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당 선종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당 선종은 당나라의 황족으로, 무종 사후 환관들의 추대로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여, 파벌 싸움을 억제하고 불교를 보호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토번과 위구르가 쇠약해진 틈을 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하다가 단약 중독으로 사망했다. 말년에는 황태자 책봉을 미루어 황위 계승의 불확실성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의 치세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으며, 고려 왕실과의 연관성에 대한 설화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당 헌종의 황자 - 당 목종
    당 목종은 당 헌종의 아들로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절도사들의 반란과 환관의 득세, 잦은 유희와 방탕한 생활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이 된 제13대 황제이다.
  • 도교 군주 - 당 대종
    당 대종은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당나라 황제에 올랐으나, 환관의 권력 장악, 절도사의 세력 확대, 토번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당나라 중앙집권 체제 약화와 봉건화의 시작을 초래했다.
  • 도교 군주 - 보장왕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난으로 즉위하여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으로 혼란을 겪다 고구려 멸망 후 부흥을 시도하다 유배되어 사망했다.
당 선종 - [인물]에 관한 문서
당 선종 정보
당 선종
기본 정보
이침 (李忱)
초명이이 (李怡)
묘호선종 (宣宗)
시호원성지명성무헌문예지장인신총의도대효황제 (元聖至明成武獻文睿智章仁神聰懿道大孝皇帝)
존호성경문사화무광효황제 (聖敬文思和武光孝皇帝)
생년810년 7월 27일
몰년859년 9월 10일 (향년 49세)
출생지대명궁
능묘정릉 (貞陵)
재위 정보
즉위일846년 4월 22일
퇴위일859년 9월 7일
연호대중 (大中): 847년 - 859년
신상 정보
아버지당 헌종
어머니정씨
배우자원소황후 조씨
가계
자녀아래 '가족' 섹션 참고
당나라 군주
계승자당 의종
이전당 무종
기타 정보
절일천장절

2. 생애

wikitext

선종의 어머니 정씨(鄭氏)는 진해군(鎭海軍, 본부는 지금의 장쑤성 전장시에 있었다) 절도사 이기(李錡)의 시첩(待妾)이었는데, 이기가 모반죄로 처형된 뒤 궁에 들어왔다.[7] 정씨는 헌종의 아내인 곽귀비의 시녀가 되었고, 헌종에게서 선종을 낳았다.[3][6][7] 광왕(光王)에 봉작된 뒤 십육택(十六宅)에서 살면서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며 살았는데, 때문에 당시 문종이나 다른 황족들은 그가 정말 어리석은 줄만 알고 자주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3] 특히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무종은 선종을 존경하지 않았다고 한다.[3]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2] 궁궐 환관들은 모여 이이를 무종의 후계자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하여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2] 환관들은 무종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이이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그의 이름을 더 길한 이진(李忱)으로 바꾸고, 황실 업무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2]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석천(淅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경준(瓊俊)이라 하였는데, 절에 있던 승려 제안(濟安)이 선종의 거동을 알아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송고승전》).[2]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진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환관 마원지에 의해 이례적으로써 황태숙(皇太叔)으로 옹립된 선종은 무종이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이름을 이에서 침으로 바꾸었다.[2]

선종을 옹립한 환관들은 어리석은 선종의 모습만 기억하고 그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해 황제로서 옹립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 감추고 있던 본연의 총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선종은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고자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내정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연호를 대중(大中)으로 선포하고, 무종조에 중용되었던 이덕유 일당을 배제하고 우승유 일파를 억제하는 등 중신들에 의한 파벌 싸움(우이당쟁)이나 환관 세력의 소멸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견제정책을 채용하는 등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무종 시대에 발호되었던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시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선종은 당시 티베트(吐蕃), 위구르(回紇)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병사를 보내 하황(河湟) 땅을 차지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2]

그러나 만년에는 무종과 마찬가지로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대중(大中) 13년(859년), 무종과 같은 단약(丹藥) 남용으로 인한 중독 증상으로 50세에 사망하였다. 당 선종 통치 후반기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황제가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아 황위 계승이 불확실해진 데 대한 고위 관료들의 우려였다.[8] 그는 이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지만, 이자가 장남이 아니었기에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망설였다.[8]

당 선종은 관료들을 승진시키고 포상하는 데 신중하여 고위 관료들에게 명예로운 붉은색과 보라색 제복을 자주 하사하지 않았으며, 측근들을 부당하게 편애하지 않아 승진에 있어서 공정했다고 한다.[8] 한편, 당 선종은 환관들의 권력을 억제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8]

당 선종 통치 후반기에 그는 불멸을 약속한 일부 연금술사들을 총애하게 되었고, 그들이 제조하고 처방한 주사 기반의 환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했다.[12] 이러한 환약에 의한 중독의 결과로 그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쉽게 화를 냈으며, 859년에는 이러한 독성 수은 엘릭서의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인해 등 뒤에 큰 궤양성 부스럼이 생겨 병상에 누워 재상 및 기타 관료들과 회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12] 그는 총애하는 세 명의 고위 환관, 즉 궁중 통신국(''추밀원'') 왕귀장(王歸長중국어)과 마공유(), 남원사(宣徽南院使, ''선휘남원사'') 왕거방(王居方중국어)에게 이자를 위탁했다. 당 선종이 사망한 후 왕귀장, 마, 왕거방은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고,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신책군()의 환관 사령관 중 한 명인 왕종실(王宗實중국어)을 장안에서 강소성양저우에 본부를 둔 회남 절도사(淮南)로 보내 회남의 환관 감시관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왕종실은 궁궐에 침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당 선종이 이미 중국 연금술적 엘릭서 중독으로 사망했음을 발견하고, 허위 조서를 발부한 혐의로 왕귀장, 마, 왕거방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는 이온을 궁궐로 맞이하여 당 선종의 이름으로 이온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최로 바꾸는 조서를 발부했다. 다음 날, 당 선종의 죽음이 발표되었고 이최는 황제(당 의종)가 되었다.[8]

당 선종의 능묘인 정릉(貞陵)은 섬서성경양현에 위치해 있다.

2. 1. 즉위 전

선종의 어머니 정씨(鄭氏)는 진해군(鎭海軍, 본부는 지금의 장쑤성 전장시에 있었다) 절도사 이기(李錡)의 시첩(待妾)이었는데, 이기가 모반죄로 처형된 뒤 궁에 들어왔다.[7] 정씨는 헌종의 아내인 곽귀비의 시녀가 되었고, 헌종에게서 선종을 낳았다.[3][6][7] 광왕(光王)에 봉작된 뒤 십육택(十六宅)에서 살면서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며 살았는데, 때문에 당시 문종이나 다른 황족들은 그가 정말 어리석은 줄만 알고 자주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3] 특히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무종은 선종을 존경하지 않았다고 한다.[3]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2] 궁궐 환관들은 모여 이이를 무종의 후계자로 결정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하여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2] 환관들은 무종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이이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그의 이름을 더 길한 이진(李忱)으로 바꾸고, 황실 업무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2]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석천(淅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경준(瓊俊)이라 하였는데, 절에 있던 승려 제안(濟安)이 선종의 거동을 알아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송고승전》).[2]

2. 2. 치세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진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환관 마원지에 의해 이례적으로써 황태숙(皇太叔)으로 옹립된 선종은 무종이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이름을 이에서 침으로 바꾸었다.[2]

선종을 옹립한 환관들은 어리석은 선종의 모습만 기억하고 그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해 황제로서 옹립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 감추고 있던 본연의 총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선종은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고자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내정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연호를 대중(大中)으로 선포하고, 무종조에 중용되었던 이덕유 일당을 배제하고 우승유 일파를 억제하는 등 중신들에 의한 파벌 싸움(우이당쟁)이나 환관 세력의 소멸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견제정책을 채용하는 등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무종 시대에 발호되었던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시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선종은 당시 티베트(吐蕃), 위구르(回紇)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병사를 보내 하황(河湟) 땅을 차지하는 등의 성과도 거두었다.[2]

그러나 만년에는 무종과 마찬가지로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대중(大中) 13년(859년), 무종과 같은 단약(丹藥) 남용으로 인한 중독 증상으로 50세에 사망하였다.[2]

선종 황제는 모친 정(鄭) 비를 황태후로 추존했다. 선종 황제는 즉위 직후 무종 치세 동안 조정에서 권력을 장악했던 강력한 재상 이덕유에 맞서 행동했는데, 그는 이덕유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혐오했다. 선종 황제는 이덕유를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수도 장안에서 쫓아내어 형남 절도사(荊南, 현재 후베이성징저우에 위치)로 보냈으며, 이덕유의 동료 재상 정수 또한 제거했다.[2] 그 후 몇 년 동안 선종 황제는 이덕유에게 동조한다고 여겨지는 관료들을 숙청했고, 이덕유가 죽어 마땅하지 않은 죄목으로 하급 관리 오상(吳湘)을 처형한 것을 근거로 이덕유를 계속 기소했다(이덕유는 오상의 숙부 오무령[吳武陵]을 원망했다). 이덕유는 거듭 강등되어 장안에서 점점 더 멀리 보내졌고, 결국 850년경 섣달 그믐날 해남도 하이커우에 있는 애주(崖州)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목종 치세 이후 제국 정부를 괴롭혔던 우-이 당쟁으로 알려진 제국 관료들 사이의 파벌주의를 대부분 종식시킨 것으로 여겨졌다.[2][8][9]

무종과 이덕유가 추진했던 정책 중 불교 박해 및 예니세이 키르기스와의 동맹 등 일부가 뒤집혔다. 선종 황제는 이덕유 대신 백민중을 수석 재상으로 임명했고, 그 후 몇 년 동안 백민중은 동료 재상 마지를 포함한 다른 여러 관료들을 추천했다.[8]

한편 선종 황제는 또한 842년 왕 랑다르마가 죽은 후 격렬한 내전에 빠진 토번 제국에도 관심을 돌렸다.[10] 848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선종 황제는 안사의 난 이후 토번 제국에 빼앗겼던 여러 주를 탈환하기 위해 변경 군대를 파견하여 현재 간쑤성 동부, 닝샤 회족 자치구 남부, 쓰촨성 서부 지역을 탈환했다. 게다가 한족 출신 장의초가 851년 토번 관료들로부터 하서 회랑을 장악하고 선종 황제에게 귀순한 후 당나라는 토번 제국에 대한 손실을 대체로 회복했다.[2][8][11]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당항족의 반란에 대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당항족이 당나라 관료들의 학대로 인해 반복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온화하고 정직하기로 알려진 관료들을 당항족 지역에 임명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으며, 백민중에게 당항족에 대한 작전을 지휘하도록 하여 많은 저명한 제국 정부 관리들을 포함하는 대규모 참모진을 배속시켰다. 백민중의 지휘하에 당항족은 851년에 대체로 항복했다. 그러나 백민중은 선종 황제 재위 기간 동안 재상직에 복귀하지 못했고, 사실상 령호도로 대체되었다.[8]

선종 황제는 부지런히 정치를 펼치며 유능한 선조 당 태종의 통치를 눈여겨보고 태종의 모범을 따르려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제국 관료들의 능력과 전국 각 주의 풍습에 익숙해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능력에 따라 관료를 적절히 임명하고 그들이 유능하게 통치하고 있는지 검토할 수 있었다.[2][8] 그는 또한 검소함을 장려했고, 총애하는 딸 완수공주를 제국 관료 정호(鄭顥)와 결혼시키는 비용을 줄여 이를 시사하려 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황실 구성원과 그 친족들이 모두 법을 신중하게 준수했다고 한다.[8]

848년에는, 정 황후가 전에 시중을 들었던 목종 황제의 모친 곽 태상황태후가 사망했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당시 민간의 인식은 선종 황제가 그녀를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정 황후가 곽 태상황태후를 원망했고, 또한 선종 황제가 환관 진홍지(陳弘志)의 손에 목종 황제가 죽도록 사주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곽 태상황태후가 선종 황제의 무례함에 우울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곽 태상황태후가 선종 황제와 함께 묻히거나 선종 황제의 사당에 모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곽 태상황태후를 선종 황제와 함께 묻히도록 허락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자신의 생전에는 선종 황제와 함께 모시는 것을 거부했다.)[2]

당 선종 통치 후반기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황제가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아 황위 계승이 불확실해진 데 대한 고위 관료들의 우려였다. 이 문제는 위모, 배휴, 최심우 등의 재상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지만, 그는 모두 거부했고, 이로 인해 배휴는 사임하고 최심우는 해임되었다. (당 선종이 황태자 책봉을 반복적으로 거부한 이유는 장남인 이온 운왕을 싫어하고 셋째 아들인 이자 궤왕을 총애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이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지만, 이자가 장남이 아니었기에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망설였다.)[8]

당 선종은 관료들을 승진시키고 포상하는 데 신중하여 고위 관료들에게 명예로운 붉은색과 보라색 제복을 자주 하사하지 않았으며, 측근들을 부당하게 편애하지 않아 승진에 있어서 공정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처벌받아야 할 측근들을 처벌했고, 그들과의 친밀함 때문에 봐주지 않았다. 그가 임명한 절도사들이 해당 지역에 적합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부임하기 전에 장안에 보고하여 그와 만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는 엄격하여, 영호도(靈狐綯)가 10년 동안 재상으로 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계속 두려워했다고 한다.[8]

한편, 당 선종은 환관들의 권력을 억제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학사 위오(韋澳중국어)와 상의했을 때, 위오는 그에게 최근 기억 속에서 환관들에게 가장 많은 권력을 행사한 황제라고 말했다. 이에 당 선종은 스트레스를 받은 듯 "그렇지 않다. 사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두려워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환관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도록 장려했지만, 그에 따르면 이 전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가 승진시킨 환관들은 일단 높은 지위에 오르면 덜 순종적인 강력한 환관들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한때 그는 영호도와 환관들을 대량 학살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는데, 영호도는 무고한 사람과 유죄인 사람이 모두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했다. 대신 영호도는 환관의 수를 점차 줄일 것을 제안했다. 영호도의 제안은 환관들에게 새어 나갔고, 환관들은 이 때문에 황실 관료들을 계속 멸시했다고 한다.[8]

당 선종 통치 후반기에 그는 불멸을 약속한 일부 연금술사들을 총애하게 되었고, 그들이 제조하고 처방한 주사 기반의 환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했다. 이러한 환약에 의한 중독의 결과로 그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쉽게 화를 냈으며, 859년에는 이러한 독성 수은 엘릭서의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인해 등 뒤에 큰 궤양성 부스럼이 생겨 병상에 누워 재상 및 기타 관료들과 회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12] 그는 총애하는 세 명의 고위 환관, 즉 궁중 통신국(''추밀원'') 왕귀장(王歸長중국어)과 마공유(馬公儒zh-Hant), 남원사(宣徽南院使, ''선휘남원사'') 왕거방(王居方중국어)에게 이자를 위탁했다. 당 선종이 사망한 후 왕귀장, 마, 왕거방은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고,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신책군()의 환관 사령관 중 한 명인 왕종실(王宗實중국어)을 장안에서 강소성양저우에 본부를 둔 회남 절도사(淮南, modern Yangzhou, Jiangsu)로 보내 회남의 환관 감시관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왕종실은 궁궐에 침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당 선종이 이미 중국 연금술적 엘릭서 중독으로 사망했음을 발견하고, 허위 조서를 발부한 혐의로 왕귀장, 마, 왕거방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는 이온을 궁궐로 맞이하여 당 선종의 이름으로 이온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최로 바꾸는 조서를 발부했다. 다음 날, 당 선종의 죽음이 발표되었고 이최는 황제(당 의종)가 되었다.[8]

2. 2. 1. 대외 관계

수라이만 알 타지르는 광저우에 머무는 동안 중국인들이 새로 도착한 외국인들의 신원을 유지하기 위해 지문 기록을 사용하고 수입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요금을 부과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해상 항로가 해적과 잦은 비로 인해 위험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광저우의 현지 무슬림 인구가 자체 모스크와 바자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무슬림 공동체가 자체 이맘과 재판관(당나라 당 현종 황제가 임명)을 두고 있다고 언급했다.[13] 그는 또한 도자기 제조, 광저우의 곡창 시스템, 그리고 시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관찰했다.

2. 2. 2. 불교 정책

불교 정책에 대한 요약 및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자료를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2. 3. 말년

선종의 어머니는 진해군(鎭海軍, 본부는 지금의 장쑤성 전장시에 있었다) 절도사 이기(李錡)의 시첩(待妾)이었던 정씨(鄭氏)로, 이기가 모반죄로 처형된 뒤 궁에 들어왔다. 광왕(光王)에 봉작된 뒤 십육택(十六宅)에서 살면서 짐짓 어리석은 체 하며 살았는데, 당시 문종이나 다른 황족들은 그가 정말 어리석은 줄만 알고 자주 그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석천(淅川)에 있던 향엄사(香嚴寺)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경준(瓊俊)이라 하였다.

회창(會昌) 6년(846년), 평소 도교를 신봉한 무종이 금단을 남용한 나머지 위독해진 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환관 마원지에 의해 이례적으로써 황태숙(皇太叔)으로 옹립된 선종은 무종이 붕어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이름을 이에서 침으로 바꾸었다. 선종을 옹립한 환관들은 어리석은 선종의 모습만 기억하고 그가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 판단해 황제로서 옹립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뒤 감추고 있던 본연의 총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냈다.

총명한 선종은 쇠퇴한 국세를 재건하고자 배휴(裴休)를 기용하고 내정에 힘을 쏟았다. 새로운 연호를 대중(大中)으로 선포하고, 무종조에 중용되었던 이덕유 일당을 배제하고 우승유 일파를 억제하는 등 중신들에 의한 파벌 싸움(우이당쟁)이나 환관 세력의 소멸을 꾀하는 동시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에 대해서도 온건한 견제정책을 채용하는 등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무종 시대에 발호되었던 폐불령을 거두고 불교를 보호하는 시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무종과 마찬가지로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수를 추구하기에 이르렀고, 대중(大中) 13년(859년), 무종과 같은 단약(丹藥) 남용으로 인한 중독 증상으로 50세에 사망하였다. 당 선종 통치 후반기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황제가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아 황위 계승이 불확실해진 데 대한 고위 관료들의 우려였다.[8] 그는 이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지만, 이자가 장남이 아니었기에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망설였다.[8]

당 선종은 관료들을 승진시키고 포상하는 데 신중하여 고위 관료들에게 명예로운 붉은색과 보라색 제복을 자주 하사하지 않았으며, 측근들을 부당하게 편애하지 않아 승진에 있어서 공정했다고 한다.[8] 한편, 당 선종은 환관들의 권력을 억제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8]

당 선종 통치 후반기에 그는 불멸을 약속한 일부 연금술사들을 총애하게 되었고, 그들이 제조하고 처방한 주사 기반의 환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했다.[12] 이러한 환약에 의한 중독의 결과로 그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쉽게 화를 냈으며, 859년에는 이러한 독성 수은 엘릭서의 또 다른 부작용으로 인해 등 뒤에 큰 궤양성 부스럼이 생겨 병상에 누워 재상 및 기타 관료들과 회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12] 그는 총애하는 세 명의 고위 환관, 즉 궁중 통신국(''추밀원'') 왕귀장(王歸長중국어)과 마공유(), 남원사(宣徽南院使, ''선휘남원사'') 왕거방(王居方중국어)에게 이자를 위탁했다. 당 선종이 사망한 후 왕귀장, 마, 왕거방은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고,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신책군()의 환관 사령관 중 한 명인 왕종실(王宗實중국어)을 장안에서 강소성양저우에 본부를 둔 회남 절도사(淮南, modern Yangzhou, Jiangsu)로 보내 회남의 환관 감시관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왕종실은 궁궐에 침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당 선종이 이미 중국 연금술적 엘릭서 중독으로 사망했음을 발견하고, 허위 조서를 발부한 혐의로 왕귀장, 마, 왕거방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는 이온을 궁궐로 맞이하여 당 선종의 이름으로 이온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최로 바꾸는 조서를 발부했다. 다음 날, 당 선종의 죽음이 발표되었고 이최는 황제(당 의종)가 되었다.[8]

3. 가족 관계

당 선종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17][18][19][20][21][22][23][24]



봉호시호별칭이름(성씨)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능묘비고
미인원소황후조씨(추존)경릉



봉호(시호)별칭이름(성씨)생몰년도비고
소의오씨
첩여장씨
첩여류씨
미인양씨
재인나씨
재인사씨
군부인재인, 남안군부인구씨828년 ~ 851년
군부인장성군부인전씨
군부인무위군부인조씨
진씨
조씨
사씨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자식별칭비고
장남황태자이최(이온)833년 ~ 873년원소황후 조씨8남 9녀제17대 황제 의종.
차남옹왕정회황태자이한(이미)836년 ~ 852년
3남아왕이경요절함.
4남기왕이자844년 ~ 863년소의 오씨
5남경왕이기844년 ~ 860년궁인 사씨
6남복왕이택요절함.
7남악왕이윤? ~ 876년
8남회왕이흡요절함.
9남소왕이예850년 ~ 865년첩여 류씨
10남강왕이문851년 ~ 866년재인 구씨
11남위왕이관? ~ 860년요절함.
12남광왕이옹853년 ~ 864년궁인 진씨요절함.



-봉호시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장녀만수공주원소황후 조씨정호
차녀영복공주요절함.
3녀제국공주공회엄기
4녀광덕공주? ~ 880년원소황후 조씨우종
5녀화의공주
6녀요안공주
7녀성당공주
8녀평원공주834년 ~ 863년
9녀당양공주
10녀허창공주장숙류척
11녀풍양공주


4. 평가

당 선종의 치세는 번영하였기 때문에,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백성들은 그를 매우 그리워하며 "소태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8] 후진의 재상인 유욱은 《구당서》를 편집하면서 당 현종을 칭찬하는 어조로 글을 썼지만, 후진 시대에 이르러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많이 유실되어 더 많은 글을 쓸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3] 그러나 《신당서》의 편집자인 구양수는 당 현종이 판단력은 좋았지만, 인자함이나 은혜가 부족했다고 평했다.[14]

당 현종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화학자들은 최초로 불꽃놀이를 실험했다.[15]

5. 고려 왕실과의 관계

고려 왕조는 그 왕실이 숙종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숙종이 아닌 선종이었다는 설이 《편년통록》, 《편년강목》 등의 사서를 통해 유포되었다. 이들 사서는 현재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려사》 편찬 당시까지 현존했고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고려사》 고려세계에는 충선왕의 대도에 있을 때, 한림학사가 고려 왕실의 선대가 당 숙종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고, 충선왕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지가 나서서 "그게 우리 역사에 잘못 쓰인 것인데 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이었다"고 대답했고, 한림학사는 "선종은 외방에서 고생을 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며 넘어갔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고려사》에는 당 선종이 고려 왕실의 선대라는 설과 관련해, 선종이 양주 광군에서 멀지 않은 항주 염관에서 안선사의 후대를 받으며 머물렀고, 산수를 유람한다는 명목으로 바다를 오가던 상선을 따라 한반도 마가갑 양자동에 있던 보육의 집에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의 딸에게서 본 자식이 바로 작제건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대 교수 최재석은 《고려사》에서 당 선종이 고려 왕실의 선대라는 것은 자신을 중국 대륙도 통치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며, 당시 당나라 선종이 아무런 연고도 없으며 이유도 없이 한반도에 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충선왕 조차도 숙종과 선종을 헷갈려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6. 기타

진호민이 연기한 가상 인물 현종은 2009년 홍콩 TVB 텔레비전 드라마 ''궁심계''에 등장했다. 『당어림』에 따르면, 선종에게는 월지 출신의 총희가 있었다. 절세의 미녀였기에 처음에는 선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이윽고 선종은 양귀비와 같은 재앙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 대신들은 총희를 후궁에서 내쫓도록 설득했지만, 선종은 "궁궐을 나가면 그녀가 그리워질 것이다"라는 이유로 총희에게 독주를 하사했다.

7. 연호

선종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서력(西曆)847년848년849년850년851년852년853년854년855년856년
간지(干支)정묘(丁卯)무진(戊辰)기사(己巳)경오(庚午)신미(辛未)임신(壬申)계유(癸酉)갑술(甲戌)을해(乙亥)병자(丙子)
연호
(年號)
회창(會昌) 원년대중(大中) 원년2년3년4년5년6년7년8년9년10년
선종11년12년13년
서력(西曆)857년858년859년
간지(干支)정축(丁丑)무인(戊寅)기묘(己卯)
연호
(年號)
11년12년13년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Old Book of Tang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Dunhuang Art: Through the Eyes of Duan Wenjie https://books.google[...] Abhinav Publications
[6] 서적 Old Book of Tang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2] 팟캐스트 "#116-Tang 28: I, Xuānzong" https://thehistoryof[...] Agora Podcast Network 2017-01-22
[13] 웹사이트 Jewel of Chinese Muslim's Heritage http://www.muslimher[...] 2005-06
[14] 서적 New Book of Tang
[15] 웹사이트 The Evolution of Fireworks https://web.archive.[...] Smithsonian Science Education Center
[16] 문서 宋『尚服廟記』。宣宗の崩御後、実家へ返され再嫁した。
[17] 문서 의종 즉위 후에 황후로 추존됨.
[18] 문서 사후 재인으로 추봉됨.
[19] 문서 운왕(鄆王)
[20] 문서 사후에 황태자로 추존됨.
[21] 문서 선종이 원래 황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되지는 못함. 의종 즉위 몇년 후에 암살당함.
[22] 문서 서화공주(西華公主)
[23] 문서 의화공주(義和公主)
[24] 문서 출가하여 도사가 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