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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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겔론은 기원전 5세기 시칠리아의 겔라와 시라쿠사의 참주였다. 그는 데이노메네스의 아들로, 겔라의 참주 히포크라테스의 기병대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세력을 키웠다. 히포크라테스 사후 겔라의 참주가 되었으며, 이후 시라쿠사로 세력을 확장하여 참주가 되었다. 겔론은 시라쿠사를 번영시키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기원전 480년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시칠리아를 지켜냈다. 그는 시라쿠사를 '서부 최대의 그리스 도시'로 만들었으며, 사후에도 존경받아 묘와 조각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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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론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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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540년경 |
사망 | 기원전 478년 |
통치 시작 | 기원전 485년 |
통치 종료 | 기원전 478년 |
직업 | 군인, 정치인 |
칭호 | 시라쿠사의 참주 |
가문 | |
아버지 | 디네메네스 |
형제 | 히에론 1세, 트라시불로스 |
자녀 | 여러 명 |
통치 | |
이전 통치자 | 히포크라테스 |
후임 통치자 | 히에론 1세 |
기타 정보 | |
활동 시기 | 고대 그리스 |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2. 일생
겔론은 데이노메네스의 아들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의 조상들은 에게해의 틸로스에서 와서 남부 시칠리아의 겔라를 세웠다고 한다.[3] 겔론은 겔라(BC 491~BC 485)와 시라쿠사(BC 485~BC 478)의 참주였다. 히포크라테스가 죽은 뒤 겔라의 참주가 되었으며, BC 485년 당쟁을 틈타 시라쿠사에 들어가 참주가 되어 황금시대를 열었다.[7]
겔론은 시칠리아 참주 왕들 간의 분쟁에 참전하여 뛰어난 병사로 명성을 얻었다. 히포크라테스 기병대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여러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5] 히포크라테스가 시켈족과의 전투에서 히블라에서 사망하자, 겔론은 히포크라테스의 아들들을 돕는다는 구실로 평민 반란을 진압하고 BC 491년 군대를 통해 스스로 권력을 잡았다. 그는 겔라, 낙소스, 장클레, 카마리나를 통치했다.[5]
BC 48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 침입했을 때, 겔론은 아크라가스의 참주 테론과 결탁하여 히메라에서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였다.[7] 그는 강력한 함대와 용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겔론은 데이노메네스의 아들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의 조상들은 에게해의 틸로스에서 왔으며, 남부 시칠리아의 젤라를 세운 사람들이었다.[3] 그의 먼 조상 중 한 명인 텔리네스는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백성을 대지의 여신 의식을 통해 화해시켰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텔리네스의 모든 후손, 즉 겔론을 포함하여 이 종교의 사제였다고 추론한다.[3]겔론의 세 형제는 히에론, 트라시불루스, 그리고 폴리잘로스였다.[4] 데이노메네스는 자식들의 운명에 대해 신탁을 구했고, 겔론, 히에론, 트라시불루스 모두 참주가 될 운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겔론은 시칠리아의 여러 참주 왕들 간의 수많은 분쟁에 참전하여 뛰어난 병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활약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젤라의 참주였던 삼촌 히포크라테스의 기병대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시라쿠사를 상대로 한 전투를 포함해 여러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시라쿠사를 정복하게 된다.[5]
2. 2. 겔라의 참주가 되다
히포크라테스가 죽은 뒤 겔라의 참주가 되었다.[7]겔론이 권력을 잡기 시작한 것은 히포크라테스가 시칠리아의 토착 부족인 시켈족과의 전투에서 히블라에서 사망한 이후였다. 히포크라테스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유지했지만, 평민들은 이 가문의 통치에 싫증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다. 겔론은 히포크라테스의 아들들이 권력을 잡도록 돕는다는 구실로 반란을 진압했다. 대신, 그는 기원전 491년에 군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권력을 잡았다. 그가 참주로서 통제하게 된 영토에는 겔라, 동쪽의 낙소스, 북동쪽의 장클레, 남쪽의 카마리나가 포함되었다.
3. 시라쿠사의 참주
겔론은 히포크라테스가 죽은 뒤 겔라의 참주가 되었으며, 기원전 485년 당쟁을 틈타 시라쿠사에 들어가 참주가 되어 황금시대를 열었다.[7] 그는 용병대와 강력한 함대를 보유했으며,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 침입했을 때 아크라가스의 참주 테론과 연합하여 히메라에서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였다.[7]
겔론은 이후 5년 동안 겔라와 다른 도시들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기원전 485년, 시라쿠사의 귀족들(가모리)이 일반 시민들에게 추방되어 겔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겔론은 이를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시라쿠사를 점령하여 가모리들을 복귀시켰다. 겔라에는 동생 히에론을 남겨두었다.
겔론은 메가라 히블라이아와 에우보이아를 정복(기원전 483년)하고, 귀족들은 추방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노예로 삼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평민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겔론의 통치 아래 시라쿠사는 번영했다. 그는 웅장한 건축물을 짓고, 용병을 고용하여 강력한 군대를 육성했다. 용병의 대부분은 원주민 시켈인이었고, 일부는 그리스 본토 출신이었으며 총 10,000명에 달했다. 이들에게는 시라쿠사 시민권이 주어졌다.
겔론은 아크라가스(현재의 아그리젠토)의 참주 테론과 동맹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기원전 481년, 아테네 사절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케메네스 제국에 맞서기 위해 겔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겔론은 그리스 육군 또는 해군의 사령관 직위를 요구하며 28,000명의 병력과 200척의 함선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리스 본토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 그는 페르시아가 승리할 경우에 대비하여 크세르크세스에게 바칠 선물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3. 1. 시라쿠사 점령
기원전 485년, 시라쿠사의 귀족 가모리들이 평민들에게 쫓겨나 겔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겔론은 이를 영토 확장의 기회로 보고, 대군을 이끌고 시라쿠사를 거의 저항 없이 점령하여 가모리들을 복귀시켰다.[7]겔론은 시라쿠사의 새로운 참주가 되었고, 그의 형제 히에론에게 겔라 통치를 맡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겔라 시민의 절반을 시라쿠사로 이주시키고, 카마리나의 모든 귀족을 추방했다.[7]
겔론은 인근 에우보이아와 메가라 히블라이아를 정복(기원전 483년)하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전략을 계속하여, 각 도시의 귀족들을 강제로 제거하고 나머지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귀족으로 자랐기 때문에 하층 계급을 신경 쓰지 않았고, "평민들과 집을 공유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7]
겔론의 통치 아래 시라쿠사는 곧 번영했다. 겔론은 시라쿠사에 대규모 건설 계획을 추진하는 동시에 강력한 용병 군대를 창설하고자 했다. 그의 군대 대부분은 토착 시켈 부족에서 모집했지만, 일부는 그리스 본토에서 모집했으며, 이들은 과거에 겔론과 함께 싸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들의 총수는 약 10,000명으로 알려졌으며, 모두에게 시라쿠사의 시민권이 부여되었다.[7]
3. 2. 시라쿠사 번영과 군사력 강화
겔론은 기원전 485년, 평민들에게 쫓겨난 시라쿠사의 귀족 가모리들의 도움 요청을 기회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를 점령했다.[7] 그는 형제 히에론에게 겔라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시라쿠사의 참주가 되었다. 겔론은 겔라 시민의 절반을 시라쿠사로 이주시키고, 카마리나의 귀족들을 추방하는 등 강제 이주 정책을 펼쳤다.겔론은 시라쿠사 주변의 에우보이아와 메가라 히블라이아를 정복(기원전 483년)하고, 각 도시의 귀족들을 추방하고 나머지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귀족 출신으로 하층민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겔론의 통치 아래 시라쿠사는 번영했다. 그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강력한 용병 군대를 조직했다. 용병의 대부분은 시켈 부족 출신이었지만, 일부는 그리스 본토에서 모집되었으며 그 수는 약 10,000명에 달했다. 이들에게는 시라쿠사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겔론은 아크라가스의 참주 테론의 딸 데마레타와 결혼하여 테론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481년, 아테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케메네스 제국에 맞서기 위해 겔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겔론은 그리스 해군이나 육군의 지휘관 자리를 요구하며 28,000명의 병력과 200척의 배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승리에 대비해 크세르크세스에게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겔론의 군대에는 기병, 궁수, 슬링(무기)병 등 경무장 병력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겔론의 군사 기술이 아테네나 스파르타보다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3. 3.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지원 요청 거절
기원전 481년, 아테네의 대표단이 겔론에게 크세르크세스 1세와 아케메네스 제국에 맞서는 전쟁에서 도움을 요청했다.[2] 겔론은 자신이 그리스 해군이나 육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된다면 28,000명의 병력과 200척의 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2] 그의 군대에는 기병대, 궁수, 슬링(무기) 투척병 등 경무장 병력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테네나 스파르타보다 겔론 휘하에서 군사 과학이 더 발전했음을 시사한다.[2]그러나 겔론은 두 직책 모두 거절당했고, 그리스인에게 물품이나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다.[2] 그는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 동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를 대비하여 크세르크세스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했다.[2]
4. 히메라 전투
겔론이 그리스 본토를 지원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시칠리아 서부에 대한 카르타고의 위협 때문이었다. 당시 시칠리아 서부에는 페니키아인의 식민 도시가 있었지만, 기원전 560년경부터는 같은 페니키아계 도시 국가인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크라가스의 테론이 히메라의 참주 테릴루스를 몰아내면서 시칠리아 전체가 카르타고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테릴루스는 히메라를 되찾기 위해 카르타고에 지원을 요청했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의 영향력과 영토 확대를 꾀하며,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틈타 테릴루스의 요청을 수락했다.
몇몇 학자들은 크세르크세스와 카르타고가 연락을 취해 그리스 본토와 식민 도시를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서로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는 하밀카르가 이끄는 30만 대군을 시칠리아 북부 파노르무스(현재의 팔레르모)에 상륙시켜 히메라로 진격했다. 겔론은 동맹 관계였던 테론이 위기에 처하자 보병 5만 명과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히메라로 향했다.
겔론의 부대 일부는 인근 셀리누스의 동맹군으로 위장하여 카르타고군 진영에 잠입했다. 이들은 진영 내부에서 겔론의 본대와 연락하여 하밀카르의 배에 불을 지르는 신호를 보냈다. 뒤이은 전투에서 겔론과 테론은 카르타고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하밀카르를 포함한 15만 명의 카르타고군이 전사했다.
전투 후 카르타고군 진영에서 얻은 전리품과 카르타고가 지불한 의 배상금은 겔론과 그의 군대, 동맹 도시에 분배되었고, 상당량은 시라쿠사에 새로운 신전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시라쿠사로 돌아와 시민들과 회의를 열고 하밀카르와의 전쟁 경과와 전리품 분배 방식을 설명했다. 겔론은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다면 시민들이 자신을 처형하고 시라쿠사를 직접 통치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시민들은 겔론을 계속 참주로 인정했고 이후 2년간 평화로운 통치가 이어졌다.[7]
4. 1.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침공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서부 해안에 가하는 위협 때문에 겔론은 그리스 본토를 지원하지 않았다. 아크라가스의 테론은 폭군 테릴루스를 히메라에서 몰아내면서, 강력한 카르타고로부터 시칠리아 전체의 독립을 위태롭게 했다. 테릴루스는 히메라를 탈환하기 위해 강력한 동맹을 찾다가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그들의 영향력과 영토를 늘리고 싶어했고, 마침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이 다가오면서 완벽한 기회를 얻게 되어 그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일부 학자들은 크세르크세스와 카르타고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리스와 그 식민지의 서부와 동부 전선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하여 어느 전선도 다른 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480년, 30만 명의 카르타고군이 시칠리아 북부 해안의 파노르무스에 상륙하여 장군 하밀카르의 지휘 아래 동쪽으로 히메라로 진격했다. 겔론은 동맹 테론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5만 명의 병력과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메라로 향했다.
겔론의 병력 중 일부는 인근 도시 셀리누스의 동맹군으로 위장하여 카르타고 진영에 접근했다. 일단 안에 들어가자 그들은 진영을 내려다보는 산에 주둔하고 있던 겔론 군대의 나머지 부대에게 하밀카르의 배에 불을 지름으로써 신호를 보냈다. 이어진 전투에서 겔론과 테론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카르타고 사상자는 하밀카르를 포함하여 15만 명으로 추산되었다.[7]
카르타고 진영에서 수집한 재물과 카르타고와의 평화 조약으로 얻은 2000talent의 은은 겔론에 의해 그의 군대와 동맹국에게 분산되었으며, 많은 양이 시라쿠사에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는 데 지정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수도로 돌아온 후 시라쿠사 사람들과 회의를 열고 하밀카르와의 전쟁 중 자신의 행동과 전리품을 분산시킨 방식을 설명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를 죽이고 시라쿠사를 차지해도 좋다고 말했다. 시라쿠사 사람들은 겔론을 그들의 참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그는 다음 2년 동안 평화롭게 통치를 이어갔다.
4. 2. 겔론의 승리
겔론은 히포크라테스가 죽은 뒤 겔라의 참주가 되었으며, 기원전 485년 당쟁(黨爭)을 틈타 시라쿠사에 들어가 참주가 되어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는 강력한 용병대와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48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크라가스의 참주 테론과 연합하여 히메라에서 카르타고 군을 격퇴하였다.[7]
겔론이 그리스 본토를 지원하지 않은 것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서부 해안에 가하는 위협 때문일 수 있다. 아크라가스의 테론은 폭군 테릴루스를 히메라에서 몰아냈지만, 이는 시칠리아 전체의 독립을 카르타고로부터 위협받게 만들었다. 테릴루스는 히메라를 되찾기 위해 강력한 동맹을 찾아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했고, 카르타고는 그의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그들의 영향력과 영토를 늘리고 싶어했고, 마침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이 다가오면서 완벽한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했다.
일부 학자들은 크세르크세스와 카르타고가 서로 연락을 취하며 그리스와 그 식민지의 서부와 동부 전선에서 동시 공격을 감행하여 어느 전선도 다른 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480년, 30만 명의 카르타고 군이 시칠리아 북부 해안의 파노르무스에 상륙하여 장군 하밀카르의 지휘 아래 동쪽으로 히메라로 진격했다. 겔론은 동맹 테론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5만 명의 병력과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메라로 향했다.
겔론의 병력 중 일부는 인근 도시 셀리누스의 동맹군으로 위장하여 카르타고 진영에 접근했다. 일단 안에 들어가자 그들은 진영을 내려다보는 산에 주둔하고 있던 겔론 군대의 나머지 부대에게 하밀카르의 배에 불을 지름으로써 신호를 보냈다. 이어진 전투에서 겔론과 테론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카르타고 사상자는 하밀카르를 포함하여 15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카르타고 진영에서 수집한 재물과 카르타고와의 평화 조약으로 얻은 의 은은 겔론에 의해 그의 군대와 동맹국에게 분산되었으며, 많은 양이 시라쿠사에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수도로 돌아온 후 시라쿠사 사람들과 회의를 열고 하밀카르와의 전쟁 중 자신의 행동과 전리품을 분배한 방식을 설명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를 죽이고 시라쿠사를 차지해도 좋다고 말했다. 시라쿠사 사람들은 겔론을 그들의 참주로 계속 인정했고, 그는 다음 2년 동안 평화롭게 통치를 이어갔다.
4. 3. 전후 처리
겔론은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대를 격파한 후, 카르타고 진영에서 얻은 전리품과 카르타고와의 평화 조약으로 얻은 2000탈렌트 (단위)의 은을 그의 군대와 동맹국에게 분배했으며, 상당량은 시라쿠사에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7]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겔론은 수도로 돌아온 후 시라쿠사 사람들과 회의를 열고 하밀카르와의 전쟁 중 자신의 행동과 전리품 분배 방식을 설명했다.[7] 그는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다면 그를 죽이고 시라쿠사를 차지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시라쿠사 사람들은 겔론을 계속 참주로 인정했고, 그는 이후 2년 동안 평화롭게 통치했다.5. 죽음과 유산
겔론은 시라쿠사를 7년 동안 통치한 후 기원전 478년에 사망했다.[7] 그의 왕국은 형제 히에론에게 넘어갔고, 히에론은 그 후 10년 동안 통치하다가 사망했다. 왕위를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에 대한 분쟁으로 인해 시라쿠사 국가는 해체되었다.
6. 평가
겔론은 시칠리아의 겔라(BC 491~BC 485)와 시라쿠사(BC 485~BC 478)의 참주였다. 히포크라테스 사후 겔라의 참주가 되었으며, BC 485년 당쟁을 틈타 시라쿠사에 들어가 참주가 되어 황금시대를 열었다.[7] 그는 강력한 용병대와 함대를 보유하였으며, BC 48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크라가스의 참주 테론과 연합하여 히메라에서 카르타고 군을 격파하였다.[7]
겔론은 시라쿠사를 수도로 삼아 "서부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 도시"로 만들었다. 시라쿠사는 섬에 위치하고 반도로 본토와 연결되어 있어, 동쪽으로 그리스 본토를 바라보고 자체 항구를 가진 최적의 장소였다. 겔론은 성벽을 건설하여 시라쿠사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고, 정복한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을 이주시킨 전술을 사용하여 도시의 번영을 크게 증가시켰다. 그는 극장을 건설하고 아테나에게 헌정된 화려한 사원을 지어 도시 문화를 향상시켰다. 이러한 개선들은 훗날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에게 중요한 전초 기지가 되는 등 시라쿠사의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겔론의 또 다른 업적은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승리한 것이다. 이 전투는 시기와 위치 때문에 중요했는데, 만약 겔론이 패배했다면 시칠리아 섬 전체가 카르타고에 정복될 수도 있었다. 그리스 본토는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군대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고, 페르시아와 카르타고가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면 그리스 본토는 양면 공격을 받아 그리스 문명이 종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겔론은 BC 480년에 하밀카르를 격파하여 시칠리아를 70년 동안 카르타고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냈다.
겔론은 히메라 전투의 승리로 인해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받았으며, 그의 기념으로 정교한 무덤과 조각상이 세워졌다. 정복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우했음에도 불구하고, 존경받는 폭군이자 관대한 왕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었다. 겔론 사후 150년 후 티몰레온이 폭군 통치의 기억을 지우려 했을 때에도 그의 조각상이 보존된 것은 겔론이 시칠리아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Gelon에 대한 정보 (Bury & Meiggs, de Sélincourt's Herodotus, Britannica 참조)
[2]
서적
Shaping the Geography of Empire: Man and Nature in Herodotus' Histori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3]
서적
Herodotus (De Sélincourt's)
[4]
서적
Bury & Meiggs
[5]
서적
Herodotus (De Sélincourt's)
[6]
서적
The Greek State at War: Part V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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