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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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 로사는 1784년 한양에서 태어나, 남편과 사별 후 천주교를 접하고 신앙을 받아들였다. 뛰어난 언변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가족과 함께 교회를 섬기며 1838년 체포되어 감옥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형조 판서 앞에서 신앙을 옹호하다가 1839년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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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로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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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 로사 |
출생일 | 1784년 |
사망일 | 1839년 7월 2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직업 | 순교자 |
시복 및 시성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기타 정보 |
2. 생애
김 로사는 1784년 한양의 한 비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했지만,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 후 천주교를 믿는 친척집에서 살면서 교회를 처음 접했고, 늦은 나이에도 교리를 배우는 데 열중했다. 똑똑하고 언변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의 가치를 잘 이해시켰으며, 모친과 오빠에게 신앙의 진리를 가르쳐 가족이 함께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김로사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살며 양심을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며 기도했으며, 사제들을 존경하고 도왔다. 1838년 1월 16일 체포되었을 때도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감옥으로 향했고,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옥졸들마저 그녀의 태도에 감동했지만, 조정의 폭압을 피할 수 없었다. 형조 판서 앞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천주를 버릴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 또한 죄라고 말하며 신앙을 지켰다. 결국 1839년 7월 20일 56세의 나이로 사형이 집행되었다.[1]
2. 1. 신앙 생활
김 로사는 1784년 한양의 한 비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결혼했지만 남편과 사별한 후, 천주교를 믿는 친척집에서 살면서 교회를 처음 접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교리를 배우는 데 열중했다. 똑똑하고 언변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신앙의 가치를 잘 이해시킬 수 있었다. 모친과 오빠에게는 신앙의 진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가족은 협력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 수 있었다.[1]김 로사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살며 자주 양심을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며 끊임없이 기도했다. 사제들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갖고 있었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1]
2. 2. 체포와 순교
김 로사는 1784년 한양의 한 비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결혼했지만 남편과 사별한 후, 천주교를 믿는 친척집에서 살면서 교회를 처음 접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교리를 배우는 데 열중했다. 똑똑하고 언변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의 가치를 잘 이해시켰다. 모친과 오빠에게 신앙의 진리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 가족은 협력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았다.김 로사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살며 자주 양심을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며 끊임없이 기도했다. 사제들에 대해 커다란 존경심을 갖고 있었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그녀는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38년 1월 16일 한밤중에 포졸들이 그녀의 집을 포위했지만, 그녀는 어떤 우려도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침내 올 것이 왔다며 행복해했고,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옥졸들마저 그녀의 태도에 감동했다. 그러나 조정의 폭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형조 판서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는 그녀 앞에 온갖 고문 도구를 늘어놓으며 말했다. "죄인 김노사는 들으라. 우리가 이 도구들을 사용하여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네 살가죽을 찢어내기 전에, 너의 천주를 버리고 천주교도들의 이름을 대라." "판서님! 저는 저의 천주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미덕을 사랑하시며 죄를 벌하시는데, 제가 어찌 그분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 또한 죄입니다. 오래전에 저는 그러한 진리를 위하여 저의 피를 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죄인은 내 말을 듣거라. 네 종교의 교리는 어명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 교회에 속하기를 고집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 제 육신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앞서 국왕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전하께서는 어찌 이 단순한 사실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판서는 격노하여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전까지 극심하게 고문했다. 1839년 7월 20일에 그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56세였다.[1]
3. 시복 · 시성
김 로사는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1]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4.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
김 로사는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1]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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