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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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예루살렘은 1949년 제1차 중동 전쟁 휴전 협정에 따라 요르단이 통치하던 지역으로,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후 서예루살렘에 통합되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선언했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동예루살렘을 독립 후 수도로 간주한다. 동예루살렘은 고대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온 지역으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위치해 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의 도시 계획을 통해 유대인 인구를 늘리고,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건축 허가를 제한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해왔으며, 이는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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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루살렘은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관할하에 놓여 1950년 수도로 선포되었으며, 주요 상업, 의료, 종교 시설이 위치해 있다. - 예루살렘의 지리 - 키드론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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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예루살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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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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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아랍어) (히브리어) |
로마자 표기 | Al-Quds ash-Sharqiya (아랍어) Mizrah Yerushalayim (히브리어) |
행정 구역 | |
국가 |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
행정 구역 구분 | 예루살렘현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지구 (이스라엘) |
도시 | 예루살렘 |
지리 | |
면적 | 33.7 km² |
인구 | |
총 인구 (2017년) | 281,163명 |
인구 밀도 | 8,343명/km² |
시간대 | |
시간대 | UTC+2 |
서머 타임 | UTC+3 |
기타 정보 | |
전화 지역 번호 | 해당 정보 없음 |
ISO 코드 | 해당 정보 없음 |
차량 번호판 코드 | 해당 정보 없음 |
공식 웹사이트 | 해당 정보 없음 |
비고 | 해당 정보 없음 |
지도 정보 |
2. 역사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부였던 동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국 행정 구역으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선포하며 실질적인 지배를 강화해왔다.
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의 시 경계를 확장하여 현재 "동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약 70km2를 포함시켰다. 여기에는 "요르단 동예루살렘"(6km2)과 베들레헴, 베이트 잘라 시의 64km2에 달하는 28개 마을과 지역이 포함되었다.[18]
점령 직후, 이스라엘은 무그라비 구역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1948년에 파괴되었던 유대인 지구를 재건하여 유대인들이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과 통합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이스라엘 시민권 대신 "영주권"을 부여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내 유대인 인구를 늘리고 팔레스타인 인구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예를 들어, 유대인 정착민에게는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높은 재산세를 부과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주택 건설을 제한하고, 이스라엘 서안 지구 분리 장벽을 건설하여 동예루살렘을 서안 지구와 분리시켰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주택 부족, 높은 실업률, 빈곤, 기본적인 서비스 부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 당국으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1980년, 크네세트는 예루살렘법을 통과시켜 "통합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다. 이는 공식적인 조치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병합 행위로 불린다.[19] 이 선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 의해 "무효"로 결정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에서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명시했다. 2000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2002년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이 법을 승인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 PLO와 관련된 모든 사무실 및 NGO 조직을 폐쇄했으며,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협력 기구 (OIC)는 2017년 12월 13일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했다.
제2차 인티파다 동안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동쪽 경계 주변에 보안 장벽을 설치하여 동예루살렘의 지역 사회를 서안 지구의 교외 지역과 분리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입법 선거에서 하마스는 4석을, 파타는 2석을 얻었지만,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의해 시내에서 선거 운동이 금지되었다.
2018년, 이스라엘은 라마트 슐로모 정착촌에 640개의 새로운 "유대인 전용" 주택 건설을 승인했다. 베체렘에 따르면, 이스라엘 당국은 2004년 이후 동예루살렘에서 949채의 팔레스타인 가옥을 파괴하여 3,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하게 했다. 2019년 첫 10개월 동안 140채 이상의 가옥이 철거되어 238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집을 잃었다.[20][21]
2. 1. 고대 시대
동예루살렘 지역은 기원전 5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채석기 시대에 정착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3200년경의 청동기 시대 초기 무덤이 발견되었다.[18] 기원전 2천년기 후반, 기혼 샘과 가까운 다윗 성 주변에 정착지가 집중되었다. 거대한 가나안인의 건축이 이루어졌는데, 요새 안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바위를 뚫어 물길을 만들었다. 성벽은 두께가 7미터에 달했고, 무게가 약 2721.55kg에 달하는 바위로 지어졌다.[18]
2. 2. 영국 위임통치 시대

1934년, 영국 위임통치 당국은 선거를 위해 예루살렘을 12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구획 설정은 예루살렘 시의회에서 팔레스타인계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려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이클 덤퍼에 따르면, 실제 구획 설정은 이와는 다르게 서쪽 선거 경계선의 "갈고리"는 가능한 한 많은 새로운 유대인 거주지를 포함시키고 아랍 마을은 경계 밖으로 유지하기 위한 게리맨더링이라고 하였다. 동쪽으로, 도시의 경계는 실완, 라스 알-아무드, 앗-투르 및 아부 토르의 인접한 아랍인 거주지를 제외하기 위해 옛 시가지 성벽에서 끝났다. 이 경계는 1948년까지 시정촌을 정의했다. 1947년까지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예루살렘 지구 전체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영국 시정촌 경계 내에서는 유대인이 99,000명 대 65,100명의 아랍인으로 우세를 보였다. 동예루살렘의 유대인 거주는 구시가지에 집중되어 있었고, 실완과 셰이크 자라에도 산재해 있었다.
2. 3.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그 여파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둘로 나뉘었다. 서쪽은 이스라엘이, 동쪽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는데, 국제 사회는 양측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다.[18] 동예루살렘은 주로 무슬림과 기독교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했다.예루살렘 전투는 요르단 아랍 군단과 이스라엘 방위군(IDF), 이르군, 레히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특히 유대인 지구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폐허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27개의 시나고그와 30개의 학교가 파괴되었다.[40] 요르단군은 후르바 시나고그를 폭파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추방은 1948년 1월 하가나가 세미라미스 호텔을 폭파하면서 시작되었고, 데이르 야신 학살 이후 더욱 심해졌다.[38] 많은 유대인들도 도시를 떠났다. 적십자사는 시온 문을 통해 약 1,300명의 유대인을 서쪽으로 대피시켰다.[39] 요르단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월경지였던 스코푸스 산에는 히브리 대학교가 있었다.
카타몬, 탈비야, 바카 등 서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났으며,[41] 이들 중 상당수는 구시가지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동예루살렘은 서예루살렘의 아랍 지역 출신 중산층을 포함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수용했다. 이들은 이전에 동쪽 지역의 유대인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으며, 서예루살렘 교외로 이주하기도 했다. 분쟁 결과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30~40% 감소했고, 팔레스타인 인구의 절반이 떠났다. 1952년 요르단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동예루살렘의 아랍 인구는 46,700명이었다.
2. 4. 요르단 통치 시기 (1949-1967)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었으며,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 하에 놓였다. 요르단 통치 기간(1949-1967) 동안 동예루살렘은 종교적 중요성을 유지하면서도 여러 변화를 겪었다.1949년 휴전 협정에 따라 그린 라인이 설정되어 예루살렘이 분할되었다. 요르단은 동예루살렘(구시가지 포함)을 통치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서안 지구와 함께 동예루살렘을 합병했다.[18] 이 합병은 영국에 의해 사실상 통제로 인정되었으나, 미국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1953년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두 번째 수도로 선포했지만, 주요 관공서는 암만으로 이전되었다.
예루살렘 전투 동안 요르단 아랍 군단과 IDF 사이의 전투는 유대인 지구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많은 시나고그와 학교가 파괴되었다.[39] 전쟁 이후 동예루살렘에는 서예루살렘에서 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입되어 인구가 증가했다. 1952년 요르단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동예루살렘의 아랍 인구는 46,700명이었다.[40]
요르단 당국은 동예루살렘의 성지에 대해 오스만 제국의 현상 유지를 유지했다. 성묘 교회의 복구 과정에서 요르단은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1960년대 초에는 올리브산에 인터컨티넨탈 호텔이 건설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유대인 묘지가 훼손되어 논란이 일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묘비가 도로 공사 및 군용 변소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며 항의했다.[41]
1960년대 동안 동예루살렘은 관광 산업이 발전하면서 경제적 개선을 보였다. 그러나 요르단은 이스라엘 여권을 인정하지 않아 유대인과 무슬림 이스라엘인은 동예루살렘의 예배 장소에 접근할 수 없었다.
2. 5. 이스라엘 통치 시기 (1967-현재)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부였던 동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국 행정 구역으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선포하며 실질적인 지배를 강화해왔다.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의 시 경계를 확장하여 현재 "동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약 70km2를 포함시켰다. 여기에는 "요르단 동예루살렘"(6km2)과 베들레헴, 베이트 잘라 시의 64km2에 달하는 28개 마을과 지역이 포함되었다.[18]
점령 직후, 이스라엘은 무그라비 구역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또한, 1948년에 파괴되었던 유대인 지구를 재건하여 유대인들이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과 통합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이스라엘 시민권 대신 "영주권"을 부여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내 유대인 인구를 늘리고 팔레스타인 인구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예를 들어, 유대인 정착민에게는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높은 재산세를 부과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주택 건설을 제한하고, 이스라엘 서안 지구 분리 장벽을 건설하여 동예루살렘을 서안 지구와 분리시켰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주택 부족, 높은 실업률, 빈곤, 기본적인 서비스 부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 당국으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2. 5. 1. 1980년 병합 이후
1967년 6일 전쟁 이후, 동예루살렘은 서안 지구 전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스라엘은 점령 직후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에 흡수시켰다. 1980년, 크네세트는 예루살렘법을 통과시켜 "통합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다. 이는 공식적인 조치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병합 행위로 불린다.[19] 이 선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 의해 "무효"로 결정되었다.1948년 전쟁 이후 다비드 벤구리온은 "유대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의 유기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선언했고,[19] 요르단은 이듬해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다. 이러한 결정은 1950년 1월 이스라엘 크네세트와 1950년 4월 요르단 의회에서 확인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동예루살렘은 확장된 경계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의 병합이었다.[19] 유엔 총회는 도시의 지위를 변경하는 조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에서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명시했다. 2000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2002년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이 법을 승인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 PLO와 관련된 모든 사무실 및 NGO 조직을 폐쇄했으며,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협력 기구 (OIC)는 2017년 12월 13일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했다.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지역을 이스라엘의 "법, 관할권 및 행정"에 포함시켰지만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를 서예루살렘의 자치구에 편입시켰다. 내부적으로 이 조치는 그 도시의 일부를 이스라엘에 통합하는 병합으로 설명되었다.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이 조치를 비난하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서 그 법을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것으로 계속 간주한다. 이스라엘은 선출된 아랍 시의회를 해산하고, 이를 서예루살렘 시장인 테디 콜렉의 행정부에 두었다. 동예루살렘 시장인 루히 알-카티브는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
전력 공급과 같은 서비스는 팔레스타인 회사에서 이스라엘 회사로 이전되었고, 장관 결정에 따라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인의 비율은 정책적으로 76대 24로 정해졌지만, 2000년 마스터플랜에서는 이 비율을 70대 30으로 조정했고, 이는 다시 팔레스타인 인구 증가를 고려하여 60대 40%의 비율을 따라야 했으며, 현재 이 비율은 도시 인구의 37%를 차지한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제안받았을 때, 압도적인 다수는 대신 거주자 지위를 선택하고 이스라엘 기관에 대한 보이콧 전략을 채택했다. 이후 자치구에 포함된 동예루살렘 토지의 90%는 1967년 이후 28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을 또는 사유지를 대부분 수용하여 추가되었다.
이후, 유대인 정착민에게 5년간의 세금 면제를 허용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재산세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반면 예루살렘 서안 지구 거주자들은 재산세가 높은 등급으로 분류되어 시정 서비스의 26%를 부담하면서 혜택은 5%만 받았다(2000년). 1986년까지 아랍 동예루살렘의 60%는 쓰레기 수거 시설이 부족했고, 학교는 교실을 확장할 수 없어 독특한 이중 교대제 시스템을 강요받았다. 유대인 지역은 최대 8층까지 건물을 지을 수 있었지만,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2층으로 제한되었다. 이 지역의 기반 시설은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B'Tselem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이 지역의 37만 명의 과밀 거주자들은 사전 통지 없이 거주자의 이동에 대한 극심한 제한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그들의 거주가 취소될 수 있고, 건축 허가는 거의 주어지지 않으며, 분리 장벽이 그들을 도시의 나머지 지역과 격리시킨다. 매일 14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일하고, 건강 검진을 받고,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들의 빈곤은 꾸준히 증가하여 예루살렘의 "비유대인" 가구의 77%가 이스라엘 빈곤선 이하인 반면, 유대인 가족은 24.4%였다(2010년).
2012년의 국제 위기 그룹 보고서는 이스라엘 정책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분리 장벽으로 서안 지구와의 교역이 차단되고, 이스라엘의 대테러 기관이 "정치적 파괴"로 포함하는 정치 조직이 동방의 집 폐쇄로 인해 거부되었으며, 그것은 번창하는 유대인 지역에 둘러싸인 "고아 도시"이다. 지역 건설이 차단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빈민가가 되었고, 이스라엘 경찰조차 안전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감히 가지 않아서 범죄 사업이 번성했다.
동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할권 확장은 여러 인접 마을을 포함하여 요르단 동예루살렘의 시 관할 구역을 서안 지구 영토를 통합하여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 과정에서 아부 디스, 알-아이자리야, 베이트 하니나, 알-람과 같은 동예루살렘의 여러 교외 지역은 제외되었고, 여러 아랍 마을이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 경계 안에 포함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자제했다. 이는 합병의 표시였다.
서쪽 벽 앞의 옛 무그라비 구역은 점령 3일 만에 불도저로 철거되었고, 135가구가 강제로 재정착되었다. 그 자리는 넓은 야외 광장으로 대체되었다. 1948년에 파괴된 유대인 지구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지만, 재건되어 유대인들이 재정착했다.
제2차 인티파다 동안 침투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동쪽 경계 주변에 보안 장벽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구조물은 동예루살렘의 지역 사회를 서안 지구의 교외 지역과 분리했으며, 이들 지역은 모두 이스라엘과 IDF의 관할 하에 있다. 분리 장벽의 계획된 경로는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스라엘 대법원은 장벽의 특정 구간(동예루살렘 구간 포함)의 경로를 변경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오슬로 협정에서 PLO는 동예루살렘 문제를 임시 협정에서 제외하고 최종 지위 협상으로 넘기기로 양보했다. 2001년 이후 이스라엘은 PA의 일부라는 구실로 많은 팔레스타인 NGO를 폐쇄했다.
2006년 1월 25일 팔레스타인 입법 선거에서 6,300명의 동예루살렘 아랍인이 등록되어 현지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주민들은 서안 지구 투표소로 이동해야 했다. 하마스는 4석을, 파타는 2석을 얻었지만,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의해 시내에서 선거 운동이 금지되었다.
2009년 3월, 기밀 "동예루살렘에 관한 EU 대표단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동예루살렘의 "불법 병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스라엘의 '현실적 사실' – 새로운 정착촌, 장벽 건설, 차별적인 주택 정책, 주택 철거, 제한적인 허가 제도, 팔레스타인 기관의 지속적인 폐쇄 등 – 은 동예루살렘에서 유대계 이스라엘인의 존재를 증가시키고, 시내의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약화시키며, 팔레스타인 도시 개발을 방해하고, 동예루살렘을 서안 지구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한다."
2018년, ''알 바와바''는 이스라엘이 극 보수적인 라마트 슐로모 정착촌에 640개의 새로운 "유대인 전용" 주택 건설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주택 중 일부는 사유 재산인 팔레스타인 토지에 건설될 것이다. 베체렘에 따르면, 이스라엘 당국은 2004년 이후 동예루살렘에서 949채의 팔레스타인 가옥을 파괴하여 3,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하게 했다. 2016년 이후 철거가 눈에 띄게 증가하여 그 해에 92채가 철거되었다. 2019년 첫 10개월 동안 140채 이상의 가옥이 철거되어 238명의 팔레스타인인, 그중 127명이 미성년자,들이 집을 잃었다.[20][21]
2011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동예루살렘 아랍인 주민의 39%가 팔레스타인 시민권 대신 이스라엘 시민권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주민의 40%는 팔레스타인 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면 거주지를 떠나고 싶어했다.
1998년 기준으로 예루살렘의 종교 유산은 1,072개의 시나고그, 52개의 모스크, 65개의 교회 및 72개의 수도원으로 구성된다.
3. 지위
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의 시 경계를 확장하여 현재 "동예루살렘"으로 불리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약 70km2를 포함시켰다. 여기에는 "요르단 동예루살렘"(6km2)과 베들레헴 및 베이트 잘라 시의 64km2에 달하는 28개 마을과 지역이 포함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동예루살렘은 서안 지구 전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스라엘 점령 직후, 동예루살렘은 여러 인접한 서안 지구 마을과 함께 서예루살렘에 흡수되었다. 1967년 11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가 통과되었으며, 평화 조약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최근 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1980년, 크네세트는 "통합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는 예루살렘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공식적인 조치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병합 행위로 불린다.[19] 이 선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 의해 "무효"로 결정되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1949년 12월 "유대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의 유기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했고,[19] 요르단은 이듬해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다. 이러한 결정은 1950년 1월 이스라엘 크네세트와 1950년 4월 요르단 의회에서 각각 확인되었다.[19]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동예루살렘은 확장된 경계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의 병합이었다. 유엔 총회의 만장일치 결의안에서, 유엔은 도시의 지위를 변경하는 조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1988년)에서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명시되어 있다. 2000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2002년 10월 이 법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 PLO와 관련된 모든 사무실 및 NGO 조직을 폐쇄했으며,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협력 기구(OIC)는 2017년 12월 13일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했다.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지역을 이스라엘의 "법, 관할권 및 행정"에 포함시켰지만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를 서예루살렘의 자치구에 편입시켰다. 내부적으로 이 조치는 그 도시의 일부를 이스라엘에 통합하는 병합으로 설명되었다. 비판적인 국제 사회를 상대로는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순전히 기술적인 조치이며 병합이 아니라고 정당화했으며, 1980년 7월 30일 기본법: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수도 통과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주장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이 조치를 비난하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서 그 법을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것으로 계속 간주한다. 이스라엘은 선출된 아랍 시의회를 해산하고, 이를 서예루살렘 시장인 테디 콜렉의 행정부에 두었다.
동예루살렘 시장인 루히 알-카티브와 요르단 시의회 의원들은 이스라엘 군정에 의해 해산 통보를 받았다. 알-카티브는 시위 조직 혐의로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
전력 공급과 같은 서비스는 팔레스타인 회사에서 이스라엘 회사로 이전되었고, 장관 결정에 따라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인의 비율은 정책적으로 76대 24로 정해졌지만, 2000년 마스터플랜에서는 이 비율을 70대 30으로 조정했고, 이는 다시 팔레스타인 인구 증가를 고려하여 60대 40%의 비율을 따라야 했으며, 현재 이 비율은 도시 인구의 37%를 차지한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제안받았을 때, 압도적인 다수는 대신 거주자 지위를 선택하고 이스라엘 기관에 대한 보이콧 전략을 채택했다. 이후 자치구에 포함된 동예루살렘 토지의 90%는 1967년 이후 28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을 또는 사유지를 대부분 수용하여 추가되었다.
이후, 유대인 정착민에게 5년간의 세금 면제를 허용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재산세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반면 예루살렘 서안 지구 거주자들은 재산세가 높은 등급으로 분류되어 시정 서비스의 26%를 부담하면서 혜택은 5%만 받았다(2000년). 유대인 지역은 최대 8층까지 건물을 지을 수 있었지만,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2층으로 제한되었다. 이 지역의 기반 시설은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2017년 현재, 이 지역의 37만 명의 과밀 거주자들은 사전 통지 없이 거주자의 이동에 대한 극심한 제한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그들의 거주가 취소될 수 있고, 건축 허가는 거의 주어지지 않으며, 분리 장벽이 그들을 도시의 나머지 지역과 격리시킨다. 매일 14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일하고, 건강 검진을 받고,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들의 빈곤은 꾸준히 증가하여 예루살렘의 "비유대인" 가구의 77%가 이스라엘 빈곤선 이하인 반면, 유대인 가족은 24.4%였다(2010년).
2012년 국제 위기 그룹 보고서는 이스라엘 정책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분리 장벽으로 서안 지구와의 교역이 차단되고, 이스라엘의 대테러 기관이 "정치적 파괴"로 포함하는 정치 조직이 동방의 집 폐쇄로 인해 거부되었으며, 그것은 번창하는 유대인 지역에 둘러싸인 "고아 도시"이다. 지역 건설이 차단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빈민가가 되었고, 이스라엘 경찰조차 안전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감히 가지 않아서 범죄 사업이 번성했다.
이스라엘의 통치 하에 모든 종교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성지에 접근할 수 있으며, 무슬림 와크프는 성전 산과 그곳의 무슬림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제2차 인티파다 동안 침투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동쪽 경계 주변에 보안 장벽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구조물은 동예루살렘의 지역 사회를 서안 지구의 교외 지역과 분리했으며, 이들 지역은 모두 이스라엘과 IDF의 관할 하에 있다.
오슬로 협정에서 PLO는 동예루살렘 문제를 임시 협정에서 제외하고 최종 지위 협상으로 넘기기로 양보했다. 2001년 이후 이스라엘은 PA의 일부라는 구실로 많은 팔레스타인 NGO를 폐쇄했다.
2006년 1월 25일 팔레스타인 입법 선거에서 6,300명의 동예루살렘 아랍인이 등록되어 현지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주민들은 서안 지구 투표소로 이동해야 했다. 하마스는 4석을, 파타는 2석을 얻었지만,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의해 시내에서 선거 운동이 금지되었다.
2009년 3월, 유럽 연합은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의 "불법 병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기밀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8년, 이스라엘은 극 보수적인 라마트 슐로모 정착촌에 640개의 새로운 "유대인 전용" 주택 건설을 승인했다. 이들 주택 중 일부는 사유 재산인 팔레스타인 토지에 건설될 것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2004년 이후 동예루살렘에서 949채의 팔레스타인 가옥을 파괴하여 3,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하게 했다.
2011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동예루살렘 아랍인 주민의 39%가 팔레스타인 시민권 대신 이스라엘 시민권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예루살렘은 1967년부터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국제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로 1980년 이스라엘에 의해 사실상 병합되었다. 이스라엘은 결의안에 대한 답변에서 이러한 조치가 병합을 구성하지 않으며, 단지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성지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변호사는 요르단이 해당 영토에 대한 합법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6일 전쟁 중 자위권 행사로 "공백을 메울"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해석은 소수 의견이며, 국제법은 서안 지구 전체(동예루살렘 포함)를 점령지로 간주하며 점령지(동예루살렘 포함)의 팔레스타인인에게 자기 결정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공식적으로 병합하거나 그곳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 적은 없지만, 1967년 이스라엘 법률과 행정 확장은 1980년 예루살렘 기본법과 함께 효과적인 또는 사실상 병합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동예루살렘이 이스라엘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크네세트 법이 국제법에 위배되더라도 법원은 국내법에 구속되므로 해당 지역을 병합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판결했다.
3. 1. 주권 문제
동예루살렘은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 이후 1949년 휴전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예루살렘을 동서로 분할 통치하면서 "성립"되었다.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을, 요르단은 구시가지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통치했다.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에 통합·편입시켰지만, 이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병합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38]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 주민에게 "거주권"을 부여했지만, 전략적으로 비유대인 인구를 예루살렘 전체의 30% 이하로 억제하려는 정책을 펴고 있다. 건물 건설 허가율을 낮추고, "거주권"을 박탈하여 예루살렘에서 추방하는 등 민족 청소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38]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에서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동예루살렘을 독립 후의 수도로 간주하고 있다.
2023년 1월 28일, 동예루살렘 네베 야코프 지구의 회당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7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범인은 팔레스타인인 남성이었으며,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사살되었다.[41]
다비드 벤구리온은 1949년 12월 "유대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의 유기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했고,[19] 요르단은 이듬해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다. 이러한 결정은 1950년 1월 이스라엘 크네세트와 1950년 4월 요르단 의회에서 각각 확인되었다.[19] 1980년, 크네세트는 "통합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는 예루살렘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공식적인 조치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병합 행위로 불린다.[19] 이 선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 의해 "무효"로 결정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 (1988년)에서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명시되어 있다. 2000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2002년 10월 이 법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슬람 협력 기구 (OIC)는 2017년 12월 13일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했다.
3. 2. "분할" 또는 "공유"에 대한 협상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1949년 휴전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을, 요르단은 구시가지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되었다.[19] 1950년 1월 23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고, 크네세트 결의안은 "유대 국가의 창설과 함께 예루살렘은 다시 수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요르단은 4월 24일에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 지구를 합병했다. 이 통일은 영국에 의해 인정되었지만, 동예루살렘에 대한 요르단의 주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사실상'' 통제만 인정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의 시 경계를 확장했으며, 여기에는 실완, 라스알아무드 등이 포함되었다. 1953년,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에 ''아마나''(신탁 통치) 지위를 부여하여 사실상 이 도시를 요르단의 두 번째 수도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요르단 당국은 동예루살렘의 성지에 대해 오스만 제국의 ''현상 유지''를 유지했다. 성묘 교회가 1949년 화재로 손상되자, 요르단 국왕 압둘라 1세는 모든 교단의 승인을 조건으로 복구 계획을 승인했다.
1960년대 초, 요르단은 올리브산에 인터컨티넨탈 호텔 건설을 승인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 묘지가 훼손되었는데,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스라엘 정부는 묘비 일부가 도로 공사 및 군용 변소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며 항의했다.
1960년대 동안 예루살렘은 경제적 개선을 보았고 관광 산업이 발전했지만, 요르단은 이스라엘 여권을 인정하지 않아 유대인 및 무슬림 이스라엘인은 동예루살렘의 예배 장소에 접근할 수 없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동예루살렘은 서안 지구 전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에 흡수하고, 1980년 예루살렘법을 통해 "통합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 의해 "무효"로 결정되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1949년 "유대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의 유기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했고, 요르단은 이듬해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다. 1967년 이후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의 병합이었다. 유엔 총회는 도시의 지위를 변경하는 조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명시하고 있다. 2000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을 근거로 동예루살렘에서 PLO 관련 조직을 폐쇄했다. 이슬람 협력 기구 (OIC)는 2017년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지만,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점령지로 간주한다. 이스라엘은 아랍 시의회를 해산하고, 동예루살렘을 테디 콜렉 시장의 행정부에 두었다.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제안받았지만, 대부분 거주자 지위를 선택하고 이스라엘 기관에 대한 보이콧 전략을 채택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정착을 장려하고 팔레스타인인의 거주를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
제2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은 보안 장벽을 설치하여 동예루살렘을 서안 지구와 분리했다.
오슬로 협정에서 PLO는 동예루살렘 문제를 최종 지위 협상으로 넘기기로 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입법 선거에서 하마스는 동예루살렘에서 4석을 얻었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선거 운동이 금지되었다.
2009년, 유럽 연합은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의 "불법 병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8년, 이스라엘은 라마트 슐로모 정착촌에 "유대인 전용" 주택 건설을 승인했다. 이스라엘 당국은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가옥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011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동예루살렘 아랍인 주민의 39%가 팔레스타인 시민권 대신 이스라엘 시민권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슬로 협정과 2003년 로드맵 모두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연기했다. 1997년 베일린-아부 마젠 협정은 예루살렘 전체가 이스라엘 주권 하에 남을 것이라고 명시했지만, 팔레스타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비 슐라임 등은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정착촌 정책을 협상을 선제하기 위한 현실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는 예루살렘이 두 개의 별개의 시 당국에 의해 관리되는 단일 통일 대도시 단위로 유지될 것이며, 그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주권 하에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정부와의 2008년 협상에서 올메르트는 예루살렘에 대한 공유된 합의를 예측하는 지도를 제시했지만, 마무드 아바스는 이를 냅킨에 복사해야 했다.
3. 3. 예루살렘의 수도 지위
다비드 벤구리온은 1949년 12월 "유대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의 유기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선언했고, 이듬해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다. 이러한 결정은 1950년 1월 이스라엘 크네세트와 1950년 4월 요르단 의회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동예루살렘은 확장된 경계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의 병합이었다. 유엔 총회의 만장일치 결의안에서, 유엔은 도시의 지위를 변경하는 조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1967년 6일 전쟁 이후, 예루살렘의 동부는 서안 지구 전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스라엘 점령 직후, 동예루살렘은 여러 인접한 서안 지구 마을과 함께 서예루살렘에 흡수되었다. 1967년 11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가 통과되었으며, 평화 조약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최근 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1980년, 크네세트는 "통합되고 통일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는 예루살렘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공식적인 조치는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병합 행위로 불린다.[19] 이 선언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 의해 "무효"로 결정되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1988년)에서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명시되어 있다. 2000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2002년 10월 이 법은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 PLO와 관련된 모든 사무실 및 NGO 조직을 폐쇄했으며,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슬람 협력 기구(OIC)는 2017년 12월 13일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인정했다.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지역을 이스라엘의 "법, 관할권 및 행정"에 포함시켰지만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를 서예루살렘의 자치구에 편입시켰다. 내부적으로 이 조치는 그 도시의 일부를 이스라엘에 통합하는 병합으로 설명되었다. 비판적인 국제 사회를 상대로는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순전히 기술적인 조치이며 병합이 아니라고 정당화했으며, 1980년 7월 30일 기본법: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수도 통과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주장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이 조치를 비난하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서 그 법을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것으로 계속 간주한다. 이스라엘은 선출된 아랍 시의회를 해산하고, 이를 서예루살렘 시장인 테디 콜렉의 행정부에 두었다.
동예루살렘 시장인 루히 알-카티브와 요르단 시의회 의원들은 이스라엘 군정에 의해 해산 통보를 받았다. 알-카티브는 시위 조직 혐의로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
전력 공급과 같은 서비스는 팔레스타인 회사에서 이스라엘 회사로 이전되었고, 장관 결정에 따라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인의 비율은 정책적으로 76대 24로 정해졌지만, 2000년 마스터플랜에서는 이 비율을 70대 30으로 조정했고, 이는 다시 팔레스타인 인구 증가를 고려하여 60대 40%의 비율을 따라야 했으며, 현재 이 비율은 도시 인구의 37%를 차지한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제안받았을 때, 압도적인 다수는 대신 거주자 지위를 선택하고 이스라엘 기관에 대한 보이콧 전략을 채택했다. 이후 자치구에 포함된 동예루살렘 토지의 90%는 1967년 이후 28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을 또는 사유지를 대부분 수용하여 추가되었다. 전 부시장인 메론 벤베니스티에 따르면, 이 계획은 아랍인의 수를 최소화하면서 토지를 최대한 포함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후, 유대인 정착민에게 5년간의 세금 면제를 허용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재산세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반면 예루살렘 서안 지구 거주자들은 재산세가 높은 등급으로 분류되어 시정 서비스의 26%를 부담하면서 혜택은 5%만 받았다(2000년). 유대인 지역은 최대 8층까지 건물을 지을 수 있었지만,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2층으로 제한되었다. 이 지역의 기반 시설은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B'Tselem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이 지역의 37만 명의 과밀 거주자들은 사전 통지 없이 거주자의 이동에 대한 극심한 제한으로 인해 그들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그들의 거주가 취소될 수 있고, 건축 허가는 거의 주어지지 않으며, 분리 장벽이 그들을 도시의 나머지 지역과 격리시킨다. 매일 14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일하고, 건강 검진을 받고,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들의 빈곤은 꾸준히 증가하여 예루살렘의 "비유대인" 가구의 77%가 이스라엘 빈곤선 이하인 반면, 유대인 가족은 24.4%였다(2010년).
2012년 국제 위기 그룹 보고서는 이스라엘 정책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분리 장벽으로 서안 지구와의 교역이 차단되고, 이스라엘의 대테러 기관이 "정치적 파괴"로 포함하는 정치 조직이 동방의 집 폐쇄로 인해 거부되었으며, 그것은 번창하는 유대인 지역에 둘러싸인 "고아 도시"이다. 지역 건설이 차단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빈민가가 되었고, 이스라엘 경찰조차 안전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감히 가지 않아서 범죄 사업이 번성했다.
동예루살렘은 1967년부터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국제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로 1980년 이스라엘에 의해 사실상 병합되었다. 1967년 6월 27-28일, 동예루살렘은 시 경계 확장을 통해 예루살렘에 통합되었고 이스라엘의 법, 관할권 및 행정 아래 놓였다. 유엔 총회 결의안에서, 유엔은 도시의 지위를 변경하려는 조치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결의안에 대한 답변에서 이러한 조치가 병합을 구성하지 않으며, 단지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성지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변호사는 요르단이 해당 영토에 대한 합법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6일 전쟁 중 자위권 행사로 "공백을 메울"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해석은 소수 의견이며, 국제법은 서안 지구 전체(동예루살렘 포함)를 점령지로 간주하며 점령지(동예루살렘 포함)의 팔레스타인인에게 자기 결정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공식적으로 병합하거나 그곳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 적은 없지만, 1967년 이스라엘 법률과 행정 확장은 1980년 예루살렘 기본법과 함께 효과적인 또는 사실상 병합을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동예루살렘이 이스라엘 국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크네세트 법이 국제법에 위배되더라도 법원은 국내법에 구속되므로 해당 지역을 병합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판결했다. 변호사에 따르면, 지역의 병합은 자동으로 그 주민들을 이스라엘 시민으로 만들 것이지만, 그러한 조건은 부족하며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영주권자"의 지위를 가진다. 2012년의 유엔 총회 결의안 67/19는 동예루살렘이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의 일부를 형성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슬로 협정과 2003년 로드맵 모두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연기했다. 1997년 베일린-아부 마젠 협정은 이스라엘에 의해 모든 면이 둘러싸인 비무장화된 "팔레스타인 실체"에 제한적인 자치를 구상했으며, 예루살렘 전체가 이스라엘 주권 하에 통일된 상태로 남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아비 슐라임 등은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정착촌 정책을 협상을 선제하기 위해 현실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에서는 1967년 이전의 예루살렘 분계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정부와의 2008년 마지막 진지한 협상에서 올메르트는 9월 16일, 이스라엘 정착촌은 이스라엘에 남고 팔레스타인 동네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일부가 되어 미래의 수도를 구성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공유된 합의를 예측하는 지도를 포함했다. 구시가지가 포함된 ''성스러운 분지''는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이스라엘, 미국, 팔레스타인 국가가 감독하는 공동 신탁 통치 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1980년, 크네세트는 예루살렘을 "완전하고 통일된",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는 "예루살렘 법"을 기본법으로 채택했다. 이 법은 1967년 6월에 정의된 확장된 경계를 포함하여 서예루살렘과 동예루살렘 모두에 적용되었다. 예루살렘 법은 정치적, 상징적 중요성을 가지지만, 도시의 법적 또는 행정적 상황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았다.
1993년 9월 13일에 서명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원칙 선언(오슬로 I)은 예루살렘의 최종 지위 문제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협상 마지막 단계로 연기했다.
2001년 타바 회담에서 이스라엘은 영토에 관해 상당한 양보를 했지만, 동예루살렘에 연속적인 팔레스타인 수도를 허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3. 3. 1. 미국의 입장
미국은 동예루살렘을 "두 개의 팔레스타인 영토 중 더 큰 영토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부로 언급하며,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유대인을 "정착민"이라고 지칭한다.[23]예루살렘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1967년 이후 때때로 급격한 변동을 보였다.[23] 1967년까지 미국은 동예루살렘을 적대적 점령 하에 있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일부로 간주했다.[23] 1990년 3월 1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동예루살렘에서의 이스라엘 건설에 대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23] 같은 해, 미국 의회는 예루살렘이 분할될 수 없는 도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믿음을 재확인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23] 1995년 11월 8일, 예루살렘 대사관법에서는 1999년을 미국 대사관을 해당 도시로 이전하는 최종 기한으로 정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했다.[23]
1991년, 1991년 마드리드 평화 회의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약속 서한''(1991년 10월 15일)에서 미국이 정직한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을 약속하고 평화 회담을 저해할 수 있는 모든 일방적인 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팔레스타인 측은 이 성명이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정착촌과 정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클린턴 행정부는 동예루살렘을 점령 하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주권이 불확실한 영토로 간주했다.[23] 앨 고어 부통령은 미국이 "통합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의 분할될 수 없는 수도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24]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했으며, 2018년 5월 14일, 미국은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이전했다.[25] 2017년 12월 8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대통령의 성명이 "예루살렘의 최종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국경을 포함한 최종 지위는 양측이 협상하고 결정해야 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26]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을 때, 그의 대표단은 동예루살렘에 진입하면서 차량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제거했는데, 이는 동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널리 해석되었다.[27]
4. 도시 계획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 자치구에 편입했다. 이는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도시 일부를 이스라엘에 통합하는 병합으로 설명되었지만, 국제 사회에는 행정 서비스를 위한 기술적인 조치이며 병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 1980년 7월 30일 기본법: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수도 통과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주장도 마찬가지였다.[2]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조치를 비난하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서 그 법을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3] 이스라엘은 선출된 아랍 시의회를 해산하고, 서예루살렘 시장인 테디 콜렉의 행정부에 두었다.
동예루살렘에는 시장인 루히 알-카티브와 11명의 요르단 시의회 의원들이 있었다. 우지 나르키스는 아랍 시의회가 해산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부군정관 야코프 살만에게 시의회를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살만은 카티브와 4명의 의원들을 소환하여 히브리어로 짧은 성명서를 읽었다.[4] 알-카티브는 서면 명령을 요구했고, 아랍어 번역이 냅킨에 적혔다. 이스라엘 언론인 우지 벤자민은 "이 모든 에피소드는 어떤 합법성의 흔적도 부족했다"고 말했다.[5] 알-카티브는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6]
전력 공급과 같은 서비스는 팔레스타인 회사에서 이스라엘 회사로 이전되었고, 장관 결정에 따라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인의 비율은 정책적으로 76대 24로 정해졌다.[7] 2000년 마스터플랜에서는 이 비율을 70대 30으로 조정했고, 이후 팔레스타인 인구 증가를 고려하여 60대 40%의 비율을 따라야 했다.[8] 이스라엘 시민권을 제안받았을 때, 압도적인 다수는 거주자 지위를 선택하고 이스라엘 기관에 대한 보이콧 전략을 채택했다.[9] 이후 자치구에 포함된 동예루살렘 토지의 90%는 1967년 이후 28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을 또는 사유지를 대부분 수용하여 추가되었다. 전 부시장인 메론 벤베니스티에 따르면, 이 계획은 아랍인의 수를 최소화하면서 토지를 최대한 포함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10]
이후, 유대인 정착민에게 5년간의 세금 면제를 허용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재산세(''arnona'')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반면 예루살렘 서안 지구 거주자들은 재산세가 높은 등급으로 분류되어 시정 서비스의 26%를 부담하면서 혜택은 5%만 받았다(2000년).[11] 1986년까지 아랍 동예루살렘의 60%는 쓰레기 수거 시설이 부족했고, 학교는 교실을 확장할 수 없어 이중 교대제 시스템을 강요받았다.[12] 유대인 지역은 최대 8층까지 건물을 지을 수 있었지만,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2층으로 제한되었다.[13] 이 지역의 기반 시설은 여전히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14] B'Tselem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이 지역의 37만 명의 과밀 거주자들은 거주 취소, 건축 허가 제한, 분리 장벽 등으로 인해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15] 매일 14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15] 예루살렘의 "비유대인" 가구의 77%가 이스라엘 빈곤선 이하인 반면, 유대인 가족은 24.4%였다(2010년).[16]
2012년 국제 위기 그룹 보고서는 이스라엘 정책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분리 장벽으로 서안 지구와의 교역이 차단되고, 정치 조직이 거부되었으며, "고아 도시"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빈민가가 되었고, 범죄 사업이 번성했다.[17]
동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할권 확장은 여러 인접 마을을 포함하여 요르단 동예루살렘의 시 관할 구역을 의 서안 지구 영토를 통합하여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부 디스, 알-아이자리야, 베이트 하니나, 알-람과 같은 동예루살렘의 여러 교외 지역은 제외되었고, 여러 아랍 마을이 분할되었다.[18] 그러나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 경계 안에 포함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자제했다.
서쪽 벽 앞의 옛 무그라비 구역은 점령 3일 만에 철거되었고, 135가구가 강제로 재정착되었다.[19] 그 자리는 넓은 야외 광장으로 대체되었다. 1948년에 파괴된 유대인 지구는 재건되어 유대인들이 재정착했다.
"동예루살렘"이라는 용어는 1967년 이후 예루살렘 시에 통합되어 약 를 포함하는 지역을 지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를 포함하는 1967년 이전 요르단이 통제했던 예루살렘 시의 작은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의 80만 주민 중 39%(372,000명)가 팔레스타인인이지만, 시 예산은 그들에게 예산의 10%만 할당한다.[20]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위해 군사 통제 하에 있는 수많은 작은 앙클레이브를 둘러싼 이스라엘 유대인 도시가 되도록 설계되었다.[21] 동예루살렘을 서안 지구에서 차단하는 정착촌 체인의 마지막 연결 고리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하르 호마 정착촌 건설을 승인한 1997년에 만들어졌다.[22]
이스라엘 비정부 기구 B'Tselem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아랍 주민들의 건축 허가 획득을 어렵게 만드는 정책으로 인해 주택 부족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예루살렘 밖에서 주택을 찾도록 강요하고 있다.[23]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주민과 결혼한 동예루살렘 주민은 시민권법으로 인해 남편과 아내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인티파다 이후 동예루살렘이 서안 지구와 점점 더 단절되어 주요 경제 중심지를 잃게 되면서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아 예루살렘을 떠났다. 이스라엘 언론인 샤하르 샤하르는 이러한 이주가 동예루살렘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영주권을 잃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4]
미국 친구 봉사 위원회와 마셜 J. 브레거에 따르면,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계획 및 개발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도시에서 유대인 다수를 증진하려는 이스라엘 정책의 일부이다.[25]
2007년 5월 13일, 이스라엘 내각은 유대인 정착민을 유치하기 위해 동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입지를 확대하고 경제를 부양하려는 제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동예루살렘에 더 많은 유대인 정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내각은 세금 감면, 정부 부서 이전, 법원 건설, 예루살렘 연구 센터 건설 등을 위한 약 57억 5천만 NIS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 동예루살렘에 25,000채의 유대인 주택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개발 단계에 있다. 아랍 주민들은 건축 허가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이 제안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26]
예루살렘 공공 문제 센터의 저스투스 바이너에 따르면 예루살렘 시는 아랍 지구에 36,000개의 건축 허가를 부여했는데, "2020년까지 ''합법적인'' 건축을 통해 아랍 주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 "일반적으로 허가 승인을 위해 4~6주를 기다리고, 유사한 신청 승인률을 누리며, 동일한 규모의 생활 유닛에 대해 물과 하수도 연결을 위해 동일한 수수료($3,600)를 지불한다". 바이너는 불법 유대인 건축은 일반적으로 기존 합법적인 구조물에 대한 추가를 포함하지만, 불법 아랍 건축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건설된 다층 건물 건설을 포함한다고 썼다.[27]
2010년 3월 유럽 연합 보고서에 따르면,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주민 93,000명, 즉 전체의 33%가 이스라엘의 건축 제한으로 인해 집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이 보고서는 2013년에 98개의 건물이 철거되어 298명이 집을 잃었고, 400명이 일터와 생계를 잃었으며, 80%가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한다고 기록했다. 2,000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250명의 해당 구역 교사가 매일 학교에 가기 위해 이스라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20]
동예루살렘의 유대인 지역은 팔레스타인 지역보다 30배 더 많은 놀이터를 가지고 있다. 2015년 예루살렘 법원이 시 의회에 놀이터 건설을 시작하도록 지시한 후 수르 바헤르 공동체를 위해 벨기에 자금으로 놀이터가 건설되었다. 그것은 허가 없이 건설되었으며, 이스라엘 당국은 아랍 지구에서 놀이터에 적합한 공터를 찾는 어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28]
2017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이후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에 허가된 연간 건축 허가 건수는 60% 증가했다. 1991년 이후 동예루살렘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건축 허가의 30%만 받았다.[28]
2021년, 이스라엘 대법원은 2021년 5월 10일에 하급 법원에서 허가한 팔레스타인 가족의 셰이크 자라 지역 퇴거를 유지할지 여부에 대한 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상되었다.[29] 2021년 5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이 예상되는 퇴거로 인해 발생했다.[30]
5. 인구
1967년 인구 조사에서 이스라엘 당국은 66,000명의 팔레스타인 거주민을 등록했다. 당시 동예루살렘에는 1948년 요르단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유대인이 추방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수백 명에 불과했다.[32]
1993년 6월까지 동예루살렘에는 유대인 다수가 형성되었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유대인 거주민은 155,000명이었고, 팔레스타인인은 150,000명이었다.[32]
2008년 말, 동예루살렘의 인구는 456,300명으로 예루살렘 거주민의 60%를 차지했다. 이 중 195,500명(43%)은 유대인이었고(예루살렘 전체 유대인 인구의 40%를 차지), 260,800명(57%)은 아랍인이었다. 아랍인 중 95%는 무슬림으로 예루살렘 무슬림 인구의 98%를 차지했고, 나머지 5%는 기독교인이었다.[32] 같은 해 팔레스타인 중앙 통계청은 인구 조사에 따라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수가 208,000명이라고 보고했다.[32]
2008년 말, 동예루살렘의 주요 아랍인 거주 지역은 슈아팟, 베이트 하니나, 올드시티의 무슬림 지구(26,300명), 올리브산의 아트 투르 (아스-사와나 포함) (24,400명) 등이었다. 동예루살렘의 주요 유대인 거주 지역에는 라못, 피스갓 제에브, 길로, 네베 야아코브, 라마트 슐로모, 이스트 탈피오트 등이 있었다. (12,200명) 올드시티(이미 언급된 무슬림 지구 포함)는 아랍인 36,681명과 유대인 3,847명이 거주하고 있다.[32]
2016년 동예루살렘의 인구는 542,400명으로 예루살렘 거주민의 61%를 차지했다. 이 중 214,600명(39.6%)은 유대인이었고, 327,700명(60.4%)은 아랍인이었다.[32]
피스 나우에 따르면, 2017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이후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 승인이 60% 증가했다.[31] 1991년 이후, 이 지역 거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은 건설 허가의 30%만을 받았다.[32]
동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 지역 중 북부 지역은 부유한 경향이 있는 반면, 남동부 지역은 더 가난한 인구가 거주하며 그들의 기원은 더 흔히 농촌 또는 부족이다. 더 부유한 아랍인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 북부에서 이주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아랍인의 약 절반은 헤브론 지역에 조상이 있다.[33]
중동 전문가 데이비드 폴락에 따르면, 두 국가 해법이 수립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최종 합의가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동예루살렘 아랍인의 48%는 이스라엘 시민이 되기를 원하고, 42%는 팔레스타인 국가 시민이 되기를 원할 것이며, 9%는 요르단 시민권을 선호할 것이다.[34]
동예루살렘 인구 변화는 다음과 같다.
5. 1. 거주 및 시민권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 자치구에 편입시켰다. 이는 내부적으로 도시의 일부를 이스라엘에 통합하는 병합으로 설명되었으나, 국제 사회에는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기술적인 조치이며 병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4]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의 조치를 비난하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78에서 관련 법을 "무효"라고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5] 이스라엘은 아랍 시의회를 해산하고, 테디 콜렉 서예루살렘 시장의 행정부에 편입시켰다.이후 동예루살렘 시장이었던 루히 알-카티브는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9] 전력 공급 등 서비스는 팔레스타인 회사에서 이스라엘 회사로 이전되었고, 장관 결정에 따라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인의 비율은 정책적으로 76대 24로 정해졌으나,[10] 2000년 마스터플랜에서는 70대 30, 현재는 60대 40의 비율을 따르고 있다.[11] 이스라엘 시민권을 제안받았을 때, 압도적인 다수는 거주자 지위를 선택하고 이스라엘 기관에 대한 보이콧 전략을 채택했다.[12]
이후 유대인 정착민에게는 세금 면제 혜택이 주어졌지만,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높은 세금을 부담하면서도 시정 서비스 혜택은 적게 받았다.[14] 1986년까지 아랍 동예루살렘의 60%는 쓰레기 수거 시설이 부족했고, 학교는 교실을 확장할 수 없었다.[15] 유대인 지역은 최대 8층까지 건물을 지을 수 있었지만,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2층으로 제한되었다.[16] B'Tselem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이 지역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거주 취소, 건축 허가 제한, 분리 장벽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18]
국제 위기 그룹 보고서는 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해 동예루살렘이 서안 지구와의 교역이 차단되고, 정치 조직 활동이 제한되며, 건설 제한으로 인해 빈민가가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20]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위한 군사 통제 하에 있는 작은 앙클레이브를 둘러싼 이스라엘 유대인 도시가 되도록 설계되었다.[22]
1990년대 이후 건축 허가 제한 정책으로 인해 주택 부족이 발생하여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동예루살렘 밖에서 주택을 찾거나,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 출신 배우자와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24] 미국 친구 봉사 위원회 등은 이러한 제한이 도시에서 유대인 다수를 증진하려는 이스라엘 정책의 일부라고 주장한다.[26]
2007년 이스라엘 내각은 동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입지를 확대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제안을 논의했다.[27] 그러나 아랍 주민들은 건축 허가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이 제안은 비판을 받았다.[27]
2010년 유럽 연합 보고서에 따르면,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주민의 33%가 이스라엘의 건축 제한으로 인해 집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31]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 허가 건수는 증가했다.[28]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당시 거주했던 아랍 주민들에게 영구적인 이스라엘 거주권을 부여했다.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를 거부한다.[32] 2005년 말, 동예루살렘 아랍 인구의 93%가 영주권을, 5%가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32]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약 4,500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이스라엘 시민권을 신청했다.[33]
이스라엘 시민권이 없는 동예루살렘 주민들은 시의 지방 선거에서 투표할 권리가 있으며, 시 행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들은 세금을 납부하며, 사회 보장 혜택과 국가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보장된다. 1995년 이스라엘은 "생활 중심지"가 예루살렘에 없음을 증명할 수 없는 전직 아랍 예루살렘 주민들의 영구 거주 자격을 취소하기 시작했으나, 4년 후 이 정책은 철회되었다.[32]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인의 95% 이상이 시민권이 아닌 거주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시민권 신청 건수는 증가했지만,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정이다.[34]
최근 동예루살렘 주민들은 이스라엘 신분증 신청 증가, 바그루트 시험 응시 증가, 이스라엘 고등 교육 기관 등록 증가 등 이스라엘 사회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34]
동예루살렘 인구 변화는 다음과 같다.
6. 의료
1998년까지 동예루살렘 주민들은 의료 서비스와 제공 면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2012년까지 동예루살렘의 거의 모든 지역에는 첨단 의료 장비, 특수 응급실, 엑스레이 진단 센터 및 치과 진료소를 갖춘 건강 진료소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의료 시스템은 모든 이스라엘 시민과 동예루살렘 주민들이 이스라엘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무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
하아레츠에 따르면, 2015년 이스라엘 도시와 동예루살렘 간의 의료 센터의 질은 거의 동등하다. 동예루살렘의 건강 품질 지수는 2009년 74점에서 2012년 87점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서예루살렘의 진료소가 받은 것과 동일한 품질 등급이다. B'tselem은 예루살렘 인구의 4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시는 유대인 구역에서 주가 운영하는 27개에 비해 팔레스타인 구역에서 6개의 건강 관리 센터만 운영한다고 주장한다.[21] ACRI에 따르면 동예루살렘 주민 중 11%만이 복지 서비스의 치료를 받는다. 2006년에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64%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았고, 2015년에는 75%, 그들의 자녀 중 84%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았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팔레스타인인을 위한 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동예루살렘 병원에서 2500만달러를 삭감했다. 이 자금 삭감은 가자 지구와 치료가 불가능한 광범위한 서안 지구의 환자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6개 병원의 운영 비용의 40%를 차지한다. 이 자금 부족으로 인해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병원과 성 요한 안과 병원의 생존 가능성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절약된 금액은 다른 지역의 "우선 순위가 높은 프로젝트"로 재분배될 예정이었다.
7. 문화
2009년 아랍 문화 수도로 예루살렘이 지정되었다.[1][2] 2009년 3월, 이스라엘 내무부 장관은 예루살렘, 나사렛, 그리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다른 지역에서 예정된 문화 행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장관은 이스라엘 경찰에게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A)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역에서 행사를 개최하려는 모든 시도를 억제할 것"'''을 지시했다. 이 행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잠정 협정 조항을 위반한다는 이유였다. 이 조항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이스라엘 영토에서 행사를 조직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3]
2013년 6월 22일, 이스라엘 공공 보안 장관은 18년 전통의 인형극 축제를 막기 위해 엘-하카와티 극장을 8일 동안 폐쇄했다. 이스라엘 보안 기관 신 베트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어린이 축제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비난했지만, 극장 감독은 이를 부인했다.[4] 한 달 후, 이스라엘의 연극계 인사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5]
2013년 6월 29일, 이스라엘은 알 카만자티 음악 학교의 '''라말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프랑스 성 안나 교회에서 콘서트를 여는 것을 막기위해 동예루살렘으로의 접근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가들이 분리 장벽을 넘어간 후, 콘서트는 결국 열렸다.[6][7]
동예루살렘은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인 특유의 아랍 버스가 교통수단 등으로 운행되고 있다. 유대교의 욤 키푸르에 해당하는 날에도 동예루살렘에서는 평소와 같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
8. 경제
2013년 5월, UNCTAD는 유엔이 동예루살렘 경제에 대해 실시한 최초의 포괄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1] 보고서는 이스라엘 점령이 지난 20년 동안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와 비교하여 동예루살렘 경제를 절반으로 위축시켰다고 결론지었으며, 이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경제적 고립을 초래한 "장기 점령 하에 동예루살렘 경제의 쇠퇴와 고립 심화에 대한 암울한 증거"라고 묘사했다.[1][2]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는 가구 비율은 비유대인 가구가 77%, 유대인 가구가 25%였으며, 아동 빈곤 격차는 팔레스타인 아동이 84%, 유대인 아동이 45%였다.[1][2] 주요 문제점으로는 이스라엘이 안보를 이유로 부과하는 상품 및 인력 이동 제한과 이스라엘의 "심각한 사회 경제적 조건"에 대한 무관심이 지적되었다.[1][2] UNCTAD는 "이스라엘 정부는 동예루살렘의 경제 상황 개선과 팔레스타인 주민의 복지 증진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점령국의 의무를 훨씬 더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1][2]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총독은 경제 개선을 위해서는 "정치적 상황의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1]
9. 교육
이스라엘 교육부에 따르면, 이스라엘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른 동예루살렘 고등학생 수는 2008년 5,240명에서 2011년 6,022명으로 증가했다. 동예루살렘 학생들을 이스라엘 대학교 및 칼리지에 진학시키기 위한 학교가 동예루살렘에 10곳 있으며, 가장 큰 학교 중 하나는 알-자하라 거리의 안타 마아나(Anta Ma'ana|당신은 우리와 함께ar) 연구소이다.
동예루살렘에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가 부족하다. 2012년에는 교실 부족이 1,100개로 보고되었는데, 이는 ''하레츠''가 "교육부와 시 당국이 아랍 인구를 위한 동예루살렘 학교를 의도적으로 수년간 방치한 결과"라고 묘사했다. 아랍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학생 중퇴율이 나타나고 있으며, 2011년에는 12학년의 40%에 달했다.
동예루살렘의 학교는 다음과 같다.
- 슈미트 걸스 칼리지
10. 유대인 정착촌 관련 소송
21세기 이후 이스라엘의 정착민 단체인 아테레트 코하님(en), 나할라트 시몬(en)은 아랍인(팔레스타인인) 주민의 토지를 매수하려 하고 있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주민에게는 퇴거 청구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유권을 주장하며 강제로 눌러앉는 행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단체는 1948년 이전 유대인의 토지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스라엘 법률은 유대인에 한해 1948년 이전의 재산을 되찾는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42]
이러한 소송 전략은 몇 차례 패소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20년 10월 22일,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연방 판사 법원은 팔레스타인인 주민 24명 중 12명의 퇴거와 유대인 정착민에게의 인도를 명령하고, 정착 비용 70007000ILS(약 226만 엔)의 부담을 명했다.[43][44] 11월 26일, 예루살렘 지방 법원은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 주민 87명의 퇴거를 명령했다. 유엔 인도주의 문제 조정 사무소(OHCHR)의 보고에 따르면, 2021년 1월 11일 기준, 877명(어린이 391명 포함)이 퇴거 위기에 놓여 있다. 유엔 특별 보고관인 마이클 린크(en)는 이스라엘 법원의 팔레스타인인 주민 퇴거 명령이 제네바 제4협약 49조의 주민 강제 이주 금지 조항에 위반된다고 비판했다.[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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