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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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검계는 조선 시대에 존재했던 무리로, 초기에는 장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향도계에서 출발하여 점차 폭력적인 성향을 띠며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숙종 때 처음 조정에 알려졌으며, 일본의 국서로 인해 한성부가 혼란에 빠지자 검계가 군사 훈련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여 민정중의 처벌 주장을 이끌었다. 이후 영조 시대에 다시 나타났다가 장붕익에 의해 소탕되었고, 순조 시대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검계는 살인, 폭행, 약탈 등 반사회적 행위를 일삼았으며, 이규상의 기록에 따르면 독특한 생활 방식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민중 저항 운동으로 보기도 하지만,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인 집단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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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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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게 (검계) | |
개요 | 조선 시대 후기에 사회 혼란기에 자생적으로 발생한 민중 자위 조직 또는 비밀 결사이다. |
기원 | "검계(劍契)"라는 명칭은 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계(契)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
활동 목적 |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 범죄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것 |
역사적 배경 | |
시대적 상황 | 조선 후기,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범죄가 증가하던 시기였다. |
정부의 기능 약화 | 정부의 치안 유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자,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다. |
조직 및 활동 | |
구성원 | 주로 하층민, 상인, 무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지역 사회의 자위 조직 역할을 수행했다. |
활동 내용 | 범죄 예방 마을 순찰 정보 수집 유사시 무력을 사용한 방어 |
사회적 영향 | |
긍정적 측면 | 사회 질서 유지 범죄 감소 지역 사회 안정 |
부정적 측면 | 권력 남용 부패 불법 행위 |
대중 문화 속의 검계 | |
드라마 | 동이와 같은 역사 드라마에서 검계의 활동이 묘사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참고 자료 | |
관련 웹사이트 | 컴게(검계)란 - 전60화 동이 줄거리와 캐스트 한드라마☆ 동이|BS재팬 |
2. 검계의 유래
검계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때 조정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를 인지했다. 검계는 원래 장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결성된 향도계에서 출발하였다.[3]
2. 1. 향도계에서 검계로
검계는 숙종 때 처음으로 조정에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1684년 2월 25일 민정중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검계는 원래 향도계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향도계는 장례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결성한 계이다. 향도계는 사람의 착하고 악함을 가리지 않고 무리를 모았는데, 이들이 형세에 의지하여 상여를 멜 때 소란을 피우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검계가 되었다. 도가(都家, 계를 맡는 집)는 검계 구성원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였다.[3]3. 검계의 기록
《조야회통》과 《숙종실록》에서는 1684년(숙종 10년) 초 대마도주가 보낸 왜의 국서가 도착한 뒤 한성부에 소란이 일고 동대문 밖으로 피난 가는 백성이 줄을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서에는 명나라가 망한 뒤 대만을 근거로 삼던 반청 운동 세력 정금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퍼져나가 백성들이 동요하였다.[1]
이후 검계 당원들이 남산에 올라 태평소를 불거나 중흥동에 모여 진법을 익히는 등 군사 훈련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1684년 2월 12일, 좌의정 민정중은 검계가 백성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한다며 처벌을 주장했다.[1]
3. 1. 왜의 국서와 한성부의 혼란
1684년(숙종 10년) 초, 대마도주가 1683년 12월에 보낸 왜의 국서가 도착한 뒤로 한성에는 소란이 날로 심해져 동대문으로 나가는 피난민이 줄을 이었다. 이 국서에는 명나라가 망한 뒤 대만을 근거로 삼던 반청 운동 세력 정금(鄭錦)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근거 없는 말이 조야에 퍼지면서 한성부는 어수선해졌다.[1]그 뒤, 검계 당원들이 한밤중에 남산에 올라가 태평소를 불어 마치 군사를 모으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중흥동에 모여 진법을 익히는 듯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에 1684년 2월 12일, 좌의정 민정중은 서울 시내의 무뢰배들이 결성한 검계가 습진(진법을 익히는 군사 훈련)을 하여 서울 시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3. 2. 검계의 습진과 민정중의 주장
1684년 초, 일본(에도 막부)에서 보낸 국서로 인해 한성이 혼란에 빠졌다. 이 국서는 명나라 멸망 후 대만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반청 세력 정금이 조선을 공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퍼져나가 동대문 밖으로 피난 가는 백성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1]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검계 당원들은 한밤중에 남산에 올라가 태평소를 불거나, 중흥동에 모여 진법을 익히는 등 군사 훈련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1]
1684년 2월 12일, 좌의정 민정중은 서울 시내의 무뢰배들이 결성한 검계가 습진을 하여 서울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으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4. 검계의 소탕
숙종실록에 따르면, 1684년 2월 18일에 검계 가운데 십여 명이 포도청에 잡혀왔다. 민정중은 이들이 칼로 제 살을 깎고 가슴을 베는 등 흉악한 짓을 한다고 보고하며, 이들을 가볍게 다스리면 무리가 늘어날 것을 염려하여 중법(重法)으로 다스릴 것을 건의했다.[1]
4. 1. 민정중의 보고와 중법 건의
숙종실록에 따르면, 1684년 2월 18일에 검계 가운데 십여 명이 포도청에 잡혀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패악한 자’는 칼로 제 살을 깎고 제 가슴을 베기까지 하는 등 그지없이 흉악한 짓을 한다고 민정중이 보고했다. 민정중은 그들을 가볍게 다스리면 그 무리가 늘어나게 됨을 염려하여 중법(重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한 그해 3월 22일 향도들로 군정을 채우고 조례를 세워 폐습을 고쳐 달라고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1]4. 2. 향도 개혁
숙종실록에 따르면, 1684년 3월 22일 향도들로 군정을 채우고 조례를 세워 폐습을 고쳐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 이를 수용하였다.[1]5. 검계의 재발
영조 때 검계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자 1725년부터 1735년 사이에 포도대장이었던 장붕익(張鵬翼)이 이들을 일망타진했다는 기록이 있다.[1] 순조 시대인 1803년에는 검계 무리가 승지 최중규(崔重圭)의 집에 난입하여 가족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고,[1] 이 사건으로 형조판서 채홍리(蔡弘履)가 범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파직되기도 했다.[1]
5. 1. 영조 시대
《조야회통》과 이원순(李源順)의 《화해휘편》(華海彙編)에 따르면, 영조 때에 이르러 다시 검계가 말썽을 피웠다고 한다. 1725년부터 1735년 사이에 포도대장이었던 장붕익(張鵬翼)이 검계를 일망타진하였다.[1]5. 2. 순조 시대
1803년(순조 3년) 8월 9일 사간 이동식(李東埴)이 상소에서 검계를 언급하였다.[1] 그해 8월 1일 검계의 무리가 승지 최중규(崔重圭)의 집에 난입하여 최중규의 아들과 연로한 부녀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1] 형조판서 채홍리(蔡弘履)가 범죄자들을 무겁게 처벌하지 않아 파직되었고, 이동식은 채홍리를 간삭(刊削)하고 그를 추천한 이면긍(李勉兢)까지 귀양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검계의 행태
검계는 주로 살인, 폭행, 겁탈, 약탈 등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으며, 몸에 칼자국을 내거나 자해하는 행위는 폭력 숭상의 징표로 여겨진다.[4]
6. 1. 반사회적, 반체제적 성향
검계는 주로 살인, 폭행, 겁탈, 약탈 등을 일삼았다. 이들은 대개 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으며, 몸에 칼자국을 내거나 칼로 자해하는 행위는 폭력 숭상의 징표로 여겨진다.[4] 양반에게까지 꺼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이들의 반사회적이며 반체제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이를 반봉건적인 성향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단순히 반체제적인 것으로 평가한다.[4]이규상의 〈장대장전〉에 따르면, 검계는 낮에는 자고 밤에는 돌아다니며,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 등 일상생활을 철저히 뒤집었다. 또한 삿갓 위에 구멍을 뚫고 삿갓을 내려쓴 뒤 그 구멍으로 사람을 내다보는 특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4] 이규상에게 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검계 구성원이자 '집주름'[4]이었던 표철주는 젊은 시절 "용감하고 날래며 인물을 잘 쳤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는" 인물이었다.[4]
이규상의 기록에 따르면 검계는 스스로를 '왈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모든 왈자가 검계였던 것은 아니다.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 주인공 광문은 거지 출신으로 신용을 쌓아 널리 알려진 왈자였다. 〈광문자전〉 뒤이은 〈서광문자전후〉에서 광문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가 무고로 풀려났을 때, 그를 찾아가 이야기한 사람은 표망동, 곧 집주름 표철주였다. 이들은 모두 왈자였지만, 표철주는 반사회적인 폭력을 휘두른 반면 광문은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4]
6. 2. 이규상의 〈장대장전〉에 묘사된 검계
이규상의 〈장대장전〉에 따르면, 검계는 낮에 자고 밤에 돌아다니며,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는 등 일상생활을 철저히 뒤집었다. 또한 삿갓 위에 구멍을 뚫고 삿갓을 내려쓴 뒤 그 구멍으로 사람을 내다봤다고 한다.[4] 검계 구성원이었던 표철주(表鐵柱)는 용감하고 날래며 인물을 잘 치고, 날마다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6. 3. 왈자와 검계
검계는 스스로를 '왈자'라 칭했지만, 모든 왈자가 검계는 아니었다. 박지원이 지은 〈광문자전〉의 주인공 광문은 원래 거지 출신으로 신용을 쌓아 신의 있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왈자였다. 〈광문자전〉에 뒤이은 〈서광문자전후〉에서 역모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가 무고로 밝혀져 나왔을 때 찾아가 이야기한 사람이 표망동, 곧 집주름[4] 표철주였다. 이 둘은 모두 왈자였는데, 표철주는 반사회적인 폭력을 휘두른 반면 광문은 폭력을 쓰되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7.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コムゲ(剣契)とは
https://netkigyo.web[...]
2023-02-18
[2]
웹사이트
韓ドラ☆ トンイ|BSジャパン
https://www.bs-tvtok[...]
2023-02-19
[3]
웹사이트
剣契(コムゲ)とは? トンイと粛宗の時代
http://xn--eckud3f.k[...]
2023-02-18
[4]
문서
오늘날의 복덕방
[5]
서적
조선후기 사회변도 연구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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