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누마 오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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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누마 오키나리는 일본의 무사시국이와쓰키번주 오카 다다히로의 아들로, 1855년에 태어났다. 1869년 고쿠보번주 다누마 오키타카의 양자가 되었고, 1870년 오키타카가 사망하자 고쿠보 번지사가 되었다. 번교 확대 등 문치 정책을 펼쳤으나,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지사에서 해임되었다. 1873년 가독을 다누마 지에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925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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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마 오키나리 | |
---|---|
기본 정보 | |
씨족 | 오오카 씨 → 다누마 씨 |
묘소 | 야나카 묘원 |
시대 | 에도 시대 후기 - 다이쇼 시대 |
출생 | 안세이 2년 (1855년) 7월 |
사망 | 다이쇼 14년 (1925년) 9월 3일 |
다른 이름 | 금미 (어린 시절 이름), 오키나리 |
가문 | |
부모 | 오오카 다다히로 다누마 오키타카 |
형제자매 | 오오카 다다쓰라, 이나바 마사요시, 오키나리, 안도 모 |
자녀 | 지에 |
관직 | |
주군 | 메이지 천황 |
번 | 가즈사고쿠보 번지사 |
고쿠보 번 번주 | |
역임 기간 | 1870년 ~ 1871년 |
대수 | 2대 |
전임 | 다누마 오키타카 |
후임 | 폐번치현 |
2. 생애
안세이 2년(1855년) 7월, 무사시국 이와쓰키번주 오카 다다히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 메이지 2년(1869년) 고쿠보번주 다누마 오키타카의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인 메이지 3년(1870년) 2월 22일 양아버지 오키타카가 사망하자 가문을 상속받아 고쿠보 번지사에 취임했다. 번지사로서 학문 장려와 번교 확대 등 문치 정책을 펼쳤으나,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인해 지번사에서 해임되었다. 메이지 6년(1873년) 11월에는 가독을 오키타카의 장녀 지혜에게 물려주고 은거하며 다누마 가문을 떠났다. 다이쇼 14년(1925년) 9월 3일에 70세로 사망했으며, 야나카 영원에 묘가 있다. 생부인 오카 다다히로의 묘도 인접하여 건립되어 있다.
2. 1. 출생과 가계
안세이 2년(1855년) 7월, 무사시국이와쓰키번주 오카 다다히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2. 2. 고쿠보번 번지사 시절
메이지 2년(1869년)에 고쿠보번주 다누마 오키타카의 양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메이지 3년(1870년) 2월 22일, 양아버지 오키타카가 사망하면서 가문을 상속받아 고쿠보번의 지번사(번의 통치자)로 취임했다. 번지사로서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번교(번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확대하는 등 문치(文治) 정책을 펼쳤다.메이지 4년(1871년) 2월 14일에는 번의 행정을 대참사(번의 고위 관리)에게 맡기고 유학을 떠나는 것을 허가받았으며, 같은 해 2월 25일에는 도쿄로 이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7월 14일,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단행된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행정 개혁) 조치에 따라 번지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3. 폐번치현과 그 이후
메이지 3년(1870년) 2월 22일, 양아버지 다누마 오키타카가 사망하자 가문을 상속받아 코쿠보 번지사에 취임했다.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번교를 확대하는 등 문치 정책을 채택했다. 메이지 4년(1871년) 2월 14일, 번정을 대참사에게 맡기고 유학을 허가받았다. 같은 해 2월 25일에는 도쿄로 이주했다.같은 해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인해 지번사에서 해임되었다.
메이지 6년(1873년) 11월, 가독을 오키타카의 장녀 지혜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동시에 다누마 가문에서도 떠났다. 다이쇼 14년(1925년) 9월 3일에 70세로 사망했다. 야나카 영원에 묘가 있으며, 그의 생부인 오카 다다히로의 묘도 인접하여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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