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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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석조 아미타불상이다. 광배와 대좌를 갖춘 등신대 크기로, 사실적인 옷 주름과 당당한 체구, 근엄한 표정이 특징이다. 특히 옷 주름은 우진왕 계통 불상 양식을 따르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맞댄 아미타정인 수인을 하고 있다. 불상 뒷면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으며, 김지성이 부모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미륵보살상과 함께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불교 조각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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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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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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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
영문 이름 | Stone Standing Amitabha Buddha of Gamsansa Temple, Gyeongju |
유형 | 국보 |
지정 번호 | 82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5, 국립중앙박물관 |
시대 | 통일 신라 |
수량 | 1구 |
문화재청 ID | 11,00820000,11 |
2. 특징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상은 당당하고 위엄 있는 모습, 이상화된 신체 비례와 양감이 강조된 신체 표현, 사실적인 옷 주름 등에서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보여준다.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 1. 형태 및 조형적 특징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상은 광배와 대좌를 갖춘 등신대 크기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나발과 큼직한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풍만하며 눈, 코, 입이 뚜렷하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넓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위로는 통견의 법의가 몸에 밀착되어 신체 윤곽이 드러나며 볼륨감이 강조되었다. 법의는 목 부분에서 한 번 뒤집힌 옷깃과 함께 가슴 앞에서 U자형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다가 양쪽 다리 위로 나누어지면서 각각 U자형 옷주름이 발목까지 내려온다. 특히 두 다리에 밀착된 옷주름은 다리의 양감을 강조하고 주름 간 간격에 변화를 주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옷주름 표현은 우진왕(優塡王; Udyana) 계통 불상에서 주로 나타나며, 석가가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갔을 때의 우진왕사모상(優塡王思慕像) 고사에 나오는 인도 최초 조성 불상과 관련이 있다. 일본 교토 청량사에 있는 단목 석가상은 조연이 985년 중국 송나라에서 우진왕이 만들었다는 불상을 모각해 온 것이다. 우진왕식 착의법은 아육왕(阿育王; Asoka)식 착의법과 함께 8세기 이후 통일신라 불상에서 유행했다.
오른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이 수인(手印)은 아미타정인 중 상품하생인에 가깝고, 명문 기록대로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로,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 등에 따르면 48대원을 세웠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부처인 아미타불은 정토신앙과 함께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일찍부터 유행하여 많이 조성되었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배로, 세 줄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사이에 여러 화문을 장식했으며 가장자리는 화염문으로 마무리했다. 대좌는 안상이 음각된 팔각대석 위에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인데, 앙련과 복련 표현에 차이가 있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상은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보여주며,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 2. 우진왕 계통 불상 양식
이 불상에서 보이는 특이한 옷주름 표현 방식은 우진왕(優塡王; Udyana) 계통의 불상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석가의 불전 중 '우진왕사모상(優塡王思慕像)'이라는 인도 최초의 불상 조성 설화와 관련이 있다. 석가가 도리천에 올라갔을 때, 교상미국(憍賞彌國; Kausambi)의 우진왕이 전단향목으로 5척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한 것에서 유래한다.일본 경도 청량사에 있는 단목 석가상은 조연이 985년 중국 송나라에서 우진왕 불상을 모각해 온 것으로, 인도 우진왕식 착의법(着衣法)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진왕식 착의법은 아육왕(阿育王; Asoka)식 착의법과 함께 8세기 이후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크게 유행했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옷주름은 목부분에서 한번 뒤집혀진 옷깃과 함께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양쪽 다리 위로 나누어지면서 각각 U자형 옷주름이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데, 다리에 밀착된 옷주름은 주름 간 간격에 변화를 주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2. 3. 통일신라 불상 양식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상은 등신대 크기로,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머리에는 나발과 큼직한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풍만하며 눈·코·입이 뚜렷하여 근엄한 인상이다. 넓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에는 통견의 법의가 밀착되어 몸의 윤곽과 볼륨감을 드러낸다. 목 부분에서 뒤집힌 옷깃과 가슴 앞 U자형 옷주름은 양 다리 위로 나뉘며 다시 U자형으로 늘어져 발목까지 내려온다. 특히 두 다리에 밀착된 옷주름은 다리의 양감을 강조하고 주름 간 간격에 변화를 주어 사실적이다.이러한 옷주름 표현은 우진왕(優塡王) 계통 불상에서 주로 나타나며, 석가가 도리천에 올라갔을 때 우진왕이 전단향목으로 5척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했다는 '우진왕사모상(優塡王思慕像)' 설화에서 유래한다. 일본 교토 세이료지(淸凉寺)에 있는 단목 석가상은 985년 조연이 중국 송나라에서 우진왕 불상을 모각해 온 것으로, 우진왕식 착의법은 아육왕(阿育王)식 착의법과 함께 8세기 이후 통일신라 불상에 유행했다.
오른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가락을 구부린 수인은 아미타정인 중 상품하생인과 유사하여, 명문대로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로, 《무량수경》 등에 따르면 48대원을 세웠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중요한 부처인 아미타불은 정토신앙과 함께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일찍부터 유행했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배로, 세 줄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화문과 화염문으로 장식했다. 안상이 음각된 팔각대석 위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는 앙련과 복련 표현에 차이가 있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상은 당당하고 위엄 있는 모습, 이상화된 신체 비례, 양감 강조된 신체 표현, 사실적 옷주름 등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보여주며,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교 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3. 기록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 덕분에 제작 시기와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명문은 같은 절에서 출토된 미륵보살상과 유사한 내용으로, 21행 391자로 구성되어 있다.[2]
김지성은 고위 관직을 역임한 후 은퇴하여 불교와 도교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는 부모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감산사를 짓고 미륵보살상과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여 절에 안치했다.
명문 마지막에는 성덕왕 19년(720)에 김지성이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김지성은 719년에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여래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아미타여래상은 완성하지 못하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결국 아미타여래상은 김지성의 명복을 빌기 위해 72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도 유사한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간을 위해 아미타상 1구를 조성했다고 전한다.
3. 1. 명문 내용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같은 절에서 출토된 미륵보살상과 유사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21행 391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불상의 확실한 조성연대를 알려준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2]무릇 지극한 도는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주(周)나라 때 자취를 드러내었고 능인(能仁, 부처)는 가는 듯하고 오는 듯 하지만 일찍이 한(漢) 명제(明帝)의 꿈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불교의) 기원은 서역에서 (불법의) 등불이 전해져 동방에 이르렀고, 마침내 이에 불일(佛日)의 그림자가 해 뜨는 땅을 덮어 비추었다. 패엽(貝葉)의 경문이 패수(浿水)를 넘어 (신라를) 일깨워, 용궁 같은 절들이 우뚝우뚝 솟고 기러기처럼 탑이 줄지어 늘어서 있으니, 사위성(舍衛城)의 경계가 여기에 있고 극락의 땅에 가깝다. 중아찬 김지전(金志全)은 신령스러운 산천의 기운으로 태어났으며 성신(星辰)이 내린 덕을 받아 성품은 구름과 노을에 맞고 정은 산수와 벗하였다. 현명한 자질을 갖추어 명(命)을 이어 받았고 지략을 품어서 시정(時政)을 보좌하니 대궐에 나아가 경륜을 쌓아 곧 상사(尙舍)에 제수되어 어명을 받들었다. 계림에 머물며 인수(印綬)를 이끄니 집사시랑을 역임하였다. 나이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세간을 피해 한적한 곳에 거처하니 사호(四皓)의 고상함과 같았고, 영화를 버리고 성품을 기르니 양소(兩疏)가 물러날 때를 안 것과 같았다. 무착(無著)의 진종(眞宗, 불교)을 우러러 사모하여 때때로 『유가론』을 읽고 겸하여 장주(莊周)의 그윽한 도를 사랑하여 날마다 「소요편」을 열람하였다. 자애로운 부모 은덕에 보답하는 것은 십호(十號, 부처)의 힘만한 것이 없고, 성스러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함은 삼보(三寶)의 인연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국주대왕과 이찬(伊飡) 개원공(愷元公),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처 고로리(古路里), 죽은 여동생 고보리(古寶里), 또 처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 그 감산장전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이에 석조 아미타상 1구를 만드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작은 인연이 피안에까지 넘어가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의 중생 모두가 보리를 증득하게 하소서. 개원 7년(719년) 기미년 2월 15일에 나마(奈麻) 총(聰)이 교(敎)를 받들어 지었고 사문 석경융(釋京融) 대사 김취원(金驟源)이 ▨▨▨.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찬이 나이 47세에 고인이 됨에 동해 바윗가에 유골을 흩뿌렸다. 후대에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자는 이 선업의 도움이 있으리라. 김지전 중아찬은 삼가 생전에 이 선업을 받들었으며, ▨9세 경신년 4월 22일에 서거하여 ▨하였다.한국어
이 명문에 의하면, 김지성은 임금을 받드는 상사와 집사성의 시중이란 중임을 역임한 후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살면서 무착의 유가론을 탐독하고 《장자》의 소요편을 읽어 부모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미륵보살상과 함께 이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 절에 안치했다고 한다. 명문의 끝 부분에 성덕왕 19년(720)에 김지성이 세상을 떠나자 아미타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지성이 719년에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보살을 조성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김지성이 돌아가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720년 이후에 이 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남월산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간을 위해서 아미타상 1구를 조성했다고 되어 있다.
3. 2. 역사적 의의
김지성은 임금을 받드는 상사와 집사성의 시중을 역임한 후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살면서 무착의 유가론을 탐독하고 《장자》의 소요편을 읽어 부모와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미륵보살상과 함께 이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 절에 안치했다.[2] 명문 끝부분에는 성덕왕 19년(720)에 김지성이 세상을 떠나자 아미타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김지성이 719년에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보살을 조성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김지성이 돌아가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720년 이후에 이 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 제4 남월산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간을 위해서 아미타상 1구를 조성했다고 되어 있다.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0-06-28
[2]
논문
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上)-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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