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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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인득(金仁得, 1915년 8월 17일 ~ 1997년 7월 10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벽산그룹의 창립자이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호는 벽산(碧山)이다.
생애1915년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농업에 종사하면서 포목상 일도 겸했다. 칠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금융조합에 입사하였다. 이후 1951년 부산에서 동양물산을 설립하였다. 1962년에는 벽산건설의 전신인 한국스레트공업을 인수하여 벽산그룹을 일구었다. 그는 서울의 영화관 단성사, 반도극장, 중앙극장도 인수했었다.
1972년과 1978년에는 제1, 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서울 중구 2선거구, 무소속)을 지냈고, 1981년에는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서울 중구 3선거구, 민주정의당)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91년에는 벽산그룹 경영권을 장남 김희철에게 승계하였다. 1997년 7월 10일 숙환으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업적김인득은 벽산그룹을 창업하여 건축자재, 건설, 유통, 금융, 정보 산업, 에너지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쳤다. 그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주한 미군 철수 계획 철회에 힘썼으며,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1960~1970년대 농어촌 근대화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벽산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육영 사업을 지원하였다.
기타김인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생전 인사동 승동교회 원로 장로였다. 그는 기업 경영 외에도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의 경영 철학은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이 될 수 없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는 한국경영자총협회, 무역협회 부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경제계에 기여한 공로로 철탑, 은탑,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으며,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으로 재임하던 1970년대 중반에는 '대한군원삭감안'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 한·미 간의 외교 현안 해결에 앞장선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가족 관계
- 아버지: 김상수
- 어머니: 박차련
- 배우자: 윤현의 (1982년 사별), 박윤자 (1986년 재혼)
- 장남: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
- 차남: 김희용 (동양물산 회장)
- 3남: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최근 논란김인득의 손자인 김모씨(김희용 회장의 장남)가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김모씨는 벽산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농기계 회사의 최대 주주이자 임원이다. 또한, 또 다른 손자인 김태식(김희용 회장의 차남)은 음란물 유포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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