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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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정제는 쩐 왕조의 황족으로, 호 왕조가 멸망한 후 명나라의 지배에 저항하며 쩐 왕조 부흥을 시도한 인물이다. 쩐 예종의 아들로 태어나 간정왕에 봉해졌으며, 호꾸이리가 호 왕조를 세운 후에는 일남군왕이 되었다. 1407년 쩐찌에우꺼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흥카인 연호를 사용하며 명나라에 대항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패배하고 내부 갈등으로 인해 1409년 중광제에게 사로잡혔으며, 이후 명나라에 체포되어 141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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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정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간정제(Giản Định Đế) |
한자 표기 | 簡定帝 |
전체 이름 | Trần Ngỗi (陳頠, 진외) |
통치 정보 | |
칭호 | 대월의 황제 |
아버지 | 쩐 예종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자녀 | 알 수 없음 |
출생일 | 1375년 |
출생지 | 탕롱, 대월 |
사망일 | 1410년 |
사망지 | 난징, 명나라 |
매장지 | 알 수 없음 |
계승 | 후기 쩐 왕조의 황제 |
재위 기간 | 1407년–1409년 |
이전 | '왕조 설립' |
계승자 | 중광제 |
계승 순서 | 후기 쩐 왕조의 퇴위한 황제 |
왕가 | 후기 쩐 왕조 |
연호 | 흥경(Hưng Khánh) |
묘호 | 알 수 없음 |
시호 | 알 수 없음 |
종교 | 알 수 없음 |
2. 생애
간정제는 쩐 예종의 둘째 아들로, 호꾸이리가 호 왕조를 세우기 전에는 간정왕(簡定王)에 봉해졌고, 호 왕조 건립 후에는 일남군왕(日南郡王)으로 봉해졌다. 1407년 명나라의 침공으로 모도(謨渡, 현재의 닌빈성 옌모현)로 피신한 그는 쩐 왕조의 유신(遺臣) 쩐찌에우꺼(陳肇基)를 만나 1407년 11월 1일 황제로 즉위하였다. 간정제는 쩐씨 왕조를 재건하고 연호를 흥카인으로 정했다.[1]
초기 간정제는 명나라에 맞서 싸웠으나 여러 차례 패배하고 응에안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당떳 등 유력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세력이 강해졌고, 1408년에는 포고(逋姑, 현재의 남딘성 풍조아인현 히에우꼬사)에서 명나라군을 대파하고 장수 여의(呂毅)를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승세를 타고 탕롱으로 진격하려던 간정제는 당떳의 반대에 부딪혀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당떳과 참모 응우옌까인쩐(阮景眞)을 살해했다. 이에 당떳의 아들 당중(鄧容)과 응우옌까인쩐의 아들 응우옌까인지(阮景異)는 쩐꾸이코악을 중광제로 옹립하였다. 1409년 4월, 중광제 세력은 간정제를 사로잡아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다.
이후 간정제는 일부 병력을 얻어 하홍에서 중광제와 힘을 합쳐 명군에 대항했으나, 1409년 11월 명나라 장수 장보(張輔)에게 패하고 연주(演州)로 도망갔다. 12월 16일[1], 장보와 목성은 천관(天關)에서 간정제와 신하들을 사로잡아 금릉으로 압송했고, 1410년 3월 5일[2] 모두 처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쩐 예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간정왕(簡定王)에 봉해졌다. 호꾸이리가 호 왕조를 세운 뒤에는 일남군왕(日南郡王)으로 봉해졌다. 1407년 명나라가 침공하자 그는 모도(謨渡, 현재의 닌빈성 옌모현)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쩐 왕조의 유신(遺臣) 쩐찌에우꺼(陳肇基)를 만났다. 쩐찌에우꺼는 무리를 이끌고 그를 따랐으며, 이에 1407년 11월 1일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병사를 일으켜 쩐씨 왕조를 재건하였으며, 연호를 흥카인으로 고쳤다.[1]2. 2. 명과의 항쟁과 내부 갈등
호꾸이리가 호 왕조를 세운 뒤, 쩐 예종의 둘째 아들인 간정제는 일남군왕(日南郡王)으로 봉해졌다. 1407년 명나라가 침공하자 그는 모도(謨渡, 현재의 닌빈성 옌모현)로 달아나 쩐 왕조의 유신(遺臣) 쩐찌에우꺼(陳肇基)를 만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흥카인으로 고쳤다.[1]간정제는 명나라에 맞서 싸웠으나 초기에는 여러 차례 패배하고 응에안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당떳 등 유력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세력이 강해졌다. 당떳은 명나라에 항복한 대월의 장수 팜테깡(范世矜)을 참살했고, 간정제는 응에안 이남 지역을 점거하게 되었다. 1408년에는 포고(逋姑, 현재의 남딘성 풍조아인현 히에우꼬사)에서 명나라 장수 목성(沐晟)의 4만 군사를 격파하고 여의(呂毅)를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2]
승세를 타고 탕롱으로 진격하려던 간정제는 당떳의 반대에 부딪혀 불화가 생겼다. 간정제는 당떳과 참모(參謀) 응우옌까인쩐(阮景眞)을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당떳의 아들 당중(鄧容)과 응우옌까인쩐의 아들 응우옌까인지(阮景異)는 군영을 떠나 쩐꾸이코악을 중광제로 옹립하였다. 1409년 4월, 중광제 세력은 간정제를 습격하여 사로잡고 태상황(太上皇)으로 세웠다.
2. 3. 체포와 처형
호 왕조를 세운 호꾸이리는 쩐 예종의 둘째 아들인 간정제를 일남군왕(日南郡王)으로 봉했다. 명나라가 침공하자 간정제는 모도(謨渡, 현재의 닌빈성 옌모현)로 달아났고, 쩐 왕조의 유신(遺臣) 쩐찌에우꺼(陳肇基)를 만나 무리를 이끌고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흥카인으로 고쳤다.간정제는 명나라에 맞섰으나 여러 차례 패배하였고, 이후 당떳(鄧悉) 등 유력 인사들이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다. 1408년에는 포고(逋姑, 현재의 남딘성 풍조아인현 히에우꼬사)에서 명나라 장수 목성(沐晟)의 4만 군사를 격파하고 장수 여의(呂毅)를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간정제는 탕롱 진격을 주장했으나 당떳이 반대하여 내분이 일어났고, 간정제는 당떳과 참모(參謀) 응우옌까인쩐(阮景眞)을 죽였다. 이에 당떳의 아들 당중(鄧容)과 응우옌까인쩐의 아들 응우옌까인지(阮景異)는 군영을 떠나 쩐꾸이코악을 중광제로 옹립하였다.
1409년 4월, 중광제 세력은 간정제를 습격하여 사로잡고 태상황(太上皇)으로 세웠다. 그러나 7월부터 간정제는 일부 병력을 얻어 명군에 대항하였다. 그해 11월, 명나라 장수 장보(張輔)가 중광제와 응우옌까인지를 격파하였고, 간정제는 연주(演州)로 도망갔다. 12월 16일[1], 장보와 목성은 천관(天關) 일대에서 간정제와 그 신하들을 사로잡았다. 간정제 등은 명나라의 수도 금릉으로 압송되었고, 영락 8년 정월 정유일(1410년 3월 5일)[2]에 모두 처형되었다.
3.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친 | 쩐 예종 | |
모친 | 흥경태후(興慶太后) | |
아내 | 당부인(鄧夫人) | 화주대지주(化州大知州) 당떳의 딸. 간정제가 당떳을 국공(國公)으로 봉함. |
4. 연호
참조
[1]
서적
明太宗實錄
1409-11
[2]
서적
明太宗實錄
1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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