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라키움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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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라키움 공방전은 기원전 48년 카이사르 내전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포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폼페이우스의 공세에 밀려 테살리아로 퇴각했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보병 1,000명, 기병 200명의 손실을 입었고, 폼페이우스는 승리했으나 추격을 멈추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폼페이우스는 과신하게 되었고, 결국 테살리아에서 파르살루스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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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키움 공방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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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디라키움 전투 |
관련 전투 | 카이사르의 내전 중 카이사르의 마케도니아 침공 |
![]() | |
날짜 | 기원전 48년 7월 10일 |
장소 | 디라키움 (현대 두러스) |
결과 | 폼페이우스 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폼페이우스 군 |
교전 2 | 카이사르 군 |
지휘관 및 지도자 | |
폼페이우스 군 지휘관 |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
카이사르 군 지휘관 |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병력 규모 | |
폼페이우스 군 병력 | 50,000명 |
카이사르 군 병력 | 28,000명 |
사상자 규모 | |
폼페이우스 군 사상자 | 2,000명 이상 |
카이사르 군 사상자 | 1,000–4,000명 |
2. 전투 전 상황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후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파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부관 쿠리오는 북아프리카에서 패배했고,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 확보에도 실패했다.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1월, 직접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로 진격하여 아폴로니아와 오리쿰을 점령했다.
양군은 디라키움의 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을 구축했고, 전선은 교착 상태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의 제2진은 그리스에 상륙하여 카이사르 본진과 합류하려 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포위하는 진지를 구축했다.
한편, 군량과 병력에서 우세했던 폼페이우스는 보급 기지인 디라키움(현재의 알바니아 두레스)에서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2진의 병력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전 48년 4월 초, 안토니우스와 그의 지원군은 디라키움 밖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한 카이사르의 작전에 합류할 수 있었다.
3. 전투의 전개
폼페이우스는 병력과 보급에서 우세했기에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소모전을 펼치며 카이사르 군을 고사시키려 했다. 카이사르는 4월부터 6월 말까지 폼페이우스를 포위하고 전투를 걸었으나, 폼페이우스는 응하지 않고 소모전을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와 같은 폼페이우스 측 인물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7월 6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포위망의 허점을 발견하고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폼페이우스 군은 남쪽 포위망에 집중 공격을 가해 카이사르 군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군의 쉬운 후퇴에 함정을 의심하여 추격을 중단했고, 카이사르 군은 괴멸을 피할 수 있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포로로 잡힌 카이사르 군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3. 1. 폼페이우스의 책략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주민 일부가 도시를 배신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보내 카이사르를 요새에서 유인하려 했다. 이와 동시에 포위선 중앙에 있는 요새에 삼각 공격을 시작했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휘하의 한 개 코호르트와 가이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휘하의 세 개 코호르트가 폼페이우스의 다섯 개 군단에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휘하의 주 야영지에서 온 두 개 군단의 지원을 받았다. 폼페이우스 군은 폼페이우스가 그들을 철수시킬 수 있기 전까지 이틀 동안 두 선 사이의 언덕 꼭대기에 고립되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손실을 2천 명으로 추산했다.
4. 전투의 결과
카이사르 군은 보병 1,000명, 기병 200명 정도의 손실을 보았다. 카이사르는 테살리아까지 퇴각했다. 그는 패배의 책임을 자신 대신 군단병에게 돌렸고, 군단병들은 자책하며 다음 전투인 파르살루스 전투를 대비하게 되었다.
전술적으로 카이사르의 입지는 상당히 약화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요새선의 한쪽 끝을 점령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확장된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더 긴 전선을 구축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밤을 틈타 아폴로니아로 철수하면서 두 개의 군단을 남겨 폼페이우스 군이 카이사르 군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고 믿게 속였다. 폼페이우스는 기병대를 보내 추격했지만, 카이사르의 후위 부대와 교전하여 저지되었다.
이때는 여름이었고, 카이사르는 아직 식량 조달대가 방문하지 않은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장기간 작전을 지원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곰피의 행정관들이 전쟁에서 질 것 같은 지도자를 돕고 싶어하지 않아 입장을 거부하자,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잔혹함의 성공적인 예시로 그 도시를 약탈하도록 했다.
폼페이우스 군은 카이사르가 내전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겪은, 사소하지 않은 패배에 고무되었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은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를 결정적인 전투로 끌어들여 짓밟으라고 촉구했고, 다른 사람들은 로마와 이탈리아로 돌아가 수도를 되찾을 것을 촉구했다. 폼페이우스는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현명하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믿었으며, 시리아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고 카이사르의 약한 보급선을 이용하기 위해 전략적 인내를 택했다. 승리의 기쁨은 과신과 상호 의심으로 바뀌었고, 폼페이우스에게 적과의 최종 조우를 유발해야 한다는 상당한 압력이 가해졌다. 자신의 군대에 너무 많은 신뢰를 두기 시작하고 과신한 장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에서 증원받은 직후 테살리아에서 카이사르와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5. 전투 이후
카이사르의 패배로 그의 포위 전술은 실패했지만, 그는 퇴각 책임을 군단병에게 돌렸고, 군단병들은 자책하며 다음 전투를 대비했다. 전술적으로 카이사르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요새 라인의 한쪽 끝을 점령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확장된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더 긴 라인을 건설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카이사르는 밤을 틈타 아폴로니아로 철수했고, 두 개의 군단을 남겨 폼페이우스군이 그곳에 있다고 믿도록 속였다. 폼페이우스는 기병대를 추격했지만, 카이사르의 후위 부대와의 교전에서 저지되었다.
당시는 여름이었고, 카이사르는 식량 조달대가 방문하지 않은 지역으로 이동해 장기간 작전을 지원할 수 있었다. 곰피의 행정관들이 전쟁에서 질 것 같은 지도자를 돕고 싶어하지 않아 입성을 거부하자,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도시를 약탈하도록 했다.
폼페이우스군은 승리에 고무되었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내전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겪은 패배였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은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와의 결전을 촉구했고, 다른 이들은 로마와 이탈리아로 돌아가 수도를 되찾을 것을 주장했다. 폼페이우스는 전면전 대신 전략적 인내를 택하며, 시리아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고 카이사르의 약한 보급선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과신과 상호 의심으로 바뀌었고, 폼페이우스에게 적과의 최종 조우를 유발해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졌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대에 대한 과신과 장교들의 영향으로 테살리아에서 카이사르와 교전하기로 결정했다.
6. 역사적 의의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가 디라키움 공방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테살리아까지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군단병들의 사기를 올린 결과 승리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군단병들에게 돌렸고, 군단병들은 자책하며 다음 전투를 대비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군을 맹공하여 카이사르가 목숨을 잃을 뻔할 정도로 완승했지만, 카이사르 군의 큰 패배에 함정을 의심하여 추격을 멈추었다. 이는 카이사르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카이사르는 "만약 그때, 적군의 누군가 1명이라도 그렇게 원했다면, 오늘 승리는 그들의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폼페이우스는 추격에 신중했으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등 카이사르의 정적들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카이사르를 추격하게 되었고, 이는 파르살루스 전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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