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디시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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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까디시야 전투는 636년에 일어난 이슬람 세력과 사산 제국 간의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비잔틴-사산 전쟁과 사산 제국의 내분으로 약화된 사산 제국이 이슬람 세력의 발흥으로 이라크를 침공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랍 무슬림은 사산 제국의 군대와 3개월간의 협상 끝에 전투를 시작했고, 4일간의 격전 끝에 사산 제국은 패배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이슬람 제국은 데라프쉬 카비아니를 포함한 많은 전리품을 얻었고, 사산 제국의 이라크 통치를 종식시켰으며, 이후 크테시폰 포위전과 나하반드 전투로 이어져 사산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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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년에 벌어진 야르무크 전투는 라시둔 군대와 비잔틴 제국 간의 중요한 전투로, 무슬림 세력의 레반트 지역 지배를 확립하고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까디시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정보 | |
| 전투 | 알-카디시야 전투 |
| 부분 | 무슬림의 페르시아 정복 |
![]() | |
| 날짜 | 636년 11월 16일~19일 |
| 장소 | 알-카디시야, 사산조 메소포타미아 |
| 결과 | 라시둔 칼리파국의 승리 |
| 영토 변경 | 아랍의 지배가 현재의 이라크까지 확장됨 |
| 교전 세력 | |
| 교전 1 | 라시둔 칼리파국 |
| 교전 2 | 사산 제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라시둔 칼리파국 |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칼리드 이븐 우르푸타 알-무탄나 이븐 하리타 알-카카 이븐 암르 알-타미미 아심 이븐 암르 알-타미미 압둘라 이븐 알-무탐 슈라빌 이븐 심트 주흐라 이븐 알-하위야 자리르 이븐 압드 알라 알-바잘리 툴라이하 암루 빈 마디 야크리브 |
| 사산 제국 | 로스탐 파로흐자드 바흐만 자두이흐 호르무잔 잘리누스 샤흐리야르 빈 카나라 미흐란 라지 피루즈 코스로우 카나드바크 그리고르 2세 노비라크 티루이흐 무셰흐 3세 마미코니안 자반시르 나키라간 |
| 병력 규모 | |
| 라시둔 칼리파국 | 30,000명 |
| 사산 제국 | 미상 |
| 사상자 및 피해 | |
| 라시둔 칼리파국 | 막대함 |
| 사산 제국 | 막대함 |
2. 역사적 배경
까디시야 전투가 벌어지기 전, 중동 지역의 양대 강자였던 비잔틴 제국과 사산 제국은 수십 년에 걸친 대규모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퇴한 상태였다. 특히 전쟁에서 패배한 사산 제국은 심각한 내부 혼란에 빠져들었다.
628년,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2세가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살해당한 이후, 사산 제국은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에 휩싸였다. 카바드 2세 자신도 즉위 몇 달 만에 페스트로 사망했고, 이후 불과 4년 동안 여러 명의 왕과 왕위 참칭자들이 나타나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632년, 호스로 2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로스탐 파로흐자드와 같은 군부 실력자들에게 있었다. 오랜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은 사산 제국의 국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가 리다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를 통일하고 외부로의 팽창을 시작했다. 633년, 아부 바크르는 유능한 장군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를 보내 이라크 지역을 침공하게 했다. 할리드는 연이은 전투에서 사산 제국 군대를 격파하며 이라크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
그러나 634년,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이 격화되자 할리드는 군대의 일부를 이끌고 시리아 전선으로 이동했고, 같은 해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제2대 칼리파로 즉위했다. 이라크에 남은 이슬람 군대는 병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사산 제국은 잠시 숨을 돌리며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이후 몇 차례 공방전이 오갔으나, 어느 쪽도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635년, 사산 제국의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며,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동맹을 추진했다. 두 제국은 공동의 적인 이슬람 세력에 맞서 협력하려 했으나, 칼리파 우마르는 이를 미리 간파하고 대비했다. 636년 8월, 비잔틴 군대는 야르무크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이로써 사산-비잔틴 연합 전선 구축 시도는 무산되었다. 비잔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단독으로라도 이슬람 세력에 맞서기로 결정하고, 수도 크테시폰 인근에 대규모 군대를 집결시켜 로스탐 파로흐자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에 맞서 칼리파 우마르 역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규모 병력을 이라크로 파견하여 까디시야에서 사산 제국군과 대치하게 되면서, 양측의 운명을 건 까디시야 전투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2. 1. 동로마-사산 전쟁과 사산 제국의 약화
동로마 제국 황제 모리스가 포카스에게 암살당하자, 모리스의 복수를 명분으로 사산 제국의 샤한샤 호스로 2세는 동로마 제국에 선전포고하며 긴 전쟁을 시작했다. 사산 제국 군대는 전쟁 초반 우세를 점하며 시리아, 이집트, 아나톨리아 등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광범위하게 점령했고, 예루살렘에서 진정한 십자가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6]。610년 포카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헤라클리우스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오랜 전쟁을 수행했으며, 마침내 627년 니네베 전투에서 사산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크테시폰 근처까지 진격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호스로 2세는 아들 카바드 2세가 일으킨 반란으로 폐위되고 처형되었다. 카바드 2세는 즉위 후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고 점령했던 모든 영토와 진정한 십자가를 반환했다. 같은 시기, 사산 제국 북부를 침공했던 돌궐 군대 역시 카바드 2세와 조약을 맺고 헤라클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철수했다[6]。
수십 년간 이어진 이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모두에게 막대한 인명 손실과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특히 사산 제국은 전쟁 패배와 내부 혼란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슬람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했다. 하리드의 초기 원정 이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약화된 사산 왕조와 이슬람 군대 간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635년, 새로 즉위한 사산 제국의 야즈데게르드 3세는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고, 헤라클리우스 역시 레반트 지역을 되찾기 위해 공세를 준비하며 양 제국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칼리파 우마르는 이러한 움직임을 미리 간파하고 대비했다. 헤라클리우스가 636년 5월 공세를 시작했을 때,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직 군대를 완전히 규합하지 못해 호응하지 못했다. 우마르는 야르무크강 방면의 군대를 증강하는 한편,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에게 야즈데게르드 3세와의 평화 협상에 들어가도록 했다[9]。 동로마 군대는 증원되는 이슬람 군대에 맞서 서둘러 공격을 개시했으나, 636년 8월 야르무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동맹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참패로 야즈데게르드 3세의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수도 크테시폰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로스탐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는 곧이어 벌어질 까디시야 전투의 배경이 되었다.
2. 2. 사산 제국의 내분
628년 호스로 2세가 자신의 아들 카바드 2세에게 궁궐에서 살해당하면서 사산 제국의 내분은 시작되었다. 카바드 2세는 자신의 형제 18명을 살해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으나, 즉위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페스트로 급사하면서 사산 제국은 극심한 혼란과 내전에 휩싸였다.[7]카바드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일곱 살 난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어린 왕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8개월 후, 아르다시르 3세는 그의 장군이었던 샤흐르바라즈에게 살해당했고, 샤흐르바라즈는 스스로 왕위를 차지했다. 샤흐르바라즈는 이전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중 613년과 614년에 각각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 역시 짧았다. 629년 6월 9일, 샤흐르바라즈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하자르와 돌궐 연합군과의 전투 중에 사망했다.[7]
샤흐르바라즈 사후에는 호스로 2세의 딸인 보란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는 사산 왕조 역사상 왕위에 오른 두 명의 여성 군주 중 한 명으로(다른 한 명은 그녀의 여동생 아자르미도크트), 629년 6월 17일부터 630년 6월 16일까지 통치했다. 보란은 정의를 실현하고, 파괴된 기반 시설을 재건하며, 세금을 낮추고, 새로운 동전을 주조하는 등 제국에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고, 로스탐 파로흐자드를 페르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국방을 강화하고자 했다.[7]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인해 중앙 권력은 이미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고, 보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보란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퇴위하거나 살해당했다. 보란의 뒤를 이어 여동생 아자르미도크트가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곧 페르시아 귀족인 호르미즈드 6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7]
약 5년에 걸친 극심한 내부 권력 투쟁 끝에, 632년 호스로 2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7] 야즈데게르드 3세의 즉위는 혼란에 빠진 사산 제국에 잠시나마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군 총사령관 로스탐 파로흐자드와 또 다른 장군 피루즈 호스로(피루잔이라고도 함)와 같은 실력자들의 손에 있었으며, 중신들 사이의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7] 이러한 내부 분열과 혼란은 결국 외부 세력의 침입에 취약한 상태를 만들었다.
2. 3. 이슬람 세력의 발흥과 이라크 침공
무함마드 사후, 아부 바크르는 리다 전쟁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 이는 수십 년 안에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의 시작이었으며[8],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비잔틴 제국 및 사산 제국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아부 바크르는 자원병으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를 최고 장군인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에게 맡겼다.할리드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633년 4월 사슬 전투, 같은 달 강 전투, 5월 왈라자 전투와 울라이스 전투에서 연이어 사산 왕조군을 격파했다. 633년 5월 마지막 주에는 히라 전투 이후 알-히라를 함락시켰고[8], 이후 알-안바르 공방전(633년 6월~7월)과 아인 알-탐르 전투(633년 7월)를 통해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 633년 11월 페르시아의 반격을 격퇴하고, 12월에는 국경 도시 피라즈에서 벌어진 피라즈 전투에서 사산 제국, 비잔틴 제국, 기독교 아랍인 연합군을 물리쳤다. 이로써 할리드는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제외한 이라크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군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직접적인 위협으로 부상하자, 할리드는 군대의 절반을 이끌고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34년 8월,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제2대 정통 칼리파로 즉위했다. 이라크에 남은 무슬림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점령지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할리드의 침공 이후 혼란에 빠졌던 사산 제국은 점차 안정을 되찾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당시 이라크 무슬림군 사령관이었던 알-무타나 이븐 하리타는 모든 전초기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알-히라마저 포기한 채 아라비아 사막 근처까지 후퇴했다.[8]
우마르는 메디나에서 아부 우바이드가 지휘하는 증원군을 파견했다. 증원군은 634년 10월 이라크에 도착했고, 아부 우바이드는 지휘권을 인수하여 현대의 쿠파 근처에서 벌어진 나마라크 전투와 이후 카스카르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히라를 재점령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다시 반격에 나서 다리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아부 우바이드가 전사하고 무슬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알-무타나가 다시 지휘를 맡아 약 3,0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 후퇴했다. 페르시아 지휘관 바흐만은 무슬림군을 추격하려 했으나, 사산 제국 내부의 정치적 문제(루스툼의 반란 진압 지원 요청)로 인해 크테시폰으로 소환되면서 추격을 중단했다. 알-무타나는 아라비아 국경 근처로 물러나 증원군을 요청하며 재정비에 들어갔고, 이후 유프라테스 강 서쪽 기슭에 진영을 치고 페르시아군과의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3. 전투의 전개
까디시야는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인 아티크 강 서쪽 강둑에 위치했던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라흐미 왕조의 옛 수도였던 알-히라에서 서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져 있었다. 현재 지리적으로는 이라크의 알-힐라와 쿠파 남서쪽에 해당한다.
영국 던햄 대학교와 이라크 알-카디시야 대학교의 고고학자들은 미국의 기밀 해제된 첩보 위성 사진과 '다르브 주바이다'(Darb Zubayda|다르브 주바이다ara, DZ)라고 불리는 하지 순례길을 설명하는 역사 문헌을 활용하여 전투가 벌어졌던 정확한 장소를 특정했다.[3]
3. 1. 무슬림 군의 준비
칼리프 우마르는 이라크 재침공을 위해 아라비아 전역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우마르는 쿠라이시 부족의 중요한 인물인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이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636년 5월, 사드는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디나 인근 시스라의 진영에서 북아라비아로 진군했으며, 그곳에서 무슬림 군대의 지휘권을 인수하고 즉시 이라크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드는 군 지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경험 많은 지휘관들의 조언을 구하라는 우마르의 지시를 받았다. 우마르는 사드에게 쿠파에서 약 약 48.28km 떨어진 작은 마을인 알-까디시야에서 멈추라는 명령을 보냈고, 무슬림 군대는 이곳에 주둔했다.우마르는 캠페인 전반에 걸쳐 원격으로 군대에 전략적 명령과 지시를 계속 내렸다. 당시 무슬림 군대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마르는 이전에 리다 전쟁에서 움마를 이탈했던 부족들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모집된 군대는 전문적인 군대가 아니라 아라비아 전역에서 새로 모집된 병력으로 구성된 자원군이었다.
한편,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 이후,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야르무크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병력 일부를 즉시 이라크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야르무크에서 온 5,000명의 베테랑 부대는 전투 이틀째에 까디시야에 도착했으며, 이는 무슬림 군대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자 사기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우마르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까디시야 전투는 현장 지휘관인 사드와 로스탐 파로흐자드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우마르와 로스탐의 대결 양상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사산 왕조 군대의 대부분 역시 왈라자 전투와 울라이스 전투에서 정규군 대부분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새로 징집된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대적인 추산에 따르면 사산 제국 군대의 병력 규모는 약 30,000명이었고, 이슬람 군대는 전투 둘째 날 시리아에서 온 지원군이 합류한 후 약 30,000명에 달했다. 이러한 수치는 교전 당사자들의 병참 능력, 작전 기지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양측의 전반적인 인력 제약을 고려하여 추정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산 제국 군대와 그 동맹군이 이슬람 군대보다 수적으로 상당한 우위를 점했다고 본다.
636년 7월, 주요 무슬림 군대는 샤라프에서 까디시야로 진군했다. 사드는 야영지를 세우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강 어귀를 확보한 후, 수와드 내부로 정찰 및 습격 부대를 보냈다. 그는 칼리프 우마르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했으며, 우마르에게 무슬림 군대가 야영한 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까디시야, 메디나, 그리고 페르시아 군대가 집결하고 있는 지역 사이의 지형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 시점의 무슬림 군대는 기병 7,000명을 포함하여 약 30,000명이었다. 시리아에서 온 병력과 현지 아랍 동맹군의 지원을 받아 병력은 36,000명까지 늘어났다. 사령관 사드는 좌골 신경통을 앓고 있었고 몸 전체에 종기가 나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는 까디시야의 옛 왕궁에 자리를 잡고 전장을 조망하며 전쟁 작전을 지휘했으며, 자신의 대리인으로 할리드 이븐 우르푸타를 임명하여 일련의 전령을 통해 자신의 지시를 전장에 전달했다.
라시둔 보병은 4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었으며, 각 군단은 반격을 위해 후방에 자체 기병 연대를 두었다. 각 군단은 서로 약 150m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군대는 부족과 씨족을 기반으로 편성되어 모든 병사가 자신이 잘 아는 동료 옆에서 싸우도록 했고, 각 부족은 자신들의 구역에서 발생하는 약점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했다.
무슬림 군대는 사산조 군인들의 은색 헬멧과 유사한 금색 헬멧을 착용했다. 사슬 갑옷은 헬멧에 부착된 아벤테일이나 메일 코이프 형태로 얼굴, 목, 뺨을 보호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무거운 가죽 샌들이나 로마식 샌들 부츠 또한 초기 무슬림 병사들의 전형적인 복장이었다. 갑옷으로는 경화된 가죽 비늘 갑옷, 판갑 또는 메일 갑옷이 사용되었다. 보병은 기병보다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호버크와 크고 나무 또는 섬유 세공으로 만든 방패가 사용되었으며, 긴 자루의 창도 사용되었다. 보병 창은 약 2.5m 길이였고, 기병 창은 최대 5.5m 길이에 달했다.
사용된 검은 로마의 글라디우스나 사산조의 장검과 유사했으며, 두 종류 모두 어깨에 두르는 벌드리크에 매달아 착용했다. 활은 시위를 걸지 않았을 때 약 2m 길이로, 유명한 잉글랜드 롱보우와 비슷한 크기였으며 최대 사거리는 약 150m였다. 무슬림 궁수들은 상대 기병대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배치된 라시둔 군대는 비잔틴 전선에 배치된 병력에 비해 갑옷을 가볍게 착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3. 2. 사산 제국 군의 준비
칼리드가 시리아 방면으로 이동한 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비옥한 사와드 지역은 사산 제국과 이슬람 세력 간의 공방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은 사산 제국의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가 635년경 권력 기반을 다지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동맹을 추진하며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헤라클리우스의 손녀 마니안과 결혼하며 동맹 강화를 시도했고, 두 황제는 공동의 적인 칼리프 우마르를 겨냥하여 레반트와 이라크에서 동시에 공세를 펼치기로 계획했다.그러나 이 계획은 헤라클리우스의 군대가 636년 8월 야르무크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에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차질을 빚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서부 공세가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단독으로 이라크 탈환을 위한 군사 작전을 계속 추진했다. 그는 수도 크테시폰 인근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고, 경험 많은 장군 로스탐에게 군대의 총지휘를 맡겼다. 사산 제국 군대는 크테시폰 근처 발라샤바드에 주둔하며 반격 준비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우마르는 이라크 주둔 이슬람 군 지휘관 무탄나에게 아라비아 사막 가장자리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사산 제국 군대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추정이 존재한다. 현대 연구에서는 약 30,000명 정도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 기록이나 다수 학자들은 사산 제국 군대가 이슬람 군대보다 수적으로 상당한 우위를 점했다고 본다. 일부 기록에서는 병력을 60,000명 또는 50,000명에서 100,000명 사이로 언급하기도 한다.
사산 제국 군대는 636년 7월 카디시야에 도착하여 아티크 강 동쪽 제방에 요새화된 진영을 구축했다. 주력 부대는 보병, 중기병, 그리고 코끼리 부대로 구성되었다. 코끼리 부대는 사산 제국 내 인도 속주에서 훈련된 코끼리들로 이루어져 '인도 부대'라고도 불렸다.
636년 11월 16일, 사산 제국 군대는 아티크 강 서쪽 제방으로 건너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총사령관 로스탐은 약 45,000명의 보병을 4개 사단으로 나누어 각각 150미터 간격으로 배치했고, 15,000명의 기병 역시 4개 사단으로 나누어 예비대로 활용할 준비를 했다. 약 33마리의 코끼리는 각 보병 사단에 8마리씩 배치되었다. 전선의 총 길이는 약 4km에 달했다.
사산 제국 군의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았다.
- 총사령관: 로스탐
- 우익: 호르무잔
- 우익 중앙: 잘리누스
- 후위: 피루잔
- 좌익: 미란
로스탐은 강 서쪽 제방 근처, 우익 중앙 부대 뒤편에 천막으로 가려진 높은 지휘소를 설치하여 전장을 효과적으로 조망했다. 그의 옆에는 사산 제국의 상징인 데라프쉬 카비아니 깃발이 세워졌다. 또한 로스탐은 전장에서 수도 크테시폰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전령을 배치하여 전황을 신속하게 보고할 수 있는 통신 체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당시 사산 제국 군대는 이라크에서의 계속된 전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손실된 병력의 상당수는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로 충원된 상황이었다.
3. 3. 전투의 경과
636년 7월, 라시둔의 주요 군대는 샤라프에서 까디시야로 진군하여 야영지를 세우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군대를 이끈 사드는 수와드 지역으로 습격 부대를 보내는 한편, 칼리프 우마르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전장의 지리적 특징과 페르시아 군대의 집결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당시 무슬림 군대는 기병 7,000명을 포함하여 약 30,000명이었으나, 시리아에서 온 증원군과 현지 아랍 동맹군의 합류로 36,000명까지 늘어났다. 사드는 좌골 신경통과 종기를 앓아 옛 왕궁에서 할리드 이븐 우르푸타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전투를 지휘했다. 라시둔 보병은 4개 군단으로 나뉘어 배치되었고, 각 군단은 후방에 기병 연대를 두어 반격을 대비했다. 군대는 부족 및 씨족 단위로 편성되어 모든 사람이 잘 아는 동료 옆에서 싸우고, 부족이 약점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했다.무슬림 군대는 사산조 군인들과 유사한 금색 헬멧과 사슬 갑옷으로 얼굴과 목을 보호했다. 판갑이나 메일 갑옷 등 다양한 갑옷을 착용했으며, 보병은 기병보다 더 두꺼운 갑옷을 입었다. 무기로는 글라디우스나 사산조 장검과 유사한 검, 약 2.5m 길이의 보병 창, 최대 5.5m 길이의 기병 창, 그리고 잉글랜드 롱보우와 비슷한 크기의 활(최대 사거리 약 150m)을 사용했다. 특히 무슬림 궁수들은 페르시아 기병에게 효과적이었다.
우마르의 지시에 따라 사드는 사산 제국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와 그의 장군 로스탐 파로크자드에게 사절단을 보내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지즈야(인두세)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안누만 이븐 무카린이 이끈 사절단은 크테시폰에서 야즈데게르드 3세를 만났으나 협상은 실패했다. 일례로,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랍 사절단의 일원인 아심 이븐 암르 알-타미미의 머리 위에 흙이 담긴 바구니를 올려놓아 모욕하려 했으나, 아랍 사절단은 이를 페르시아가 자발적으로 영토를 넘겨주는 징표로 해석했다. 로스탐 역시 이 해석에 동의하며 황제를 질책했다.
시리아 전선에서 야르무크 전투의 승리로 상황이 안정되자 우마르는 협상 중단을 명령했고, 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로스탐은 까디시야로 진군했지만, 여전히 전투를 피하려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아랍 사절단에게 물자와 안전 보장을 제안하며 회유하려 했으나, 사절단은 이슬람 개종, 지즈야 지불, 또는 전쟁이라는 세 가지 선택지만을 제시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양측은 전투를 준비했다.
전투 첫째 날 (11월 16일, '혼란의 날')636년 11월 16일 새벽, 로스탐의 명령으로 페르시아군은 운하를 건너 전열을 갖췄다. 양 군은 약 500m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라시둔군은 북동쪽, 사산군은 강을 등지고 남서쪽을 향했다. 전투 시작 직전, 사드는 병사들에게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러분의 유산"이라며 사기를 높였다. 전투는 양측 무바리준(결투사)들의 개인 결투로 시작되었다[6]。 여러 결투에서 손실을 본 로스탐은 좌익 군대에 무슬림 우익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르시아군의 공격은 강력한 화살 세례로 시작되었고, 코끼리 부대가 돌격을 이끌었다. 무슬림 우익 기병은 사산 중기병에게 저지당했고, 보병은 코끼리의 위세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사드는 알-아샤스 이븐 카이스가 이끄는 중우익 기병대에게 사산 좌익 측면을 공격하게 하고, 주라 이븐 알-하위야가 이끄는 우익 중앙 보병대를 보내 후퇴하는 우익 보병을 지원했다. 정면과 측면에서 협공을 받은 사산 좌익은 결국 후퇴했다[6]。
초반 공격이 실패하자 로스탐은 우익과 우익 중앙 군대에 무슬림 좌익과 좌익 중앙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다시 한번 화살 공격에 이어 코끼리 부대가 돌격해오자, 무슬림 좌익 기병대는 혼란에 빠져 후퇴했다.
사드는 좌익 중앙 사령관 아심 이븐 암르에게 코끼리 부대를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아심은 궁수들에게 코끼리 위의 병사들을 저격하게 하고, 보병에게는 코끼리 안장의 끈을 끊게 하는 전술을 사용했다[6]。 이 전술이 성공하여 코끼리들이 물러나자 무슬림은 반격에 나섰고, 사산 우익과 우익 중앙 군대도 후퇴했다.
오후가 되자 사드는 전면적인 반격을 명령했다. 무슬림 기병대는 측면에서 치고 빠지는 Karr wa farr|카르 와 파르ara 전술을 구사하며 돌격했다. 로스탐은 직접 전투에 나서 여러 부상을 입으면서도 이 공격을 막아냈다. 해 질 녘에 전투는 끝났지만,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을 뿐 승패는 결정되지 않았다. 무슬림 연대기에서는 이날을 '야움 알-아르마스'(Yawm al-Armath|야움 알-아르마스ara, 혼란의 날)라고 기록했다.
전투 둘째 날 (11월 17일)11월 17일, 전투는 다시 개인 결투로 시작되었다. 정오 무렵, 시리아에서 알-카카 이븐 암르 알-타미미가 이끄는 선봉대와 하시姆 이븐 우트바가 이끄는 본대가 증원군으로 도착했다.[12] 카카는 증원군을 여러 소그룹으로 나누어 차례로 전장에 투입함으로써 마치 대규모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는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이날 카카는 다리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지휘했던 장군 바흐만 자두야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날 사산 군대에 코끼리가 없었기 때문에, 사드는 이 기회를 살려 총공격을 명령했다. 4개 군단이 모두 돌격했지만 사산 군대는 굳건히 버텨냈다. 카카는 낙타를 기괴하게 위장시켜 사산 군마들을 놀라게 하여 기병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취약해진 사산 좌익 중앙 보병을 향해 무슬림 군대는 공격을 강화했다. 이제 무슬림 군대의 야전 사령관 역할을 맡은 카카 이븐 암르는 로스탐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야르무크 전투의 참전 용사이기도 한 그의 시리아 부대에서 무바리즈 그룹을 이끌고 사산조 우익 중앙을 통과하여 로스탐의 사령부로 향했다. 로스탐은 다시 한번 직접 무슬림에 대한 반격을 이끌었지만, 돌파구는 마련되지 못했다. 이날도 해 질 녘까지 결판이 나지 않고 양군은 진영으로 물러났다.
전투 셋째 날 (11월 18일, '소음의 밤')11월 18일, 로스탐은 더 많은 무슬림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승부를 결정짓고자 했다. 코끼리 부대를 다시 전면에 내세우고 전 병력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12]。 페르시아군의 공격은 화살과 투사체 세례로 시작되었고, 무슬림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 보병과 기병의 지원을 받은 코끼리 부대가 돌격의 선두에 서자, 무슬림 기병대는 다시 동요했고 전열이 흐트러졌다[12]。
로스탐은 이 틈을 타 기병 연대를 보내 사드가 지휘하는 본진을 급습하려 했으나, 무슬림 기병대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사드는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하는 것이 승리의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고, 코끼리의 눈을 멀게 하고 코를 자르라고 명령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무슬림은 코끼리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겁에 질린 코끼리들은 페르시아 진영을 가로질러 강으로 도망쳤다[12]。
코끼리가 사라지자 사드는 다시 총공격을 명령했고, 양군은 격렬하게 충돌했다[6]。 무슬림은 코끼리 대신 위장한 낙타를 다시 투입했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고 페르시아 말들은 자리를 지켰다. 3일째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가장 치열했으며, 전장은 시체로 뒤덮였다. 극심한 피로 속에서도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져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양측 모두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무슬림 연대기에서는 이날 밤을 '라일라트 울-하리르'(Lailat ul-Harir|라일라트 울-하리르ara, 소음의 밤)라고 기록했다[12]。
전투 넷째 날 (11월 19일)
11월 19일 동이 트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제 실질적인 야전 사령관 역할을 맡은 카카는 부하들에게 "한 시간 정도만 더 싸우면 적은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니 바니 타밈의 전사들이여, 한 번 더 공격하면 승리는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연설하며 독려했다고 전해진다. 카카가 이끄는 무슬림의 좌익 중앙은 돌격하여 사산 왕조의 우익 중앙을 공격했고, 이어 무슬림 군단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사산 왕조 군대는 전투 재개에 당황했다. 사산 왕조의 좌익과 좌익 중앙이 밀려났다. 카카는 다시 무바리즈단의 일원들을 이끌고 사산 왕조의 좌익 중앙을 공격했고, 정오 무렵 그는 부하들과 함께 사산 왕조의 중앙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시아 군대를 붕괴시키지는 못했다.
이날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은 페르시아 총사령관 로스탐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 까까와 그의 병사들이 사산 왕조 본부로 돌진했다. 한편, 모래 폭풍 속에서 로스탐은 몸에 5개 이상의 상처를 입은 채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계속 싸웠다. 사산 왕조 우익은 반격을 가해 잃었던 위치를 되찾았고, 무슬림의 좌익은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 이제 까까의 지휘를 받는 무슬림 좌익 중앙은 좌익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 사드는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죽음에 사기가 떨어진 페르시아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사산 왕조 전면에 대한 전면 공격을 명령했다. 오후에 무슬림들은 또 다른 공격을 감행했다.
# 전투 마지막 날, 페르시아 군대를 향해 심한 모래 폭풍이 몰아쳤다. 로스탐은 폭풍을 피하기 위해 낙타 옆에 누워 있었고, 도끼, 몽둥이, 칼과 같은 무기들이 낙타에 실려 있었다. 힐랄 이븐 울라파는 실수로 낙타에 실린 짐의 허리띠를 잘랐는데, 그 밑에 로스탐이 있는 줄은 몰랐다. 무기들이 로스탐에게 떨어져 그의 등을 부러뜨려 반쯤 죽고 마비되게 했다. 힐랄은 로스탐의 목을 베고 "카바의 신에게 맹세하건대, 내가 로스탐을 죽였다."라고 외쳤다. 전설적인 지도자의 머리가 눈앞에 매달린 것에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인들은 사기가 꺾였고, 지휘관들은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혼란 속에서 많은 페르시아 군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강을 통해 도망쳤으며, 마침내 나머지 군대는 항복했다. 이 이야기는 의심스러운 문학적 장치와 이야기의 전반적인 불일치 등 몇 가지 문제로 인해 가능성이 낮다고 일축되었다.
# 야쿠비의 한 기록에 따르면 디라르 빈 알-아즈와르, 툴라이하, 암루 빈 마아디 야크리브, 쿠르트 빈 자마 알-압디가 로스탐의 시신을 발견했다.
# 또 다른 버전에서는 로스탐이 사드와의 일대일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당시 그는 모래 폭풍으로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타바리와 마찬가지로 후대 이야기꾼들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로스탐의 죽음은 페르시아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꺾었다. 지휘관들은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전선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면 공격을 명령했다. 오후가 되자 사산 군대는 마지막 저항선을 포기하고 붕괴했다. 일부는 잘리누스의 지휘 아래 질서 있게 후퇴했지만, 대부분은 공황 상태에 빠져 강을 향해 도주했다. 사드는 기병대를 보내 도망치는 페르시아군을 추격했고, 이 과정에서 사산 군대는 막대한 추가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까디시야 전투는 무슬림의 결정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전투의 결과와 영향
까디시야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 군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아랍군은 '데라프시 카비아니(카베의 깃발)'로 알려진, 보석으로 장식된 사산 왕조의 왕실 깃발을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 깃발에 박힌 보석들은 해체되어 메디나에서 팔렸다.[13] 전투에 참여한 아랍 전사들은 Ahl al-Qādisiyyah(까디시야의 사람들) 또는 Ahl al-Qawadis로 불리며 높은 명성을 얻었고, 이후 이라크와 쿠파 등 주요 도시에 정착한 아랍인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전투 후 사령관 사드는 칼리프 우마르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이 전투는 이라크 지역에 대한 사산 왕조의 지배력을 크게 약화시켰지만, 수도 크테시폰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완전한 종결은 아니었다. 사산 왕조가 재정비하여 반격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우마르는 사드에게 크테시폰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결국 637년 3월, 크테시폰 포위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었다. 까디시야 전투의 패배와 수도 함락은 사산 왕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나하반드 전투 등에서 추가적인 패배를 겪으며 결국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의 죽음과 함께 멸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1. 사산 제국의 멸망
까디시야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특히 '데라프시 카비아니(카베의 깃발)'라 불리는,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사산 제국의 왕실 깃발도 손에 넣었다. 이 깃발의 보석들은 해체되어 메디나에서 조각으로 팔렸다. 전투에 참여한 아랍 전사들은 'Ahl al-Qādisiyyah'(까디시야의 사람들) 또는 'Ahl al-Qawadis'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 이라크와 쿠파에 정착한 아랍인들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다.전투가 끝난 후, 총사령관 사드는 칼리프 우마르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이 전투는 이라크 지역에서 사산 왕조의 지배력을 크게 약화시켰지만,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었다. 사산 제국이 수도 크테시폰을 유지하는 한, 언제든 군대를 재정비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우마르는 사드에게 크테시폰으로 진격하여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크테시폰 포위전은 약 두 달간 이어졌고, 637년 3월 마침내 도시가 함락되었다. 이후 무슬림 군대는 후제스탄까지 페르시아 영토를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638년 아라비아 반도에 닥친 심각한 가뭄과 639년 레반트 및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퍼진 암와스 역병으로 인해 정복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칼리프 우마르는 정복한 영토를 안정시키고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와 페르시아 사이에 불의 산이 있어서 그들이 우리에게 오지도 못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갈 수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사산 제국의 입장은 달랐다. 아랍인들에게 이라크를 빼앗긴 것은 큰 굴욕이었으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저항을 계속했다. 641년 12월, 사산 제국은 대규모 반격을 시도했으나 나하반드 전투에서 다시 패배했다.
결국 우마르는 사산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전면적인 침공을 계획했다. 사산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는 저항을 이어갔으나, 우스만이 칼리프가 된 후인 651년에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사산 왕조의 혈통은 끊기고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까디시야 전투 마지막 날 새벽, 전황은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시리아에서 온 원군 지휘관 중 한 명인 카카 이븐 암르(바누 타밈 부족 출신)가 자신의 부족 전사들을 이끌고 "한 시간만 더 싸우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 바누 타밈 전사들이여,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외치며 사산 군 진영으로 돌격했다.[12] 이 기습 공격으로 사산 군의 전열 일부가 무너졌고, 아랍 군대는 적 본진까지 밀고 들어갔다.
사산 군 총사령관 로스탐은 모래 폭풍 속에서 온몸에 600곳이 넘는 상처를 입고 전사한 채 발견되었다.[12] 하지만 처음에는 병사들이 총사령관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계속 싸웠다. 로스탐의 전사 소식이 퍼지자 사산 군은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로스탐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격렬한 모래 폭풍이 불자 로스탐이 낙타 그늘에 엎드려 피하고 있었는데,[12] 그 낙타 등에는 무기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이때 우연히 지나가던 한 무슬림 병사가 로스탐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낙타의 짐 끈을 잘라버렸다. 머리 위로 무기들이 쏟아져 척추가 부러진 로스탐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 병사가 "카바의 신께 맹세코, 로스탐을 죽였다!"라고 외치자, 지휘관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산 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많은 페르시아 병사들이 전투 중에 죽거나 강을 건너 도망쳤고, 나머지는 항복했다는 것이다.[12]
일부 사산 군 병사들은 대열을 유지하며 퇴각하려 했지만, 대부분은 공황 상태에 빠져 강 쪽으로 달아났다. 살아남은 지휘관 중 한 명이 간신히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리를 건너 퇴각할 수 있었다. 전투는 무슬림 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흩어져 도망치는 페르시아 병사들은 무슬림 기병에게 추격당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4. 2. 이슬람 제국의 확장
이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유명한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 깃발인 데라프시 카비아니(카베의 깃발)를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이 깃발의 보석들은 떼어져 메디나에서 조각으로 팔렸다.[13] 전투에 참여했던 아랍 전사들은 '''Ahl al-Qādisiyyah|알 알까디시야ara'''(까디시야의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 이라크와 중요한 주둔 도시가 된 쿠파의 아랍 정착민들 사이에서 높은 위상을 누렸다.까디시야 전투가 끝난 후, 사령관 사드는 칼리프 우마르에게 승리를 보고했다. 이 전투는 이라크 지역에 대한 사산 왕조의 통치 기반을 크게 흔들었지만, 수도 크테시폰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사산 왕조가 언제든 반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이에 우마르는 사드에게 크테시폰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637년 크테시폰 포위는 두 달간 이어졌고, 같은 해 3월 마침내 도시가 함락되었다. 무슬림 군대는 계속 진격하여 페르시아의 후제스탄주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638년 아라비아 반도에 닥친 심각한 가뭄과 639년 남부 메소포타미아 및 레반트 지역에 퍼진 암와스 역병으로 인해 이슬람 제국의 확장은 잠시 멈추었다. 칼리프 우마르는 정복한 영토를 안정시키고 더 이상의 확장을 원치 않아 "우리와 페르시아 사이에 불의 산이 있어서 그들이 우리에게 오지도 못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갈 수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페르시아 측의 입장은 달랐다. 까디시야 전투의 패배와 이라크 상실은 사산 왕조에게 큰 굴욕이었으며 제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사산 왕조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계속 저항했다. 641년 12월, 대규모 페르시아 반격군이 조직되었으나 네하벤드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우마르는 사산 제국 전체를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전면적인 침공을 계획했다.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계속 도망 다니다가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의 통치 시기인 651년, 호라산에서 총독에게 배신당하여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사산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4. 3. 중동 지역의 변화
까디시야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 군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막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특히 보석으로 장식된 유명한 페르시아 제국의 깃발인 카베의 기(데라프시 카비안)도 노획품에 포함되었다. 이 깃발의 보석들은 떼어져 메디나에서 팔렸다.[13] 이 전투에 참여했던 아랍 전사들은 Ahl al-Qādisiyyahara 또는 Ahl al-Qawadisara로 불리며 높은 명성을 얻었고, 이후 이라크, 특히 쿠파와 같은 주요 주둔 도시의 아랍 정착민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전투가 끝난 후, 사령관 사드는 칼리프 우마르에게 승전보를 보냈다. 이 패배는 사산 왕조의 이라크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수도 크테시폰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페르시아가 언제든 반격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우마르는 사드에게 진격을 계속하여 크테시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637년에 시작된 크테시폰 포위는 두 달간 이어졌고, 같은 해 3월 마침내 도시가 함락되었다. 이후 무슬림 군대는 페르시아의 후제스탄 지역까지 정복했다.
그러나 638년 아라비아 반도에 닥친 심각한 가뭄과 639년 남부 메소포타미아 및 레반트 지역에 퍼진 암와스 역병으로 인해 이슬람 군대의 정복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다. 칼리프 우마르는 새로 얻은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집중하고자 했으며, 페르시아의 나머지 영토는 그대로 남겨두기를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우리와 페르시아 사이에 불의 산이 있어서 그들이 우리에게 오지도 못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갈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페르시아 측의 입장은 달랐다. 까디시야 전투의 패배와 이라크 상실은 사산 왕조에게 큰 굴욕이었으며, 제국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산 왕조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군사적 노력을 계속했다. 641년 12월, 페르시아는 대규모 반격을 시도했으나 나하반드 전투에서 다시 한번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결국 칼리프 우마르는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한 전면 침공을 계획하게 되었다. 사산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제3대 칼리프 우스만의 통치 시기인 651년, 호라산으로 도망쳤다가 그곳 총독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사산 왕조의 혈통은 끊어졌고,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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