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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동맹 (16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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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 동맹은 1609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주도하여 결성된 가톨릭 국가들의 군사 동맹이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종교적 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도나우뵈르트 사건과 프로테스탄트 연합의 결성에 대응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뮌헨 회의와 뷔르츠부르크 회의를 거쳐 합스부르크 가문이 참여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으나, 30년 전쟁 발발 이후 틸리 백작의 패배와 스웨덴의 개입으로 주도권을 상실했다. 1635년 프라하 조약 체결로 동맹이 금지되면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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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동맹 (1609년)
개요
가톨릭 동맹의 바이에른 군대가 30년 전쟁 동안 사용했던 마리엔파네.
가톨릭 동맹의 바이에른 군대가 30년 전쟁 동안 사용했던 마리엔파네 (마리아의 깃발).
공식 명칭Liga Catholica (라틴어)
Katholische Liga (독일어)
존속 기간1609년 7월 10일 – 1635년 5월 30일
해체 사유프라하 조약 (1635년)에 의해 해체
이념가톨릭교
반종교개혁
맹세가톨릭 교회
창립자아우크스부르크
밤베르크
바이에른
쾰른
콘스탄츠
아이히슈테트
엘방겐
켐프텐
마인츠
파사우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
트리어
보름스
뷔르츠부르크
본부뮌헨
활동 지역신성 로마 제국
규모다양함, 최대 40,000명
지휘부
대표막시밀리안, 바이에른 공작 (1609–35)
요한 폰 크론베르크 (1609–26)
게오르크 폰 그라이펜클라우 (1626–29)
안젤름 폰 움슈타트 (1629–35)
군사 지도자요한 체르클라에스 (1610–32)
요한 폰 알드링겐 (1632–34)
전쟁 및 전투
참전윌리히 계승 전쟁 (1609–1610; 1614)
30년 전쟁 (1618–1635)
보헤미아 반란 (1618–1620)
팔츠 전역 (1620-23)
스웨덴 개입 (1630–1635)
동맹스페인 왕국
적대 세력프로테스탄트 연합
보헤미아 신분
팔츠 선제후국
덴마크 왕국
스웨덴 왕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국

2. 배경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의 오랜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 화의는 각 영지의 군주가 자신의 영토와 영민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cuius regio, eius religio)를 인정하는 등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으며, 신구교 양측 모두 화의 내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독일 내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던 칼뱅파는 화의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아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1606년 제국 자유 도시였던 도나우베르트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 행렬을 루터교 신자들이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막시밀리안 1세가 개입하여 도시를 점령하면서 종교적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160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다수파인 가톨릭 측이 1552년 이후 프로테스탄트 측이 확보한 교회 영지의 반환을 요구하는 등 공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가톨릭 측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60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하여 공동 대응에 나섰다. 프로테스탄트 동맹의 결성은 가톨릭 제후들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으며, 이는 곧 막시밀리안 1세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의 결집, 즉 가톨릭 동맹의 결성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1.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555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26년 제1차 슈파이어 제국 의회의 결과를 재확인하고,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체결되었다.

화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신성 로마 제국제후들(약 225명)은 자신의 영지의 종교를 가톨릭 또는 루터교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영지 내 주민들은 군주의 종교를 따라야 했다(''cuius regio, eius religio''; 군주의 종교가 곧 영지의 종교).
  • 가톨릭교회의 영주 주교가 통치하는 영지에 사는 루터교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루터교를 따르는 제후들은 1552년 파사우 조약 이후 가톨릭교회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계속 소유할 수 있었다.
  • 가톨릭교회의 영주 주교가 루터교로 개종할 경우, 자신의 지위와 영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원칙(''교회령 유보'', reservatum ecclesiasticum|레세르바툼 에클레시아스티쿰la)이 적용되었다.


이 화의로 인해 제국 내 종교적 갈등은 일시적으로 멈추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가톨릭과 루터교 양측 모두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화의 내용을 해석했으며, 특히 루터교 측에서는 이를 잠정적인 합의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더욱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빠르게 확산되던 칼뱅주의는 화의 내용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아, 칼뱅주의자들의 신앙은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이후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2. 2. 가톨릭 동맹 결성의 동기

카를 폰 필로티가 그린 「가톨릭 동맹 결성」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종교 개혁 이후 지속되어 온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갈등은 17세기 초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였다. 특히 1606년 제국 자유 도시였던 도나우베르트에서 발생한 사건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도시 내 다수파인 루터교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들의 성 마르코 축일 행렬을 방해하자(십자가와 깃발의 전투, Kreuz-und Fahnengefechtde), 루돌프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개입을 명령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군대를 동원해 도시를 점령하고 사실상 바이에른에 병합했는데, 이는 제국법 절차를 무시한 조치로 평가받으며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

이듬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가톨릭 측이 우위를 점하며 1552년 이후 프로테스탄트 측이 차지한 교회 영토의 반환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갱신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러한 가톨릭 측의 공세적인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608년 5월 14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하여 공동 대응에 나섰다.

프로테스탄트 동맹의 결성은 가톨릭 제후들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막시밀리안 1세는 가톨릭 세력의 결집을 강력히 주장하며 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가톨릭 제후들에게 동맹 참여를 호소했고, 1609년 7월 5일에는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등 주요 성직 제후들이 막시밀리안 1세의 구상에 찬성 의사를 표명하면서 가톨릭 동맹 결성이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제국 내 종교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이후 30년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2. 1. 도나우뵈르트 사건



가톨릭 동맹 결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이에른 영토 내의 자유 제국 도시였던 도나뵈르트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606년 4월 25일 성 마르코 축일에, 도시의 다수파인 루터교 신자들은 가톨릭 주민들이 연례 행렬을 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는 도시 내에서 루터교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다섯 명의 수도사가 이끄는 가톨릭 신자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조항에 따라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여, 깃발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인근 마을 아우제스하임(Ausesheim)으로 행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깃발과 찬송가 없이 도시로 돌아오는 것만 허용했고, 이 갈등은 결국 물리적 충돌, 이른바 '십자가와 깃발 교전'(Kreuz- und Fahnengefecht|크로이츠 운트 파넨게페히트de)으로 번졌다.

이 사건에 대해 아우크스부르크 주교가 항의하자, 가톨릭 신자였던 루돌프 2세는 가톨릭 주민의 권리가 또다시 침해될 경우 도시에 제국 추방령(Reichsacht)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에도 비슷한 반가톨릭 시위가 발생하여 성 마르코 축일 행렬이 다시 봉쇄되었다.

이에 루돌프 2세는 도나우뵈르트에 제국 추방령을 선포하고, 막시밀리안 1세에게 그 집행을 명령했다.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가 다가오자 도시는 항복했다. 그러나 제국법에 따르면 이러한 징계 조치는 같은 슈바벤 관구에 속한 프로테스탄트 뷔르템베르크 공작이 집행했어야 했다. 가톨릭 신자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이를 집행하고, 나아가 이전까지 자유 제국 도시였던 도나우뵈르트를 사실상 바이에른에 병합한 것은 명백한 제국법 위반이었다. 이 사건은 제국 내 종교 갈등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2. 2. 프로테스탄트 연합 결성

1606년 4월 25일, 바이에른의 제국 자유 도시였던 도나우베르트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성 마르코 축일 행렬을 진행하려 하자, 도시의 다수파인 루터교도들이 이를 막아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십자가와 깃발의 전투'(Kreuz-und Fahnengefechtde)로 불리기도 한다. 루터교도 시의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깃발과 찬송을 금지하며 행렬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 사건은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의 항의로 이어졌고,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2세는 도나우베르트 시에 가톨릭 신자의 권리를 침해할 경우 제국 아흐트 형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자 루돌프 2세는 실제로 제국 아흐트 형을 선언하고,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집행을 명령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우베르트를 점령했다. 제국법상으로는 같은 크라이스에 속한 루터파 뷔르템베르크 공작이 처리해야 할 문제였으나, 가톨릭 신자인 막시밀리안 1세가 사실상 도시를 장악하게 되었다.

같은 해인 160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서는 다수를 점한 가톨릭 제후들이 1555년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갱신하는 조건으로, 1552년 이후 프로테스탄트 측이 점유한 모든 교회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러한 가톨릭 측의 공세적인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영토를 지키기 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1608년 5월 14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연합이 결성되었다. 이 연합은 이후 가톨릭 동맹과 대립하며 30년 전쟁의 주요 축 중 하나가 된다.

3. 가톨릭 동맹의 결성 (1609년)

1606년 4월 25일, 바이에른의 제국 자유 도시였던 도나우베르트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행진을 루터파가 다수인 시 의회가 막아서는 사건, 이른바 Kreuz-und Fahnengefecht|십자가와 깃발의 전투de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2세는 시에 제국 아흐트 형을 선언하고,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집행을 명령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우베르트를 점령하고 사실상 바이에른에 병합했는데, 이는 제국법상으로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조치였다.

같은 시기,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는 가톨릭 제후들이 다수 의석을 이용하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개신교 측이 점유한 교회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는 등 공세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 위협을 느낀 개신교 제후들은 1608년 5월 14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맞섰다.

개신교 동맹의 결성에 대응하여,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가톨릭 제후들의 연합 결성을 추진했다. 1608년 초부터 다른 가톨릭 군주들과 협상을 시작했으며[1], 같은 해 7월에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주요 선제후들이 막시밀리안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609년 7월 10일, 뮌헨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바이에른, 아우크스부르크, 콘스탄츠, 파사우, 레겐스부르크, 뷔르츠부르크 등 남부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이 중심이 되어 '가톨릭 신앙의 방어와 제국의 평화 유지'를 목표로 하는 '''가톨릭 동맹'''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동맹의 수장(의장)에는 막시밀리안 1세가 추대되었으며, 회원국 간 상호 불가침 및 상호 지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규약을 마련했다.

그러나 뮌헨 회의에서 결성된 초기 동맹은 모든 가톨릭 제후들을 아우르지 못했고, 특히 라인강 유역의 강력한 성직 제후들과의 관계 설정 등 조직 체계 구축에는 한계를 보였다. 이후 동맹의 실질적인 운영 체제를 갖추기 위한 논의가 계속되었으며, 이는 1610년 뷔르츠부르크 회의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3. 1. 뮌헨 회의



1609년 7월, 프로테스탄트 동맹 결성에 대응하여 가톨릭 제후들의 동맹 결성을 위한 회의가 뮌헨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콘스탄츠, 파사우, 레겐스부르크,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공(公)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잘츠부르크 대주교 공은 동맹 결성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여 초청받지 못했고, 아이히슈테트 주교 공은 참가를 망설였다.

뮌헨 회의 참가 현황 (1609년 7월)
분류주교령/대주교령비고
참가아우크스부르크, 콘스탄츠, 파사우, 레겐스부르크, 뷔르츠부르크대표 파견
불참잘츠부르크반대 의사 표명
참가 보류아이히슈테트망설임



1609년 7월 10일, 회의에 참가한 국가들은 "가톨릭 종교와 제국 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동맹의 핵심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 상호 공격 금지: 동맹 회원국 간의 무력 충돌을 금지한다.
  • 분쟁 해결: 분쟁 발생 시 무력이 아닌 제국 법률에 따라 해결하며, 법률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동맹 내 중재를 통해 해결한다.
  • 상호 지원: 회원국 중 하나가 공격받을 경우, 다른 회원국들은 군사적 또는 법적 지원을 제공한다.


동맹의 의장으로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공작이 추대되었고, 아우크스부르크, 파사우,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공들이 그의 고문 역할을 맡았다. 동맹은 9년 동안 유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뮌헨 회의는 새로 결성된 동맹을 위한 실질적인 조직 구조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편, 1609년 6월 18일에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선제후들은 20,000명의 군대를 창설할 것을 제안하며 동맹 참여 의사를 보였다. 이들은 막시밀리안 공작을 동맹 의장으로 인정하는 것을 고려했으며, 8월 30일에는 막시밀리안 공작이 제국 대재상인 마인츠 선제후를 공동 의장으로 받아들인다는 조건 하에 뮌헨 협정에 동의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동맹의 체제 구축을 위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함을 시사했다.

3. 2. 뷔르츠부르크 회의

1609년 뮌헨 회의에서 동맹 체제 구축에 실패한 이후, 동맹의 구체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회의가 열렸다.

1610년 2월 10일,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를 제외한 주요 가톨릭 국가 및 다수 소규모 국가의 대표들이 뷔르츠부르크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동맹의 조직, 자금 조달, 군비 등 실질적인 운영 방안이 결정되었다. 이 뷔르츠부르크 회의는 '''가톨릭 동맹'''이 실질적으로 조직되고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동맹 수장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회의 결과를 교황, 황제, 스페인 국왕에게 알렸고, 이들은 동맹 결성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동맹 운영은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가장 큰 문제는 회원국들의 준비 부족, 특히 재정 문제였다. 1610년 4월에도 분담금이 제대로 모이지 않자, 막시밀리안 1세는 수장직 사임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당초 오스트리아의 동맹 가입을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던 스페인은 해당 조건을 철회했고, 교황도 추가 지원을 약속하며 동맹 유지를 도왔다.

3. 3. 합스부르크 가문의 참여 (1613년)

thumb, 바이에른 공작]]

1613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가톨릭 동맹에 가입하였다. 이로써 동맹은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대공, 그리고 막시밀리안 대공까지 세 명의 전쟁 지휘관을 두게 되었다. 동맹의 공식적인 목적은 "기독교적 법적 방어"로 선언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참여는 가톨릭 동맹이 황제보헤미아니더외스터라이히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봉신들 간의 갈등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이후 유럽 대륙을 휩쓴 30년 전쟁이 발발하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 초기 국면에서 황제는 가톨릭 동맹군을 자신의 제국군의 핵심적인 군사력으로 활용하였다.

3. 4. 바이에른의 일시적 탈퇴 (1617년)

레겐스부르크의 결의안 수용을 거부한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공작은 동맹 의장직에서도 사임하였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3세 대공, 마인츠 선제후, 트리어 선제후가 아우크스부르크 주교와 엘방겐 수석 사제를 바이에른의 간부 목록에 포함하는 것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1617년 5월 27일, 바이에른은 밤베르크, 아이히슈테트,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및 엘방겐 수석 사제와 함께 9년 동안 지속될 별도의 동맹을 결성하며 가톨릭 동맹에서 일시적으로 탈퇴하였다.

4. 30년 전쟁과 가톨릭 동맹

30년 전쟁 발발 후, 가톨릭 동맹은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지원하는 핵심 군사력으로 부상했다. 동맹군은 1620년 11월 8일 프라하 근교에서 벌어진 백산 전투에서 틸리 백작의 지휘 아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봉기를 진압했다. 이 승리로 전쟁 초기 국면은 가톨릭 동맹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이후 동맹군은 독일 중부로 이동하여 팔츠 선제후령을 공략했다. 1622년 빔펜 전투에서의 승리와 하이델베르크 점령 등을 통해 팔츠 지역을 장악했고, 1623년 슈타트로 전투에서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이끄는 프로테스탄트 군대를 격파하며 '팔츠 시대', 즉 초기 프로테스탄트 저항을 종결시켰다.

1625년,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지원하며 참전했으나, 동맹군은 1626년 루터 전투에서 덴마크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연이은 패배로 덴마크는 1629년 뤼베크 화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가톨릭 동맹은 독일 전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630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급변했다. 스웨덴군이 북부 독일에 상륙하자, 동맹군은 스웨덴을 지원하던 마그데부르크1631년 포위 공격했다. 5월 20일 도시 함락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과 방화가 발생하여 약 25,000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마그데부르크 전투).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켜 일부 제후들이 반황제 세력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유력한 군사 지도자였던 발렌슈타인을 해임했고, 가톨릭 동맹군은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4. 1. 보헤미아 봉기 진압 (1618-1620년)

1617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했던 페르디난트 2세와 그의 가톨릭 총독들은 1618년 프라하의 두 번째 창밖 투척 사건으로 촉발된 봉기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계 체코 귀족들에 의해 실각했다. 보헤미아 신분회는 1619년 8월 26일과 27일에 걸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한편, 8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종교 선제후들과 회의를 열어 가톨릭 동맹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가톨릭 동맹은 외부의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군사력을 동원하여 황제를 지원할 수 있었다. 동맹군은 1620년 오스트리아 북부로 진군했으며, 같은 해 11월 8일 프라하 인근에서 벌어진 하얀 산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이끄는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약 700명의 병력 손실만 입은 반면, 보헤미아 군대는 절반 가량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승리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으며, 30년 전쟁의 초기 국면은 가톨릭 동맹의 우세로 마무리되었다.

4. 2. 팔츠 선제후령 점령 (1621-1623년)

thumb, 가톨릭 동맹 군대의 총사령관]]

1622년 봄, 가톨릭 동맹 군대의 총사령관 틸리 백작은 선제후 팔츠를 침공했다. 그는 1622년 4월 27일 밍골스하임 전투에서 만스펠트 장군이 이끄는 프로테스탄트 군대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동쪽으로 후퇴하여 코르도바 장군 휘하의 스페인 군대와 합류한 뒤 전세를 뒤집었다. 5월 6일, 바덴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또 다른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공격해왔으나, 틸리의 동맹군은 빔펜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적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어 6월 20일 회흐스트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1622년 전역의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했다.

이 전투들 이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위해 싸우던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라인강 너머로 철수했고, 가톨릭 동맹군은 팔츠 지역에서 자유롭게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틸리는 11주간의 공방전 끝에 9월 19일 프리드리히 5세의 주요 도시인 하이델베르크를 점령했다. 만하임 역시 10일간의 공방전 끝에 11월 2일에 함락되었다.

이로써 프랑켄탈 요새를 제외한 선제후 팔츠 영토 대부분이 동맹군에게 점령되었고,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전쟁이 끝나는 듯 보였으나, 1623년 프리드리히 5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에게 군대를 다시 조직하여 싸움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의 군대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동맹 세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틸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이 접근하자, 크리스티안의 군대는 네덜란드 국경 쪽으로 후퇴했다. 틸리는 8월 6일, 국경에서 약 약 8.05km 떨어진 슈타트론 전투에서 그들을 따라잡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 군대는 15,000명의 병력 중 13,000명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슈타트론 전투에서의 승리는 30년 전쟁의 "보헤미아-팔츠 단계"가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했다. 황제와 그의 가톨릭 강화 정책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무력 저항은 중단되었다.

4. 3. 덴마크 전쟁 (1625-1629년)

덴마크-노르웨이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개신교를 보호하고 북유럽의 주요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1625년 30년 전쟁에 참전했다. 이로 인해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626년 8월 26일8월 27일에 걸쳐 벌어진 루터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은 덴마크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덴마크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병력의 절반 이상이 궤멸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약 6,000명의 사망자와 2,500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루터 전투에서의 대패와 더불어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황제군에게도 연이어 패배하면서, 덴마크는 결국 평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1629년 5월, 덴마크는 뤼베크 화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 결과 가톨릭 동맹은 독일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4. 4. 스웨덴 전쟁 (1630-1635년)

배경에 불타는 성벽 도시가 보이는 흑백 판화, 많은 무장한 사람들이 왼쪽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대포가 왼쪽 앞쪽에서 발사되고 있다; 텍스트 상자가 하단 중앙에 있다
''마그데부르크 약탈'', 다니엘 마나서(D. Manasser)의 1632년 판화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30년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군대를 포메라니아에 상륙시켜 북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동맹을 맺으려 시도했다. 같은 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자신의 최고사령관이었던 발렌슈타인을 해임했고, 이로써 가톨릭 동맹이 모든 가톨릭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가톨릭 동맹군은 스웨덴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마그데부르크1631년 3월 20일부터 두 달간 포위했다. 5월 20일, 동맹군은 마그데부르크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이 발생했다. 도시 주민 3만 명 중 2만 5천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도시는 화재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마그데부르크는 엘베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점령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와 학살이 자행된 이 사건은, 황제 측 내부를 포함한 많은 제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기회주의적 제후들이 반(反)황제 세력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1631년 제1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틸리 장군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은 스웨덴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1632년 레인 전투에서 양측은 다시 격돌했고, 스웨덴군이 또다시 승리했으며 이 전투에서 틸리 장군은 전사했다. 이 전투들을 계기로 전쟁의 주도권은 가톨릭 동맹에서 스웨덴과 그 동맹국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스웨덴군은 가톨릭 동맹의 영토를 공격하여 점령하거나 파괴했으며, 심지어 동맹의 가장 강력한 구성국인 선제후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5. 가톨릭 동맹의 해체 (1635년)

1631년 (제1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은 스웨덴군에게 패배하였다. 이듬해인 1632년에는 레히 강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였고, 이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면서 가톨릭 동맹은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끄는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은 바이에른 공국의 수도인 뮌헨까지 점령하였고, 이후 가톨릭 동맹은 30년 전쟁에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1635년 5월 30일, 30년 전쟁의 내전 양상을 끝내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제국 내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사이에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1629년에 발표되어 프로테스탄트의 권리를 제한했던 복구령( Restitutionsediktde )을 사실상 철회하고,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 조건을 재확립하는 내용을 담았다.

프라하 조약의 가장 중요한 조항 중 하나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제후들 간의 공식적인 동맹 결성을 금지한 것이었다. 각 제후국의 군대는 제국 전체를 위한 군대로서 황제의 군대에 통합되어야 했다. 이 조항에 따라 가톨릭 동맹은 제국 내에서 금지된 동맹이 되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프라하 조약은 제후국 간의 전투를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교를 국가 분쟁의 원인으로 삼는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통치자의 종교가 그 영토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cuius regio, eius religiola 원칙 또는 영방교회체제( Landeskirchede )가 제국 내에 영구적으로 확립되었다.

참조

[1] 간행물 German (Catholic) League
[2] 서적 The origins of the Thirty Years War and the structure of European politics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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