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트리아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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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랑 트리아농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내에 위치한 파빌리온으로, 루이 14세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1670년에 건설되었다. 처음에는 도자기 타일로 장식된 "도자기 트리아농"이 지어졌으나, 내구성이 약해 1687년에 철거되고 쥘 아르두앙 망사르에 의해 붉은 대리석을 사용한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이후 루이 14세의 가족과 여러 왕족들이 거주했으며, 나폴레옹 1세, 루이 필리프 1세 등도 사용했다. 1920년에는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현재는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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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트리아농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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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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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샤토 |
건축 양식 | 프랑스 바로크 건축 루이 14세 양식 신고전주의 엠파이어 양식 |
위치 | 베르사유, 프랑스 |
의뢰인 | 루이 14세 |
착공 | 1687년 |
완공 | 1688년 |
개조 | 1963년 |
재료 | 붉은 대리석 |
건축가 | 쥘 아르두앙 망사르 |
이전 이름 | 트리아농 드 마르브르 |
프랑스어 명칭 | Le Grand Trianon |
프랑스어 발음 | /ɡʁɑ̃ tʁijanɔ̃/ |
2. 역사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 본관에 대한 별궁으로 지은 건물로, '''대 트리아농''', '''트리아농 별궁''', '''그랑 트리아농'''으로도 불린다. 루이 14세와 그의 공식 첩의 은신처였으며, 궁정 엄격한 예법에서 벗어나 손님을 초대해 가벼운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리스풍 열주·주랑 등 베르사유 궁전 본관과는 다른 아담한 풍취를 지녔다.
1670년 루이 르 보가 설계한 최초의 건물은 "도자기 트리아농"(''Trianon de porcelaine'')으로 불렸으나,[10] 훼손 문제로 1687년 철거되었다.[10] 1686년 쥘 아르두앙 망사르가 랑그독산 붉은 대리석으로 새 건물을 설계, "대리석 트리아농"으로 불리게 되었고,[1] 1687년부터 1688년까지 건설되어 루이 14세와 맹트농 후작 부인이 사용했다.[1]
프랑스 혁명 동안 방치되었다가,[7] 제1 프랑스 제국 시대 나폴레옹이 엠파이어 스타일 가구로 꾸며 거처로 사용했고, 이후 루이 필리프 1세 부부도 거주했다.[8] 1920년 트리아농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어 헝가리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다.[8] 1963년 샤를 드골이 건물 개축을 명령했다.
2. 1. 도자기 트리아농 (Trianon de porcelaine)
1670년 루이 14세는 건축가 루이 르 보에게 베르사유 궁전 외곽 트리아농에 지을 도자기 파빌리온을 설계하도록 의뢰했다.[10] 이 건물은 루앙, 리시외, 네베르, 생클루의 프랑스 제조사에서 생산된 흰색과 파란색 델프트 스타일의 도자기(세라믹) 타일로 외관을 장식하여 "도자기 트리아농"(''Trianon de porcelaine'')으로 불렸다.[10]
건설은 1670년에 시작되어 1672년에 완공되었다.[10] 이 별궁은 루이 14세와 그의 공식 첩이었던 몽테스팡 부인의 은신처로 사용되었으며, 궁정의 엄격한 예법에서 벗어나 가벼운 식사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10]
그러나 도자기로 만들어진 건물은 훼손되기 쉬웠다. 결국 루이 14세는 1687년에 도자기 트리아농을 철거하고 더 튼튼한 재료로 된 더 큰 건물로 대체할 것을 명령했다.[10]
2. 2. 대리석 트리아농 (Trianon de marbre)
1686년경, 트리아농 드 포르셀린의 깨지기 쉬운 도자기 타일이 훼손되자, 루이 14세는 건물을 더 튼튼한 재료로 대체할 것을 명했다. 이 공사는 건축가 쥘 아르두앙 망사르에게 맡겨졌다. 아르두앙 망사르의 새 건물은 이전 건물의 두 배 크기였으며, 랑그독산 붉은 대리석을 사용하여 "대리석 트리아농"으로 불리게 되었다.[1]1687년 6월에 시작된 이 건물은 1688년 1월에 완공되었다. 루이 14세와 그의 비밀 결혼 상대였던 맹트농 후작 부인이 이 건물을 사용했다.[1]
아르두앙 망사르가 초기에 설계한 건물 계획은 건설 과정에서 크게 변경되었다. 원래 트리아농 드 포르셀린의 핵심을 유지하려던 의도는 정원에 면한 붉은 대리석 기둥의 주랑 현관을 갖춘 야외 공간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1687년 여름, 주랑 현관이 결정되기 전에 최소 세 개의 다른 구조물이 지어졌다가 철거되었다. 원래 디자인의 기울어진 망사르 지붕은 트리아농 드 포르셀린의 지붕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지만, 루이 14세는 이 구조물이 너무 "무거워 보인다"고 느껴 거부했다.[2] 메인 윙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긴 내부 갤러리는 루이 14세가 이전 트리아농 드 포르셀린에서 즐겨 사용하던 야외 산책로 자리에 건설되었다.
내부 디자인 계획은 루이 14세와 그의 건축가들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확립한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루이는 건축가들에게 "모든 것을 하얗게 칠하라. 트리아농의 벽에는 금박이나 색상을 사용하지 마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3] 이것은 베르사유의 내부를 정의하는 다채로운 대리석, 풍부한 색상, 금박과는 다른 것이었다. 궁전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 대신, 트리아농의 벽은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 ''보아즈리''로 덮여 있었고, 플라스터 프리즈, 기둥, 그리고 더 세련되고 섬세한 외관의 자본이 사용되었다.[4]
트리아농은 루이 14세의 대가족의 보금자리였으며, 1703년부터 1711년까지 그의 아들인 루이, 그랑 도팽이 거주했다. 이 영지는 그의 손자 루이 드 프랑스의 아내이자 루이 15세의 부모인 부르고뉴 공작 부인이 가장 좋아하는 휴양지였다. 루이 14세 통치의 말년에는 루이 14세의 처제인 팔라티네이트의 엘리자베스 샤를로테, 오를레앙의 과부 공작 부인이자 궁정에서 ''마담''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녀의 아들 필리프 도를레앙, 미래의 루이 14세의 사위이자 프랑스의 섭정은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루이 14세는 아르두앙 망사르가 1708년에 시작한 트리아농을 위한 더 큰 날개 건설을 명령하기도 했다. 이 날개는 ''트리아농-수-부아''라고 불리며 루이 14세의 합법적인 딸 프랑수아즈-마리 드 부르봉을 포함한 오를레앙 가족을 수용했다.
왕의 막내 손자인 샤를 드 프랑스와 그의 아내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스 도를레앙도 그곳에 거주했다. 베르사유 궁전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던 오를레앙 가족은 나중에 프랑수아즈-마리의 여동생으로 교체되었다. 부르봉 공작 부인, ''마담 라 뒤셰스''는 트리아농에서 살았고 나중에 파리에 부르봉 궁전을 지었는데, 그 디자인은 트리아농을 본뜬 것이다.
1717년,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 1세가 베르사유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 머물렀다. 페테르호프 궁전은 베르사유에서 영감을 받았다.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시대에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을 더 선호했다.
2. 3.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혁명 동안, 그랑 트리아농은 방치되었다.[7] 제1 프랑스 제국 시대에 나폴레옹은 이곳을 자신의 거처 중 하나로 만들었고, 엠파이어 스타일로 가구를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함께 트리아농에서 살았다.[8] 이후 그랑 트리아농에 거주한 왕족은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이탈리아인 부인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였다. 그는 섭정 필리프 도를레앙의 후손이었고,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였다.[8] 1837년 10월, 루이 필리프 1세의 딸 마리 달레앙은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와 그랑 트리아농에서 결혼했다. 루이 필리프는 그랑 트리아농에 위생적인 변화를 주어, 부엌과 사무실을 지하로 옮기고 배관 시설을 추가했다.[8]1920년, 그랑 트리아농에서 트리아농 조약의 협상 및 서명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으로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영토의 3분의 1 미만을 가지게 되었다. 헝가리인들에게 "트리아농"이라는 단어는 오늘날까지도 최악의 국가적 재앙 중 하나를 상징한다.
1963년, 샤를 드골은 건물의 개축을 명령했다.
3. 건축 및 디자인
루이 14세의 요청으로 지어진 이 별궁은 베르사유 궁전 본관에 대한 별궁적인 의미를 가졌다. 프랑수아즈 아테나이스와의 은신처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손님을 초대하여 궁정의 엄격한 예법에서 벗어난 가벼운 식사를 제공했다. 대리석의 그리스풍 열주·주랑을 비롯한 시설이 있으며, 베르사유 궁전 본관과는 또 다른 아담한 풍취를 보여준다.[8]
4. 현대의 사용
1963년 샤를 드골은 건물 개축을 명령했다.[8] 오늘날 그랑 트리아농은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이며, 외국 귀빈을 접대하는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 중 하나이다.
5. 역대 거주자
- 1690-1703년: 루이 14세[10]
- 1703-1711년: 그랑 도팽[10]
- 1708년부터: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폰 팔츠 (트리아농 수 부아 별관)[10]
- 1711-1712년: 부르고뉴 공작 루이와 마리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10]
- 1712-1714년: 베리 공작 샤를과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10]
- 1717년: 표트르 1세[10]
- 1720년경: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10]
- 1740년 및 1743년: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10]
- 1774년: 루이 15세 (사망 전 일주일)[10]
- 1810-1814년: 황후 마리 루이즈[10]
- 1830-1848년: 마리 아멜리 드 부르봉[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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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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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es Univ de Bordea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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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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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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