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무네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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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무네아키는 일본의 후작이자 관료였다. 1909년 백부인 다테 무네노부의 양자가 되었고, 1923년 가독을 상속받아 후작을 습작했다.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가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을 지냈으며,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대장 사무관, 대장성 대신 관방 재정 경제 조사 과장, 대장성 히로시마 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생존자 구호에 힘썼으며, 일본부동산은행 상무이사, 시미즈 건설 상담역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우와지마성을 우와지마시에 기부했으며, 64세에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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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네아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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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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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표기 | 다테 무네아키 |
로마자 표기 | Date Muneaki |
출생일 | 1905년 3월 6일 |
사망일 | 1969년 11월 29일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
배우자 | 다테 미치코 |
자녀 | 장남: 다테 무네노리 |
친족 (정치가) | 조부: 다테 무네토쿠 (귀족원 의원) |
작위 및 훈장 | 정4위 |
경력 | |
소속 정당 | 화요회 |
직책 | 귀족원 의원 |
선거구 | (후작 의원) |
임기 시작 | 1935년 3월 5일 |
임기 종료 | 1947년 5월 2일 |
우와지마 다테 가 | |
직책 | (우와지마) 다테 후작가 당주 |
임기 | 1923년 ~ 1947년 |
대수 | 3 |
기타 |
2. 경력
다테 무네아키는 1909년 백부 다테 무네노부의 양자가 되었고, 1923년 양부 사망 후 가독을 상속받아 후작이 되었다. 1925년 이름을 무네아키(宗彰)로 바꾸었다. 1927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으며,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1935년 귀족원 후작 의원이 되어 1947년 귀족원 폐지까지 재임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없어 피해를 면했고, 이후 직원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1957년 일본부동산은행 상무이사, 1964년 시미즈 건설 상담역 등을 역임했다. 1949년 우와지마성을 우와지마시에 기증했다. 64세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적남 무네노리가 가독을 이었다.
2. 1. 관료 및 정치 경력
1909년(메이지 42년), 백부인 다테 무네노부의 양자가 되었다. 양부가 사망함에 따라 1923년(다이쇼 12년) 3월 10일, 가독을 상속받아 후작을 습작[1]했다. 가독 상속에 따라 1925년(다이쇼 14년) 3월 14일, 이름을 무네아키(宗彰)로 개명했다[2] . 1927년(쇼와 2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는 아라이 젠타로와 이리마노 타케오 등 두 사람과 함께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1935년 3월 5일, 만 30세가 되어 귀족원 후작 의원에 취임[3]했으며, 화요회에 소속되어 1947년 5월 2일 귀족원 폐지까지 재임[4]했다.이후 대장 사무관, 대장성 대신 관방 재정 경제 조사 과장, 대장성 히로시마 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화족이라는 점 때문에 부하들은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매우 서민적이고 부하를 생각하는 온화한 인품에 모두 금세 매료되었다고 한다.
1945년(쇼와 20년) 8월 6일, 원폭 투하 날에는 마침 재국하지 않아 직격을 면했고, 직후 청사(재무국은 견고한 건물이라는 이유로 후쿠로마치의 일본은행으로 피난해 있었다)에 달려가 직원 구호에 나섰다. 이때 외상이 적은 건강한 사람을 지휘하여 부상자 간호·이송, 유해 이송 및 화장 등의 활동을 했지만,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코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후년에 "원폭에 대해 잘 몰랐다. 딱한 일을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짚신을 신고 머리를 휘날리며 부하의 베인 상처와 화상을 치료하고 간병하는 것부터 유해 이송, 그리고 목재를 모아 화장까지 직접 한 것에 대해 부하들은 "이런 국장이 또 있었을까"라며 감사했다.
쇼와 42년, 이때 부하들의 수기를 모은 "원폭의 기록"을 자비 출판했지만, 부수가 적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옛 부하들이 쇼와 55년에 새로운 수기와 다테 국장의 추억을 더하여 재판했다. ("히로시마 재무국 원폭 피해자 기록 원폭의 기록" 정원산 경일랑 편, 재단법인 대장 재무 협회 간행).
1957년에 일본부동산은행 상무이사, 1964년에 시미즈 건설 상담역 등을 역임했다.
2. 2.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생존자 구호
1945년(쇼와 20년) 8월 6일, 원폭 투하 당시 다테 무네아키는 히로시마에 없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청사(재무국은 튼튼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후쿠로마치의 일본은행으로 피난해 있었다)로 달려가 직원 구호에 나섰다.[1]이때, 외상이 적은 건강한 사람들을 지휘하여 부상자 간호 및 이송, 유해 이송 및 화장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원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건강해 보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코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원폭에 대해 잘 몰랐다. 딱한 일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
다테 무네아키는 짚신을 신고 머리를 휘날리며 부하들의 베인 상처와 화상을 직접 치료하고 간병했으며, 유해를 이송하고 목재를 모아 화장하는 일까지 직접 했다. 이러한 모습에 부하들은 "이런 국장이 또 있었을까"라며 감사했다.[1]
1967년, 이때의 부하들의 수기를 모은 "원폭의 기록"을 자비로 출판했다. 이 책은 발행 부수가 적었지만, 살아남은 옛 부하들이 1980년에 새로운 수기와 다테 국장의 추억을 담은 기록을 더하여 재판했다. ("히로시마 재무국 원폭 피해자의 기록 원폭의 기록" 정원산 경일랑 편 재단법인 대장 재무 협회 간행).[1]
2. 3. 전후 활동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있지 않아 직접적인 피해는 피했지만, 직후 청사(재무국은 견고한 건물이라는 이유로 일본은행 후쿠로마치 지점으로 피난해 있었다)로 달려가 직원 구호에 나섰다.[1] 외상이 적은 건강한 사람들을 지휘하여 부상자 간호 및 이송, 유해 이송 및 화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당시 원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코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훗날 "원폭에 대해 잘 몰랐다. 딱한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1] 짚신을 신고 머리를 휘날리며 부하들의 베인 상처와 화상을 치료하고 간병하는 것부터 유해 이송, 목재를 모아 화장하는 일까지 직접 도맡아 한 것에 대해, 부하들은 "이런 국장이 또 있었을까"라며 감사했다.[1]1967년, 이때 부하들의 수기를 모은 "원폭의 기록"을 자비 출판했으나, 부수가 적어 살아남은 옛 부하들이 1980년에 새로운 수기와 다테 국장의 추억을 담아 재판했다. ( "히로시마 재무국 원폭 피해자의 기록 원폭의 기록" 정원산 경일랑 편 재단법인 대장 재무 협회 간행).
1957년 일본부동산은행 상무이사, 1964년 시미즈 건설 상담역 등을 역임했다.[1] 1949년에는 우와지마성을 우와지마시에 기부했다.[1] 64세에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고, 적남인 무네노리가 가독을 계승했다.[1]
3. 영전
- 1937년 5월 1일 - 정사위[5]
4. 가족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다테 노리타카 | 1866년 | 1944년 | 다테 무네노리의 셋째 아들. 육군 보병 중좌. |
어머니 | 다테 토모코 | 1874년 | 1949년 | 호조 우지야스의 딸. |
양아버지 | 다테 무네노부 | 1860년 | 1923년 | 친백부. 귀족원 후작 의원. |
아내 | 마츠다이라 미치코 | 1912년 | 1972년 | 마츠다이라 요시타미의 딸. |
장남 | 무네노리 | 1935년 | 2008년 | 아내는 야노 마사코. 자녀: 무네노부, 키쿠코. |
차남 | 무네타다 | 1939년 | 아내는 쇼노 미에코. | |
장녀 | 소코 | 1941년 | 카츠라기 시게마로 백작의 차남 시게타카의 아내. | |
차녀 | 준코 | 1944년 | 와타나베 사다지의 아내. | |
친척 - 형인 토쿠마의 장인은 요시이 코조 (요시이 이사무의 아버지). |
참조
[1]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2]
간행물
官報
1925-03-19
[3]
간행물
官報
1935-03-07
[4]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 貴族院・参議院議員名鑑
[5]
간행물
官報
193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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