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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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륙 낭인은 일본의 국가주의 및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받아 중국 대륙과 한반도 등지에서 활동한 일본인들을 지칭한다. 초기에는 청나라와 조선으로 건너간 불평 사족과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갑신정변 등 이씨 조선 말기 정쟁에 관여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대륙 정책과 발맞춰 활동 범위를 넓혔으며,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에 협력하여 첩보, 후방 교란 등의 활동을 펼쳤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분열 상황을 틈타 활동을 이어갔으나, 중일 전쟁 종결과 함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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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낭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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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낭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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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및 활동 | |
정치적 선전 | 중국 내에서 친일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
정보 수집 |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정부나 관련 단체에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기도 했다. |
중국 혁명 지원 | 신해혁명과 같은 중국의 혁명 운동에 개입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일부 대륙낭인은 쑨원과 같은 혁명가를 지원하기도 했다. |
경제적 이권 확보 | 중국 대륙에서 광산 개발, 철도 건설 등 각종 이권 사업에 참여하여 일본 자본의 진출을 도왔다. |
무력 행사 | 필요에 따라 무력을 사용해 일본의 이익을 지키거나 특정 세력을 지원했다. |
주요 인물 | |
가와시마 나니와 | 조선과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대륙 침략에 기여했다. |
우치다 료헤이 | 흑룡회를 조직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국권 확장을 주장했다. |
도야마 미쓰루 | 현양사를 조직하여 대륙 진출을 옹호하고 지원했다. |
야마다 요시오시 | 중국 혁명에 관여하고 일본의 대륙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비판 | |
관련 용어 | |
낭인 | 원래는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사회에 불만을 품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
지사 | 국가나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 |
정한론 | 일본이 무력을 사용하여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 |
대동아공영권 |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념. |
같이 보기 |
2. 역사적 배경
"대륙 낭인"은 "국가주의, 대외 팽창론을 품고 대륙 각지에 거주·방랑한 민간 일본인의 통칭"[1]으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그 범위가 넓어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모든 대륙 낭인이 일본의 대외 진출을 지지한 것은 아니며, 군인이나 관료처럼 조직에 속한 사람들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륙 낭인과 같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륙 낭인"을 자칭하며 실제로는 군부나 남만주철도 등 일본계 기업과 결탁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2. 1. 초기 활동 (1870년대~1880년대)
초기 대륙 낭인의 기원은 정벌론 등이 논의되던 시기에 청나라와 조선으로 건너간 불평 사족과 상인들로 여겨지며, 갑신정변 등 이씨 조선 말기의 정쟁에 그들이 관여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1] 1870년대부터 1880년대에 걸쳐 청년 시절을 보낸 젊은이들은 막부 말기・메이지 유신의 소란기를 겪었고, 사족 반란과 자유민권운동의 좌절, 메이지 정부 체제의 확립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들은 유럽화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국가주의 혹은 아시아주의에 눈을 뜨고, 일본을 떠나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대륙 진출에 관여하려 했다. 이들은 개항장의 일본인 상점 등을 거점으로 현지의 풍속, 습관, 정치・경제 사정을 탐색하는 한편, 현양사・흑룡회・동아동문회 등 일본 국내 국가주의・아시아주의 단체와도 연계했다. 특히 현양사의 토야마 미쓰루는 이누카이 쓰요시와 함께 "대륙 낭인의 양대 거두"로 불릴 정도로 그들의 후원자로 알려졌다. 또한, 일본 정부의 대외 정책 관련 조사나 군부의 지원을 받아 병요지지 조사 등에 참여하며 중국어와 현지 정세에 통달한 "지나통"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군부 혹은 일본 재계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으면서, 이후 대륙 낭인의 방향성을 정하게 되었다.2. 2.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1894년~1905년)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지나통(支那通)"[1]이라 불리는 중국 전문가들이 일본군에 적극 협력하여 통역, 첩보, 후방 교란, 특무 공작 등에 종사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 일본의 대외 진출을 축으로 한 대륙 정책이 확정되면서, 대륙 낭인은 점차 그 범위 내에서 활동하도록 한정되었다. 오히려 대륙 낭인들은 이러한 풍조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일본 정부와 군부 및 여론의 대외 강경론을 이끌어내고,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 했다.2. 3. 신해혁명 이후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분열 상태는 대륙 낭인에게 일본의 대륙 정책에 기초한 새로운 활약의 장을 제공하고, 그 재생산을 촉진했다.[1] 하지만, 신해혁명의 진전에 따른 군벌의 몰락과 통일의 진행은 대륙 낭인의 활동과 그 이익에 상반되었고, 대륙 낭인의 입장은 일본의 국가주의에 기반하여 중화민국 측과 대립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주 사변과 이에 이어진 중일 전쟁은 대륙 낭인에게 또 다른 새로운 활동의 장을 제공했지만,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에 따른 일본의 패전과 대외 진출 정책의 종언으로 대륙 낭인은 사실상 소멸했다.2. 4.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1931년~1945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분열은 대륙 낭인에게 일본의 대륙 정책에 기반한 새로운 활약의 장을 제공했고, 그 재생산을 촉진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진전에 따른 군벌의 몰락과 통일의 진행은 대륙 낭인의 활동 및 그 이익과 상반되었고, 대륙 낭인의 입장은 일본의 국가주의에 기반하여 중화민국 측과 대립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주 사변과 이에 이어진 중일 전쟁은 대륙 낭인에게 또 다른 새로운 활동의 장을 제공했지만,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에 따른 일본의 패전과 대외 진출 정책의 종언으로 대륙 낭인은 사실상 소멸했다.[1]3. 주요 인물
대륙 낭인으로 분류되는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 근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구라 쇼소 | 기시다 긴코 | 오카 센진 | 이케가미 시로 | 소네 슌코 |
호조 나카헤이 | 타루이 토키치 | 이다 타케오 | 미야자키 슌지 | 오카모토 류노스케 |
카네코 야헤이 | 오자와 카츠로 | 아라오 세이 | 네즈 하지메 | 오가키 타케오 |
고노에 아쓰마로 | 하세가와 타츠노스케 | 아다치 겐조 | 나카노 지로 | 요코카와 쇼조 |
가와시마 나미하 | 사이고 시로 | 이시카와 고이치 | 스즈키 텐간 | 야마다 료세이 |
곤도 세이케이 | 이시미츠 마사키요 | 이부카 히코사부로 | 스에나가 세츠 | 히라야마 슈 |
미야자키 토텐 | 야스나가 토노스케 | 니시하라 카메조 | 하라구치 몬이치 | 우치다 료헤이 |
오키 테이스케 | 쿠도 타다시 | 야마나카 미네타로 | 호리카와 타츠키치로 | 아즈마 노리마사 |
아마카스 마사히코 | 다테 준노스케 | 사토미 하지메 | 코히나타 하쿠로 | 고다마 요시오 |
코노리 우지토시 |
참조
[1]
서적
日本歴史大事典
[2]
서적
日本歴史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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