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포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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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격포행궁은 17세기 조선 시대에 변산반도 일대에 건설된 행궁으로, 유사시 왕의 피난처 확보와 국방 전략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18세기 문헌에 따르면 정전, 동서 날개집, 누각 등을 갖춘 규모였으나, 남한산성 행궁 등 다른 행궁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격포 행궁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 간의 차이로 인해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며, 격포진에서 약 1리 떨어진 곳에 동향했다는 기록과, 다른 지도에는 미좌축향으로 묘사되어 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 악화에 대비하여 부안 변산을 조선의 진양으로 삼는 전략적 중요성에 따라, 격포 행궁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강흔(姜俒, 1739~1775)의 「격포행궁기(格浦行宮記)」에 따르면, 격포 행궁은 정전 10칸, 동서 날개집 8칸, 누각 4칸, 행각 4칸, 바깥문 3칸, 안문 2칸으로 구성되었고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단청은 벗겨졌으나 건물의 규모는 컸다고 한다. 격포진 관아 앞에는 만하루(挽河樓)라는 누각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격포 행궁은 동시대에 설치된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강흔의 「격포행궁기」에는 행궁이 격포진에서 약 1리 떨어진 곳에 동향(東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규장각 규12155-v.1-7 격포진도(格浦鎭圖, 영조년간)'와 <비변사인인방안지도>의 기록에는 "행궁은 5칸이고 미좌축향(未坐丑向)"으로 나타난다. 강흔의 글에서 정전이 10칸으로 기록된 것과 비교되는데, 이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좌축향은 미(未) 방위에서 축(丑) 방위를 향하는 것으로, 12지지를 360도로 환산하면 약 210도에서 30도를 가리킨다. 즉, 정북향에서 북동쪽으로 30도 기울어진 방향이다. 호남지도 격포진도에서 행궁은 전형적인 화국양향으로, 물이 오른쪽으로 흐르는 우선수(右旋水)이고 내룡은 왼쪽으로 이어지는 좌선룡(左旋龍) 형국이다.
병자호란(1636년) 이후 청나라가 조선에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가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는 등 왕실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 청은 조선에 군사 지원과 인조의 입조를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2. 규모
3. 격포 행궁의 위치
4. 조성 이유
이에 조선 조정은 청과의 관계 악화에 대비하고 유사시 왕이 피난할 안전한 장소를 확보해야 했다. 1639년(인조 17) 7월, 이경의는 강화도 중심 방어 체제에 더해 북쪽으로는 연안과 해주, 남쪽으로는 부안 변산에 대진(大鎭)을 설치하고, 부안 변산은 나주, 영암과 호응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청과의 관계 악화 시 부안과 변산을 조선의 최후 보루로 삼으려는 구상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의 방어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이경의의 상소처럼 부안 변산을 포함한 새로운 방어 거점 마련이 필요해졌다. 격포 행궁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변산반도 일대에 유사시 왕의 피난처를 확보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4. 1. 시대적 배경
병자호란(1636년) 직후인 1640년, 조선은 청나라의 지속적인 군사적, 외교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특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어 왕실의 안위에 대한 우려가 컸다. 청은 조선에 군사 지원을 요구하고, 인조에게 직접 청에 입조할 것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청과의 관계 악화에 대비하고 유사시 왕이 피난할 안전한 장소를 확보해야 했다.
1639년(인조 17) 7월, 청이 조병 요구를 거절당하자 왕에게 직접 청으로 입조할 것을 요구했다. 이성구는 "한 번 입조해서 별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해마다 입조하게 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라며 우려했다.
같은 해 7월 14일, 비국 당상에서 청과의 관계 단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인조는 심양에서 온 박황에게 청의 사정을 물었고, 박황은 '불측한 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답했다. 범문정은 '성에서 나왔을 때 아들로 바꾸어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반은 강화도를 보장(保障)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류는 왕이 머물 곳으로 남한산성과 강화도 중 한 곳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승지 이경의는 청과의 관계 단절에 대비한 상소를 올렸다. 이경의는 강화도 중심 방어 체제에 더해 북쪽으로는 연안과 해주, 남쪽으로는 부안 변산에 대진(大鎭)을 설치하여 서로 호응하게 하고, 부안 변산은 나주, 영암과 호응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청과의 관계 악화 시 부안과 변산을 조선의 최후 보루, 즉 진양(晉陽)으로 삼으려는 구상이었다.
4. 2. 국방 전략의 변화
당시 조선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공격에 취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강화도 외에 새로운 방어 거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경의는 상소를 통해 강화도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안과 해주, 남쪽으로는 부안 변산에 대진(大鎭)을 설치하여 서로 호응하는 방어 체제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부안 변산은 나주, 영암과 연결되어 호남 지역의 방어 거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격포 행궁은 이러한 국방 전략의 변화 속에서, 변산반도 일대에 새로운 방어 거점을 마련하고 유사시 왕의 피난처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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