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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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현은 오나라의 관료로, 감농어사, 산기중상시, 회계 태수, 대사농 등을 역임했다. 손호 치세에 직언을 하다가 광주로 유배되었고, 이후 교지로 유배되어 장혁과 함께 전장에서 공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장혁이 사망한 후 칙서를 발견하고 자결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육개, 설영, 호충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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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루현 |
본관 | 쑤저우 |
자 | 성선(承先) |
직업 | 정치인 |
자녀 | 루거 |
관직 경력 | |
관직 | 감농어사(監農御史) |
임명 시기 | 258년 이후 |
군주 | 손휴 |
관직 | 산기상시(散騎中常侍) |
임명 시기 | 264년 이후 |
군주 | 손호 |
관직 | 진금중후(鎮禁中候) |
임명 시기 | 270년 |
군주 | 손호 |
관직 | 대사농(大司農) |
군주 | 손호 |
관직 | 회계태수(會稽太守) |
군주 | 손호 |
사망 정보 | |
사망 장소 | 광주 |
2. 생애
누현은 경제 때 감농어사(監農御史)를 지냈고, 말제 즉위 후에는 산기중상시(散騎中常侍), 회계 태수, 대사농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법을 중시하고 충직하게 행동하여 말제의 뜻을 자주 어기게 되었고, 결국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
어떤 사람이 누현이 하소와 함께 정사를 비방했다고 모함하여 광주로 보내졌다. 화핵이 상소를 올려 용서를 구했지만, 말제는 누현과 그의 아들 누거(樓據)를 교지로 유배시키고, 장혁에게 그들을 죽이도록 밀명을 내렸다. 그러나 장혁은 누현을 차마 죽이지 못했고, 장혁이 병으로 죽은 후 누현은 칙서를 발견하고 자결하였다. 천책 원년 (275년)에는 손호가 누현의 아들과 손자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손휴 때 감농어사를 지냈다.손호 때 왕번, 만욱, 곽착과 함께 산기중상시가 되었다. 회계군 태수를 거쳐 대사농에 취임했다. 만욱과 손호는 금중의 책임자가 될 만한 인격을 갖춘 자를 찾다가 누현을 그 적임자로 여기고 궁하진·금중후로 삼아 여러 일을 맡겼다. 누현은 위엄 있고 올바르게 행동하며 관례를 존중했지만, 거리낌 없는 직언을 하여 손호의 뜻에 거스르는 일도 종종 있었다.
2. 2. 금중후 시절과 직언
손호 때 왕번, 만욱, 곽탁과 함께 산기중상시가 되었다. 회계군 태수를 거쳐 대사농에 취임했다. 만욱과 손호는 금중의 책임자가 될 만한 인격을 갖춘 자를 찾았고, 누현을 그 적임자로 여겨 궁하진·금중후로 삼아 여러 일을 맡겼다. 누현은 위엄 있고 올바르게 행동하며 관례를 존중했지만, 거리낌 없는 직언을 하여 손호의 뜻에 거스르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중 하소와 함께 국정을 비방했다는 참언을 받아 문책당하여 광주로 추방되었다.2. 3. 유배와 죽음
누현은 공정하고 솔직한 성품으로, 손호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 거리낌 없이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손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누군가 누현과 하소가 손호의 정책을 비판했다고 모함하자, 황제는 격노하여 누현을 파면하고 광주(현재의 광둥성 및 광시 좡족 자치구를 포함)로 유배 보냈다.. 관료 화핵이 누현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손호는 누현의 명성을 미워하여 누현과 그의 아들 누거(樓據)를 교지군으로 유배 보냈다.손호는 비밀리에 교지군에 주둔하고 있던 장군 장혁에게 누현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장혁은 누현이 도적과 싸우는 용감한 모습을 보고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장혁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후, 누현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손호가 보낸 비밀 명령을 발견하고 장혁이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현은 그 후 자결하였다.
천책 원년 (275년)에 손호가 하소를 주살하고 가족을 임천군으로 강제 이주시킬 때, 누현의 아들과 손자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 일화
누현은 광주(廣州)에 이르러, 중상의 옛 거처를 거닐다가 (중상의 최후가) 몹시 비통하여 견딜 수 없었다.[4]
예전에 산월이 반란을 일으켜 지나가는 곳마다 도륙하였다. 누현이 사는 마을에 이르러 누현의 집 뜰에 들어가 솥과 시루를 돌아보았는데, 부뚜막에 걸려 있었다.
遠使餘賊怖見奪取|원사여적포견탈취|멀리서 다른 도적이 와 빼앗을까 겁이 나는구나!중국어
그러고는 이들을 닦고 우물 속에 집어넣고 돌아갔다. 누현의 집안은 훗날 돌아와서 솥과 시루를 다시 건졌다.[5]
4. 평가
육개는 건형 원년(269년)에 사망하기 직전, 국가를 지탱할 인물 중 한 명으로 누현의 이름을 언급했다.[3] 육기도 《변망론》에서 오나라 말기의 건전했던 시기의 정치를 지탱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누현을 꼽았다.
설영은 누현을 "절개가 있고, 스스로 재능을 키운 인물"로 평가하며, 왕번, 하소, 위소와 동등한 인물로 평가했고, 호충 또한 위소를 제외한 세 명의 인물에 대해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굳이 말하자면 누현이 가장 뛰어났다"라고 평했다.
진수는 설영과 호충의 평가를 참고하면서도 "혼란한 정치 시대에 고관으로 있었으니,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평했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손호의 소행을 간하다가 분노를 사 처형당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이름만 언급된다.[1]
6. 친족 관계
누현에게는 누거라는 아들이 있었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2]
서적
三国志 呉志 賀邵伝
[3]
문서
姚信・楼玄・賀邵・張悌・郭逴・薛瑩・滕脩・陸喜・陸抗
[4]
서적
누승선전
[5]
서적
누승선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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