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기 요시카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카기 요시카즈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야구 해설가이다. 사가미하라 시청을 거쳐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1977년과 1978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은퇴 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타격 코치, 쇼난 시렉스 코치, 톈진 라이언스 감독 등을 역임하며 1998년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2022년부터는 tvk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선수 - 사이토 아키오
사이토 아키오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1977년부터 1993년까지 활약하며, 오른손 투수 최초로 100승 100세이브를 달성하고 신인왕을 수상한 후 은퇴, 야구 해설가와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 다이요 웨일스 선수 - 사이토 아키오
사이토 아키오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1977년부터 1993년까지 활약하며, 오른손 투수 최초로 100승 100세이브를 달성하고 신인왕을 수상한 후 은퇴, 야구 해설가와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 다이요 웨일스 선수 - 마쓰바라 마코토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 마쓰바라 마코토는 사이타마현 출신으로 포수와 내야수로 활약하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전신팀인 다이요 웨일스의 간판 타자로 이름을 알렸고, 은퇴 후에는 여러 팀에서 코치를 역임하고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 일본의 야구 감독 - 후지타 모토시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MVP를 2연패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일본의 야구 감독 - 후루타 아쓰야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감독,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주전 포수로서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으로 MVP를 수상하고 도루 저지율 신기록을 세웠으며, 선수회 회장으로서 파업을 주도하여 선수 권익 신장에 기여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을 역임했다.
다카기 요시카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국적 | 일본 |
출생지 | 가나가와현 아이코군 아이카와정 |
생년월일 | 1949년 3월 13일 |
신장 | 178 |
체중 | 82 |
利き腕 | 좌 |
타석 | 좌 |
수비 위치 | 외야수, 1루수 |
프로 입단 연도 | 1971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외 |
첫 출장 | 1972년 9월 2일 |
최종 출장 | 1987년 6월 18일 (은퇴 경기)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후치노베 고등학교 |
사회인 | 사가미하라 시청 |
프로 | 다이요 웨일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72 - 1987) |
감독/코치 경력 | |
일본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87 - 2009)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1 - 2013) |
해외 | 톈진 라이언스 (2010) |
기타 정보 |
2. 선수 경력
사가미하라 시청을 거쳐 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1972년 ~ 1987년)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18] 미트 능력이 뛰어나 "장인 정신"이라고 칭송받는, 넓은 코스로 타구를 쳐내는 기술과 승부 근성을 겸비한 호타자였다.[13][18] 그립을 내리고 간격을 만들며, 헤드를 늦추면서 몸에 감기는 듯한 스윙이 특징이었다. 전성기에는 클린업, 말년에는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팀을 지탱했다.[13] 또한, 외야 수비도 능숙하고 안정감이 있었다.[13]
현역 시절에는 선배인 쓰지 야스히코 등에게 자주 장난을 걸었다고 한다.[18]
==== 프로 입단 전 ====
일찍 세상을 떠난 누나를 포함해 여자 형제가 3명 연달아 태어난 후 태어났고, 스님으로부터 "여계 혈통이라 남자아이가 자라기 어렵다. 이름에 '女(여자)' 자를 넣는 것이 좋다"라는 조언을 받은 부모님에 의해 "好一(고이치)"로 명명되었다[4]。 집안은 섬유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빴으며, 본인은 방임 속에서 자랐다[5]。
입학한 후치노베 고등학교에는 처음에는 야구부가 없었고, 2학년인 1966년에 자신이 교내에서 참가자를 모집하여 야구부를 창설했지만, 부원은 1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았고 감독도 없는 팀이었다[2][1]。 자신은 에이스이자 주포를 맡았으며,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3학년인 1967년 여름의 1경기뿐이었다. 요코하마 공원 평화 구장에서 도츠카 고등학교와 대결하여 0-5로 완봉패를 당했다[5]。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사가미하라시청 관계자에게 "시험을 보고 우리 야구부에 들어오지 않겠나?"라는 제안을 받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졸업 후 1968년부터 세무 수납과에 근무[6]하는 한편, 경식 야구부에 입부했다[5]。 3년째인 1970년에 투수 겸 외야수로 출전한 제20회 산업 대항의 관업 공사 부문에서 우승하여 본 대회에 진출했다. 1회전에서 마루젠 석유와 대결, 4회에 상대 에이스 히사타마 키요토로부터 백스크린에 3점 홈런을 날렸지만, 경기는 5-11로 패했다[1][7]。
1971년 11월에 야구부 후배와 함께 놀림으로 참가한 가와사키 구장에서의 입단 테스트에서 우연히 컨디션이 좋아[2] 합격해 버렸고, 한 달 동안 고민한 끝에 거절 전화를 걸었지만, 입단 테스트를 지켜본 아오타 노보루 헤드코치로부터 "이 타격 실력으로 시청에서 근무하는 것은 아깝다"라는 재차 고기에게 연락이 왔다[1]。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모처럼 전쟁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인생은 얼마든지 만회가 가능하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젊은 녀석들의 특권이다. 2~3년 병역에 갈 생각으로 프로 야구에 가라"라는 말로 입단을 결심하고[1], 같은 해 드래프트 외로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2]。 등번호는 "'''81'''", 계약금은 0이었다[13]。
==== 프로 선수 시절 ====
1972년 시즌 후반에 1군으로 승격되어 9월 2일 주니치 드래건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 1번 타자 겸 좌익수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첫 타석에서 이나바 미쓰오로부터 2루타를 날렸다. 시즌 후 등번호가 '35'로 변경되었다[13]。프로 1년차는 다카기가 현역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경험으로 꼽고 있다. 사가미하라 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드래프트 외 지명으로 입단한 다카기는 아마추어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해온 선수와는 분명히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에 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배트를 휘두르는 등 맹연습에 매진하여 손에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코칭스태프에게는 좀처럼 인정받지 못했고, 드래프트 지명으로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선수에게 우선적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것에 분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13]。 또한, 사생활에서는 교제하던 여성과 결혼했다[8]。
1973년에는 1군 출장 없이 시즌을 마쳤고, 시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을 뻔했지만, 다카기의 재능을 눈여겨본 동료 클리트 보이어가 구단에 이야기하여 잔류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다카기는 보이어를 은인으로 존경하고 있다[9]。 같은 해 시즌 후에는 1군 타격 코치 오키야마 미츠토시로부터 1년차 나가사키 게이이치와 함께 불려 매일 3명이서 묵묵히 연습에 매달려 하루에 1000번은 배트를 휘둘렀다[10]。
1974년에는 2년 만에 1군에 출전했지만, 단 2경기에서 2타석 출장에 그쳤고, 무안타로 끝났다. 시즌 후 등번호가 '63'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사생활에서는 부인과의 사이에 장녀가 태어났다[8]。
1975년에는 3년 만에 안타를 쳤지만 12경기 출장에 그쳤고, 현역에서 은퇴하고 다른 직업을 찾을까도 생각했지만, 부인의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말에 마음을 돌렸다[8]。
1976년부터는 1군 출장 기회가 늘어났다. 5월 12일 야쿠르트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와타나베 타카히로로부터 프로 첫 홈런을 날렸다. 최종적으로는 94경기에 출장(그 중 41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타율 .279, 7홈런의 성적을 남겼다. 시즌 후 퇴단이 결정된 보이어로부터 등번호 '6'을 물려받았다.
1977년에는 "승부에 '女(여자)' 자가 들어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권유로 등록명을 '''다카기 요이치'''로 변경했다[4]。 같은 해부터 감독으로 복귀한 벳토 카오루로부터 리스트와 배드 헤드의 사용법을 지도받아[12], 그 즉시 타격이 향상되어 1군 승격의 계기가 되었다. 벳토의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적절한 원 포인트 어드바이스를 보내는 지도는 "틀에 가두지 않고, 선수의 재능을 살린다"는 다카기의 현재 지도법에도 살아있다[11]。외야수 레귤러였던 에지리 료가 머리에 사구를 맞아 전력에서 이탈한 것을 계기로 레귤러를 차지하여[12], 주로 3번 타자로서 본인 첫 규정 타석에 도달했다. 타율 .323(리그 9위), 20홈런, 73타점의 좋은 성적을 남기고, 올스타 첫 출전을 했다[13]。이 해 이후부터 팀의 핵심이 되었다. 또한, 사생활에서는 차녀가 태어났다[8]。
1978년에는 리그 5위인 타율 .326, 23홈런, 80타점, 출루율 .401로 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남기고, 2년 연속 올스타에 출전했다[13]。
1980년에는 주장을 맡아 주로 4번 타자로 활약. 9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하는 등 타고난 승부 근성을 발휘하여, 개인 최다인 128경기에 출장[13]。 타율 .283, 12홈런, 56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1981년에는 115경기 출장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하여[13], 타율 .270, 9홈런, 50타점을 기록했다. 외야 수비에서도 개인 최다인 12보살을 달성하여 팀에 기여했다.
1982년에는 2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만, 같은 해를 기점으로 외국인 선수의 가세 등으로 벤치로 물러나는 기회가 늘어나 대타의 카드[13] 또는 준 레귤러로 기용되게 된다.
1983년에는 손목 등 잇따른 부상에 시달린 탓에, 등록명을 '''다카기 유이치'''로 변경한다[4][12]。 시즌에서는 규정 타석 미달이면서 타율 .369, 6홈런, 출루율 .434의 좋은 성적을 남긴다.
1984년에는 3년 만에 100경기 이상 출전했고,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타율 .273, 6홈런, 출루율 .362를 기록했다.
1985년에는 93경기에 출장하여, 규정 타석 미달이면서 타율 .299, 출루율 .387를 기록. 6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한다[13]。또한 8월 15일 주니치전(나고야 구장)에서 가시마 다다시로부터 통산 100홈런을 날렸다.
1987년, 팀의 젊은 피 기용 방침에 따라 시즌 도중인 6월이라는 이례적인 시기에 현역에서 은퇴[13]。 동시에 2군 타격 코치 보좌에 취임한다. 6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요코하마)이 은퇴 경기가 되어, 대타로 출장하여 니시모토 세이로부터 안타를 날려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3]。
==== 주요 기록 ====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72년 7월 2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2차전(가와사키 구장), 1번·좌익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타석·첫 안타 : 상동, 1회말에 이나바 미쓰오로부터 우중간 2루타
- 첫 타점 : 1975년 7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8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초에 오가와 구니카즈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홈런 : 1976년 5월 1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초에 와타나베 다카히로로부터 솔로 홈런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85년 6월 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말에 가케하타 미쓰노리의 대타로서 출장 ※역대 254번째
- 통산 100홈런 : 1985년 8월 1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6차전(나고야 구장), 6회초에 가시마 다다시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40번째
- 올스타전 출장 : 2회(1977년, 1978년)
2. 1. 프로 입단 전
일찍 세상을 떠난 누나를 포함해 여자 형제가 3명 연달아 태어난 후 태어났고, 스님으로부터 "여계 혈통이라 남자아이가 자라기 어렵다. 이름에 '女(여자)' 자를 넣는 것이 좋다"라는 조언을 받은 부모님에 의해 "好一(고이치)"로 명명되었다[4]。 집안은 섬유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빴으며, 본인은 방임 속에서 자랐다[5]。입학한 후치노베 고등학교에는 처음에는 야구부가 없었고, 2학년인 1966년에 자신이 교내에서 참가자를 모집하여 야구부를 창설했지만, 부원은 1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았고 감독도 없는 팀이었다[2][1]。 자신은 에이스이자 주포를 맡았으며,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3학년인 1967년 여름의 1경기뿐이었다. 요코하마 공원 평화 구장에서 도츠카 고등학교와 대결하여 0-5로 완봉패를 당했다[5]。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사가미하라시청 관계자에게 "시험을 보고 우리 야구부에 들어오지 않겠나?"라는 제안을 받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졸업 후 1968년부터 세무 수납과에 근무[6]하는 한편, 경식 야구부에 입부했다[5]。 3년째인 1970년에 투수 겸 외야수로 출전한 제20회 산업 대항의 관업 공사 부문에서 우승하여 본 대회에 진출했다. 1회전에서 마루젠 석유와 대결, 4회에 상대 에이스 히사타마 키요토로부터 백스크린에 3점 홈런을 날렸지만, 경기는 5-11로 패했다[1][7]。
1971년 11월에 야구부 후배와 함께 놀림으로 참가한 가와사키 구장에서의 입단 테스트에서 우연히 컨디션이 좋아[2] 합격해 버렸고, 한 달 동안 고민한 끝에 거절 전화를 걸었지만, 입단 테스트를 지켜본 아오타 노보루 헤드코치로부터 "이 타격 실력으로 시청에서 근무하는 것은 아깝다"라는 재차 고기에게 연락이 왔다[1]。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모처럼 전쟁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인생은 얼마든지 만회가 가능하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젊은 녀석들의 특권이다. 2~3년 병역에 갈 생각으로 프로 야구에 가라"라는 말로 입단을 결심하고[1], 같은 해 드래프트 외로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2]。 등번호는 "'''81'''", 계약금은 0이었다[13]。
2. 2. 프로 선수 시절
1972년 시즌 후반에 1군으로 승격되어 9월 2일 주니치 드래건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 1번 타자 겸 좌익수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첫 타석에서 이나바 미쓰오로부터 2루타를 날렸다. 시즌 후 등번호가 '35'로 변경되었다[13]。프로 1년차는 다카기가 현역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경험으로 꼽고 있다. 사가미하라 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드래프트 외 지명으로 입단한 다카기는 아마추어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해온 선수와는 분명히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에 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배트를 휘두르는 등 맹연습에 매진하여 손에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코칭스태프에게는 좀처럼 인정받지 못했고, 드래프트 지명으로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선수에게 우선적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것에 분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13]。 또한, 사생활에서는 교제하던 여성과 결혼했다[8]。1973년에는 1군 출장 없이 시즌을 마쳤고, 시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을 뻔했지만, 다카기의 재능을 눈여겨본 동료 클리트 보이어가 구단에 이야기하여 잔류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다카기는 보이어를 은인으로 존경하고 있다[9]。 같은 해 시즌 후에는 1군 타격 코치 오키야마 미츠토시로부터 1년차 나가사키 게이이치와 함께 불려 매일 3명이서 묵묵히 연습에 매달려 하루에 1000번은 배트를 휘둘렀다[10]。
1974년에는 2년 만에 1군에 출전했지만, 단 2경기에서 2타석 출장에 그쳤고, 무안타로 끝났다. 시즌 후 등번호가 '63'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사생활에서는 부인과의 사이에 장녀가 태어났다[8]。
1975년에는 3년 만에 안타를 쳤지만 12경기 출장에 그쳤고, 현역에서 은퇴하고 다른 직업을 찾을까도 생각했지만, 부인의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말에 마음을 돌렸다[8]。
1976년부터는 1군 출장 기회가 늘어났다. 5월 12일 야쿠르트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와타나베 타카히로로부터 프로 첫 홈런을 날렸다. 최종적으로는 94경기에 출장(그 중 41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타율 .279, 7홈런의 성적을 남겼다. 시즌 후 퇴단이 결정된 보이어로부터 등번호 '6'을 물려받았다.
1977년에는 "승부에 '女(여자)' 자가 들어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권유로 등록명을 '''다카기 요이치'''로 변경했다[4]。 같은 해부터 감독으로 복귀한 벳토 카오루로부터 리스트와 배드 헤드의 사용법을 지도받아[12], 그 즉시 타격이 향상되어 1군 승격의 계기가 되었다. 벳토의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적절한 원 포인트 어드바이스를 보내는 지도는 "틀에 가두지 않고, 선수의 재능을 살린다"는 다카기의 현재 지도법에도 살아있다[11]。외야수 레귤러였던 에지리 료가 머리에 사구를 맞아 전력에서 이탈한 것을 계기로 레귤러를 차지하여[12], 주로 3번 타자로서 본인 첫 규정 타석에 도달했다. 타율 .323(리그 9위), 20홈런, 73타점의 좋은 성적을 남기고, 올스타 첫 출전을 했다[13]。이 해 이후부터 팀의 핵심이 되었다. 또한, 사생활에서는 차녀가 태어났다[8]。
1978년에는 리그 5위인 타율 .326, 23홈런, 80타점, 출루율 .401로 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남기고, 2년 연속 올스타에 출전했다[13]。
1980년에는 주장을 맡아 주로 4번 타자로 활약. 9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하는 등 타고난 승부 근성을 발휘하여, 개인 최다인 128경기에 출장[13]。 타율 .283, 12홈런, 56타점의 성적을 남겼다.
1981년에는 115경기 출장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하여[13], 타율 .270, 9홈런, 50타점을 기록했다. 외야 수비에서도 개인 최다인 12보살을 달성하여 팀에 기여했다.
1982년에는 2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만, 같은 해를 기점으로 외국인 선수의 가세 등으로 벤치로 물러나는 기회가 늘어나 대타의 카드[13] 또는 준 레귤러로 기용되게 된다.
1983년에는 손목 등 잇따른 부상에 시달린 탓에, 등록명을 '''다카기 유이치'''로 변경한다[4][12]。 시즌에서는 규정 타석 미달이면서 타율 .369, 6홈런, 출루율 .434의 좋은 성적을 남긴다.
1984년에는 3년 만에 100경기 이상 출전했고,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타율 .273, 6홈런, 출루율 .362를 기록했다.
1985년에는 93경기에 출장하여, 규정 타석 미달이면서 타율 .299, 출루율 .387를 기록. 6월 4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한다[13]。또한 8월 15일 주니치전(나고야 구장)에서 가시마 다다시로부터 통산 100홈런을 날렸다.
1987년, 팀의 젊은 피 기용 방침에 따라 시즌 도중인 6월이라는 이례적인 시기에 현역에서 은퇴[13]。 동시에 2군 타격 코치 보좌에 취임한다. 6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요코하마)이 은퇴 경기가 되어, 대타로 출장하여 니시모토 세이로부터 안타를 날려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3]。
2. 2. 1. 주요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72년 7월 2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2차전(가와사키 구장), 1번·좌익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타석·첫 안타 : 상동, 1회말에 이나바 미쓰오로부터 우중간 2루타
- 첫 타점 : 1975년 7월 1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8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초에 오가와 구니카즈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홈런 : 1976년 5월 1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초에 와타나베 다카히로로부터 솔로 홈런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85년 6월 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말에 가케하타 미쓰노리의 대타로서 출장 ※역대 254번째
- 통산 100홈런 : 1985년 8월 1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6차전(나고야 구장), 6회초에 가시마 다다시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40번째
- 올스타전 출장 : 2회(1977년, 1978년)
3. 지도자 경력
다카기 요시카즈는 은퇴 후 지도자 경력을 이어갔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1993년부터 2001년, 그리고 2003년과 2011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2] 1군 타격 코치 시절, 199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38년 만의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제패에 기여하며 '머신건 타선'의 아버지라고 불렸다.[2] 스즈키 타카노리, 로버트 로즈, 긴조 다쓰히코 등 4년 연속으로 수위 타자를 배출했다.[14][15][16] 특히 스즈키 타카노리는 코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 1군에서 결과를 내지 못했던 젊은 스즈키를 지도하여 2년 연속 수위 타자를 획득하는 등 뛰어난 타자로 성장시켰다.[14][15][16]
2002년에는 쇼난 시렉스 종합 코치,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육성 코치를 맡았다. 2008년에는 쇼난 시렉스 수석 코치, 2009년에는 수석 겸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2009년에는 쇼난 시렉스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17]
2010년에는 중국 야구 리그의 톈진 라이언스 감독으로 파견되어 1년간 지휘했다. 2011년 요코하마 1군 타격 코치로 복귀했고, DeNA에 매각된 후 2012년에는 2군 타격 코치, 2013년에는 2군 타격 수석 코치를 맡았다.[17]
이후 JR 동일본 임시 타격 코치, 아자부대부고 야구부 지도를 거쳐 2022년부터는 tvk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3. 1. 지도 스타일
4.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다이요에서 2군 타격 코치(1988년 - 1992년), 요코하마에서 1군 타격 코치(1993년 - 1999년, 2001년, 2003년)·1군 야수 치프 겸 타격 코치(2000년), 쇼난 시렉스에서 종합 코치(2002년)·육성 특별 코치(2004년 - 2006년)·타격 겸 육성 코치(2007년)·치프 코치(2008년)·치프 겸 타격 코치(2009년)를 맡았다. 1군 타격 코치 시절 1996년 오프에 '''연결하는 야구'''를 제창한 것에서 1998년에 팀이 38년 만에 우승·일본 제일을 했을 때 '''머신건 타선의 아버지'''라고 칭해졌다[2]。 재임 중 스즈키 타카노리(1997년 - 1998년), 로버트 로즈(1999년), 킨조 타츠히코(2000년)와 4년 연속으로 구단에서 수위 타자를 배출했다. 다카기는 스즈키를 코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 꼽았으며, 1군에서 결과를 내지 못했던 당시 젊은 스즈키를 오프 기간 동안 자택으로 초대해 곁에서 스윙을 지켜봤다. 친밀하게 함께 타격 폼을 만들어냈다[14]。 그 후에도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연습은 계속되어, 스즈키는 레귤러로 정착. 2년 연속 수위 타자를 획득하는 등 구계 굴지의 타자로 성장했다[15][16]。
쇼난 코치 시절인 2009년에는 1군의 감독 오야 아키히코가 5월 18일자로 휴양에 들어가, 쇼난의 감독 타시로 토미오가 1군 감독 대행으로 승격됨에 따라, 쇼난 감독 대행으로 취임하여 시즌 종료 후까지 맡았다. 입단 후 38년간 단 한 번도 구단이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재적했다.
2010년부터는 구단 프런트로 이동하여 베이스타스에 소속되면서 우호 구단인 중국 야구 리그·텐진 라이온스 감독(총교련)으로 파견되어 1년간 지휘를 맡았다. 2011년에는 8년 만에 요코하마의 1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 DeNA에 매각된 후에는 2군 타격 코치(2012년)·2군 치프 타격 코치(2013년)를 맡았으며, 2013년 10월 1일자로 나카네 히토시와 함께 코치 계약을 맺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17]。
퇴단 후에는 JR 동일본 임시 타격 코치를 맡았으며, 2015년에는 모교인 아자부대부고 야구부에서 수차례 지도했다.
2022년부터는 본수 계약으로 tvk의 야구 해설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5. 상세 정보
5. 1. 출신 학교
- 아자부 대학부속 후치노베 고등학교
5. 2. 선수 경력
사가미하라 시청을 거쳐 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서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다.5. 3. 지도자 경력
다카기 요시카즈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군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1993년부터 2001년, 2003년, 그리고 2011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02년에는 쇼난 시렉스 종합 코치를,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쇼난 시렉스 육성 코치를 담당했다. 2008년에는 쇼난 시렉스 수석 코치, 2009년에는 쇼난 시렉스 수석 겸 타격 코치 및 감독 대행을 역임했다. 2010년에는 톈진 라이언스 감독을 맡았으며, 2012년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군 타격 코치, 2013년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군 타격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5. 4. 등록명
다카기 요시카즈(たかぎ よしかず)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사용한 등록명이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는 한자 표기가 다른 다카기 요시카즈(たかぎ よしかず)를 사용했다. 1983년부터는 또 다른 한자 표기인 다카기 요시카즈(たかぎ よしかず)를 2013년까지 사용했다.참조
[1]
서적
最後のクジラ:大洋ホエールズ・田代富雄の野球人生
講談社
2013
[2]
웹사이트
横浜DeNA:“マシンガン”生みの親、元打撃コーチ・高木由一さん 42年プロ野球人生に幕
https://web.archive.[...]
カナロコ by神奈川新聞
2021-03-13
[3]
웹사이트
「どういうふうに野球をやめようか」から高木由一は2度の球宴出場を果たした|プロ野球|集英社 スポルティーバ 公式サイト web Sportiva 後編 page3
https://sportiva.shu[...]
2021-09-22
[4]
웹사이트
高校で野球部をつくり、公務員からプロへ。漫画を超えた高木由一の仰天人生|プロ野球|集英社 スポルティーバ 公式サイト web Sportiva 前編 page1
https://sportiva.shu[...]
2021-03-15
[5]
웹사이트
高校で野球部をつくり、公務員からプロへ。漫画を超えた高木由一の仰天人生|プロ野球|集英社 スポルティーバ 公式サイト web Sportiva 前編 page2
https://sportiva.shu[...]
2021-03-15
[6]
뉴스
日刊スポーツ
1976-05-27
[7]
간행물
日本社会人野球協会報1970
日本社会人野球協会
1971
[8]
웹사이트
【帰ってきた!ダンカンが訪ねる 昭和の侍】高木由一さん、昭和の「とっつぁん」page2
https://www.sanspo.c[...]
2019-01-12
[9]
웹사이트
恩師と慕われた喧嘩のボイヤー(下)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5-02-10
[10]
웹사이트
最近のベイスターズの選手たちが羨ましい……「大洋ホエールズOB」としての長崎慶一さんに会いに行く(前編)
https://bunshun-jp.c[...]
[11]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2013-05-20
[12]
웹사이트
「どういうふうに野球をやめようか」から高木由一は2度の球宴出場を果たした|プロ野球|集英社 スポルティーバ 公式サイト web Sportiva 後編 page4
https://sportiva.shu[...]
2021-03-15
[13]
웹사이트
高木嘉一 市役所の税務課から大洋の四番まで上り詰めた男/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https://column.sp.ba[...]
2021-02-21
[14]
잡지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
2021-01
[15]
웹사이트
野球殿堂の候補者入りの新候補者 鈴木尚典を成功に導いた秘話
https://full-count.j[...]
2013-12-29
[16]
웹사이트
野球殿堂の候補者入りの新候補者 鈴木尚典を成功に導いた秘話
https://full-count.j[...]
2013-12-29
[17]
웹사이트
2014年度 コーチ契約について
http://www.baystars.[...]
横浜DeNAベイスターズ公式サイト
2013-10-01
[18]
웹사이트
連載ダンプ辻コラム 第125回「止まっていた車が突然……いたずら好きだった高木由一君」 {{!}} 野球コラム
https://column.sp.ba[...]
2022-11-05
[19]
문서
[20]
웹사이트
관련 내용
http://www.baystars.[...]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13-10-01
[21]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