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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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1744년 효안(曉岸)을 비롯한 11명의 화승들이 조성한 불화로,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있다. 지장보살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시왕도는 각 시왕을 묘사한 형식으로,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2016년 시왕도 중 '제2초강대왕도'가 프랑스에서 환수되어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2017년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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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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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
국가지정여부 | 보물 |
지정번호 | 1693 |
지정일 | 2010년 12월 21일 |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옥천사 (북평리)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옥천사 |
수량 | 10폭 |
문화재청 ID | 12,16930000,38 |
2. 조성 배경 및 역사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을 중심으로 11명의 화승들이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조성에 참여하였다.[1] 옥천사에는 같은 해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도 함께 전해졌으나, 현재는 도난당한 상태이다.[1]
이후 2016년 9월, 옥천사 시왕도 중 하나인 '제2초강대왕도'(第二初江大王圖)가 프랑스 개인 소장자로부터 환수되어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기 시작했다.[2] 2017년 10월 31일에는 환수된 문화재가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3]
2. 1. 조성 배경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을 중심으로 11명의 화승들이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조성에 참여하였다.[1] 현재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는 유실되었고,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 있다. 옥천사에는 1744년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도 함께 전해졌으나, 현재는 도난당한 상태이다.[1]옥천사 시왕도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조선시대 시왕신앙이 유행하면서 많이 만들어졌다.[2]
2. 2. 1744년 조성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의 주도로 11명의 화승들이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조성에 참여하였다.[1]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 있으며,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는 결실되었다. 옥천사에는 1744년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도 있었으나, 현재 도난당한 상태이다.[1]지장보살도는 화면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그 좌우를 2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2보살을, 상단에 6보살을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상단의 6보살 중 지장보살 좌우의 보살은 정면상을 취하고, 나머지 권속들은 중앙의 지장보살을 바라보도록 표현하여 짜임새 있고 안정적인 구도를 보여준다.[1]
시왕도는 한 폭에 1위(位)의 시왕을 묘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각 화면은 용두가 장식된 의자에 좌정한 시왕과 권속을 상단에 크게 배치하고, 하단은 채운(彩雲)으로 구획하여 각 시왕에 해당하는 지옥 장면을 묘사하였다. 상단에는 각 시왕의 권속들이, 하단에는 지옥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러한 형식의 시왕도는 1742년 범어사 시왕도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졌으나, 현재 범어사 시왕도의 소장처는 알 수 없다. 이후 시왕이 각각 1폭으로 조성되는 시왕도는 옥천사 시왕도에 시왕 의자 뒤로 병풍을 추가한 형식이 다수 제작되었다. 1764년 시왕도(호림박물관 소장)나 1798년 통도사 시왕도 등이 그 예시이며, 이는 18세기 후반 시왕도의 전형이 되었다.[1]
현재 옥천사 지장보살도는 색 오염과 화면 꺾임 현상이 나타나지만, 본존과 다른 권속들의 상호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시왕도는 개체한 흔적이 없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지장보살도와 제9도시대왕도는 비단 바탕천에,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 바탕에 제작되었다.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
2016년 9월, 옥천사 시왕도 중 하나인 '제2초강대왕도'(第二初江大王圖)가 프랑스 개인 소장자로부터 환수되어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2017년 10월 31일 환수된 문화재는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3]
옥천사 명부전에 봉안된 시왕도는 10폭으로 구성된 불화로,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의 주도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가 도난당해 8폭만 남아 있었다. 명부전의 시왕도 8폭은 전각 내 다른 그림인 '지장보살도'와 함께 2010년 보물 제1693호로 지정되었다.
시왕도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을 근본 경전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조선시대에 시왕신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많이 만들어졌다.
옥천사 시왕도는 한 폭에 시왕 1위를 묘사하고, 화면 상단에는 시왕과 권속을, 하단에는 지옥을 배치하였다. 환수된 '제2초강대왕도'의 '초강대왕'은 사망 후 14일 만에 만나는 왕으로, 초강(初江)에서 망자의 죄를 심판하고 초강을 건너는 망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2]
2. 3. 도난 및 환수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이 주도하여 조성한 고성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가 도난당하여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만 남아 있었다.[1]이후 2016년 9월, 옥천사 시왕도 중 하나인 '제2초강대왕도'(第二初江大王圖)가 프랑스 개인 소장자로부터 환수되어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2] 초강대왕은 사망 후 14일 만에 만나는 왕으로, 초강(初江)에서 망자의 죄를 심판하고 초강을 건너는 망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2]
명부전에 있던 시왕도 8폭은 전각 내의 다른 그림인 '지장보살도'와 함께 2010년 보물 제1693호로 지정되었다.[2] 2017년 10월 31일에는 환수된 '제2초강대왕도'가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3]
3. 구성 및 양식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이 주도하고 11명의 화승들이 참여하여 조성되었다. 현재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는 유실되었고,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 있다. 옥천사에는 이 9점의 불화와 함께 1744년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난당한 상태이다.[1]
3. 1. 지장보살도
화면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그 좌우를 2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2보살을 그리고, 상단에 대칭으로 6보살을 배치하였다. 상단의 6보살 중 지장보살의 좌우 보살은 정면상을 취하고, 나머지 권속들은 중앙의 지장보살을 바라보게 표현하여 화면의 구도가 짜임새 있고 안정적이다.[1]옥천사 지장보살도는 색의 오염과 화면 꺾임 등의 현상이 나타나지만, 본존과 다른 권속들의 상호는 원형이 잘 남아있는 상태이다. 지장보살도와 제9도시대왕도는 바탕천의 재질이 비단이며,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 바탕에 제작되었다.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
3. 2. 시왕도
시왕도는 한 폭에 각 1위(位)의 시왕을 묘사한 형식을 취하였다. 각 화면은 용두가 장식된 의자에 좌정한 시왕과 권속을 상단에 크게 배치하고, 하단에 채운(彩雲)으로 화면을 구획하여 각 시왕에 해당하는 지옥 장면을 묘사하였다.[1] 화면 상단에는 각 시왕의 권속들이 배치하고, 하단에는 지옥장면이 묘사되었다. 이러한 형식의 시왕도는 1742년 범어사 시왕도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졌으나, 현재 범어사 시왕도는 소장처를 알 수 없다. 이후 시왕이 각각 1폭으로 조성되는 시왕도는 옥천사 시왕도에 시왕의 의자 뒤로 병풍을 추가한 형식이 다수 제작되었다. 1764년 시왕도(호림박물관 소장)나 1798년 통도사 시왕도 등이 그 예에 속하며, 이는 18세기 후반 시왕도의 전형이 되었다.[1]옥천사 시왕도는 10폭으로 구성된 불화로, 1744년 화승인 효안(曉岸)의 주도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를 누군가 훔쳐가 8폭만 남아 있었다. 명부전에 있는 시왕도 8폭은 전각 내의 또 다른 그림인 '지장보살도'와 함께 2010년 보물 제1693호로 지정됐다.[2]
시왕도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을 근본 경전으로 해서 제작된 그림으로, 조선시대에 시왕신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많이 만들어졌다.[2]
옥천사 시왕도는 한 폭에 시왕 1위가 묘사돼 있으며, 화면의 상단에는 시왕과 권속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지옥을 그렸다. 2016년 9월에 환수된 '제2초강대왕도'의 '초강대왕'은 사망 후 14일 만에 만나는 왕으로 초강(初江)에서 망자의 죄를 심판하고, 초강을 건너는 망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2] 2017년 10월 31일 환수된 문화재가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3]
시왕도는 개체한 흔적이 없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제9도시대왕도는 바탕천의 재질이 비단이며,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바탕에 제작되었다.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
4. 재질 및 보존 상태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의 주도로 11명의 화승들이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를 조성하였다. 현재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가 결실되어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있다. 옥천사에는 이 9점의 불화와 함께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난당한 상태이다.[1]
옥천사 지장보살도는 색이 오염되고 화면이 꺾이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지만, 본존과 다른 권속들의 얼굴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시왕도는 개체한 흔적이 없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지장보살도와 제9도시대왕도는 비단 바탕천에 제작되었고,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 바탕에 제작되었다. 이 불화들은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준다.[1]
5. 문화재적 가치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의 주도로 11명의 화승들이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를 조성하였다. 현재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는 없어지고,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 있다. 옥천사에는 1744년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도 있었으나, 현재는 도난당한 상태이다.[1]
지장보살도는 화면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그 좌우를 2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2보살을, 상단에 대칭으로 6보살을 배치하였다. 상단의 6보살 중 지장보살 좌우의 보살은 정면을 향하고 있고, 나머지 권속들은 중앙의 지장보살을 바라보게 표현하여 화면의 구도가 짜임새 있고 안정적이다.[1]
시왕도는 한 폭에 각 1위(位)의 시왕을 묘사하는 형식을 취했다. 각 화면은 용두가 장식된 의자에 앉은 시왕과 권속을 상단에 크게 배치하고, 하단에 채색 구름으로 화면을 구획하여 각 시왕에 해당하는 지옥 장면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시왕도는 1742년 범어사 시왕도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졌으나,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이후 옥천사 시왕도처럼 시왕이 각각 1폭으로 조성되고 시왕의 의자 뒤로 병풍을 추가한 형식이 다수 제작되었다. 1764년 시왕도(호림박물관 소장)나 1798년 통도사 시왕도 등이 그 예에 속하며, 이는 18세기 후반 시왕도의 전형이 되었다.[1]
현재 옥천사 지장보살도는 색의 오염과 화면 꺾임 등의 현상이 나타나지만, 본존과 다른 권속들의 얼굴은 원형이 잘 남아있는 상태이다. 시왕도는 개칠한 흔적이 없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지장보살도와 제9도시대왕도는 바탕천의 재질이 비단이며,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 바탕에 제작되었다.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1]
5. 1. 도난 문화재 환수의 의의
2016년 9월, 옥천사 시왕도 중 하나인 '제2초강대왕도'(第二初江大王圖)가 프랑스 개인 소장자로부터 환수되어 서울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2]옥천사 명부전에 있던 시왕도는 원래 10폭으로 구성된 불화였으나,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를 도난당해 8폭만 남아 있었다.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이 주도하여 조성한 이 시왕도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預修十王生七經)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시왕신앙이 유행하면서 많이 만들어졌다. 명부전에 남아있던 시왕도 8폭은 전각 내의 '지장보살도'와 함께 2010년 보물 제1693호로 지정되었다.[2]
옥천사 시왕도는 한 폭에 시왕 1위와 권속을 상단에, 지옥을 하단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환수된 '제2초강대왕도'의 '초강대왕'은 사망 후 14일 만에 만나는 왕으로, 초강(初江)에서 망자의 죄를 심판하고 초강을 건너는 망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2]
2017년 10월 31일, 환수된 '제2초강대왕도'는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다.[3]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0-12-21
[2]
뉴스
40년전 도난당한 보물 불화, 프랑스서 돌아왔다
http://www.yonhapnew[...]
2016-09-28
[3]
웹인용
문화재청고시제2017-130호(국가지정문화재<국보, 보물> 지정 및 변경)
http://gwanbo.mois.g[...]
20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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