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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르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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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르미스다는 6세기 초에 재위한 교황으로, 이탈리아 프로시노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제 서품 전에 결혼하여 아들 실베리오를 두었으며, 대립교황 라우렌시오 시대에 교황 심마코를 지지했다. 호르미스다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아카키우스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와 유스티누스 1세와 협상하여 분열을 종식시켰다. 그의 노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1세가 호르미스다의 지시에 따라 519년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하면서 아카키우스 분열이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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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르미스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교황 성인
이름호르미스다
직함로마 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재임 시작514년 7월 20일
재임 종료523년 8월 6일
선임자심마코
후임자요한 1세
추기경 임명514년 이전
추기경 임명자심마코
계급추기경-부제
출생일기원후 450년경
출생지서로마 제국, 프루시노,
사망일523년 8월 6일 (72~73세)
사망지동고트 왕국, 로마
자녀1명 교황 실베리오
축일8월 6일

2. 생애

교황 연대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그의 서신들을 보면, 아카키우스 분열로 인해 갈라선 로마 교황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좌 간의 친교를 복구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제논 황제가 《헤노티콘》을 반포하고 그의 후계자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도 적극 지지하면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점차 단성설에 기울게 되었으며, 칼케돈 공의회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은 많은 주교를 박해하면서 결국 로마 교회와의 친교가 끊어져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동로마 제국의 기병대 지휘관 비탈리아누스가 트라키아, 소스키타이, 미시아 등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으며, 자신은 직접 훈족과 불가리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입구로 진군하였다. 정통 기독교 신앙을 따르던 비탈리아누스의 압력에 굴복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나서기로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와의 대화에 나선 또 다른 이유는 성 베드로좌의 주인이 새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전임 교황 심마코와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나 접촉도 없었다.[18]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먼저 514년 12월 28일에 호르미스다에게 그를 다음 해 7월 1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되는 시노드에 초청하는 서신을 써서 보냈다. 515년 1월 12일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첫 번째 서신보다 덜 격식을 갖춘 두 번째 서신을 써서 호르미스다에게 보냈다. 이 두 번째 서신이 첫 번째 서신보다 먼저 로마에 도착했다. 호르미스다는 교회가 재일치하리라는 기대감에 환영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전임 교황들의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시노드 초대를 환영했지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첫 번째 서신 또한 로마에 당도하자 교황은 신중하게 협상하였다. 그는 먼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회의를 거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단을 보낸다는 것을 알리는 서신을 황제에게 써서 보냈다.

그리하여 파비아의 엔노디우스와 카티나의 포르투나투스 등 두 명의 주교와 사제 베난시오, 부제 비탈리스, 공증인 힐라리오로 구성된 교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을 방문하였다.[19] 호르미스다는 사절단을 통해 교회 일치에 앞서 몇 가지 선행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첫째,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와 교황 레오 1세의 교의서한(Tomus)을 수용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 둘째, 동방 교회의 주교들 역시 황제를 따라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와 교황 레오 1세의 교의서한을 수용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 디오스코루스, 앨루루스,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2세, 베드로 몬구스, 아카키우스 등과 그들을 추종하던 이들을 모두 공식적으로 단죄한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20]
  • 셋째, 아카키우스 분열로 인하여 추방당한 성직자들은 로마 사도좌에서 다시 심사하여 무죄가 입증될 경우 복귀시켜야 한다.
  • 넷째, 추방당한 성직자들 중에 로마와 친교 관계 중에 있으며 가톨릭 신앙을 천명한 이들은 즉각 복귀시켜야 한다.
  • 다섯째, 정통 신앙을 박해하여 고소당한 주교들의 심판은 교황에게 유보되어야 한다.


이전까지는 황제가 공의회에서 교부들이 서로 자유롭게 토론하게 하였지만, 교황은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락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교황 자신에 대한 순명을 요구한 것이었다.[21] 그러나 교황의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푸대접을 받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로마로 돌아갔다.

516년 7월 16일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에게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였으며, 7월 28일에는 로마 원로원을 방문하여 역시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친서를 보내면서 교황에게 맞설 것을 충동질하였다. 하지만 테오도릭 대왕은 물론 원로원마저 교황에게 계속 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호르미스다는 발칸반도의 주교들과 추가적으로 로마와 친교를 맺었으며, 니코폴리스의 주교이자 에피루스의 대주교였던 요한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친교를 끊고 로마와의 친교를 회복하였다.[22]

엔노디오 주교와 미세눔의 펠라지오 주교로 구성된 교황의 두 번째 사절단 역시 첫 번째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성과 없이 돌아왔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역시 교황 사절단에게 뇌물을 주며 회유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19] 설상가상 비탈리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서 황제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트라키아 북부로 달아나고 그의 지지자들은 처형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권좌의 위험에서 벗어나자 517년 7월 11일 시노드 개최를 잠정적으로 미루고 로마와의 일치 협상을 파기한다고 공식 발표하였으나, 그로부터 1년 후에 사망하였다. 《교황 연대표》에서는 그가 벼락을 맞고 즉사했다고 기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호르미스다는 이탈리아반도 캄파냐디로마 프로시노네에서 태어났다.[16] 기독교의 부제로 서품되기 전에 이미 혼인한 몸이었으며, 슬하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이 아들은 훗날 교황 실베리오가 되었다.[6] 라우렌시오 이교 시대에 그는 교황 심마코를 지지한 대표적인 성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502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공증인으로 활동하였다.[16] 파비아의 주교 마누스 펠릭스 엔노디오가 호르미스다에게 보낸 서신 두 편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교황에게 빌려 준 말들과 돈을 되돌려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7]

2. 2. 교황 선출

교황 심마코와는 달리 호르미스다는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잡음이 전혀 없었다. 교황이 되자마자 호르미스다는 우선 아직 잔존한 라우렌시오 분파를 불러들여 화해하고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여 로마에 남은 이교의 마지막 잔재를 지워버렸다. 라우렌시오 분파는 심마코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크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호르미스다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17]

2. 3. 아카키우스 분열 종식

아카키우스 분열519년 3월 28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성당에서 로마 교회와의 친교 회복을 알리는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이로써 헤노티콘 반포 이후 지속되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비탈리아누스의 압력과 교황 호르미스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호르미스다는 사절단을 통해 교회 일치를 위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협상을 중단하고 1년 후 사망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뒤를 이은 유스티누스 1세는 호르미스다의 조건을 모두 수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도 이를 따르면서 분열이 종식되었다.

2. 3. 1. 분열의 배경

호르미스다는 교황 심마코를 지지한 주요 성직자 중 한 명이었다. 502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공증인으로 활동했다.[16]

전임 교황 심마코와 달리 호르미스다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논란이 없었다. 교황이 되자마자 호르미스다는 라우렌시오 분파를 다시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 로마에 남아 있던 이교의 잔재를 없앴다. 라우렌시오 분파는 심마코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컸기 때문에 호르미스다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17]

교황 연대표》와 현존하는 그의 서신들은 아카키우스 분열로 갈라선 로마 교황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좌 간의 친교를 회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제논 황제가 《헤노티콘》을 반포하고 그의 후계자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이를 지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점차 단성설에 기울었고,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는 주교들을 박해하면서 로마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장군 비탈리아누스가 트라키아, 소스키타이, 미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훈족과 불가리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정통 기독교 신앙을 따르던 비탈리아누스의 압력에 굴복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와 대화에 나선 또 다른 이유는 성 베드로좌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전임 교황 심마코와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도 없었다.[18]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514년 12월 28일에 호르미스다에게 다음 해 7월 1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리는 시노드에 초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515년 1월 12일에는 덜 격식을 갖춘 두 번째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이 먼저 로마에 도착했다. 호르미스다는 교회가 재일치하리라는 기대감에 환영했지만, 전임 교황들의 자세를 견지하며 시노드 초대는 환영했지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첫 번째 서신이 로마에 도착하자, 교황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파비아의 엔노디우스와 카티나의 포르투나투스 등 두 명의 주교, 사제 베난시오, 부제 비탈리스, 공증인 힐라리오로 구성된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였다.[19] 호르미스다는 사절단을 통해 교회 일치에 앞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 결의와 교황 레오 1세의 교의서한(Tomus)을 수용한다고 공식 선포해야 한다.

# 동방 교회의 주교들도 이를 따르고,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 디오스코루스, 앨루루스,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2세, 베드로 몬구스, 아카키우스 등과 그 추종자들을 공식 단죄해야 한다.[20]

# 아카키우스 분열로 추방당한 성직자들은 로마 사도좌에서 심사 후 복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 로마와 친교 중이며 가톨릭 신앙을 천명한 추방된 성직자들은 즉각 복귀시켜야 한다.

# 정통 신앙을 박해하여 고소당한 주교들의 심판은 교황에게 유보되어야 한다.

이전까지 황제가 공의회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했지만, 교황은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락과 교황에 대한 순명을 요구했다.[21] 그러나 교황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푸대접을 받고 로마로 돌아갔다.

516년 7월 16일 동로마 제국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하여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7월 28일에는 로마 원로원을 방문하여 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교황에게 맞설 것을 충동질했지만, 테오도릭 대왕과 원로원은 교황에게 순명하기로 결정했다. 호르미스다는 발칸반도 주교들과 추가로 친교를 맺었으며, 니코폴리스의 주교이자 에피루스의 대주교였던 요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친교를 끊고 로마와 친교를 회복했다.[22]

엔노디오 주교와 미세눔의 펠라지오 주교로 구성된 교황의 두 번째 사절단도 성과 없이 돌아왔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뇌물로 사절단을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19] 비탈리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서 패하고 지지자들이 처형되자,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517년 7월 11일 협상 파기를 선언했지만, 1년 후 사망했다. 《교황 연대표》는 그가 벼락을 맞고 즉사했다고 기록했다.

2. 3. 2. 호르미스다의 노력

호르미스다는 교황이 되자마자 라우렌시오 분파를 교회로 다시 불러들여 화해함으로써 로마에 남아 있던 이교의 잔재를 없애는 데 힘썼다. 그는 전임 교황 심마코와 달리 분파와의 갈등을 피하고자 노력했다.[17]

호르미스다는 아카키우스 분열로 인해 갈라선 로마 교황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좌 간의 친교를 복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헤노티콘을 반포하고 단성설을 지지했던 제논 황제와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때문에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사이가 틀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장군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자,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호르미스다에게 서신을 보냈다. 호르미스다는 교황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교회 일치를 위한 조건을 제시했다.[19]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건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교황 레오 1세의 교의서한을 공식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동방 교회의 주교들도 이를 따르고, 네스토리우스 등 이단자들을 단죄해야 한다.[20]
아카키우스 분열로 추방된 성직자들은 로마의 심사를 거쳐 복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로마와 친교 관계에 있는 추방된 성직자들은 즉각 복귀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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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 번째 사절단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호르미스다는 발칸반도 주교들과 추가적으로 친교를 맺고, 두 번째 사절단을 보냈지만 역시 실패했다.[22]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유스티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유스티누스 1세는 호르미스다의 조건을 모두 수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도 이를 따랐다. 519년 3월 28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성당에서 로마 교회와의 친교 회복을 알리는 예식이 거행되면서 아카키우스 분열은 막을 내렸다.

2. 3. 3. 분열의 종식

호르미스다는 교황이 되자마자 로마에 남아 있던 라우렌시오 분파를 불러들여 화해하고 교회 안에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로마 내 분열의 마지막 잔재를 없앴다. 라우렌시오 분파는 교황 심마코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컸기 때문에 호르미스다는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17]

교황 연대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수많은 서신을 보면, 아카키우스 분열로 인해 갈라선 로마 교황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좌 간의 친교를 복구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제논 황제가 《헤노티콘》을 반포하고 그의 후계자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점차 단성설에 기울었고,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는 주교들을 박해하면서 로마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의 기병대 지휘관 비탈리아누스가 트라키아, 소스키타이, 미시아 등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훈족과 불가리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였다. 정통 기독교 신앙을 따르던 비탈리아누스의 압력에 굴복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와 대화에 나선 또 다른 이유는 교황이 심마코에서 호르미스다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심마코와 아나스타시우스 1세 사이에는 어떠한 대화나 접촉도 없었다.[18]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514년 12월 28일 호르미스다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 해 7월 1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되는 시노드에 초청하였다. 515년 1월 12일에는 첫 번째 서신보다 덜 격식을 갖춘 두 번째 서신을 보냈다. 호르미스다는 교회가 재일치하리라는 기대감에 환영하면서도, 전임 교황들의 자세를 견지하며 시노드 초대는 환영했지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첫 번째 서신이 도착하자 교황은 신중하게 협상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회의를 거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알리는 서신을 황제에게 보냈다.

파비아의 엔노디우스와 카티나의 포르투나투스 등 두 명의 주교와 사제 베난시오, 부제 비탈리스, 공증인 힐라리오로 구성된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을 방문하였다.[19] 호르미스다는 사절단을 통해 교회 일치에 앞서 몇 가지 선행조건을 제시하였다.

  • 첫째, 황제는 칼케돈 공의회 결의와 교황 레오 1세의 교의서한(Tomus)을 수용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 둘째, 동방 교회의 주교들 역시 황제를 따라 칼케돈 공의회 결의와 교황 레오 1세의 교의서한을 수용하고,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 디오스코루스, 앨루루스,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 2세, 베드로 몬구스, 아카키우스 등과 그들을 추종하던 이들을 모두 공식적으로 단죄한다고 선포해야 한다.[20]
  • 셋째, 아카키우스 분열로 추방당한 성직자들은 로마 사도좌에서 다시 심사하여 무죄가 입증될 경우 복귀시켜야 한다.
  • 넷째, 추방당한 성직자들 중에 로마와 친교 관계에 있으며 가톨릭 신앙을 천명한 이들은 즉각 복귀시켜야 한다.
  • 다섯째, 정통 신앙을 박해하여 고소당한 주교들의 심판은 교황에게 유보되어야 한다.


이전까지 황제가 공의회에서 교부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허락했던 것과 달리, 교황은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락과 더불어 기독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교황 자신에 대한 순명을 요구한 것이다.[21] 그러나 교황 사절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푸대접을 받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로마로 돌아갔다.

516년 7월 16일 동로마 제국 사절단이 로마를 방문하여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7월 28일에는 로마 원로원을 방문하여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교황에게 맞설 것을 충동질하였지만, 테오도릭 대왕과 원로원은 교황에게 계속 순명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호르미스다는 발칸반도 주교들과 추가적으로 로마와 친교를 맺었으며, 니코폴리스의 주교이자 에피루스의 대주교였던 요한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친교를 끊고 로마와의 친교를 회복하였다.[22]

엔노디오 주교와 미세눔의 펠라지오 주교로 구성된 교황의 두 번째 사절단 역시 첫 번째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성과 없이 돌아왔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교황 사절단에게 뇌물을 주며 회유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 비탈리아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서 황제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처형되자,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517년 7월 11일 시노드 개최를 잠정적으로 미루고 로마와의 일치 협상을 파기한다고 발표하였으나, 1년 후 사망하였다. 《교황 연대표》에서는 그가 벼락을 맞고 즉사했다고 기록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뒤를 이어 정통 신앙을 따르는 유스티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는 호르미스다가 제시한 조건들을 모두 수용하였다. 그는 황명으로 아카키우스 뿐만 아니라 선대 황제들인 제논과 아나스타시우스 1세까지 열거하며 그들을 죄인으로 선언하고 교회 딥티크 목록에서 삭제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1세 역시 호르미스다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였다. 519년 3월 28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성당은 시민들 앞에서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했음을 알리는 장엄한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아카키우스 분열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aint Hormisdas http://saints.sqpn.c[...]
[2] 서적 Collier's Encyclopedia Macmillan Educational Company 1984
[3] 백과사전 Pope St. Hormisdas
[4] 서적 The Popes and the Papacy in the Early Middle Ages Routledge and Kegan Paul 1979
[5] 웹사이트 Hormozod http://www.iranicaon[...] 2012-03-23
[6] 논문 The Laurentian Schism: East and West in the Roman Church https://www.jstor.or[...] 1978
[7] 서적 Epistulae
[8] 서적 Popes and the Papacy
[9] 서적 Popes and the Papacy
[10] 서적 The Book of Pontiffs (Liber Pontificalis) University Press 1989
[11] 웹사이트 Hormisdas, bp. of Rome http://www.ccel.org/[...] 1911
[12] 서적 Avitus of Vienne University Press 2002
[13] 서적 Byzantium and the Roman Primacy Fordham University Press 1966
[14] 서적 The Deaths of the Popes Macfarland & Company, Inc. 2004
[15] 웹사이트 HORMOZD http://www.iranicaon[...] 2012-03-23
[16] 논문 The Laurentian Schism: East and West in the Roman Church http://www.jstor.org[...] 1978
[17] 서적 Popes and the Papacy
[18] 서적 Popes and the Papacy
[19] 서적 The Book of Pontiffs (Liber Pontificalis) University Press 1989
[20] 웹사이트 Hormisdas, bp. of Rome http://www.ccel.org/[...] 1911
[21] 웹사이트 Hormisdas, bp. of Rome http://www.ccel.org/[...] 1911
[22] 서적 Avitus of Vienne University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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