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라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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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달라하라도는 스페인 중동부, 카스티야-라 만차 자치 지방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보인다. 이베리코 산맥과 중앙 산맥이 위치하며, 타구스강, 하라마강, 에브로강 등의 강이 흐른다. 지중해성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혹독하다. 1833년 스페인 지방 행정 구역 재편으로 설치되었으며, 1982년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이 발족하면서 이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로마 시대, 서고트족, 무어인의 지배를 거쳐 1833년 주가 설치되었다. 주요 유적으로는 엘 인판타도 궁전, 시구엔사 대성당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과달라하라도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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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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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Provincia de Guadalajara (스페인어) |
위치 |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
수도 | 과달라하라 |
공식 언어 | 스페인어 |
주민의 호칭 | 과달라하레뇨 / 과달라하레냐 |
정치 | |
의회 | 코르테스 헤네랄레스 |
지리 | |
면적 | 12,167 km² |
면적 순위 | 17위 |
인구 | |
총 인구 | 258,890 명 (2019년) |
인구 순위 | 42위 |
인구 밀도 | auto |
인구 비율 | 스페인 전체의 0.52% |
기타 정보 | |
ISO 3166-2 | ES-GU |
우편 번호 | 19 |
2. 지리
과달라하라 주는 다양한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기후와 식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과달라하라 주는 일반적으로 중앙 고원의 전형적인 지중해성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11] 길고 건조하며 더운 여름과 길고 혹독한 겨울이 나타나며, 봄과 늦가을에는 온화한 기온을 보인다. 이러한 기후의 다양성은 다양한 식생과 생태계를 만들어내어, 참나무, 노간주나무, 소나무, 너도밤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을 주 전역에서 볼 수 있다.[12]
2. 1. 지형

과달라하라 주는 스페인 중동부에 위치하며, 카스티야-라 만차 자치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면적은 12km2로 스페인 전체 면적의 3.42%를 차지한다.[6] 쿠엥카 주, 마드리드 주, 세고비아 주, 소리아 주, 사라고사 주, 테루엘 주와 접한다. 주의 수도는 과달라하라이며, 주 인구의 약 35%가 이곳에 거주한다. 과달라하라에는 288개의 자치체가 있으며, 이 중 4분의 3 이상이 인구 200명 미만의 마을이다.
과달라하라는 산악 지형으로, 주 동쪽은 이베리코 산맥 지역에 속하며, 서쪽에는 중앙 산맥이 솟아 있다.[7][8] 이베리코 산맥은 북동부를 차지하며, 소모시에라, 아욘 산맥, 오세혼 산맥, 알토 레이, 보데라 바라호나, 라도나 산맥 등이 인접해 있다. 산들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9] 에나레스강(유역 면적 3735km2)과 하라마강(유역 면적 782km2)과 같은 강들의 협곡에 의해 침식되었다.
스페인의 주요 강 중 하나인 타구스 강(Tajo)은 주의 동쪽 부분을 지나는 주요 강으로, 4686km2의 유역을 형성하며, 더 넓은 마드리드 유역의 일부를 이룬다.[7] 또한 2015km2의 유역을 가진 타후냐 강과 996km2의 유역을 형성하는 에브로 강도 주목할 만하다. 주목할 만한 다른 특징으로는 알토 타호 자연 공원, 테헤라 네그라 너도밤나무 숲, 푸에블라 데 벨레냐 석호, 파스트라나와 예브라의 마고소 언덕, 라 미뇨사의 화산 언덕, 토레모차 델 피나르의 습지 등이 있다.[10]
2. 2. 수계
과달라하라 주는 스페인 중동부, 카스티야-라 만차 자치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스페인의 주요 강 중 하나인 타구스 강은 주의 동쪽 부분을 지나며 타구스강 유역을 형성하고, 더 넓은 마드리드 유역의 일부를 이룬다.[7] 타후냐 강과 에브로 강도 이 지역을 지난다.이 지역의 산들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9] 에나레스강(유역 면적 3735km2)과 하라마강(유역 면적 782km2) 등 강들의 협곡에 의해 침식되었다.
2. 3. 기후
과달라하라도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지리적 특성을 지녀 다양한 기상 조건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중앙 고원의 전형적인 지중해성 대륙성 기후로 분류될 수 있다.[11] 길고 건조하며 더운 여름과 길고 혹독한 겨울은 봄과 늦가을에 온화한 기상 조건으로 이어진다. 기후의 다양성은 다양한 식생과 생태계를 만들어내며, 참나무, 노간주나무, 소나무, 너도밤나무 등과 같은 나무들을 주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12] 강수량의 계절별 분포는 지형의 영향을 받으며, 연간 700~900mm 사이로 가장 많은 강수량이 이베리코 산계의 산악 지역에서 발생한다. 아일론 산맥의 하라마 강과 소르베 강의 발원지에서 800mm 이상이 내린다. 시에사의 헤나레스 계곡과 타후냐 계곡, 북부 황무지 지역은 연평균 600mm 미만의 강수량을 보이며, 사라고사 및 테루엘 주와 접한 몰리나 황무지 등의 일부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400mm 미만일 수 있다.2. 4. 행정 구역
과달라하라 도는 라 알카리아, 라 캄피냐, 라 세라니아 및 세뇨리오 데 몰리나-알토 타호의 코마르카를 포함한다.[13] 카스티야-라 만차 주의 쿠엔카 현, 아라곤 주의 사라고사 현과 테루엘 현, 마드리드 주, 카스티야 이 레온 주의 세고비아 현과 소리아 현과 접해있다.현도 과달라하라는 과달라하라 현 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과달라하라 현에는 288개의 무니시피오 (기초 자치체)가 있으며, 그 중 4분의 3이 인구 200명 이하의 자치체이다.
3. 역사
과달라하라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사건을 겪으며 발전해 왔다.
켈트 이베리아인들이 정착한 후, 로마 제국은 이 지역에 농업, 광업, 상업을 도입하고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여 통신을 발전시켰다. 서고트족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아 기독교와 게르만법을 도입했으며, 레오비길드 왕은 타구스 강에 레코폴리스를 건설했다. 이후 무어인들이 4세기 동안 이슬람 통치를 확립하고, 현재의 주도인 과달라하라를 건설했다.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분열된 후, 1085년 레온-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의 주도로 기독교 정복이 시작되었다. 12세기 말,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승리로 과달라하라 전역이 카스티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근대에는 가톨릭 군주의 결혼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통합되었고, 멘도사 가문의 후원 아래 과달라하라는 15세기와 16세기에 번성하여 "알카리아 아테네"라는 별칭을 얻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는 도서관을 건립하고,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학문 발전을 이끌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후, 1719년 왕립 섬유 공장이 설립되어 18세기 동안 번성했지만, 스페인 독립 전쟁으로 19세기 초에 문을 닫았다. 1813년 해방 이후 도시는 황폐화되었으나, 1840년 군사 공학 아카데미 설립으로 상황이 개선되었다. 1844년에는 엔디엘라엔시나에서 은이 발견되어 은 광풍이 일기도 했다.
1833년 스페인 지방 행정 구역 재편으로 과달라하라 주가 설치되었고, 프랑코 독재 체제 이후 스페인 민주화를 거쳐 1982년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이 발족되었다.
20세기 초, 군사 시설은 과달라하라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로마노네스 백작의 영향으로 추가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스페인 내전 이후, 1950년대 후반부터 산업 발전 계획이 추진되어 헤나레스 회랑 지역이 발전했지만, 농촌 지역은 쇠퇴했다. 2005년에는 대규모 산불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3. 1. 선사 시대

과달라하라 도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이는 에나레스 강과 리나레스 강둑에서 발견된 석기 도구로 증명된다. 리바 데 사엘리세스의 Cueva de los Casares에는 수많은 선사 시대 동굴 벽화가 있으며, 알콜레아 델 피나르를 포함한 과달라하라 도의 여러 유적지에서 기원전 4천년기의 거석 문화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의 강둑을 따라 여러 청동기 시대 정착지의 유적이 있으며, 특히 코고유도의 로마 델 로모(Loma del Lomo)와 모하레스의 청동기 시대 후기 정착지가 있다.[2]
3. 2. 고대
켈트 이베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시구엔사, 아티엔사, 테르만시아 (북쪽), 몰리나 (남쪽)을 중심으로 철기 시대 후기에 이 지역을 점령했다. 그들은 가축과 말을 기르고, 요새화된 읍, 마을, 성들을 건설했다. 기원전 143년부터 133년까지 로마인들은 스페인 정복을 위한 전투를 시작했고, 이는 기원전 94년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지역에 농업, 광업, 상업을 도입하고, 도로와 다리를 통해 통신을 촉진했다. 중요한 로마 도시는 세곤티아(시구엔사)였으며, 루사가 주변에 마을 벽과 공공 건물을 건설했다.[2]3. 3. 중세

서고트족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아 6세기와 7세기경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기독교와 게르만법을 이 지역에 도입했다. 578년, 레오비길드 왕은 타구스 강에 성당과 궁전을 갖춘 레코폴리스를 건설했다. 711년경 무어인들이 이 지역에 도착하여 13세기 초까지 약 4세기 동안 이슬람 통치를 확립했다. 무어인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현재의 주도인 마디나트 알-파라이(Madinat-al-Faray) (과달라하라, 아랍어 وادي الحجارة|와디 알-하자라ar, "돌의 계곡/강바닥")를 건설한 것이며, 9세기에 기독교인들을 물리친 것으로 기억되는 베르베르 족의 지도자 알-파라이에 의해 세워졌다.[2]
현재 과달라하라 주가 포함하는 영토는 알-안달루스의 중앙 변경주의 일부였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았으며, 가장 중요한 마을은 아티엔자, 과달라하라, 하드라케, 히타, 시구엔자였다.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분열된 후 톨레도는 1018년에 독립했으며, 1043년부터 1075년까지 통치한 야흐야 알-마문 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알-마문 사후 레온-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 왕의 압박으로 1085년에 이 지역에 대한 기독교 정복이 시작되었다. 12세기 초까지 몰리나, 라 세라니아, 시구엔자, 타구스 계곡이 회복되었고, 시구엔자 주교구가 설립되었다. 알폰소 7세와 알폰소 8세 치하에서 이 지역은 카스티야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로 재정착되었다. 12세기 말 쿠엔카 주와 알라르콘의 정복과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승리로 과달라하라의 모든 영토가 다시 카스티야 기독교인들의 손에 들어갔다.[3]
3. 4. 근세

근대는 가톨릭 군주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1469년 바야돌리드)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결혼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관이 통합되었다. 그들은 교회, 군대, 귀족에게서 개발된 권력을 중앙 집권화했는데,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얻은 영토를 재판매하여 이교도와 싸우는 데 필요한 수입을 얻기 위해서였다. 16세기에는 카를 1세와 펠리페 2세에 의해 이러한 관행이 강화되었다. 과달라하라의 경우,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파스트라나의 군사 기사단에 속했던 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상당한 영토를 얻는 데 성공한 멘도사 가문은 파스트라나에 요새화된 궁전을 짓고, 사야톤, 에스코페테, 알발라테 데 소리타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다.[2]
멘도사 가문 아래에서 과달라하라시는 15세기와 16세기에 번성하여 작가, 역사가, 철학자를 끌어들였고, 이로 인해 "la Atenas alcarreña"(알카리아 아테네)라는 별칭을 얻었다.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1398–1458)는 궁전, 교회, 수도원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을 대량으로 소장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16세기에 그의 이름을 딴 이니고 로페스 데 멘도사(1493–1566)는 도시에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추가적인 작가들을 유치했다. 파스트라나 또한 루이 고메스 데 실바(1516–1573)의 지도 아래 르네상스 시대에 번성하여 라틴어 학교와 합창 학교를 설립했다. 16세기 말까지 이 도시는 태피스트리와 카르멜회 수녀원으로 유명해졌다. 루이의 미망인인 아나 데 멘도사가 1592년에 사망하면서 귀족들이 마드리드로 이동했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이전의 높은 지위를 잃게 되었다. 스페인 황금 시대가 17세기 중부 스페인에서 발전하는 동안 과달라하라는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면서 장기간 쇠퇴를 경험했다.[2]
3. 5. 근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과달라하라 시와 이 지역 주요 마을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719년, 과달라하라에 왕립 섬유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 공장에는 스페인 전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등 유럽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이 공장은 18세기 내내 번성했지만, 스페인 독립 전쟁의 결과로 19세기 초에 문을 닫았다. 독립 전쟁 동안 프랑스군은 이 지역의 마을들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는데, 특히 몰리나에서는 600채 이상의 건물이 화재로 파괴되었다.[2]1813년 과달라하라 시가 해방되었을 때, 도시는 황폐화되어 가난에 시달렸다. 1840년, 이전 섬유 공장에 군사 공학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이후 추가적인 군사 시설들이 들어섰고, 19세기 말에는 비행선 연대가 창설되어 초기 탐험과 실험을 이끌었다.[2]
1844년 엔디엘라엔시나 광산 지구에서 은이 발견되면서 이 지역에 은 광풍이 일었다.[4]
1833년 스페인 지방 행정 구역 재편에서 스페인 전역에 49개의 주가 설치되었다. 이때 과달라하라 주가 설치되었고, 주도는 과달라하라로 정해졌다. 이때 과달라하라 주와 마드리드 주 등 5개 주는 '역사적 지역'인 카스티야 라 누에바 지역으로 묶였지만, '역사적 지역'에는 권한이나 행정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코 독재 체제를 거쳐, 스페인 민주화 이행기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스페인 전역에 17개의 자치 지방이 설치되었다. 1982년 8월 10일에는 과달라하라 주 등 5개 주로 이루어진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이 발족했다.
3. 6. 현대
20세기 초 30년 동안 군사 시설은 과달라하라에 재정적 지원을 계속 제공했다. 인구는 약간 증가했으며, 1886년부터 1936년까지 과달라하라의 대표를 지낸 부유한 지주이자 정치인인 로마노네스 백작의 영향으로 추가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2]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편에서 싸운 후, 1950년대 후반까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잇따른 정부는 과달라하라와 헤나레스 회랑을 선호하여 마드리드 밖으로 산업 개발을 옮기려는 계획이 시작될 때까지 이 지역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새로운 산업과 개선된 통신이 과달라하라, 토레혼, 알칼라 데 헤나레스, 아수케카 데 헤나레스, 윤케라 데 헤나레스에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농촌 지역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2]2005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이 지역은 '과달라하라 화재'로 알려진 산불로 황폐화되었다.[5] 11명의 소방관이 폭발로 사망했다. 이 화재는 하이커들의 바비큐로 인해 발생했다.
1833년 스페인 지방 행정 구역 재편에서 스페인 전역에 49개의 주가 설치되었다. 이때 과달라하라 주가 설치되었고, 주도는 과달라하라로 정해졌다. 이때 과달라하라 주나 마드리드 주 등 5개 주는 '역사적 지역'인 카스티야 라 누에바 지역으로 묶였지만, '역사적 지역'에는 권한이나 행정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1939년부터 1975년까지의 프랑코 독재 체제를 거쳐, 스페인 민주화 이행기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스페인 전역에 17개의 자치 지방이 설치되었다. 1982년 8월 10일에는 과달라하라 주 등 5개 주로 이루어진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이 발족했다.
4. 인구
연도 | 인구 |
---|---|
1877년 | 203,017명 |
1887년 | 204,984명 |
1900년 | 203,655명 |
1910년 | 213,076명 |
1920년 | 211,193명 |
1930년 | 213,284명 |
1940년 | 211,561명 |
1950년 | 208,652명 |
1960년 | 189,585명 |
1970년 | 149,804명 |
1980년 | 143,473명 |
1990년 | 145,593명 |
2000년 | 174,999명 |
2010년 | 257,442명 |
2020년 | 261,995명 |
출처: 국립 통계 연구소(Instituto Nacional de Estadística, INE)
5. 문화 유산
과달라하라에는 로마네스크 건축 및 고딕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시구엔사 대성당, 엘 인판타도 궁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과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5. 1. 주요 유적지
주목할 만한 랜드마크로는 팔라수에로스의 성과 성벽, 엘 인판타도 궁전, 파스트라나 공작 궁전, 메디나셀리 공작 궁전 (코고유도), 시구엔사 대성당, 라 리바 데 사엘리세스의 Cueva de los Casares, 피오스 성 등이 있다. 과달라하라 시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데 라 푸엔테 라 마요르 공동 대성당은 1941년에 ''비엔 데 인테레스 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5. 2. 성곽
아티엔자 성은 높은 바위에 위치하여 수 마일 밖에서도 볼 수 있다. 1085년 알폰소 6세가 최종적으로 탈환하기 전까지 무어인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14] 시구엔사 성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무어인이 기반을 확장했고 1123년 아겐의 베르나르에 의해 기독교인에게 되찾아졌다.[15] 18세기 말, 주교 후안 디아스 데 라 게라는 요새의 모습을 주교 궁전의 모습으로 바꾸었지만, 스페인 독립 전쟁 동안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830년대에는 화재로 인해 파괴되어 버려졌다.[16] 완전히 복원된 후, 이 성은 1976년에 파라도르 고급 호텔로 문을 열었다. 깃발과 갑옷으로 장식된 거대한 라운지는 성의 원래 식당이었다.[17]몰리나 데 아라곤 성은 주변 계곡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4개의 문과 6개의 탑이 있는 외부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4개는 현재 양호한 상태이다. 원래 탑 라인에는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은 기존의 켈트이베리아인 성 위에 세워진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정복 시기 무어인 요새 (10-11세기)로 시작되었다. 요새는 몰리나 타이파의 영주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엘 시드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추방되었을 때 이곳에 거주했다. 1129년 아라곤의 알폰소 1세에 의해 무어인으로부터 정복되었다.[18]
인상적인 토리하 성은 11세기에 템플 기사단에 의해 건설되었다. 알카리아 석회암으로 지어진 직사각형 구조는 3개의 둥근 탑과 원통형 요새를 가지고 있다. 1445년에는 나바라의 캡틴 후안 데 푸엘레스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추기경 페드로 곤잘레스 데 멘도사 (1428–1495)의 소유가 되었다. 19세기에는 빅토르 위고의 아버지인 위고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가 엘 엠페시나도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되었다. 1962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19]
헤나레스 강을 내려다보는 하드라케 성은 때때로 엘 시드의 성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4개의 둥근 탑과 1개의 직사각형 탑이 있다. 오늘날의 완벽하게 균형 잡힌 궁궐 구조는 15세기에 후안 구아스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수세기 동안 무어인에 의해 사용된 요새 부지에 서 있다. 외부 구조는 상당히 복원되었지만 내부는 여전히 폐허 상태이다.[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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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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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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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distrito minero de Hiendelaenc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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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Un incendio asola el noreste de Guadalajara y se cobra la vida de 11 pers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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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illo de Jadraque / Castillo del 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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