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우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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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우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서울특별시 후생국장, 국회의원, 국방부 차관 및 장관, 주영국 대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으며, 1962년 동양방송 TV(현 KBS 2TV)를 설립했다. 국방부 장관 재직 시 안식교 신자 병사 배치를 지시했고, 주영국 대사 재임 중 제네바 국제해양법회의에서 미국의 영해 관련 제안에 반대하여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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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우 (정치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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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업 | |
주요 직업 | 정치인, 외교관, 교육자, 스카우트 지도자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1912년 4월 29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서대문구역 |
사망일 | 1985년 9월 13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학력 | |
대학교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이학 석사 |
경력 | |
주요 경력 | 조선주택영단 이사장 무소속 국회의원 국방부 차관 국방부 장관 영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대한적십자사 총재 중앙대학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전임교수 한양대학교 전임강사 |
스카우트 활동 |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 |
정치 활동 | |
직책 | 제6대 국방부 장관 |
임기 | 1956년 5월 26일 ~ 1957년 7월 6일 |
대통령 | 이승만 |
전임 | 손원일 |
후임 | 김정렬 |
기타 정보 | |
본관 | 안동 |
2. 생애
김용우는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하였다.[1] 서울특별시 후생국장, 중앙기술교육위원회 사무총장, 중앙관재처 운영처장, 조선주택영단이사장을 거쳐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 1954년 국회 사무총장을 거쳐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제6대 국방부차관,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제6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다.[1]
1957년 주영국 초대 대사로 임명되어 10월 28일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1] 1958년 제네바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 영해 문제에 대하여 미국 안에 반대하여 부결되게 하였다.[3] 이후 귀국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해임되었다.[3]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제11대 총재를 역임하였다.[1]
1962년 동양방송 TV(현 KBS 2TV)를 설립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본과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을 나왔으며, 남가주 대학교 대학원 수물과를 수료하였다.[1]2. 2. 관료 및 정치 활동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본과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을 거쳐 남가주 대학교 대학원 수물과를 수료하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후생국장, 중앙기술교육위원회 사무총장, 중앙관재처 운영처장, 조선주택영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1]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54년 국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제6대 국방부차관을,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제6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다.[1]국방부장관 재직 시절인 1957년 4월 3일, 장관 특명 ‘국방총제2288호’를 통해 각 군 참모총장에게 안식교인 병사들을 위생병 또는 기타 직접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병과에 가급적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2]
1957년 주영국 초대 대사로 임명되어 10월 28일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1] 1958년 2월 24일부터 4월 28일까지 열린 제네바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하여 영해 문제에 대해 미국 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미국은 영해를 6리로 하고, 영해선에서 다시 6리를 연안국의 독점어업구역으로 하되, 독점어업구역에서 과거 5년 이상 어로를 한 실적이 있는 국가의 기득권은 인정하되 연안국가와 이의가 있을 경우에는 5개국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의 재결을 받도록 하는 안을 제시했다. 한국 대표단은 이 안에 대해 독점어업권에 이의를 제기하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3]
당시 미국 대표단 아서 딘은 일본 정부와 친근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고, 김용우 수석대표는 한국의 입장, 특히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어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미국 안에 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 대표단은 한국이 반대할 것을 예측하고 본국에 연락하여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4월 15일 총회에서 김용우는 미국 안에 반대표를 던졌고, 표결 결과 38대 36으로 미국 안은 부결되었다. 표결 당일 아침, 김용우는 정부로부터 미국 안에 찬성하라는 긴급 훈령을 받았으나, 부대 조항에 대한 언급이 없어 망설이다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3]
이후 유럽 지역 주재 공관장 회의 참석을 위해 귀국한 김용우는 사표를 제출했고, 정부는 미국과의 외교 신의를 고려하여 "의원면직"이 아닌 "해임"으로 처리했다.[3]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제11대 총재를 역임하였다.[1]
2. 3. 국방부 차관 및 장관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제6대 국방부 차관을,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제6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1] 1957년 4월 3일 국방부 장관 재직 당시 장관 특명 ‘국방총제2288호’를 통해 각 군 참모총장에게 안식교인 병사들을 위생병 또는 기타 직접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병과에 가급적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2]2. 4. 주영국 대사 및 제네바 국제해양법회의
1958년 2월 24일부터 4월 28일까지 열린 제네바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3] 이 회의에서 중요 의제였던 영해 문제에 대해, 미국은 영해를 6리로 하고 추가로 6해리의 독점어업구역을 설정하되, 과거 5년 이상 해당 구역에서 어업 활동을 한 국가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안을 제시하였다.[3]한국 대표단은 독점어업권에 대한 이견 때문에 이 안에 반대하였다.[3] 미국 대표단 아서 딘은 과거 판문점 회담에서 유엔 측 대표로 참석했고 일본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3] 김용우 수석대표는 한국의 입장에서 미국 안에 찬성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특히 일본과의 어업 문제로 인한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3]
미국 대표단은 한국이 반대할 것을 예측하고 본국에 연락하여,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외무부에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3] 4월 15일 총회에서 김용우는 미국 안에 반대표를 던졌고, 표결 결과 38대 36으로 미국 안은 부결되었다.[3]
표결 당일 아침, 김용우는 한국 정부로부터 미국 안에 찬성하라는 긴급훈령을 받았으나, 훈령에는 중요 부대조항에 대한 언급이 없어 망설이다 반대표를 던졌다.[3] 귀국 후 김용우는 사표를 제출했고, 정부는 미국과의 외교적 신의를 고려하여 그를 해임하였다.[3]
2. 5. 대한적십자사 총재 및 기업 활동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제11대 총재를 역임하였다.[1] 1962년 동양방송 TV(현 KBS 2TV)를 설립하였다.국방부장관 재직 시절인 1957년 4월 3일 장관 특명 ‘국방총제2288호’를 통해 각 군 참모총장에게 안식교인 병사들을 위생병 또는 기타 직접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병과에 가급적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2]
3.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 | 15,649표 | 50.19% | 1위 | 당선 | 초선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 | 6,677표 | 26.88% | 3위 | 낙선 |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공화당 | 22,950표 | 31.87% | 2위 | 낙선 |
3. 1.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김용우는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15,649표를 얻어 50.1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당선 여부 |
---|---|---|---|
무소속 | 15,649표 | 50.19% | 당선 |
3. 2.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954년)
김용우는 1954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서울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서 6,677표를 얻어 26.8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3위로 낙선하였다.선거명 | 순번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3대 | 무소속 | 6,677표 | 26.88% | 3위 | 낙선 |
3. 3.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김용우는 1967년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22,950표(31.87%)를 얻어 2위로 낙선하였다.참조
[1]
뉴스
二十八日 着任 金用雨駐英大使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7-10-30
[2]
간행물
인민군도 무작정 처벌 안 했다
한겨레21
2003-01-02
[3]
뉴스
訓令을 어긴 否票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5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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