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포드고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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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련 정치인으로, 1960년대 소련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하며 우크라이나 경제 재건에 힘썼으며, 1960년에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와 함께 집단 지도 체제를 이끌었으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1977년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국가원수로서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198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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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포드고르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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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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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러시아어: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Подго́рный 우크라이나어: Микола Вікторович Підгорний, 미콜라 빅토로비치 피드호르니 |
출생일 | 1903년 2월 18일 (구력 2월 5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카를로프카 (현재 우크라이나 카를리우카) |
사망일 | 1983년 1월 12일 |
사망지 |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
안장지 |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
배우자 |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포드고르나야 (1908–1995) |
자녀 | 나탈리아, 레시아 |
직업 | 기계 공학자, 공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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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 |
정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1930–1976) |
주요 직책 | |
소비에트 연방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재임 시작: 1965년 12월 9일 재임 종료: 1977년 6월 16일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재임 시작: 1964년 10월 14일 재임 종료: 1965년 12월 6일 |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재임 시작: 1957년 12월 26일 재임 종료: 1963년 7월 2일 |
기타 정치 경력 | |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1953–1957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위원회 사무국 부의장 | 1958년 1월–3월 |
우크라이나 공산당 하르키우 지역 위원회 제1서기 | 1950–1953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 식량 산업 담당 부인민위원 | 1944-1946 |
모스크바 식품 산업 기술 연구소 소장 | 1942-1944 |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식량 산업 담당 부인민위원 | 1940–1942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위원회 식량 산업 담당 부인민위원 | 1939–1940 |
중앙 기관 구성원 |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 1963–1965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회원 | 1960–1977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 위원 | 1958–1960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회원 | 1952–1982 |
지도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니콜라이 빅토로비치 포드고르니는 1903년 2월 18일(구력 2월 5일) 러시아 제국의 카를로프카(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카를로프카 지역 콤소몰 창립에 참여했으며,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콤소몰 서기를 지냈다. 17세 때(1920년경) 카를로프카의 기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1926년 지역 노동자 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포드고르니는 모스크바 식품산업기술대학 학장이 되었다. 나치 독일로부터 우크라이나 SSR이 해방된 후, 그는 우크라이나 SSR 및 소련 정부의 명령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소련의 통제를 다시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 후에는 잠시 우크라이나 SSR 식품산업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다시 맡았으나, 1946년에는 우크라이나 SSR 장관평의회의 상임대표로 임명되었다.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 소련에서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서기장, 알렉세이 코시긴을 정부 수반(총리), 그리고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국가 원수(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로 하는 이른바 '트로이카'로 알려진 집단 지도체제가 들어섰다.[5] 포드고르니는 흐루쇼프 축출 과정에서 브레즈네프와 협력하여 중앙위원회에 흐루쇼프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그의 해임에 일조했다.[4]
1931년 키예프 식품 산업 기술 연구소(현재 국립 식품 기술 대학교)를 졸업하고 설탕 산업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37년 빈니차에서 부수석 기술자로, 1939년에는 카멘네츠-포돌스크주(현재 흐멜니츠키주) 설탕 신탁의 수석 기술자로 승진했다. 1939년 말 우크라이나 SSR 식품 산업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0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식품 산업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2]
3. 소련 지도부로 부상 (1942-1964)
1950년 4월, 포드고르니는 하르키우 주의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지역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이후 1953년에는 CPU 중앙위원회(CC) 제2서기로 승진했다. 1957년부터 1963년까지는 CPU CC 제1서기를 역임했는데, 이는 사실상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위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경제를 재건하고 현대화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산업 및 농업 생산량 증대와 주민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했으며, 당 조직 강화와 새로운 간부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2]
1960년, 포드고르니는 소련의 최고 정책 결정 기구인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CPSU)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소련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는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피보호자이자 측근으로 여겨졌으며, 1960년 흐루쇼프와 함께 유엔 본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캐나다, 유고슬라비아 등 여러 국가에 소련 특사로 파견되었다. 포드고르니의 정치적 신념은 흐루쇼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보다도 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61년, 포드고르니는 우크라이나 SSR의 곡물 수확량 감소 원인을 "악천후" 탓으로 돌렸다가, 곡물이 "도난당하고" "약탈당했다"고 주장한 흐루쇼프의 눈 밖에 잠시 나기도 했다.[3] 그러나 1962년에는 흐루쇼프에게 농업 생산량이 다시 증가했다고 보고하며 신임을 회복했다. 그의 지휘 아래 우크라이나 SSR은 국가 곡물 공급량을 전년 대비 두 배로 늘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농업 관리 능력 덕분에 서방 제1세계 관측통들은 포드고르니를 흐루쇼프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으로 간주하기도 했다.[3]
하지만 1964년, 흐루쇼프를 제1서기 및 총리직에서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포드고르니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협력하여 중앙위원회에서 흐루쇼프의 경제 운영 실패를 비판하고 그를 의지주의와 오만한 행동으로 규탄하는 데 가담했다. 결국 브레즈네프와 그의 동맹 세력의 영향을 받은 정치국 위원들은 흐루쇼프 해임을 결정했다.[4]
4. 흐루쇼프 이후의 권력 투쟁 (1964-1977)
흐루쇼프 실각 직후 포드고르니는 서기국의 제2서기로서 당 조직 부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자리는 상당한 권력 기반이 될 수 있었기에 서기장 브레즈네프에게는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졌다. 브레즈네프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고, 포드고르니와의 경쟁 관계가 형성되었다. 결국 포드고르니는 1965년 12월, 서기국 제2서기 자리에서 물러나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뒤를 이어 명목상의 국가 원수인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포드고르니가 실질적인 권력 경쟁에서는 밀려났음을 시사하며, 이후 브레즈네프에게 권력이 점차 집중되면서 집단 지도체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화되었다.
4. 1. 권력 투쟁
니키타 흐루쇼프가 제1서기직에서 물러난 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서기장, 알렉세이 코시긴을 정부 수반,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국가 원수로 하는 이른바 '트로이카'로 알려진 집단 지도체제가 구성되었다.[5]
국가 원수가 되기 전 포드고르니는 소련 공산당 서기국의 제2서기로서 당 조직 부문을 담당했다. 이 자리는 포드고르니가 당 조직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을 수 있게 하여 서기장인 브레즈네프의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잠재적 위협 때문에 브레즈네프는 KGB 의장 알렉산드르 셸레핀과 손을 잡고 포드고르니와 코시긴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포드고르니의 입지는 브레즈네프와 그의 동맹 세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위협받았다. 1965년 2월, ''에코노미체스카야 가제타'' 신문은 포드고르니가 과거에 이끌었던 하르키우 당 조직과 그 경제 운영 방식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는 포드고르니를 간접적으로 공격하며 소련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그의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시도였다. 이에 포드고르니는 1965년 아제르바이잔 SSR의 수도 바쿠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 지도부의 중공업 정책을 비판하며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는 브레즈네프와 셸레핀뿐만 아니라 지도부 내 보수파 전체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고, 포드고르니 자신에게는 평생의 후회로 남을 결정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전까지 갈등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미하일 수슬로프마저 브레즈네프의 편에 서서 포드고르니의 견해를 "수정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1965년 12월 말, 포드고르니는 서기국 제2서기 자리를 내놓고 미코얀의 뒤를 이어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즉 국가 원수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서기장직을 향한 그의 야망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가 원수가 된 이후에도 포드고르니는 브레즈네프 치하 정치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유지했다. 코시긴, 안드레이 키릴렌코 등과 함께 그는 침체 시대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개방적인 목소리를 내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여러 차례 연설하고 활발한 국빈 방문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했다. 이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1960년대 후반 소련 사회 일각에서는 그가 코시긴을 대신해 총리직에 오르거나 심지어 브레즈네프를 밀어내고 서기장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1971년 소련 공산당 제24차 대회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최고 지도자 지위를 재확인했지만, 포드고르니는 그해 말 중화인민공화국과 북베트남에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하며 여전히 소련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브레즈네프가 서방과의 관계 개선 등 보다 유화적인 노선을 취하자, 포드고르니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화해적 태도, 서방과의 군축 협상, 그리고 동독이 베를린 협상에서 양보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에 반대하며 당내 강경파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7] 정치국 내에서는 겐나디 보로노프와 페트로 셸레스트 등이 그를 지지했다. 이론적으로 포드고르니와 코시긴이 특정 사안에 대해 합의하면 브레즈네프는 소수파가 되어 그들의 결정을 따라야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잦은 정책적 충돌로 인해 이러한 견제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브레즈네프는 1970년대 초반부터 포드고르니를 권좌에서 밀어내려는 시도를 노골화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소련의 외교 의례 서열상 국가 원수인 포드고르니가 서기장인 자신보다 앞선다는 점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1970년 9월부터 브레즈네프는 정치국 내에서 포드고르니 축출을 위한 세력 규합에 나섰다. 당시 타임지는 모스크바 정가에 브레즈네프가 포드고르니 제거에 실패할 경우, 동독이나 불가리아, 루마니아처럼 국가평의회를 신설하고 자신이 의장을 맡아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동시에 장악하려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보도했다.[7] 그러나 1970년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지지 세력은 5표에 불과했고, 다른 7명의 정치국 위원들은 브레즈네프에게 더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여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드고르니를 무리하게 제거하는 것은 집단 지도체제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소련 엘리트층의 반발을 살 수 있었다.[7]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브레즈네프는 점차 정치국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갔고,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집단 지도체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4. 2. 외교 활동
니키타 흐루쇼프의 측근으로서 포드고르니는 외교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1960년 흐루쇼프와 함께 유엔 본부를 방문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캐나다, 유고슬라비아에 소련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최고 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즉 국가원수가 된 이후 포드고르니는 주로 의전적인 외교 활동을 담당했다. 1967년 6일 전쟁 발발 직전에는 이집트 부통령 안와르 사다트에게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 보고서를 전달하기도 했다.[6]
197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을 국빈 방문했다. 당시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었기에, 포드고르니는 소련-베트남 관계 논의를 위해 베트남을 자주 방문했다. 1973년에는 핀란드와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집권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방문했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포드고르니는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보다도 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외교 의례 서열상 국가원수인 포드고르니가 서기장인 브레즈네프보다 앞서는 것에 불만을 품은 브레즈네프는 결국 1977년 새 헌법 제정을 통해 당 서기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하여 포드고르니를 실각시켰다.
5. 실각과 은퇴 (1977-1983)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포드고르니의 존재를 위협으로 느꼈고, 체르넨코에게 포드고르니의 지위를 약화시킬 방법을 찾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당 지도자가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헌법 초안이 마련되었다. 1977년 10월 7일, 소련 사회에서 당의 우월성을 더욱 강화한 1977년 소련 헌법이 승인되면서, 포드고르니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1977년 포드고르니의 실각은 브레즈네프 시대 후반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실각 직전까지 포드고르니는 브레즈네프 다음가는 권력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7년 5월 24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그리고리 로마노프의 제안으로 포드고르니는 만장일치로 폴리트뷰로 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이 결정은 포드고르니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투표 직후 그는 폴리트뷰로 석상에서 내려와 일반 위원들 사이에 앉았다. 폴리트뷰로에서 제명된 후 그의 이름은 소련 언론에서 점차 언급되지 않기 시작했다. 약 3주 뒤인 1977년 6월 16일, 포드고르니는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직에서도 공식적으로 해임되었다. 당시 소련 언론은 포드고르니가 데탕트와 소비재 생산 증대에 반대했기 때문에 은퇴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브레즈네프의 권력 장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해석된다.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고령을 고려하여 국가 원수로서의 일부 업무를 분담시키기 위해 최고 소비에트에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 제1부의장 직책을 신설했다. 이 자리에는 76세의 노련한 외교관 출신 바실리 쿠즈네초프가 임명되었다.[8]
권좌에서 물러난 포드고르니의 이후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적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소련 언론에서도 우르호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과의 만남 이후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실각 후에도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직은 잠시 유지했으나, 1978년 11월 크렘린 대궁전에서 열린 10월 혁명 61주년 기념식 참석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주소련 일본 대사였던 우오모토 도키치로(Tokichiro Uomoto)의 목격담에 따르면, 포드고르니는 브레즈네프, 코시긴, 그로미코 등 과거 동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대화를 나누었고, 이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실각한 고위 정치인이 공식 행사에 나타나 활발히 교류하는 것은 당시 소련의 관례에 어긋나는 이례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사건 직후 포드고르니는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직마저 상실했다. 또한, 그의 실각 이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드미트리 날반디안의 1977년 작 그림 '붉은 광장의 소련 지도자들'에서 브레즈네프와 코시긴 사이에 서 있던 포드고르니의 모습이 지워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9]
포드고르니는 은둔 생활을 이어가다 1983년 1월 12일 키예프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2]
6. 평가
포드고르니는 이오시프 스탈린( Иосиф Сталин|이오시프 스탈린ru )의 대숙청으로 인해 사라진 노련한 볼셰비키의 자리를 메우며 스탈린의 독재 체제 하에서 성장한 ‘출세한 세대’의 일원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나 알렉세이 코시긴과 마찬가지로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국가 및 경제 관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당료(黨僚)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170. Memorandum From the President's Assistant for National Security Affairs (Kissinger) to President Nixon
https://history.stat[...]
history.state.gov
1971-04-10
[2]
웹사이트
ru:Подгорный Николай Викторович
http://www.warheroes[...]
War Heroes
2010-11-18
[3]
잡지
The Leading Contenders to Succeed a Tired Khrushchev
http://www.time.com/[...]
1962-06-29
[4]
서적
Khrushchev: The Man and His Era
https://archive.org/[...]
W. W. Norton & Co.
[5]
서적
Khrushchev: The Man and His Era
https://archive.org/[...]
W. W. Norton & Co.
[6]
서적
Bargaining and learning in recurring crises: the Soviet-American, Egyptian-Israeli, and Indo-Pakistani rivalrie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7]
잡지
Soviet Union: Whoa, Comrade Brezhnev
http://www.time.com/[...]
1971-12-06
[8]
잡지
Soviet Union: Veep in Moscow
http://www.time.com/[...]
1977-10-17
[9]
서적
Mosukuwa Tokuhain Houkoku
Iwanami Shin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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