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노 기미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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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치바나노 기미나가는 궁마와 지략에 능했던 인물로, 겐페이 전쟁 시기에 활약했다. 그는 원래 헤이케의 가신이었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귀순하여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 편에서 싸웠다. 단노우라 전투 이후 헤이케의 총수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맡았으며, 그 후손은 히젠국으로 뻗어나가 오가시마 씨로 번영했다. 다치바나노 기미나가의 출생에 대해서는 이요 다치바나 씨 또는 중앙 귀족 다치바나 씨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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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노 기미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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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이요 귤씨 또는 귤씨칙광류 |
시대 | 헤이안 시대 말기 |
출생 | 불명 |
사망 | 불명 |
관위 | 우마노죠 |
주군 | 평지성 → 원뢰조 |
씨족 | 이요 귤씨 또는 귤씨칙광류 |
부모 | 귤공광 |
자녀 | 공충、공업、공경、공중 |
2. 출자
다치바나노 기미나가의 출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덴교의 난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토벌한 이요 타치바나 씨 다치바나노 토오야스의 자손이라는 설이고[1][2], 다른 하나는 중앙 귀족 다치바나 씨의 후예라는 설이다.[3]
2. 1. 이요 다치바나 씨(伊予橘氏) 설
기미나가의 출자에 대한 설 중 하나는 덴교의 난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토벌한 다치바나노 토오야스의 자손이라는 것이다.[1] 다치바나노 토오야스는 오치 씨 일족의 이요 다치바나 씨이며, 토오야스에서 기미나가로 이어지는 계보도 존재한다.[2]2. 2. 중앙 귀족 다치바나 씨(橘氏) 설
다른 하나는 중앙 귀족 다치바나 씨의 자손이라는 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기미나가는 산기 다치바나노 요시후루의 손자인 다치바나노 노리미츠의 아들 스에미치의 현손으로 여겨진다.[3] 또한, 그의 아버지는 토바 천황으로부터 공(公)이라는 글자를 하사받은 다치바나노 키미미츠라고 한다.3. 약력
궁마(弓馬)와 지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원래 다이라노 도모모리의 가신(家人)으로 헤이케(平家)를 섬겼으나, 지쇼 4년(1180년) 12월에 헤이케를 떠나 동료였던 가가미 나가키요(加々美長清)의 중개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휘하로 들어갔다.[12][4]
'교토 사정에 밝다'(京に馴るるの輩)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으며, 겐랴쿠 원년(1184년)에는 다이라노 요리모리의 교토 귀환 전별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휘하에서 싸웠고,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자 포로가 된 헤이케 총수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직접 집행하고 이를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하였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과거 헤이케의 가신이었음에도 변절한 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미나가의 자손은 히젠국으로 퍼져나갔으며, 특히 둘째 아들 기미나리(公業)가 영지로 삼았던 오가시마(小鹿島)[14](현 아키타현 오가시)의 지명을 따 코지카시마 씨(小鹿島氏)로 번영하였다.
3. 1. 헤이케 가신 시절
궁마술(弓馬術)과 지략에 뛰어난 인물로, 원래 다이라노 도모모리의 가신(家人)으로서 헤이케(平家)를 섬겼다. 그러나 지쇼 4년(1180년) 12월, 헤이케와의 관계를 끊고 동료였던 가가미 나가키요의 중개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휘하로 들어갔다.과거 아와타구치(粟田口)에서 당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가신이었던 사이토 사네모리 및 가타키리 가게시게와 분쟁이 벌어졌을 때, 요리토모의 할아버지이자 두 사람의 주군이었던 다메요시가 이 문제를 조정에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토와 가타키리를 꾸짖으며 기미나가의 편을 들어준 일이 있었다. 기미나가는 이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겐지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친척을 찾아 도토미국으로 내려가 가마쿠라로 향했다고 전해진다.[4]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데, 가타키리 가게시게는 헤이지의 난(1159년)에서 전사했고, 미나모토노 다메요시는 그보다 앞선 호겐의 난(1156년) 직후 처형되었으므로, 기미나가가 관련된 분쟁은 1180년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기미나가는 '교토 사정에 밝은 인물'이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다. 겐랴쿠 원년(1184년), 헤이케 일족이었으나 서쪽으로 낙향하지 않고 교토에 남아 요리토모에게 귀순했던 다이라노 요리모리가 교토로 돌아올 때 열린 전별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지휘 아래 전투에 참여했으며,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자 포로가 된 헤이케의 총수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직접 집행했다. 또한 다이라노 시게히라의 최후와 함께 이 사실을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했다. 『헤이케 이야기』의 「대신의 처형」(大臣殿被斬) 부분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기미나가가 과거 헤이케의 가신이었던 사실을 잊고 손바닥 뒤집듯 변절한 모습을 비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귀순
궁마술과 지략에 뛰어난 인물로, 원래 다이라노 도모모리( 平知盛일본어 )의 가신(家人)으로 헤이케( 平家일본어 )를 따랐으나 지쇼 4년(1180년) 12월에 헤이케를 떠났다. 동료였던 카가미 나가키요( 加々美長清일본어 )의 중개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頼朝일본어 )의 휘하로 들어갔다. 과거 교토의 아와타구치( 粟田口일본어 )에서 당시 미나모토노 타메요시( 源為義일본어 )[11]의 가신이었던 사이토 사네모리( 斎藤実盛일본어 ) 및 카타키리 카게시게( 片切景重일본어 )와 분쟁이 벌어졌을 때, 요리토모의 할아버지이자 두 사람의 주군이었던 타메요시가 이 문제를 조정에 호소하지 않고 사이토와 카타키리를 꾸짖으며 기미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일이 있었다. 이 일로 겐지 가문( 源氏일본어 )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던 기미나가는 친척을 찾아 도토미국( 遠江国일본어 )으로 내려가 가마쿠라로 향했다고 전해진다.[12][4] 하지만 실제로는 카타키리 카게시게[13]는 헤이지 원년(1159년)에 있었던 헤이지의 난( 平治の乱일본어 )에서 전사했고, 타메요시는 그 이전인 호겐 원년(1156년) 호겐의 난( 保元の乱일본어 ) 직후에 처형되었기 때문에, 이 분쟁은 지쇼 4년(1180년)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기미나가는 "교토에 익숙한 무리"( 京に馴るるの輩일본어 )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다. 겐랴쿠 원년(1184년)에는 헤이케의 일원이었으나 서쪽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교토에 남아 요리토모에게 귀순하여 우대받았던 다이라노 요리모리( 平頼盛일본어 )가 교토로 돌아오는 것을 맞아 열린 송별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 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源義経일본어 )의 휘하에서 싸웠으며, 이듬해인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 壇ノ浦の戦い일본어 )에서 헤이케가 멸망한 후, 포로가 된 헤이케의 총수 다이라노 무네모리( 平宗盛일본어 )의 처형을 맡았다. 또한 이 일과 다이라노 시게히라( 平重衡일본어 )의 죽음에 대해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하였다. 『헤이케 이야기』( 平家物語일본어 )의 「대신전 참수」( 大臣殿被斬일본어 ) 부분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기미나가가 한때 헤이케의 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거는 개의치 않고 손바닥 뒤집듯 변절한 모습을 비판했다고 한다.
3. 3. 겐페이 전쟁에서의 활약
궁술과 마술, 그리고 지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원래는 다이라노 도모모리의 가신(家人)으로 헤이케를 섬겼으나, 지쇼 4년(1180년) 12월에 헤이케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후 동료였던 가가미 나가키요(加々美長清)의 중개를 통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휘하로 들어갔다.과거 교토의 아와타구치(粟田口)에서 당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11]의 가신이었던 사이토 사네모리 및 가타키리 가게시게와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들의 주군이자 요리토모의 할아버지였던 다메요시가 이 문제를 조정에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토와 가타키리를 꾸짖으며 기미나가의 편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기미나가는 이때의 일로 겐지 가문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으며, 친척을 찾아 도토미국으로 내려갔다가 가마쿠라로 가서 요리토모에게 합류했다고 전해진다.[12][4] 하지만 실제로는 가타키리 가게시게[13]는 헤이지의 난 (1159년)에서 전사했고, 다메요시는 그보다 앞선 호겐의 난 (1156년) 직후에 처형되었기 때문에, 기미나가가 관련된 분쟁은 지쇼 4년(1180년)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
'교토 사정에 밝다'(京に馴るるの輩)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다. 겐랴쿠 원년(1184년), 헤이케 일족이었으나 서쪽으로 낙향하지 않고 교토에 남아 요리토모에게 귀순하여 우대받던 다이라노 요리모리가 교토로 돌아갈 때 열린 전별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지휘 아래 전투에 참여했으며,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자 포로로 잡힌 헤이케의 총수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담당했다. 기미나가는 이 일과 다이라노 시게히라의 최후에 대해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했다.
『헤이케 이야기』의 「대신의 처형」(大臣殿被斬) 편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기미나가가 과거 헤이케의 가신이었던 점을 들어 그의 변절을 비판했다고 한다. 옛 주군이었던 다이라노 도모모리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음에도, 기미나가는 아무렇지 않게 헤이케 총수의 처형을 집행하는 등, 과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모습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3. 4. 헤이케 멸망 이후
"교토에 익숙한 무리"라는 이유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다. 겐랴쿠 원년(1184년), 헤이케 일족이었으나 교토에 남아 요리토모에게 귀순했던 다이라노 요리모리가 교토로 돌아갈 때 열린 전별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 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으며,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자 포로가 된 헤이케의 총수 다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직접 담당하였다. 이 일과 다이라노 시게히라의 최후에 대해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하였다. 『헤이케 이야기』「대신의 처형」(大臣殿被斬) 편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기미나가가 과거 헤이케의 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 변절한 모습을 비판했다고 전한다.기미나가의 자손은 히젠국으로 세력을 넓혔다. 특히 둘째 아들 기미나리(公業)가 잠시 영지로 삼았던 아키타현 오가시마(小鹿島)[14]의 지명을 따서 코지카시마 씨(小鹿島氏)를 칭하며 번영하였다.
4. 계보
참조
[1]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角川書店
1963
[2]
서적
系図纂要
[3]
서적
小鹿島橘系図
[4]
서적
吾妻鏡
1180-02-04 #治承4年12月19日
[5]
서적
系図纂要
[6]
서적
百家系図稿
[7]
서적
小鹿島橘系図
[8]
간행물
오치 씨(越智氏) 일족인 이요 다치바나 씨(伊予橘氏)의 당주.
[9]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角川書店
1963
[10]
간행물
헤이안 중기의 구교(965~?)로 관직은 종4위상 무쓰노카미(陸奥守)까지 올랐다. 다치바나 씨의 우지노쵸자(氏長者)이기도 했으며,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로써 《[[곤자쿠 이야기집]]》이나 《[[우지슈이 이야기]]》(宇治拾遺物語)에는 그가 밤길을 가다 도적의 습격을 당했으나 거꾸로 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여류 가인(歌人) [[세이 쇼나곤]]의 남편으로도 알려져 있다.
[11]
간행물
미나토모노 요리토모의 할아버지.
[12]
서적
아즈마카가미
1180-02-04 #지쇼(治承) 4년 12월 19일조.
[13]
간행물
원문에는 「片桐」로 되어 있다.
[14]
간행물
지금의 일본 [[아키타현]](秋田県) [[오가시]](男鹿市).
[15]
논문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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