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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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로정은 과거 이와테현에 존재했던 정으로, 1889년 4월 다로촌으로 발족하여 여러 차례 쓰나미 피해를 입었다. 특히 1896년과 1933년의 지진으로 큰 인명 피해를 겪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58년 해발 10m가 넘는 방조제를 건설했다. 2005년 니사토촌과 미야코시에 합병되었으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방조제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로정은 산리쿠 철도, 다로역, 삼왕암 등의 명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1986년 마쓰오 촌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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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다이촌은 이와테현 북동부 해안 산악 지형에 위치하며, 상업적 어업과 농업이 지역 경제의 기반이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방조제로 큰 피해를 면했으며, 아키타현 미타네정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다로정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위치 | |
![]() | |
행정 | |
국가 | 일본 |
지방 | 도호쿠 지방 |
현 | 이와테현 |
군 | 시모헤이군 |
시장 | 알 수 없음 |
부시장 | 알 수 없음 |
시청 주소 | 알 수 없음 |
지리 | |
면적 | 101.05 km² |
인구 | |
총 인구 | 4,570명 |
인구 조사 기준 | 2005년 6월 1일 |
인구 밀도 | 45.2명/km² |
시간대 | |
시간대 | JST |
협정 세계시 오프셋 | +09:00 |
상징 | |
나무 | 적송 |
꽃 | 해당화 |
새 | 괭이갈매기 |
기타 정보 | |
우편 번호 | 027-0301 |
폐지 정보 | |
폐지일 | 2005년 6월 6일 |
폐지 사유 | 신설 합병 |
폐지 상세 | 구 미야코시, 다로정, 니사토촌 → 신 미야코시 |
현재 자치체 | 미야코시 |
2. 역사
다로 정은 "쓰나미 다로(津波太郎)"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예전부터 쓰나미 피해가 잦았던 곳이다. 1611년 게이초 산리쿠 지진 쓰나미로 마을이 거의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6년 메이지 산리쿠 지진 때는 마을 가구 대부분이 유실되고 인구의 83%가 사망했다.[1]
1933년 쇼와 산리쿠 해일 당시 다로촌은 559가구 중 500가구가 유실되었고, 인구 2773명 중 911명(32%)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산리쿠 연안 마을 중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이마무라 아키쓰네 도쿄대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은 피해 복구 대책으로 가옥을 높은 지대로 옮길 것을 제안했고, 내무성과 현 당국도 이를 지지하며 저리 융자 등의 지원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다로는 당시 규모가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전 부지 확보가 어려웠고, 주변에 적당한 고지대도 없었다. 또한 해안에서 멀어지면 주요 산업인 어업이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당시 촌장이었던 세키구치 마쓰타로를 비롯한 마을 당국은 고지대 이전 대신 방조제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부흥 계획을 고안했다. 이들은 대장성으로부터 재해지 고지대 이전 택지 조성 대출 자금을 빌려 방조제 공사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1960년 칠레 지진 해일 당시 다로 지역의 해일 높이는 3.5m로 제방에 미치지 못했다.[16] 다음날 보도에서 제방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해외 시찰단이 방문하는 등 다로 정의 방조제는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2003년에는 "해일 방재 마을"을 선언하고 방재 교육과 훈련에 힘썼다.
1961년 5월 28일 신자토촌에서 시작된 대규모 산불이 정내로 번져 다로 광산의 광산 주택 448채를 비롯해 아오노타키, 셋타이, 카시우치, 코보리우치, 산본기, 신타의 463채가 전소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12]
1964년 촌장이 제정되었다.[13]
2. 1. 연혁
- 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으로 히가시헤이군 다로촌이 발족했다.
- 1944년 3월 10일 - 정제 시행으로 다로정이 되었다.
- 1958년 3월 - 최초로 해발 10m가 넘는 방조제가 완성되었고, 이후에도 증설을 계속했다.
- 1960년 5월 24일 - 1960년 발디비아 지진의 영향으로 해일이 내습했지만, 방조제에는 도달하지 않아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 1979년 5월 24일 - 길이 2433m, 해발 10m의 방조제가 완공되었다.
- 2005년 6월 6일 - 니사토촌과 함께 미야코시와 합병하여 새로운 미야코시의 일부가 되었다.
- 2011년 3월 11일 -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다로 지구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2. 2. 다로의 방조제
1933년 쇼와 산리쿠 지진 해일 이후, 다로 정은 이마무라 아키쓰네 도쿄대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방조제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부흥 계획을 세웠다. 1934년에 시작된 제1기 공사는 중일 전쟁으로 인해 1940년에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재개되어 1958년에 1차 완공되었다. 이후 증축을 거쳐 1966년에 최종 완공된 방조제는 총 길이 2433m, X자 형태의 거대한 규모였다. 총 공사비는 1980년 당시 화폐 가치로 약 50억엔에 달했다.[15]1960년 칠레 지진 해일 당시에는 방조제가 효과를 발휘하여 다로 지구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16] 이를 계기로 다로 정의 방조제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해일 방재 마을"을 선언하고 방재 교육과 훈련에 힘썼다.
하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해일은 방조제를 넘어 다로 지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기존 방조제는 보강되어 2선 제방으로 활용되고, 새로운 1선 제방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2. 2. 1. 건설 배경
다로 정은 예로부터 "쓰나미 다로(津波太郎)"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쓰나미 피해가 잦았던 곳이다. 1611년 게이초 산리쿠 지진 쓰나미로 마을이 거의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6년 메이지 산리쿠 지진 때는 마을 가구 대부분이 유실되고 인구의 83%가 사망했다.[1]1933년 쇼와 산리쿠 해일 당시 다로촌은 559가구 중 500가구가 유실되었고, 인구 2773명 중 911명(32%)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산리쿠 연안 마을 중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1] 이마무라 아키쓰네 도쿄대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은 피해 복구 대책으로 가옥을 높은 지대로 옮길 것을 제안했고, 내무성과 현 당국도 이를 지지하며 저리 융자 등의 지원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다로는 당시 규모가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전 부지 확보가 어려웠고, 주변에 적당한 고지대도 없었다. 또한 해안에서 멀어지면 주요 산업인 어업이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당시 촌장이었던 세키구치 마쓰타로를 비롯한 마을 당국은 고지대 이전 대신 방조제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부흥 계획을 고안했다. 이들은 대장성으로부터 재해지 고지대 이전 택지 조성 대출 자금을 빌려 방조제 공사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1934년 제1기 방조제 공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고지대 이전을 주장하며 난색을 표하던 국가와 현도 협상 끝에 비용 부담에 동의했고, 2년째부터는 국가와 현이 전액 공사비를 부담하는 공공사업으로 전환되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이 확대되면서 자금과 자재가 부족해져 1940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2. 2. 2. 건설 과정
1933년 쇼와 산리쿠 지진으로 다로 마을은 559가구 중 500가구가 유실되고, 인구 2773명 중 911명(32%)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 이마무라 아키쓰네 도쿄대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내무성과 현 당국은 주택을 높은 곳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다로는 부지 확보와 어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당시 촌장이었던 세키구치 마쓰타로는 고지 이전 대신 방조제 건설을 중심으로 한 부흥안을 제시했다. 제1기 공사는 1934년에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국가와 현이 난색을 표했지만 협상 끝에 비용 부담에 동의하여 공공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으로 인해 1940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1954년에 공사가 재개되어 1958년에는 총 길이 1350m, 높이 10m의 대방조제가 완성되었다.[15] 이후 증축을 거쳐 1966년에 최종 완공되었으며, 총 공사비는 1980년 당시 화폐 가치로 약 50억엔이었다.
1960년 칠레 지진 해일 당시 다로 지역의 해일 높이는 3.5m로 제방에 미치지 못했다.[16] 다음날 보도에서 제방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해외 시찰단이 방문하는 등 다로 마을의 방조제는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해일은 다로 지구에 큰 피해를 입혔다. 해안 쪽 방조제가 붕괴되고 시가지가 전멸 상태가 되었으며, 200명 가까운 사망자·실종자가 발생했다. 목격자들은 해일의 높이가 제방 높이의 두 배였다고 증언했다.
이후 구 방조제 중 남은 1km는 보강되어 2017년 3월에 2선 제방으로 준공되었고, 2021년 3월에는 높이 14.7m, 총 연장 1.2km의 1선 제방이 새롭게 완성되었다.
2. 2. 3.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그 이후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는 오후 3시 25분에 다로 지구에 도달했다. 해안 쪽 방조제는 약 500m에 걸쳐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시가지 중심부에 진입한 쓰나미로 인해 지구는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쓰나미의 높이는 제방 높이의 두 배였다"고 한다.[4][5] 시가지는 전멸 상태가 되었고, 지구 인구 4,434명 중 200명 가까운 사망자·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훌륭한 방조제가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이 피난을 늦었다"는 증언도 있다.[6]지진 발생 후 반년 뒤 조사에서는 주민의 80% 이상이 시가지의 고지대 이전에 찬성했다.[10][11][17] 다양한 논의 끝에, 기존 방조제 중 남은 1km는 침하된 부분을 높여 2선 제방으로 2017년 3월에 준공되었고, 2021년 3월에는 높이 14.7m, 총 연장 1.2km의 1선 제방이 새롭게 완성되었다.
3. 지리
구 다로 정은 현청 소재지인 모리오카시의 동쪽, 현재 합병된 지역 중심지인 미야코시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지역은 동쪽에 험준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산리쿠 리아스식 해안의 일부이다. 주요 지역 산업은 상업 어업이다.
다로 정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쓰나미 피해로 파괴되었다. 가장 초기에 기록된 것은 1611년이었으며, 이후 1896년 (1,859명 사망)과 1933년 (911명 사망)에도 유사한 쓰나미가 발생했다.[1] 반복적인 쓰나미 피해를 막기 위해 X자 형태의 2중 방파제가 건설되었다. 방파제는 해안 쪽과 육지 쪽 제방을 형성하는 두 개의 연결된 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2.4km 길이였다. 이 방파제는 "만리장성"을 뜻하는 일본어 "''반리의 장성:''"으로 알려졌다.[2]
10m 높이의 방파제는 다로를 보호하기 위해 30년간의 공사 끝에 1958년에 완공되었다.[2] 이론적으로 8m 높이의 파도를 막을 수 있는 이 방파제는 수로와 하천 둑을 사용하여 쓰나미를 마을 측면으로 우회하도록 설계되었다.[2] 지방 자치 단체는 정기적으로 비상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는 연례 쓰나미 훈련을 실시했으며, 자원봉사자들이 방파제 문을 닫고 주민들은 마을 위의 집결 지점으로 이동했다. 이 시스템은 1960년 발디비아 지진으로 발생한 칠레발 쓰나미가 다로를 강타했을 때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다로에서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3]
4. 교통
- 산리쿠 철도
- * 기타리아스선:타로역 - 셋타이역
현재는 구 정역에 신타로역이 존재하지만, 당시에는 개업하지 않은 상태였다.
5. 명소
- 삼왕암[18] 쓰나미를 견뎌내고 현존하지만, 현장에 내려가는 산책로가 유실되어 멀리서만 볼 수 있다.
- 마사키 해안
- 사가베
- 방조제
6. 자매 도시
7. 다로 정청
구(舊) 다로정 정청 청사는 1971년(쇼와 46년)에 완공되었다.[14] 철골 3층 건물로 연면적은 2347m2이다.[14] 2005년(헤세이 17년) 미야코시로 합병되면서 미야코시 다로 종합사무소가 되었다.[14]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때 청사는 침수되지 않아 약 200명이 피난했다.[14] 2020년(레이와 2년) 5월 다로 종합사무소의 신 청사 이전과 함께 폐쇄되었으며,[14] 건물은 해체하고 부지에 쓰나미 자료관을 건설할 예정이다.[14]
8. 평가
다로(田老)는 "쓰나미 타로(津波太郎, 다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예전부터 쓰나미 피해가 잦았다. 1611년 게이초 산리쿠 지진 쓰나미로 마을이 거의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96년 메이지 산리쿠 지진에서는 마을 인구의 83%인 1,867명이, 1933년 쇼와 산리쿠 지진에서는 인구의 32%인 911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산리쿠 연안 마을 중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15]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로 마을은 고지 이전 대신 방조제 건설을 선택했다. 1934년부터 시작된 방조제 건설은 중일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4년 재개되어 1958년에 1차 완공, 1966년에 최종 완성되었다. 총 연장 2,433m의 X자형 방조제는 1960년 칠레 지진 쓰나미를 막아내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15] -- 2003년 다로 마을은 "쓰나미 방재 마을"을 선언하고 방재 교육과 훈련에 힘썼다.
그러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는 방조제를 넘어섰고, 다로 지구는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인구 4,434명 중 200명 가까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10][11][17] "훌륭한 방조제가 있다는 안심감이 오히려 피난을 늦췄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후 구 방조제 중 남은 부분은 보강되었고, 2021년에는 높이 14.7m의 새로운 방조제가 완성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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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津波、10メートルの防潮堤越える…岩手県宮古・田老地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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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
201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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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s tsunami defences brutally exp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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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震災6年 手をつなぎ海に黙とう 岩手・宮古
https://mainichi.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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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波、10メートルの防潮堤越える…岩手県宮古・田老地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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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災害史事典 1868-2009
日外アソシエーツ
[13]
문서
図典 日本の市町村章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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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田老町役場庁舎、解体前に公開 震災復興支えた拠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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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北新報
202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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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古市田老地区(旧田老町)防潮堤 ~万里の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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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戦後史証言プロジェクト 日本人は何をめざしてきたのか 2013年度「地方から見た戦後」 第6回 三陸・田老 大津波と“万里の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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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波対策“日本一”も全滅 防潮堤に限界…岩手・田老ル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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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王岩
http://www.city.miya[...]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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