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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박사 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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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방 박사 유물함은 동방 박사로 여겨지는 세 명의 유해를 보관하기 위해 제작된 호화로운 유물함이다. 1164년 쾰른 대주교 라이날트 폰 다셀이 밀라노에서 가져온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쾰른에 건설되었으며, 1180년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제작을 시작하여 약 1225년에 완성되었다. 이 유물함은 1,000개 이상의 보석과 구슬, 은도금 조각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쾰른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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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박사 유물함
개요
내부에서 본 동방 박사 유물함
내부에서 본 동방 박사 유물함
종류유물함
재료
금도금
보석
에나멜
스타일마스 강 미술
크기길이 220cm, 높이 110cm, 너비 70cm
위치쾰른 대성당
역사
제작 시기1180년 ~ 1225년경
제작 장소쾰른
의뢰인쾰른 대성당
중요 이벤트1164년 밀라노에서 유물 이전
보관쾰른 대성당 (성물실)
도상학
묘사동방 박사 경배
예수 그리스도
선지자
사도
보석고대 카메오
추가 정보
관련 인물라인날트 폰 다셀
프레데리히 1세
니콜라스 베르됭 (제작자로 추정)
참고 문헌Kremer, Bruno P. (2017). "Wenige Tage nach Weihnachten – Die Heiligen Drei Könige kommen". In Kremer, Bruno P. (ed.). Weihnachtsbaum und Osterhase : Unsere Jahresfeste – biologisch betrachtet (in German). Berlin, Heidelberg: Springer. pp. 17–33.
Zwierlein-Diehl, Erika (1997). "'Interpretatio Christiana': Gems on the 'Shrine of the Three Kings' in Cologne". Studies in the History of Art. 54: 62–83.

2. 역사

쾰른 대성당의 마법사 예배당. 1322년부터 1948년까지 동방 박사 유물함이 보관되었던 곳


동방 박사의 유물은 원래 콘스탄티노플로 헬레나 황후가 옮겼다. 314년, 콘스탄티누스는 이 유물을 밀라노 대교구밀라노 주교인 유스토르기우스 1세에게 맡겼고, 유스토르기우스 1세는 유물을 수레에 실어 밀라노로 옮겼다.[7] 116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밀라노의 성 유스토르기오 성당에서 동방 박사의 유물을 가져와 제국의 이탈리아 대재상이자 쾰른 대주교였던 라이날트 폰 다셀에게 주었다.[8] 라이날트는 이 유물을 쾰른으로 옮겼고, 이곳에 세 왕을 위한 유물함이 건설되었다. 그들의 뼈는 흰색 실크로 감싸져 유물함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 유물은 쾰른으로 끊임없이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

유물함의 일부는 유명한 중세 금세공인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디자인했으며,[9] 그는 1180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약 1225년에 완성했다. 유물함의 다른 부분은 필리프 폰 헨스베르크 대주교 시대에 추가 보석과 금으로 장식되었다.

약 1199년, 오토 4세는 세 명의 현자를 위해 만들어진 세 개의 황금 왕관을 쾰른 대성당에 선물했다. 유물함과 대성당이 도시의 발전에 미치는 중요성 때문에, 쾰른의 문장은 여전히 세 왕을 상징하는 이 세 개의 왕관을 보여준다. 오토 4세는 세 왕에게 금관을 바쳤지만, 유물함의 묘사에서는 그들과 함께 왕관을 쓰지 않는다.

현재 쾰른 대성당의 건설은 이 중요한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1248년에 시작되었으며, 완공까지 632년이 걸렸다.

성해는 500년 동안 유물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사제' 또는 '왕의 관리인'에 의해 세심하게 보존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수집가들은 성해의 보석을 매우 귀하게 여겨 성해가 강탈의 표적이 되었다. 1574년 1월 28일, 여러 개의 보석과 진주, 그리고 큰 카메오가 성해의 사다리꼴 판에서 도난당했다.[6] 도둑은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며 등을 신도들에게 돌린 틈을 타 유물함을 털었다. 보석과 장신구는 회수되지 못했고, 도둑의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다.[6]

프톨레마이오스 카메오


도난당한 카메오는 17겹으로 된 인도산 사도닉스로 만들어졌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그의 아내 아르시노에 2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카메오는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다.[10]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도난당한 카메오의 외형을 기록으로 남겼다. 1586년 10월, 이 카메오는 로마에서 풀비오 오르시니에게 팔렸다. 도난 당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강철 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르제트라는 갑옷 조각과 금색 틀로 수리되었다.[6] 1586년 이후, 이 카메오는 유물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비엔나의 황실 소장품에 보관되어 있다.[6]

1864년 7월 20일, 성해함이 열렸고, 그 안에서는 유골과 쾰른 대주교 필리프 1세의 동전이 발견되었다. 한 목격자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현재 성해함의 특별한 구획에는 [...] 세 사람의 뼈가 여러 개 있었다. [...] 한 사람은 어린 시절, 두 번째 사람은 청년 시절, 세 번째 사람은 나이가 꽤 있었다. 은으로 만든 브락테아테 동전 두 개가 함께 있었다. [...] 하나는 [...] 교회를 묘사하고 있었고(''주석 참조''), 다른 하나는 양쪽에 재판권의 칼과 주교 지팡이(크로지어)가 있는 십자가를 보여주었다."[11]

>''주석'': "''하르츠하임''의 ''콜로니엔의 화폐사'' 표 3, 14, 16번(1754년)의 필리프 동전과 같지만, 명문은 없다.[12] 다른 (동전)은 [...] 역시 필사본이 없으며, [...] [다셀의] 라인알드의 동전으로 판명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13]

2. 1. 기원



"유물"은 원래 콘스탄티노플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에 의해 옮겨졌다. 314년, 콘스탄티누스는 이 유물을 밀라노 대교구밀라노 주교인 유스토르기우스 1세에게 맡겼고, 유스토르기우스 1세는 유물을 수레에 실어 밀라노로 옮겼다.[7] 116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밀라노의 성 유스토르기오 성당에서 동방 박사의 유물을 가져와 제국의 이탈리아 대재상이자 쾰른 대주교였던 라이날트 폰 다셀에게 주었다.[8] 라이날트는 이 유물을 쾰른으로 옮겼고, 이곳에 세 왕을 위한 유물함이 건설되었다. 그들의 뼈는 흰색 실크로 감싸져 유물함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 유물은 쾰른으로 끊임없이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

유물함의 일부는 유명한 중세 금세공인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디자인했으며,[9] 그는 1180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약 1225년에 완성했다. 유물함의 다른 부분은 필리프 폰 헨스베르크 대주교 시대에 추가 보석과 금으로 장식되었다. 학자 리사 빅토리아 치레시는 이 귀중한 보석들이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고 언급한다.[1]

약 1199년, 오토 4세는 세 명의 현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세 개의 황금 왕관을 쾰른 대성당에 선물했다. 유물함과 대성당이 도시의 발전에 미치는 중요성 때문에, 쾰른의 문장은 여전히 세 왕을 상징하는 이 세 개의 왕관을 보여준다. 후고 슈테크엠퍼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 4세가 종종 네 번째 왕으로 묘사되었다고 이론화한다.[6] 그는 1198년에 왕위에 올랐고 1209년에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유물함 완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기증했다. 유물함에는 그가 동방 박사 뒤의 행렬에 "오토 렉스(Otto Rex)"라는 비문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오토 4세는 세 왕에게 금관을 바쳤지만, 유물함의 묘사에서는 그들과 함께 왕관을 쓰지 않는다. 위르겐 페터손은 오토 4세가 세 마법사와 동등한 지위를 갖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리스도 경배에 참여한다고 썼다.[6]

현재 쾰른 대성당의 건설은 이 중요한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1248년에 시작되었다. 대성당은 완공까지 632년이 걸렸으며, 현재 북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 건축 교회이다.

2. 2. 제작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유물함의 일부를 디자인했으며,[9] 그는 1180년에 작업을 시작하여 약 1225년에 완성했다. 필리프 폰 헨스베르크 대주교 시대에 보석과 금을 추가하여 유물함을 장식했다. 학자 리사 빅토리아 치레시는 이 귀중한 보석들이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고 언급한다.[1]

약 1199년, 오토 4세는 세 명의 현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세 개의 황금 왕관을 쾰른 대성당에 선물했다. 유물함과 대성당이 도시 발전에 미치는 중요성 때문에, 쾰른의 문장은 여전히 세 왕을 상징하는 이 세 개의 왕관을 보여준다. 후고 슈테크엠퍼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 4세가 종종 네 번째 왕으로 묘사되었다고 이론화한다.[6] 그는 1198년에 왕위에 올랐고 1209년에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유물함 완성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기증했다. 유물함에는 그가 동방 박사 뒤의 행렬에 "오토 렉스(Otto Rex)"라는 비문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오토 4세는 세 왕에게 금관을 바쳤지만, 유물함의 묘사에서는 그들과 함께 왕관을 쓰지 않는다. 위르겐 페터손은 오토 4세가 세 마법사와 동등한 지위를 갖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리스도 경배에 참여한다고 썼다.[6]

2. 3. 보존과 훼손

유물은 원래 콘스탄티노플로 헬레나 황후에 의해 옮겨졌고, 314년에 밀라노 대교구밀라노 주교인 유스토르기우스 1세에 의해 밀라노로 옮겨졌다.[7] 116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밀라노의 성 유스토르기오 성당에서 동방 박사의 유물을 가져와 쾰른 대주교 라이날트 폰 다셀에게 주었다.[8] 라이날트는 이 유물을 쾰른으로 옮겼고, 이곳에 세 왕을 위한 유물함이 건설되었다.

유물함의 일부는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디자인했으며,[9] 1180년에 시작하여 약 1225년에 완성되었다. 유물함의 다른 부분은 필리프 폰 헨스베르크 대주교 시대에 추가 보석과 금으로 장식되었다.

약 1199년, 오토 4세는 세 명의 현자를 위해 만들어진 세 개의 황금 왕관을 쾰른 대성당에 선물했다. 쾰른의 문장은 여전히 세 왕을 상징하는 이 세 개의 왕관을 보여준다. 오토 4세는 세 왕에게 금관을 바쳤지만, 유물함의 묘사에서는 그들과 함께 왕관을 쓰지 않는다.

현재 쾰른 대성당의 건설은 이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1248년에 시작되었으며, 완공까지 632년이 걸렸다.

성해는 수많은 변동과 복원을 겪었지만, 이미 손실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호화롭게 보존되어 있다. 성해의 마지막 복원은 196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6]

성해는 500년 동안 유물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사제' 또는 '왕의 관리인'에 의해 세심하게 보존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수집가들은 성해의 보석을 매우 귀하게 여겨 성해가 강탈의 표적이 되었다. 1574년 1월 28일, 여러 개의 보석과 진주, 그리고 큰 카메오가 성해의 사다리꼴 판에서 도난당했다.[6] 도둑은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며 등을 신도들에게 돌린 틈을 타 유물함을 털었다. 보석과 장신구는 회수되지 못했고, 도둑의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다.[6]

도난당한 카메오는 17겹으로 된 인도산 사도닉스로 만들어졌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그의 아내 아르시노에 2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카메오는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다.[10]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도난당한 카메오의 외형을 기록으로 남겼다. 1586년 10월, 이 카메오는 로마에서 풀비오 오르시니에게 팔렸다. 도난 당시 파손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강철 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르제트라는 갑옷 조각과 금색 틀로 수리되었다.[6] 1586년 이후, 이 카메오는 유물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비엔나의 황실 소장품에 보관되어 있다.[6]

1864년 7월 20일, 성해함이 열렸고, 그 안에서는 유골과 쾰른 대주교 필리프 1세의 동전이 발견되었다. 한 목격자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현재 성해함의 특별한 구획에는 [...] 세 사람의 뼈가 여러 개 있었다. [...] 한 사람은 어린 시절, 두 번째 사람은 청년 시절, 세 번째 사람은 나이가 꽤 있었다. 은으로 만든 브락테아테 동전 두 개가 함께 있었다. [...] 하나는 [...] 교회를 묘사하고 있었고(''주석 참조''), 다른 하나는 양쪽에 재판권의 칼과 주교 지팡이(크로지어)가 있는 십자가를 보여주었다."[11]

>''주석'': "''하르츠하임''의 ''콜로니엔의 화폐사'' 표 3, 14, 16번(1754년)의 필리프 동전과 같지만, 명문은 없다.[12] 다른 (동전)은 [...] 역시 필사본이 없으며, [...] [다셀의] 라인알드의 동전으로 판명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13]

3. 동방 박사의 정체성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세 명의 동방 박사는 아기 예수를 안고 왕좌에 앉아 있는 마리아에게 황금, 유향, 몰약을 차례대로 봉헌했다.[6] 이들은 별을 보고 그리스도가 태어난 동쪽에서 베들레헴으로 향했다.[6] 동방 박사는 카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이다.[6]

3. 1. 카스파르

카스파르는 동방 박사 세 명 중 가장 젊은 인물로, 짧은 수염을 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6] 그는 아기 예수에게 유향을 선물했다.[6]

3. 2. 멜키오르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멜키오르는 아기 예수를 안고 왕좌에 앉아 있는 마리아에게 황금, 유향, 몰약을 차례대로 봉헌한 세 명의 동방 박사 중 한 명이다.[6] 이들은 별을 보고 그리스도가 태어난 동쪽에서 베들레헴으로 향했다.[6] 동방 박사는 신사에서 황금상으로 나타나는 순서대로 카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이다.[6] 신사에서 긴 수염을 한 모습으로 묘사된 멜키오르는 세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으며,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선물했다.[6]

3. 3. 발타사르

발타사르는 아라비아 또는 에티오피아의 왕으로 묘사되며, 아기 예수에게 몰약을 선물했다.[6] 동방 박사 유물함에서 발타사르는 늙은 중동 또는 흑인 남자로 아프리카 특징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었다.[6]

4. 유물함의 구조와 장식

라이날트 폰 다셀의 흉상 세부 묘사


동방 박사 유물함의 외부는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배경 장식의 작은 조각들을 제외하고 총 74개의 부조 은도금 조각상이 있다. 측면 하단에는 예언자들의 이미지가, 상단에는 사도와 복음사가들의 이미지가 장식되어 있으며, 초기 장식에 사용된 142개를 포함하여 총 304개의 조각된 보석이 사용되었다.[6]

1574년까지 중앙에는 천사들이 받치고 있는 거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카메오가 있었다. 이 천사들은 그리스도 옆에서 성배, 성찬기, 왕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메신저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다.[1] 유물은 탈착 가능한 사다리꼴 형태의 격자형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다.

4. 1. 크기와 구조

동방 박사 유물함은 너비 약 110cm, 높이 153cm, 길이 220cm이다. 바실리카 형태이며, 두 개의 석관이 나란히 놓여 있고, 세 번째 석관은 그 지붕 능선 위에 놓여 있다. 끝부분은 완전히 덮여 있어서 석관 사이에는 틈이 보이지 않는다. 기본 구조는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세공, 유리질 에나멜, 1,000개 이상의 보석과 구슬로 장식된 금과 은으로 덮여 있다. 여기에는 다수의 카메오, 인타글리오 조각과 일부 기독교 이전 시대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1]

4. 2. 장식

성물함 전체 외부는 정교한 장식으로 덮여 있다. 배경 장식에 있는 작은 추가 조각들을 제외하고 총 74개의 부조 은도금 조각상이 있다. 측면 하단에는 예언자들의 이미지가, 상단에는 사도와 복음사가들의 이미지가 장식되어 있다. 초기 장식에 사용된 142개를 포함하여 총 304개의 조각된 보석이 있다.[6] 봉헌 촛불과 스물네 개의 램프가 성물함을 둘러싸고 있으며, 성물함 위에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웅장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1]

1574년까지 중앙에는 천사들에 의해 지지된 거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카메오가 있었다. 이 천사들은 그리스도 옆에서 성배, 성찬기, 왕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메신저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다.[1] 유물은 탈착 가능한 사다리꼴 형태의 격자형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다.

4. 2. 1. 앞면

성유물함 앞면은 1200년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높은 중앙 지점을 가진 대성당의 모습을 닮았다. 이곳에 위치한 조각상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6] 이 구역에는 가장 귀중한 보석들이 있었지만, 16세기에 도난당했다. 아래쪽에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동방 박사의 경배, 아기 예수를 안고 왕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예수의 세례 이미지가 있으며, 위쪽에는 최후의 심판에서 왕좌에 앉은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다. 분리 가능한 금세공 패널은 카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의 이름이 표시된 격자창을 보여준다. 격자창을 제거하면 세 동방 박사의 두개골이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6]

사다리꼴 판이 있는 성유물함 앞면


현재의 앞면은 베르됭의 니콜라스가 만든 원래 디자인 이후에 개조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원래 계획은 알려져 있지 않다.[6] 프톨레마이오스 카메오, 천사들, 그리고 아치 공간의 왕관 줄은 제거되었지만, 오토 4세의 조각상은 그가 들고 있는 작은 금 상자를 제외하고는 변하지 않았다.[1]

4. 2. 2. 뒷면

뒷면의 외형은 상단에 있는 두 개의 유물함과 유사하다. 세 박사의 유물은 성물함 하단 부분에 배치되어 있으며, 순교자 펠릭스와 나보르는 더 작은 상단 부분에 위치해 있다. 배경 장식의 작은 추가 조각들을 제외하고, 총 74개의 고부조 인물이 은도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표면은 하단, 중간, 상단의 3개 구역으로 나뉜다. 예레미야의 서 있는 모습은 하단 구역에서 채찍질과 십자가형의 사건을 구분한다. 하단 구역 위인 중간 구역에는 쾰른 대주교인 라인알트 폰 다셀의 흉상이 있다. 상단 구역에서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순교자 펠릭스와 나보르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보인다. 위엄의 그리스도는 왼손에는 생명의 책을 들고 오른손은 심판을 위해 높이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문은 박공의 안쪽 띠를 따라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1]

"ADVENIO DIGNOS SALVARE FERIRE MALIGNOS ERGO BONI METITE FELICIA GAVDIA VITE ITE REI VOS IRA DEI TRANSMITTIT IN IGNem QUISQue METIT QUOD ProMERVIT SUB IUDICE IVSTO."[1]

4. 2. 3. 측면

측면에는 상단과 하단을 연결하는 두 개의 일련의 아치가 있다. 예언자들의 모습은 하단을 장식하고, 사도와 복음사가들의 모습은 상단을 장식하며, 모두 명문으로 식별되고 금박을 입힌 은으로 만들어졌다. 플렌티누도 시엔티에(풍부한 지혜)라는 이름의 케루빔은 사도들 가운데에 앉아 있고, 아르덴스 카리타테(열렬한 성스러운 사랑)라는 이름의 세라핌은 다른 쪽에 앉아 있다.[1]

4. 3. 모산 미술

모산 미술(Mosa|모사la)은 12세기와 13세기 동안 주로 뫼즈강 계곡에서 제작된 카롤링거 미술에서 파생된 지역 양식이다. 뫼즈 계곡은 오늘날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 위치해 있다.[14] 정교한 금속 세공은 현재 프랑스에 있는 베르됭 출신의 니콜라스 드 베르됭(Nicholas of Verdun)이 제작했는데, 베르됭은 뫼즈강 유역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에나멜 패널은 예수의 생애, 성모 마리아, 다양한 성인, 그리고 동방 박사의 성서적 이야기와 도상을 묘사한다. 유물에 조각 요소가 보인다. 모산 미술가들은 작품에 샹르베 에나멜, 필리그리, 클로이존네와 같은 기술을 사용했다.[15]

참조

[1] 서적 A liturgical study of the Shrine of the three kings in Cologn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2] 간행물 Wenige Tage nach Weihnachten – Die Heiligen Drei Könige kommen https://doi.org/10.1[...] Springer 2023-01-29
[3] 서적 Der Dreikönigenschrein im Kölner Dom. Theologische Aspekte der Darstellung Universität zu Köln, Kunsthistorisches Institut (KHI) 2012
[4] 간행물 Tomb of the Three Kings Frank Leslie 1872
[5] 서적 A History of Arabia Caravan Books 1980
[6] 학술지 'Interpretatio Christiana': Gems on the 'Shrine of the Three Kings' in Cologne https://www.jstor.or[...] 1997
[7] 서적 The Heritage Crusade and the Spoils of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8] 웹사이트 Cologne Cathedral Supposedly has the Bones of the Three Wise Men – Unearthed https://www.sciencec[...] 2017-11-07
[9] 뉴스 Der Hohe Dom zu Köln – Kathedrale und Weltkulturerbe – Gebaut für Gott und die Menschen https://www.koelner-[...] 2017-11-07
[10] 웹사이트 Cameo with portrait heads {{!}} Greek, Ptolemaic {{!}} Hellenistic https://www.metmuseu[...] 2024-05-14
[11] 문서
[12] 서적 Historia Rei Nummariæ Coloniensis, Et Dissertationes De Eadem: Pars prima, De Nummis Archiepiscoporum Coloniensium, Pars Secunda, De Nummis Ducum Juliacensium & Montensium, & Agnatorum Genti Juliacensi, Pars Tertia. De Nummis Civitatis Coloniensis 1754
[13] 문서
[14] 학술지 The Stavelot Triptych: Notes on a Mosan Work https://www.jstor.or[...] 1972
[15] 학술지 Notes on Some Mosan Enamels https://www.jstor.or[...]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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