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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르 왕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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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디르 왕 전쟁은 1720년대 사파비 왕조의 붕괴 이후 이란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과 관련된 사건들을 포괄한다. 아프간족의 침입,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시작되었으며, 호라산 지역의 군벌이었던 나데르 샤의 등장과 사파비 왕조 재건, 무굴 제국 침공, 중앙아시아 원정,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 광범위한 군사적 활동을 포함한다. 나데르 샤는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이란 제국을 확장했지만, 말년에는 광적인 통치와 잦은 반란에 직면했고, 결국 암살당하면서 아프샤르 왕조는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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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르 왕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나디르 샤
나디르 샤의 초상화
주요 목표페르시아의 헤게모니 부활 및 중앙 유라시아 전역 확장, 최종적으로는 붕괴
주요 결과타흐마스프 2세의 사파비 왕조 복원
사파비 왕조 재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란 영토 회복
캅카스 정복
사파비 왕조 전복
아프샤르 왕조 건립
호타키 왕조 종식
페르시아만 정복
무굴 인도 침공 및 일부 합병
중앙아시아 정복
나디르 샤의 심리적 및 정신적 악화
다게스탄에서의 군사적 실패
제국 내 수많은 반란 발생
나디르 샤 암살
페르시아 제국 붕괴
페르시아 내전
영토 변화페르시아 제국이 고대 이후 최대 영토 확장 후 붕괴
교전 세력
페르시아 제국사파비 왕조 (1736년 이전)
아프샤르 왕조 (1736년 이후)
다수의 고객 및 속국
반대 세력호타키 왕조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크림 칸국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무굴 제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칸국
레즈긴인
아바르족
무스카트 술탄국
[[File:Flag of The Imamate of Oman.svg|24px]] 오만 이맘국
[[File:Asafia flag of Hyderabad State.svg|24px]] 하이데라바드
[[File:Flag of Awadh.svg|24px]] 아와드
아랍 부족
무함마라 토후국
아르달란
헤라트 사도자이 술탄국
샤키 칸국
엘리수 술탄국
카르틀리 왕국
카헤티 왕국
지휘관
페르시아 제국/[[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나디르 샤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타흐마스프 잘라예르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모함마드 칸 발로치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로트프 알리 칸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파트흐 알리 카야니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라티프 칸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아흐마드 샤 압달리
/[[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리자 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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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아디네 모스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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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Coat of arms of the Kingdom of Kartli-Kakheti.svg|25px]]/[[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이라클리오스 2세
[[File:Coat of arms of the Kingdom of Kartli-Kakheti.svg|25px]]/[[File:Afsharid Imperial Standard (3 Stripes).svg|22px]] 기비 아밀라크바리
반대 세력알라야르 칸 압달리
줄파카르 칸 압달리
아슈라프 호타키
모함마드 세이달
나스룰라 칸
제바르두스트 칸
후사인 호타키
모함마드 세이달 칸
타흐마스프 2세
아흐메트 3세
마흐무트 1세
토팔 오스만 파샤
헤키모을루 알리 파샤
쾨프륄뤼 압둘라 파샤
아흐마드 파샤
메흐메트 예겐 파샤
압돌라 파샤 제베치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무함마드 샤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니잠 울 물크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부르한 울 물크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칸 다우란 7세, 제1 미르 바크시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카마르 웃딘 칸, 대재상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사드 웃딘 칸, 미르 아티쉬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니사르 무함마드 칸 셰르 정
[[File:Alam of the Mughal Empire.svg|30px]] 크와자 아슈라
무자파르 칸
아불 올-파이즈 칸
일바레스 칸
하지 다부드 미우슈키우르스키
무함마드 칸 아바르
주요 전투
사파비 왕조 멸망굴나바드 전투
이스파한 포위전
호라산 전역상간 전투
사브제바르 원정
아프간 전역제1차 아프간 전역
카페르 칼레 전투
1729년 헤라트 전투
제2차 아프간 전역
칸다하르 포위전
사파비 왕조 복원담간 전투
콰르 고개 전투
무르체-코르트 전투
이스파한 해방
자르간 전투
제1차 오스만-페르시아 전쟁서부 페르시아 전역
나하반드
말라예르
타흐마스프의 전역
예레반
메소포타미아 전역
바그다드 포위전
사마라 전투
키르쿠크 전투
캅카스 전역
간자 포위전
이라반 포위전
예게바르드 전투
인도 전역카이버 고개 전투
카르날 전투
델리 약탈
신드 원정
체나브 전투
중앙 아시아 전역~
다게스탄 전역안달랄 전투
페르시아만 전역~
제2차 오스만-페르시아 전쟁모술 포위전
카르스 포위전
카르스 전투
반란 및 내전셰이크 아흐마드 마다니의 반란
바크티아리 반란
1733년 반란
1736년 카르틀리 반란
데라자트 반란
1741년 발흐 반란
키쉬 반란
삼 미르자의 반란
1743-46년 코이 반란
카르틀리 반란
1744년 파르스 반란
1744년 카자르 반란
1746년 케르만 반란
1746년 시스탄 봉기
1746-47년 무스카트 봉기
1746-47년 가름시라트 반란
1747년 자파란루 봉기
시기
기간1720년대 ~ 1747년
지역
장소중앙아시아, 이란 고원, 메소포타미아, 쿠르디스탄, 캅카스, 아나톨리아, 카스피해, 페르시아만, 아라비아 반도, 인도 아대륙, 힌두쿠시 산맥, 펀자브, 인더스 계곡,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즘

2. 사파비 왕조 붕괴와 이란의 혼란

18세기 초, 사파비 왕조가 급격히 쇠퇴하면서 이란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오스만 제국러시아 차르국이 이란 영토를 잠식했다.[1]

2. 1. 아프간족의 침입과 호타키 왕조

1720년대 사파비 왕조 동부에서 아프간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호타키 왕조의 마흐무드 호타키가 이끄는 침략으로 이어졌다. 마흐무드는 굴나바드 전투에서 이스파한에서 파견된 제국군을 굴욕적으로 패배시키고, 수도로 진격하여 끔찍한 이스파한 포위전 끝에 이스파한을 점령했다.[1]

이스파한의 궁정 관리인 말레크 마흐무드 시스타니는 호타키 아프간 정복자들과 합의했다. 그는 호라산에 독립 왕국을 세우는 대가로 마흐무드를 이란의 샤로 인정했다.[2] 시스타니는 호라산으로 들어가 반군과 지역 군벌로부터 호라산 대부분을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되찾았고, 수도 마슈하드를 손에 넣었다.[3] 이때 나데르는 마슈하드 북쪽 칼라트 요새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1,200명의 병력으로 시스타니의 영토를 공격했지만, 직접적인 대립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데르는 호라산에서 시스타니의 영향력에 대한 유일한 진정한 도전자로 자리매김했다.[4]

2. 2.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개입

테헤란 근처 화약고에 대한 외젠 플랑댕의 인상 (18세기).


오스만 제국은 1720년대 초, 마흐무드 1세의 호타키 왕조가 사파비 왕조를 침공했을 때 이란 서부 지역으로 진입했다. 굴나바드 인근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마흐무드 호타키는 훨씬 더 규모가 컸지만 심하게 분열된 이란 군대를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이란 군대가 패주하면서 마흐무드는 수도 이스파한으로 진격했고, 이 도시는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어 엄청난 고통과 인명 피해를 겪었다.[1] 사파비 왕조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러시아 차르국오스만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최대한 많은 영토를 병합했고, 오스만 투르크는 이란 서부를 점령하고 코카서스 지역을 러시아와 분할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호타키 정복자들은 쿠데타를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왕으로 세웠고, 마흐무드 1세는 그의 유능한 사촌 아슈라프로 교체되었다. 아슈라프는 오스만 제국의 추가적인 확장을 막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했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그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외교적 결과는 매우 화해적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아슈라프를 이란의 정당한 샤로 인정하는 대가로 코카서스와 이란 서부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인정했다.[1]

3. 나데르 샤의 등장과 초기 활동

나디르 샤호라산 지역의 군벌로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이란 동부에서 아프간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1729년 사브제바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마슈하드를 출발하여 압달리 아프간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6]

아프가니스탄 원정의 주요 기동을 보여주는 군사 도표


나디르 군대는 경무장 기병 부대와의 전투를 통해 전술을 발전시켰다. 알라야르 칸이 이끄는 15,000명의 압달리군은 카페르 칼레 주변에, 줄파카르 칸이 이끄는 12,000명은 남쪽에서 접근했다. 나디르는 소규모 전투와 기만 전술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장 환경에서 우위를 점하려 노력했다.[6]

3. 1. 타흐마스프 2세와의 협력

1720년대에 제국 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아프간 반란으로 여러 반란이 일어났고, 호타키 지도자 마흐무드 호타키가 이끄는 침략으로 이어졌다. 마흐무드는 굴나바드 전투에서 이스파한에서 파견된 제국군에게 패배를 안겼고, 이후 수도로 진격하여 이스파한 포위 끝에 이스파한을 점령했다.

이스파한의 궁정 관리인 말레크 마흐무드 시스타니는 호타키 아프간 정복자들과 합의를 맺었는데, 호라산에 독립 왕국을 세우는 대가로 마흐무드를 이란의 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시스타니는 호라산으로 진입하여 반군과 지역 군벌로부터 호라산의 대부분을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되찾았고, 수도 마슈하드를 손에 넣었다. 이때 나데르는 마슈하드 북쪽의 칼라트 요새에 자리를 잡았고, 불과 1,200명의 병력으로 시스타니의 영토를 공격했지만, 직접적인 대립은 없었음에도 나데르는 호라산에서 시스타니의 영향력에 유일한 진정한 도전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스파한 포위가 끝난 후 마흐무드는 새로운 사파비 왕위 주장자 타흐마스프 2세가 일어나 샤를 선포한 카즈빈을 진압하기 위해 아프간 병력을 파견했다. 그는 카즈빈에서 도망쳐야 했지만 아프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 서쪽에서 침략해 온 오스만 군인들의 발길에 끊임없이 짓밟히면서 그 지역에 영구적으로 머물 수 없었다. 타흐마스프는 나라 서쪽에서 쫓겨났고, 아스타라바드에서 카자르 가문의 파트알리 칸이라는 충성스럽지만 다루기 힘든 군벌을 만났다.

그들은 이란의 심장부를 해방시키기 위해 이스파한으로 진격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하고, 동맹을 맺고 더 많은 병력을 징집할 수 있는 호라산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호라산으로 진격하면서 그들은 나데르와 접촉했고, 나데르의 충성심과 그의 훨씬 더 커진 전투력을 얻었다(나데르는 쿠르드족을 상대로 작전을 펼쳐 그들 중 많은 수를 자신의 소규모 군대에 성공적으로 편입시켰다). 3만 명의 연합군은 마슈하드를 포위했고, 시스타니와 그의 사령관 피르 모하마드는 도시 성벽 안에 갇혔다. 타흐마스프는 파트알리 칸과 긴장된 관계를 맺었고, 1726년 10월 10일 나데르가 타흐마스프에게 파트알리와 시스타니 사이의 은밀한 통신선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내용이 담긴 가로챈 편지를 가져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나데르는 카자르 병력이 지도자에게 어떤 해가 가해질 경우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여 타흐마스프에게 당분간 그의 목숨을 살려두라고 조언했다. 타흐마스프는 나데르의 판단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파트알리를 처형했다.

그러나 파트알리의 참수에도 불구하고 카자르 병력은 충성파 군대에 남았고, 아이러니하게도 포위 공격을 끝낸 것은 다른 쪽의 배신이었다. 피르 모하마드는 나데르가 도시 성벽에 침투하도록 허용했고, 시스타니는 요새로 피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했다.

3. 2. 호라산 평정과 아프간족 격퇴

1720년대 이란 동부에서 아프간족의 반란이 일어나 여러 반란으로 이어졌고, 호타키 왕조의 마흐무드 호타키가 침략하여 굴나바드 전투에서 이스파한에서 파견된 제국군을 패배시키고 수도를 점령, 이스파한 포위전을 일으켰다.[6] 이스파한의 궁정 관리인 말레크 마흐무드 시스타니는 호타키 아프간 정복자들과 합의하여 호라산에 독립 왕국을 세우고 마흐무드를 이란의 샤로 인정했다. 시스타니는 호라산의 대부분을 되찾고 마슈하드를 수도로 삼았다. 이때 나데르는 마슈하드 북쪽 칼라트 요새에서 시스타니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다.[6]

마흐무드는 타흐마스프 2세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타흐마스프는 카즈빈에서 도망쳐 아스타라바드에서 카자르 가문의 파트알리 칸을 만났다. 이들은 호라산에서 시작하여 더 많은 병력을 모으기로 하고 나데르와 동맹을 맺었다. 3만 명의 연합군은 마슈하드를 포위했고, 시스타니는 항복했다. 나데르는 파트알리 칸을 처형하고 호라산의 수도를 타흐마스프에게 돌려주었으며, 이후 호라산 정복으로 헤라트 원정의 기반을 마련했다.[6]

나디르 샤는 사브제바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1729년 5월 4일 마샤드를 출발, 압달리 아프간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였다. 나디르 군대는 경무장 기병 부대와의 전투 경험을 통해 전술 시스템을 다듬었다. 알라야르 칸 휘하의 압달리군 15,000명은 카페르 칼레 주변에, 줄파카르 칸이 이끄는 12,000명은 남쪽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나데르는 소규모 전투, 기만술 등으로 우위를 유지했다.[6]

카페르 칼레 전투에서 승리한 나데르는 알라야르 칸을 추격했고, 줄피카르 칸의 접근 소식을 듣고 속임수를 써 알라야르 칸을 후퇴시켰다. 나데르는 주력 부대를 돌려 줄피카르 칸과 맞서려 했으나 모래 폭풍으로 인해 전투가 불가능해졌고, 압달리군은 헤라트로 철수했다.[6]

나데르는 헤라트에서 알라야르와 줄피카르의 연합군을 만났다. 헤라트 전투에서 이란군은 압달리족의 돌격을 저지하고 포격을 가해 알라야르 칸은 평화를 청했고, 이란을 헤라트의 종주국으로 인정했다.[6]

4. 사파비 왕조 복원과 나데르 샤의 섭정

1729년 후반, 타흐마스프 2세의 총사령관 나데르와 아슈라프 호타키 사이의 전투를 통해 사파비 왕조가 이란에 복위되었다. 명목상으로는 타흐마스프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나데르에게 있었다. 나데르는 사브제바르 원정 이후 타흐마스프 2세를 자신의 봉신으로 삼았다.

4. 1. 담간 전투와 무르체-호르트 전투

1729년 나데르는 담간 전투와 무르체-호르트 전투에서 아프간족 군대를 격파하고 이스파한을 수복했다.[6] 이 전투들을 통해 명목상으로는 타흐마스프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나데르에게 있었다.

4. 2. 아슈라프 호타키의 최후

나디르 샤는 사브제바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1729년 5월 4일 마샤드를 출발하여 아프간족 정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나디르의 군대는 경무장 기병 부대와 맞서 싸우면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술 시스템을 더욱 발전시켰다.

1729년 후반, 타흐마스프 2세의 총사령관 나데르와 아슈라프 호타키 사이의 전투를 통해 사파비 왕조가 이란에 복위되었다. 명목상으로는 타흐마스프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나데르에게 있었다. 겔자이 아프간족은 이란 고원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칸다하르 공방전을 통해 다시 이란 제국에 흡수되었다.

5.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720년대 초, 마흐무드 1세의 호타키 왕조가 사파비 왕조를 침공했을 때 오스만 제국은 이란 서부 지역으로 진입했다. 굴나바드 인근 전투에서 마흐무드 호타키는 이란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고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시켰다. 사파비 왕조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최대한 많은 영토를 병합했고, 오스만 투르크는 이란 서부를 점령하고 코카서스 지역을 러시아와 분할했다.[17]

얼마 지나지 않아 호타키 정복자들은 쿠데타를 통해 아슈라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웠다. 아슈라프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격파했다. 그러나 외교적 결과는 화해적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아슈라프가 이란의 정당한 샤로 인정하는 대가로 코카서스와 이란 서부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인정할 것을 약속했다.[17]

나데르와 아슈라프가 갈등을 벌이면서, 오스만 제국은 부활한 이란이 오스만 제국이 새로 획득한 영토를 장악하는 데 위협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사파비 왕조 충성파에 맞서 아슈라프를 지원했다. 튀르크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나데르는 여러 전투에서 아슈라프의 군대를 격파했고, 타흐마스프 2세의 명목상의 통치 하에 사파비 왕조를 재건했다.[17]

아슈라프는 서쪽으로 퇴각하여 콰르 고개에 매복을 설치했지만, 나데르는 매복을 발견하고 포위하여 병력들을 격파했다.[17]

5. 1. 서부 페르시아 원정과 메소포타미아 원정

나데르의 첫 번째 오스만 제국 원정은 그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1730년 3월 9일, 이란군은 시라즈를 떠나 노루즈 새해를 축하한 후, 서쪽으로 빠르게 강행군하여 오스만 제국을 기습했다. 루리스탄을 거쳐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나하반드에 도착한 나데르는 이곳의 튀르크군을 하마단으로 쫓아냈다. 이후 말라예르 계곡에서 이란군의 하마단 진격을 막기 위해 재정비한 오스만군과 전투를 벌였다.[16]

말라예르 계곡 전투의 군사 도해


이전까지 이란군이 상대했던 아프간 및 부족 반대자들과 달리, 오스만군은 구조와 구성 부대 유형 면에서 이란군과 거의 일치했다. 나데르는 시내 건너편에 자신의 병력을 세 개의 별도 부대로 배치했고, 두 군대는 서로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전선 전체에서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나데르는 연기 속에서 자신의 우익을 강화하고 대담한 도박을 준비했다.[16]

말라예르 계곡 전투는 하마단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나데르는 시내를 건너 우익의 갑작스러운 돌격을 명령했다. 이란군은 연기 구름 속에서 나타나 오스만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만군은 패주했고, 이란 기병대가 추격하여 많은 수의 병사들을 베고 포로로 잡았다. 나데르는 하마단을 해방하고 10,000명의 투옥된 이란 병사들을 구출한 후, 케르만샤를 확보하여 서부 이란의 광대한 지역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그는 군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하여 8월 12일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타브리즈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를 격파했다. 터키 포로들은 친절하게 대우받았으며, 나데르는 많은 파샤들을 석방하여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보냈다.[16]

전쟁 전 오스만 제국 근동 지도


이후 타흐마스프 2세의 오스만령 코카서스 침공 실패로 인해 나데르의 이전 전역에서의 모든 이득을 상실하고, 코카서스에 대한 지배권을 이스탄불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나디르는 타흐마스프의 퇴위를 강요하고 오스만령 이라크와 메소포타미아 침공을 시작하여 투르크와의 전쟁을 재개했다.[17]

나데르는 카스르에시린 근처의 요새화된 국경 마을 조하브에 대한 직접적인 진격 대신 산길을 통과하기로 결정했다. 나데르는 600명의 병사들을 오스만 보루 뒤 계곡으로 내려보냈고, 한밤중에 공격했다. 조하브 수비대는 공포에 질려 자리를 피했다. 나데르는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고 하마단을 떠나 바그다드로 향하고 있던 이란 주력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17]

이란 주력군은 키르쿠크를 포위했고, 바그다드 근처에서 오스만 군을 격파한 후 도시 자체를 포위했다. 아흐마드 파샤는 도시의 완강한 수비수로 드러났으며, 토팔 파샤가 이끄는 8만 명의 구원군이 접근할 때까지 버텼다.[18]

토팔은 나데르를 불리한 전투로 유인했고, 이란군은 절반이 파괴되고 모든 대포를 잃었다. 이 승리로 아흐마드 파샤는 열정적인 수비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바그다드를 봉쇄하기 위해 남겨진 12,000명의 이란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19]

5. 2. 타흐마스프 2세의 실정과 폐위

나데르의 첫 번째 오스만 제국 원정은 성공적이었으나, 샤 타흐마스프 2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타흐마스프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코카서스 지역을 공격했으나, 이전 나데르가 확보했던 모든 영토를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4] 이 군사적 실패는 사파비 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데르는 압달리 아프간족의 반란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점령한 코카서스 영토에 대한 침공 계획을 취소하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했다.[4] 그 사이, 타흐마스프 2세는 측근들의 꾐에 빠져 직접 전장에 나섰다. 마이클 액스워디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타흐마스프 2세가 나데르의 계속된 승리에 질투심을 느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한다.[4]

타흐마스프 2세의 코카서스 침공 실패로 인해 나데르의 이전 전역에서의 모든 이득이 사라지고, 코카서스에 대한 지배권을 이스탄불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5] 이 조약으로 인해 나데르는 타흐마스프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어린 아들 아바스 3세를 옹립했다.[3]

5. 3. 코카서스 원정과 오스만 제국 격파

나데르는 하마단을 해방하고 10,000명의 투옥된 이란 병사들을 구출한 후, 케르만샤를 확보하여 서부 이란의 광대한 지역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그는 군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하여 8월 12일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타브리즈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를 격파했다. 나데르는 많은 파샤들을 석방하여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보냈다. 전격적인 작전을 통해 나데르는 이란의 핵심 지역의 주요 주들을 모두 재통합했다.[1]

파트로나 할릴의 반란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지도부가 바뀌어 마흐무트 1세가 권력을 잡았다. 술탄 마흐무트 1세는 타흐마스프 2세를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 동부 지휘관으로 베네치아계 정치인을 임명했다. 타흐마스프 2세는 초쿠르-에 사드, 조지아, 다게스탄을 정복하려 했으나, 예레반 근처에서 오스만 군대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선 문제로 타브리즈로 돌아가야 했다.[1]

아흐마드 파샤가 케르만샤와 하마단을 점령하기 위해 서부 이란으로 진입하자 타흐마스프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이란군은 주로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편성되었으나, 미숙한 보병의 사격과 예니체리의 진격에 패배했다. 타브리즈는 하키모글루 칸에게 함락되었고, 아흐마드 파샤는 하마단을 점령했다.[1]

타흐마스프는 코카서스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러나 나데르는 이 조약에 분노하여 타흐마스프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어린 아들 아바스 3세를 옹립하여 사실상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1]

나데르는 오스만 제국과 코카서스에 대한 침략을 계속하여 이란의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 인해 나데르는 거의 전체 코카서스 지역에 대한 이란의 지배권을 재편할 수 있었고, 사파비 왕조를 위해 이 지역을 재정복했다.[4]

캅카스는 1722년 사파비 왕조의 붕괴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원정의 첫 번째 목표는 시르반 칸국의 재정복이었으며, 수도 샤마키가 1734년 8월에 함락되면서 이란군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간자를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타흐마스프 칸 잘라예르가 동남 캅카스에서 오스만군과 크림 타타르족 연합군을 격파하고 격퇴시킨 후, 나데르는 그들의 서쪽 퇴로를 차단하여 또 다른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그들을 북쪽 산으로 흩어지게 만들었다.[5]

나데르는 예레반트빌리시를 봉쇄하여 오스만의 '사라스카르' 쾨프릴뤼 파샤의 대응을 강요했다. 이스탄불은 5만 명의 기병, 3만 명의 예니체리, 40문의 대포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를 쾨프릴뤼 파샤에게 파견하여 이 지역의 오스만 영토를 방어하도록 했다.[5]

나데르는 바가바르드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여 이스탄불이 결국 자하브 조약에서 이미 합의된 메소포타미아의 국경과 코카서스의 이란 통치를 인정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바가바르에서의 참패는 크림 타타르족이 후퇴할 충분한 설득력을 제공했다.[6]

6. 아프샤르 왕조 수립과 동방 원정

نادر شاهfa는 아바스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샤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세웠다.

나디르 샤무굴 제국을 침공하여 1739년 카르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델리를 점령했다.[14] 1739년 3월 20일, 델리의 수도 열쇠는 나데르에게 항복했고, 그는 샤 자한의 붉은 성을 점령했다.[10] 자마 마스지드와 다른 델리 모스크에서 그의 이름으로 동전이 주조되고 기도가 드려졌다.

말을 탄 나디르 샤의 델리 약탈 – 전투 장면


이란의 점령으로 도시의 물가가 상승했고, 현지 상인들이 낮은 가격을 거부하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일부 이란인들이 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 나디르가 붉은 성의 여성 경비병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3월 21일 밤에 일어난 폭동 중 일부 인도인들이 이란군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나디르는 병사들에게 델리에서 ''qatl-e-aam''(qatl = 살해, aam = 공개적으로, 밖에서)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3월 22일 아침, 나디르는 완전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나와 찬드니 초크 중앙의 코트왈리 차부트라 근처에 있는 로샨-우드-도울라의 수네리 마스지드(찬드니 초크)에 앉았다. 북 소리와 트럼펫 소리에 맞춰 칼을 뽑는 것을 신호로, 이란 점령군은 도시의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에게 칼과 총을 겨누었다. 이란 군인들은 도시를 약탈하면서 전리품의 몫을 약속받았다.

나디르 샤가 델리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신을 보고 있다


찬드니 초크, 다리바 칼란 등 델리 지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가 밀집해 살았으며, 곧 시체로 뒤덮였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처럼 무슬림도 이란인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여성, 아이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1] 무함마드 샤는 자비를 구해야 했다.[12] 결국 나디르 샤는 유혈 사태를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739년 3월 22일 하루 6시간 동안 나디르 샤의 이란군은 20,000명에서 30,000명에 달하는 인도 남녀노소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13] 정확한 사상자 수는 불확실한데, 희생자들의 시신은 대량 매장 구덩이에 묻히거나 대규모 화장용 장작더미에서 화장되었고, 적절한 기록이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며칠 동안 약탈당했다. 델리 시민들에게 2천만 루피의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었다. 무함마드 샤는 왕실 보물창고의 열쇠를 넘겨주었고, 공작 왕좌를 나디르 샤에게 빼앗겼으며, 이후 이 왕좌는 이란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나디르는 다른 엄청난 보석들 중에서도 코이누르 와 다리아예 누르 ("빛의 산"과 "빛의 바다") 다이아몬드를 얻었다.[14]

나디르 샤가 전쟁의 전리품으로 가져간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의 복제품과 기타 여러 보석들


나데르 샤가 카르날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공작 옥좌에 앉아 있다.


델리에서 약탈한 재물은 매우 풍족하여 나데르는 귀환 후 3년 동안 이란의 조세를 중단했다.[14][15]

18세기 중반, 나데르 샤의 이란 제국은 부하라히바칸국을 정복하고 병합하는 데 착수했다. 최초의 교전은 나데르가 남쪽의 인도를 침공하는 동안 그의 아들이자 부왕인 레자 쿨리 미르자가 치렀으며, 그는 이 지역에서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레자 쿨리의 히바 침공은 히바의 지도자 일바레스 칸을 분노하게 했다. 일바레스가 반격을 위협하자 나데르는 아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고, 나중에 델리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결정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히바를 병합한 후 그는 일바레스를 처형하고 아부 올-파이즈 칸으로 교체했는데, 나데르는 그가 자신의 종주권을 더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18] 이 분쟁은 근대 역사상 중앙 아시아의 칸국에 대한 가장 압도적인 이란의 승리를 가져왔고, 북인도에서 이전의 병합과 결합하여 나데르의 동방 제국은 고대 사산 왕조아케메네스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이란 제국을 능가했다.[18]

6. 1. 아프간 반란 진압

전쟁 이후 나디르 샤에게 충성하던 헤라트 총독 알라야르 칸은 칸다하르의 후세인 술탄의 사주를 받은 최고 부관 줄파카르 칸으로 인해 축출될 위기에 처했다.[1] 알라야르 칸은 헤라트를 탈출하여 나디르 샤의 형제인 이브라힘 칸에게 의탁하였다.[1]

압달리족은 호라산을 침공하여 수도 마슈하드를 포위했지만, 도시를 함락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은 나데르 샤를 자극했다. 나데르 샤는 1730년 8월 16일 타브리즈를 출발, 2,250km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마슈하드에 도착했고, 압달리족은 퇴각했다.[1]

호세인 호타키는 나데르 샤와 협상을 시작하여 사파비 왕녀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줄파카르 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고, 오히려 모하마드 세이달 칸이 지휘하는 길자이족 병력을 파견했다.[1]

1731년 4월, 이란군은 노그레 마을에 도착하여 헤라트 주변의 망루와 요새를 점령했다. 나데르 샤는 하리루드 강을 건너 아프간군의 반격을 격퇴했다. 헤라트 성벽에서 발사된 포탄이 나데르 샤의 텐트를 뚫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1]

줄파카르 칸과 세이달 칸은 이란군에 대한 합동 공격을 감행했으나, 나데르 샤의 기병대 돌격으로 궤멸되었다. 이 패배로 세이달 칸은 떠났고, 헤라트는 항복 조건을 요청했다.[1]

조약에 따라 알라야르 칸은 헤라트 총독직을 되찾았고, 줄파카르 칸은 파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나데르 샤는 요새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지 않았고, 이는 파라에서 4,000명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알라야르 칸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압력을 받아 결국 추방되었다.[1]

아프간인들은 평화 사절을 보냈고, 오랜 협상 끝에 줄파카르 칸과 그의 형제는 칸다하르로 도망쳤다. 헤라트는 점령되었지만 약탈되거나 파괴되지 않았다. 이브라힘 칸은 파라를 정복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진정시켰다.[1]

6. 2. 무굴 제국 침공과 델리 약탈

나디르 샤무굴 제국을 침공하여 1739년 카르날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델리를 점령했다.[14] 델리의 수도 열쇠는 나데르에게 항복했고, 그는 1739년 3월 20일 도시에 입성하여 샤 자한의 레드 포트를 점령했다.[10] 자마 마스지드와 다른 델리 모스크에서 그의 이름으로 동전이 주조되고 기도가 드려졌다.

이란의 점령으로 도시의 물가가 상승했고, 현지 상인들이 낮은 가격을 거부하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일부 이란인들이 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 나디르가 레드 포트의 여성 경비병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3월 21일 밤에 일어난 폭동 중 일부 인도인들이 이란군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나디르는 병사들에게 델리에서 ''qatl-e-aam''(qatl = 살해, aam = 공개적으로, 밖에서)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3월 22일 아침, 나디르는 완전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나와 찬드니 초크 중앙의 코트왈리 차부트라 근처에 있는 로샨-우드-도울라의 수네리 마스지드(찬드니 초크)에 앉았다. 북 소리와 트럼펫 소리에 맞춰 칼을 뽑는 것을 신호로, 이란 점령군은 도시의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들에게 칼과 총을 겨누었다. 이란 군인들은 도시를 약탈하면서 전리품의 몫을 약속받았다.

찬드니 초크, 다리바 칼란 등 델리 지역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가 밀집해 살았으며, 곧 시체로 뒤덮였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처럼 무슬림도 이란인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여성, 아이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1] 무함마드 샤는 자비를 구해야 했다.[12] 결국 나디르 샤는 유혈 사태를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1739년 3월 22일 하루 6시간 동안 나디르 샤의 이란군은 20,000명에서 30,000명에 달하는 인도 남녀노소를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13] 정확한 사상자 수는 불확실한데, 희생자들의 시신은 대량 매장 구덩이에 묻히거나 대규모 화장용 장작더미에서 화장되었고, 적절한 기록이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시는 며칠 동안 약탈당했다. 델리 시민들에게 2천만 루피의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었다. 무함마드 샤는 왕실 보물창고의 열쇠를 넘겨주었고, 공작 왕좌를 나디르 샤에게 빼앗겼으며, 이후 이 왕좌는 이란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나디르는 다른 엄청난 보석들 중에서도 코이누르 와 다리아예 누르 ("빛의 산"과 "빛의 바다") 다이아몬드를 얻었다.[14]

델리에서 약탈한 재물은 매우 풍족하여 나데르는 귀환 후 3년 동안 이란의 조세를 중단했다.[14][15]

6. 3. 중앙아시아 원정과 칸국 정복

중앙 아시아에 억류된 이란 노예. 이란 제국 국경 너머의 칸국들은 국경 마을과 마을을 약탈하고 전리품을 획득하는 정기적인 습격을 감행했다.


18세기 중반, 나데르 샤의 이란 제국은 부하라히바칸국을 정복하고 병합하는 데 착수했다. 최초의 교전은 나데르가 남쪽의 인도를 침공하는 동안 그의 아들이자 부왕인 레자 쿨리 미르자가 치렀으며, 그는 이 지역에서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레자 쿨리의 히바 침공은 히바의 지도자 일바레스 칸을 분노하게 했다. 일바레스가 반격을 위협하자 나데르는 아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고, 나중에 델리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결정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히바를 병합한 후 그는 일바레스를 처형하고 아부 올-파이즈 칸으로 교체했는데, 나데르는 그가 자신의 종주권을 더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18] 이 분쟁은 근대 역사상 중앙 아시아의 칸국에 대한 가장 압도적인 이란의 승리를 가져왔고, 북인도에서 이전의 병합과 결합하여 나데르의 동방 제국은 고대 사산 왕조아케메네스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이란 제국을 능가했다.[18]

7. 나데르 샤의 통치와 최후

나데르 샤는 잦은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1] 그는 점점 더 잔혹해져 백성들을 처벌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745년 초부터 1746년 6월까지 반란이 일어났다.

7. 1. 다게스탄 원정과 실패

이란 제국과 다게스탄인 간의 분쟁은 1730년대 중반 나데르 샤의 코카서스 지역 첫 번째 원정부터 1747년 그의 암살까지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북 코카서스 지역의 극도로 험난한 지형은 다게스탄인들을 굴복시키는 것을 매우 어려운 과제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데르 샤는 다게스탄인들로부터 수많은 요새와 성채를 빼앗았고, 그들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러나 다게스탄인들은 다게스탄 최북단 지역에서 버티며 이란의 지배에 계속 저항했다.

분쟁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으며, 나데르 샤가 직접 참전했을 때를 제외하면 실제 치열한 전투는 몇 년에 불과했고, 그 외에는 산발적인 전투와 습격으로 이루어졌다. 이란군의 대부분의 사상자는 혹독한 날씨와 질병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는 다게스탄인들의 끈질긴 저항 의지와 결합되어, 대규모 전투가 위협받으면 멀리 떨어진 요새로 후퇴하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나데르 샤의 군대에게 전쟁을 수렁으로 만들었다. 결국, 북부 요새에서 버티던 다게스탄인들은 나데르 샤의 암살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이란 제국이 붕괴되면서 빼앗겼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7. 2. 페르시아만 원정과 해군 건설

페르시아만 주변의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페르시아 항구 도시 중 하나인 반다르-에-부셰르


아프샤르 왕조의 페르시아만 정복은 나디르 샤가 통치하는 이란 제국이 페르시아만과 그 주변 지역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군사 작전이었다. 초기에 수행된 수많은 원정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많은 목표를 달성했지만, 나데르가 임명한 다리야 살라르(제독)인 모하마드 타기 칸의 반란은 이란의 지배하에 있던 페르시아만 전역에 혼란을 초래했다. 모하마드 타기 칸이 패배하고 체포된 후에도 이란 제국은 나데르의 점점 더 잔혹해지는 통치로 인해 끊임없는 내전과 내부 전쟁의 격동기를 겪었고, 이는 그의 암살 직후 제국을 붕괴시켜 이 지역의 많은 정복지를 잃게 만들었다.[1]

7. 3. 오스만 제국과의 두 번째 전쟁

나디르 샤시아파 종파인 자파리를 이슬람의 다섯 번째 법적 종파로 인정받고자 콘스탄티노플 조약 (1736년) 비준을 시도했다.[19]

1743년, 나데르 샤는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바그다드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란은 1623년에 바그다드를, 1624년에 모술을 점령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1625년에 모술을, 1638년에 바그다드를 되찾았다. 오스만 제국사파비 제국 사이의 1639년 주하브 조약으로 85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사파비 왕조 멸망 이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이란 북서부와 카스피해 지역 분할에 합의했지만, 나데르 샤의 등장으로 이 지역에서 철수했다. 나데르 샤는 1730년부터 1736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후 인도를 침공하여 오스만과의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1745년 카르스 전투는 나데르가 그의 화려한 군 경력 동안 치른 마지막 주요 야전 전투였다.


나데르 샤는 인더스 강에서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뻗어 나가는 제국을 꿈꿨다. 그는 중앙 아시아 부족민들로 구성된 20만 명의 군대를 모아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할 계획이었으나, 오스만 울레마가 이란에 대한 성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키르쿠크, 아르빌을 점령하고 1743년 9월 14일에 모술을 포위했다. 40일 동안 이어진 포위에서 모술의 파샤인 하지 호세인 알 잘릴리는 성공적으로 모술을 방어했고, 나데르 샤는 퇴각해야 했다. 높은 세금으로 인한 이란의 반란(1743-44)으로 공세는 중단되었다. 조지아에서도 적대 행위가 확산되었는데, 기비 아밀라흐바리 왕자는 이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나데르의 조지아 동맹인 테이무라즈와 에레클레 왕자를 몰아내기 위해 오스만 군대를 고용했지만 실패했다.[20]

1744년 초, 나데르 샤는 공세를 재개하여 카르스를 포위했지만 반란 진압을 위해 다게스탄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돌아와 1745년 8월 카르스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다. 전쟁은 붕괴되었다. 나데르 샤는 점점 미쳐가며 자신의 백성을 처벌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745년 초부터 1746년 6월까지 반란이 일어났다. 1746년에 평화가 이루어졌다. 국경은 변하지 않았고 바그다드는 오스만 측에 남았다. 나데르 샤는 자파리교 인정을 요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포르테는 기뻐하며 대사를 파견했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에 나데르 샤는 부하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8. 나데르 샤에 대한 평가

나데르 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이란을 외세로부터 구하고 영토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과도한 정복 전쟁과 폭정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비판도 받는다.[1]

참조

[1] 서적 History of Iran's wars: from the Medes to now Etela'at Publishing 2008
[2] 학술 논문 The Army of Nader Shah http://m-hosseini.ir[...] 2015-11-11
[3] 서적 The Sword of Persia: Nader Shah, from tribal warrior to conquering tyrant I. B. Tauris 2009
[4] 백과사전 FLAGS i. Of Persia http://www.iranicaon[...]
[5] 서적 The Sword of Persia: Nader Shah, from tribal warrior to conquering tyrant I. B. Tauris 2009
[6] 서적 History of Iran's wars: from the Medes to now Etela'at Publishing 2008
[7] 서적 The Sword of Persia:Nader Shah, from Tribal Warrior to Conquering Tyran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2006-07-28
[8] 웹사이트 http://warfare.atspa[...]
[9] 서적 Russia and the Armenians of Transcaucasia, 1797–1889: a documentary record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7
[10] 웹사이트 AN OUTLINE OF THE HISTORY OF PERSIA DURING THE LAST TWO CENTURIES (A.D. 1722–1922) http://persian.packh[...] Packard Humanities Institute 2010-09-24
[11] 뉴스 When the dead speak http://www.hindustan[...] 2012-03-07
[12] 문서
[13] 문서
[14] 웹사이트 Nader Shah http://www.britannic[...] 2024-09-15
[15] 문서
[16] 서적 Mughal-Ottoman relations: a study of political &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Mughal India and the Ottoman Empire, 1556–1748 https://books.google[...] Idarah-i Adabiyat-i Delli 2012-04-06
[17] 문서
[18] 웹사이트 svat soucek, a history of inner asia page 195 http://librarun.org/[...]
[19] 서적 Geschiste des Osmanichen vol IV Yeditepe Yayınları 2009
[20] 서적 A History of the Georgian People: From the Beginning Down to the Russian Conquest in the Nineteenth Century Taylor & Francis 1932
[21] 서적 The Sword of Persia: Nader Shah, from tribal warrior to conquering tyrant I. B. Tauris 2009
[22] 서적 The Great Batlles of Nader Shah Donyaye Ketab 2008
[23] 서적 Iran at War: 1500–1988 Osprey Publishing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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