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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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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훌라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표기되며, 석가모니의 아들이자 불교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장애' 또는 '속박'을 의미하며, 출생과 관련하여 여러 설이 존재한다. 라훌라는 석가모니가 출가할 때 태어났으며,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카필라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그는 20세에 비구가 되었으며, 불교 경전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고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대승 불교에서는 16 장로 중 한 명으로 미륵 부처가 나타날 때까지 부처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존경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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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훌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밀행 제일
인물 정보
이름라훌라
로마자 표기Rāhula (바), Rāhula (산스크리트어)
다른 이름라훌라-밧다 (행운의 라훌라), 라훌라-바드라
출생기원전 534년 또는 451년경
출생 장소카필라바스투
사망 장소자료마다 다름
종교불교
스승고타마 붓다, 사리푸트라
알려진 이유배움에 대한 열정, 신중한 수행
출가 시기붓다의 전도 7~15년 사이
출가 장소니그로다 동산
출가 주관자샤리푸트라
가족 관계
아버지싯다르타 왕자
어머니야쇼다라 공주
조부슈도다나 왕
조모마야 왕비
외조부숩파붓다
외조모아미타
고모마하파자파티 고타미
숙모순다리 난다
삼촌난다
불교 내 역할
직위달마의 총대주교 (동아시아 불교)
선임아리아데바
후임상가난다

2. 명칭


  • राहुल Rāhulasa
  • राहुल Rāhulapi
  • 다른 음차: 라훌라, 나호라, 라호라, 하라호라, 라운 등
  • 한역: 장애, 장월, 복월, 복장 등


나후라는 장애나 장월 등으로 번역되며, 그 의미는 일식·월식 등을 일으키는 악마 라후 또는 장애를 뜻하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이름의 유래에는 크게 4가지 설이 있다.

# 야슈다라 왕비가 아이를 낳을 때 월식이 있어 나후라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 (「중허마하제경」 권6).

# 야슈다라 왕비의 태내에 6년간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 석가가 싯다르타 태자 시절에 출가를 결심했을 때, 임신 소식을 듣고 "깨뜨려야 할 장애(나후라)가 생겼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설.

# 고대 인도어에서 "라후"는 나가(용)의 머리, 케투(Ketu)는 꼬리를 의미했다. 샤카족의 토템은 나가였으며, 라후라는 고대 인도식 표현으로 용의 머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나가의 머리가 될 자"가 태어난 것을 기뻐한 석가가 이름 지었다는 설.[10]

또한 석가 당시 베다(인도의 성전) 경전에서는 일식·월식을 일으키는 존재로 아수라(비천)를 언급했지만, 라후가 원인이라는 기술은 없다.[11]

가타카나로는 라후라(혹은 라고라)로 표기되지만, 많은 불교 경전에서 라후라로 한역 음사되어 통칭이 되었다.

라후라는 장애나 장월 등으로 번역되며,[4] 그 의미는 일식·월식을 일으키는 마신 라후, 더 나아가 장애가 되는 것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의 이름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이 있다.

# 야소다라비(耶輸陀羅妃)가 아이를 낳을 때 월식이 있어 라후라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중허마가제경(衆許摩訶帝經)』 권6).

# 야소다라비의 태내에 6년간 장애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 석가가 싯다르타 태자 시절에 출가하여 학도(学道)를 뜻했을 때, 회임한 것을 듣고 "내가 깨뜨려야 할 장애(라후라)가 생겼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설.

# 고대 인도어에서는, "라후"는 나가(Naga)(용)의 머리, 케투(Ketu)는 꼬리를 의미했다. 그리고 샤카족의 토템은 바로 나가였다. 이로부터, 라후라는 고대 인도식 표현으로 용의 머리를 의미한다고 생각되며, "나가의 머리가 될 자"가 태어난 것을 기뻐한 석가가 이름 지었다는 설[5][6]

# "악마 라후와 같은 자", "라후라는 악마성을 가진 자"라는 설[7]

더욱이 석가 당시의 베다 경전에서는, 일식·월식을 일으키는 자로서 아수라(비천)가 언급되었지만, 라후가 유래라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8]

3. 출생

라훌라의 어머니와 주변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십이유경(十二遊經)』에는 석가가 싯다르타 태자였을 때 첫 번째 부인 고이(瞿夷, 고피(ゴーピー) 또는 고파(ゴーパ)), 두 번째 부인 야소다라, 세 번째 부인 녹야가 있었으며, 『수대여경(須大拏經)』·『서응경(瑞應經)』에서는 고이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縁経)』·『열반경(涅槃経)』·『법화경(法華経)』에서는 야소다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 설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또한, 석가가 출가하기 전, 그 외에도 첫 번째 부인 고이와의 사이에 우파마나, 세 번째 부인 녹야와의 사이에 선성(스낫캇타)이라는 아이가 있어 모두 출가하여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처처경(處處經)』, 서국불조대대상승전법기(西國佛祖代代相承傳法記) 및 내증불법상승혈맥보(内證佛法相承血脈譜) 등). 그러나 두 번째 부인 야소다라의 아들인 라훌라만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증과(證果, 깨달음)를 얻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경전에서는 "일자라후라(一子羅睺羅)"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1]

라훌라의 탄생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했을 때 이미 7세였다.
  • 출가 직전에 태어났다. 일반적으로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 출가 후, 어머니의 태내에 6년이나 있었지만, 석가가 성도한 밤에 태어났다.


3번째 설에서는,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55에 그가 과거세에 국왕이었을 때, 한 신선이 있어 도(盜)를 범하고, 왕에게 죄를 빌기 위해 왕궁에 이르렀는데, 왕이 오욕에 빠져 6일 동안 외부인을 보지 않았고, 이 인연으로 인해 현세에서 6년 동안 모태에 있었다고 한다.

왕자가 정신적인 삶을 위해 궁을 떠나기 직전, 그는 그의 아내 야쇼다라와 갓 태어난 아기를 한 번 쳐다본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7년 후, 붓다는 칼루다이 장관을 대신하여 다시 카필라바스투푸라를 방문했다.


라훌라는 싯다르타 고타마 왕자가 궁을 떠나 왕위를 포기한 날에 태어났으며, 왕자는 29세였다. 고대 인도 달력의 8번째 음력의 보름날에 태어났다. 그날 싯다르타 왕자는 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팔리어 계정에 따르면, 그는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듣고 "라훌라가 태어났으니 속박이 생겼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에 따라 수도다나, 싯다르타 왕자의 아버지이자 샤카 씨족의 왕은 아이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 그는 아들이 탁발승으로서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버전에서는 싯다르타 왕자가 자신의 정신적 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왕자는 정신적인 삶을 위해 궁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아내 야쇼다라와 갓 태어난 아기를 한 번 쳐다보았다. 결심이 흔들릴까 두려워 싯다르타 왕자는 아들을 안는 것을 참았고 계획대로 궁을 떠났다. 따라서 라훌라는 싯다르타 왕자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다른 문헌들은 ''라훌라''의 유래를 다르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팔리어 ''아파다나''(Apadāna)와 율장 문헌인 물라사르바스띠바다 전통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이야기는 ''라훌라''가 아수라 (악마) 라후에 의해 발생한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졌던 달의 식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한다. ''아파다나''는 라후가 달을 가리는 것처럼, 라훌라의 탄생으로 인해 시타르타 왕자가 가려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라사르바스띠바다 전통은 라훌라가 시타르타 왕자의 출가 저녁에 잉태되었고 6년 후 그의 아버지가 깨달음을 얻은 날, 즉 달의 식 동안 태어났다고 전한다. 라훌라 이름에 대한 점성학적 이론은 이전 붓다의 아들들에게 별자리와 관련된 유사한 이름이 부여되었다는 관찰을 통해 더욱 신뢰를 얻는다.

물라사르바스띠바다와 후기 중국 문헌, 예를 들어 ''아비니쉬크라마나 수트라''는 긴 임신 기간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의 설명을 제공한다. 첫 번째 유형은 야쇼다라 공주와 라훌라 자신의 업과 관련이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야쇼다라는 과거 생에서 소치기로서 어머니가 우유통을 들도록 돕기를 거부하고 어머니가 6 요자나 동안 우유통을 더 들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6년 동안 뱃속의 아이를 품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라훌라의 경우, 그의 업은 과거 생에서 왕으로서 의도치 않게 현자를 6일 동안 기다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생에서 그는 수르야라는 왕이었고 그의 형제, 붓다의 전생은 찬드라 또는 리키타라는 은자였는데,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만으로 살겠다는 서약을 했다. 어느 날, 형제는 물을 마시기 위해 서약을 어겼고, 죄책감을 느껴 왕에게 벌을 청했다. 왕은 사소한 문제에 대해 벌을 내리기를 거부했지만, 형제에게 최종 결정을 기다리게 하고 왕궁 정원에 가두었다. 6일 후, 왕은 갑자기 그 은자를 잊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그를 풀어주고 사과와 선물을 했다. 그 결과 라훌라는 태어나기 전에 6년을 기다려야 했다. 어떤 버전에서는 왕이 현자가 자신의 왕국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긴 임신 기간과 같은 나쁜 업을 쌓았다. 후기 대승 불교 주석서인 ''대지도론''은 6년의 임신 기간에 대해 야쇼다라의 업을 탓하지 않지만, 라훌라의 왕으로서의 동일한 업을 언급한다. 그러나 13세기의 일본 신앙 텍스트인 ''라운 코시키''에서 라훌라의 늦은 탄생은 업의 결과가 아니라 기적의 증거로 여겨진다.

두 번째 유형의 설명은 야쇼다라가 단식과 짚 침대에서 자는 것을 포함하는 종교적 고행을 실천하여 라훌라의 성장이 늦어졌다는 보다 자연주의적 주장을 포함한다. 그녀는 시타르타가 자기 고행을 실천하는 동안 이러한 수행에 참여했다. 나중에, 수도다나 왕은 야쇼다라가 전 남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게 했고, 그녀는 점차 건강해졌고, 임신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전 왕자가 고행으로 죽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다. 야쇼다라는 매우 절망하고 우울해져 자신의 임신을 위협했다. 시타르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식이 궁궐에 전해지자 야쇼다라는 매우 기뻐하며 라훌라를 낳았다. 불교학자 존 S. 스트롱은 이 이야기가 깨달음을 향한 탐구와 야쇼다라가 어머니가 되는 길을 병행하며, 결국 둘 다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집에 돌아와 라훌라에게 인사를 받고 있다. 붓다는 발자국과 옥좌로 표현된다. 아마라바티, 3세기. 국립 박물관, 뉴델리.


늦은 출산은 물라사르바스띠바다 전통, ''대지도론'' 및 후기 중국 ''잡보장경''에 나오는 대로 사캬 종족의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낳는다. 라훌라의 탄생은 불교도들이 처녀 출생이나 기적적인 출생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은 시타르타 왕자가 실제로 아버지임을 설명해야 했다. 야쇼다라는 자신의 아이를 연못의 돌 위에 올려놓고 라훌라가 정말 자신의 아이라면 라훌라와 돌이 가라앉지 않고 앞뒤로 떠다닐 수 있도록 진실 행위를 했다. 그녀가 선언을 한 후, 아이는 그녀의 서약에 따라 떠올랐다. 스트롱은 이것이 붓다가 깨달음을 얻는 것과 인류를 가르치기 위해 돌아오는 것과 상징적인 병행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대지도론''에는 시타르타 왕자가 여러 아내를 두고 야쇼다라가 아닌 다른 아내가 그녀의 행실의 순수함을 증명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더욱이, 물라사르바스띠바다 문헌과 ''대지도론'' 모두에서 야쇼다라의 행실의 순수함을 증명하는 세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 버전에서 붓다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하게 보이도록 초자연적 성취를 통해 만들었다. 라훌라는 진짜 붓다에게 곧바로 다가가면서 붓다가 자신의 진짜 아버지임을 증명했다. 야쇼다라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네 번째 이야기는, 서기 5세기부터 중국 아바다나 스타일 문헌에 나타나며, 그녀는 산 채로 불태워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에서 수다나 왕은 그녀의 부정 혐의에 대한 처벌로 산 채로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불길에 상처를 입는 대신, 그녀는 진실 행위를 했고 불은 연못으로 변했다. 수다나 왕은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종족으로 다시 환영했고, 나중에 라훌라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일부 중국 자타카는 그가 아이 안에서 자신의 아들 시타르타를 알아보고 시타르타 왕자의 죽음을 더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학자 레이코 오누마는 불의 시련을 스트롱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논리로 붓다의 깨달음과 병행하는 은유로 본다.

역사가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H.W. 슈만은 시타르타 왕자가 궁궐을 떠나 수행자가 되기 위해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라훌라를 잉태했다고 가설을 세웠다. 자녀나 손주가 태어난 후에야 세상을 등지는 것은 인도의 관습이었다. 슈만은 또한 왕자가 결혼 13년 만에 아들을 얻은 것은 야쇼다라가 처음에는 왕자가 아이가 생기자마자 궁궐과 왕위를 떠날까 봐 아이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동양학자 노엘 페리는 팔리어 전통에서와 같이 같은 날 출생하는 것보다 늦은 임신 기간이 역사적으로 더 그럴듯하다고 믿었다. 그는 시타르타 왕자가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남겼다면 밤에 몰래 떠날 합당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전통적인 전기에서 시타르타 왕자는 부모님의 허락 없이 궁궐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페리는 그가 이미 부모님을 만족시킬 후계자를 제공했다면 이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긴 임신 기간을 설명하려는 많은 자료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확립된 전통임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의 삶에 대한 많은 전통적인 설명은 시타르타가 몰래 궁궐을 떠난다고 전하지만, 초기 불교 경전은 아들이 떠날 때 부모님이 우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그의 선택을 알고 있었다고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신화적이고 텍스트 비평적인 관점에서, 불교 연구 학자 케이트 크로스비는 시타르타 왕자가 출가 전에 아들을 잉태하거나 낳는 것이 삶의 모든 가능한 길에서 그가 최고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티프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의 삶을 최대한 살아본 후, 그는 더 나은 대안을 위해 그것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초기 불교 인도에서 아버지로서 아들을 낳는 것은 가족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종교적 길로 여겨졌으며, 시타르타 왕자가 출가 전에 아들을 세상에 데려온 것은 그가 둘 다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불교 연구 학자 존 S. 스트롱은 왕자가 떠나기 전날 밤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의 뮬라사르바스티바다 버전이 부처가 어떤 식으로든 신체적으로 장애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개발되었다고 가설을 세운다. 장애는 수도원 전통에서 그의 서품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을 수 있다.

4. 생애

석가모니는 성도 후 카필라성으로 돌아가 많은 석가족 청년들을 출가시켰다. 야소다라와 함께 부처님 앞에 나아간 라훌라는 "왕위를 계승할 것이니 재산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요청했고, 석가모니는 사리불을 불러 라훌라를 출가시켰다는 설이 있다. 라훌라는 사미 (비구가 되기 전의 어린 견습 수행자)가 되었고,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되었다.

라훌라는 사리불에게서 수행과 학문을 배웠으며, 처음에는 부처님의 친자식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계율을 잘 지켜 비구들에게 존경받았다. 불언실행으로 밀행제일, 학문을 좋아해 학습제일이라 칭송받았으며, 라훌라의 인내를 그린 경전으로는 라운인욕경이 있다.[12]

어린 라훌라가 승단에 들어간 것은 훗날 아이들을 사찰에서 교육하는 불교 전통의 선례가 되었다.

4. 1. 출가

석가는 성도 후에 카피라성에 돌아갔을 때, 이틀째에 순다라 난다를 출가하게 해 많은 석가족 청년들을 출가시켰는데, 라훌라는 7일째에 출가했다고 한다(율장·대품 제1건도 등).

그는 어머니인 야소다라에 이끌려 불전으로 향해 가, 어머니로부터 석가불이 부친이니까 "왕위를 이으므로 재보를 양보해 주세요"라고 하도록 들었으며, 그렇게 하자 석가는 장로 사리불을 불러 출가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이때 그의 연령도 6세, 9세, 12세, 15세라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사미(비구가 될 때까지의 어린 견습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중앙에 아이가 묘사되고 양쪽에 부처를 포함한 많은 인물이 있는 부조
라훌라의 수계, 인도 박물관, 콜카타

4. 2. 수행과 깨달음

석가는 성도 후에 카필라성에 돌아갔을 때, 2일째에 순다라 난다를 출가하게 해 많은 석가족 청년들을 출가시켰지만, 라훌라는 7일째에 출가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인 야소다라에 이끌려 불전으로 향해 가, 어머니로부터 석가불이 부친이니까 "왕위를 이으므로 재보를 양보해 주세요"라고 하도록 들어 그처럼 하면 석가는 장로 사리불을 불러 출가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이 때의 그의 연령도 6세, 9세, 12세, 15세라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사미(비구가 되기 전의 어린 견습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20세에 구족계를 받는 비구가 되었다. 사리불에게서 수행과 학문을 배웠으며, 처음에는 부처님의 친자식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분별해 계율을 잘 지켜 많은 비구에게 존경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언실행으로 밀행을 완수해 밀행 제일로 칭송받았지만, 석가모니로부터는 많은 비구 중에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학습 제일이라고도 칭송받았다. 라훌라의 인내를 그린 경전으로는 라운인욕경이 있다.[12]

큰 눈썹을 가진 나이든 스님이 앉아 소매에 손을 숨기고 있는 이미지
말레이시아 페락 파시르 판장의 핑 시엔 시에 있는 라훌라 스님의 동상


팔리어 경전에 따르면, 라훌라가 사미가 된 후, 붓다는 라훌라를 정기적으로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매우 연령에 맞춰 생생한 은유와 간단한 설명을 사용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초기 불교 경전에서 라훌라의 이름을 딴 많은 을 낳았다. 팔리어 경전은 라훌라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순종적이고,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미가 되기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라훌라가 처음에는 사미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나중에 붓다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했다는 중세 초기 중국과 일본의 기록도 있다. 붓다 외에도,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도 라훌라를 가르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라훌라는 종종 아침에 탁발을 돌 때 사리푸트라를 돕고, 때로는 다른 여행에도 함께했다. 매일 아침, 라훌라는 일어나서 공중에 모래 한 움큼을 뿌리며, 그 모래알만큼 많은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게 해달라고 소원했다.

라훌라가 출가한 같은 해에, 붓다는 아들에게 '암발랏티카-라훌라바다 수트라'로 알려진 경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이 경에서 붓다는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악행을 버리고 자제력과 도덕적인 삶을 개발하도록 돕기 위해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가르치고 장려했다. 그는 행동 전, 행동 중, 행동 후에 성찰하도록 장려했고, 거짓말은 정신적인 삶을 무효화하고 공허하게 만들며, 많은 다른 악을 초래한다고 설명했다.

라훌라가 열여덟 살이 되자, 붓다는 라훌라에게 탁발을 돌 때 그를 방해하는 욕망에 대처하기 위한 명상 기법을 가르쳤다. 라훌라는 자신과 아버지의 잘생긴 외모에 매료되었다. 라훌라를 돕기 위해 붓다는 그에게 또 다른 경을 가르쳤다. 그는 라훌라에게 모든 물질은 무아이며, 자신의 정신적 경험의 다양한 부분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경을 듣고 라훌라는 명상을 시작했다. 그의 스승 사리푸트라는 그에게 호흡 명상을 실천하도록 권했지만, 라훌라에게 필요한 지침을 줄 수 없었다. 따라서 라훌라는 붓다에게 명상 방법을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고 붓다는 그에게 여러 명상 기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붓다는 안다바나라는 곳에서 라훌라에게 모든 것의 무상에 대해 가르치고, 마음에 있는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라훌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팔리어 전통에 따르면, 이 설법에는 붓다의 아들의 깨달음을 목격하겠다고 맹세했던 crore명의 천신도 참석했다. 라훌라는 "행운의 라훌라"(Rāhula-bhadda|link=nopi; Rāhula-bhadra|link=nosa)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그는 붓다의 아들이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깨를 드러낸 스님의 동상


나중에, 붓다는 라훌라를 모든 제자 중에서 배우려는 열의(sikkhākamānaṃ|link=nopi)와 팔리어 우다나에서 특히 칭찬할 만한 열한 명의 제자 중 한 명으로 포함시켰다. 중국 자료는 그가 또한 인내심으로 알려졌으며, '분별력 있게 수행'하는 데 가장 뛰어났다고 덧붙인다. 즉, 붓다의 가르침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계율과 학문에 헌신했지만, 붓다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칭찬을 구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팔리어 경전은 라훌라의 승가 규율의 엄격함에 대한 예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미는 완전한 승려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규칙이 제정된 후, 라훌라는 야외 화장실에서 잤다고 한다. 붓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사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승려들을 꾸짖었다. 그 후, 붓다는 그 규칙을 조정했다.

팔리어 경전은 라훌라가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그를 특별히 편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앙굴리말라와 데바닷타와 같이 문제가 있는 제자들을 자신의 아들만큼 편견 없이 사랑했다고 한다. 슈만은 붓다와 그의 아들의 관계가 "...신뢰하고 우호적이었지만, 다정하거나 친밀하지는 않았다"고 썼으며, 이는 승가 생활에서 애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슈만은 붓다가 그의 아들에게 한 설법이 본질적으로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한 설법과 다르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라훌라의 후년에 그의 어머니 야소다라가 비구니가 되었다. 한 이야기에서, 비구니 야소다라는 방귀로 병이 났다. 라훌라는 그녀가 익숙하고 필요했던 약인 달콤한 망고 주스를 찾기 위해 그의 스승 사리푸트라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회복을 도왔다. 따라서 라훌라의 도움으로 그녀는 마침내 회복되었다.

그가 20세가 되자, 라훌라는 비구가 되어 사왓티에서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라훌라의 죽음은 가장 초기의 자료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라훌라는 붓다와 그의 스승 사리푸트라보다 먼저 죽었다. 팔리어와 중국 자료에 따르면, 이것은 그가 두 번째 불교 천상(Trāyastriṃśa|link=nosa)을 정신적으로 여행하는 동안 일어났다. 그러나 초기 ''Ekottara Āgama'' (사르바스티바다 또는 마하상기카 전통)와 후기 ''Śāriputrapṛcchā''에 따르면, 라훌라는 고타마 붓다가 자신의 교단을 보호하기 위해 미래불 미륵이 나타날 때까지 세상에 머물도록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 네 명의 깨달은 제자 중 한 명이었다.

티베트 불화 속 라훌라(16세기)

5. 평가

대승 불교 전통에 따르면 라훌라는 16 장로(산스크리트어: Ṣoḍaśasthavira) 중 한 명으로, 미륵 부처가 나타날 때까지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깨달은 제자였다. 전통에 따르면 라훌라는 다음 부처가 나타날 때까지 '밤나무와 곡물의 땅'이라는 섬에서 1,100명의 제자들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 현장(602~664년경)은 라훌라를 노인으로 만나 열반에 들기를 미루고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바라문의 말을 들었다.[1][2] 라훌라는 새 수도승과 수습생을 교육하는 데 헌신한 십대 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3][4] 천태종 계보의 23~28명의 스승 중 한 명이자, 선불교 계보의 28명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5] 또한 미얀마 전통의 여덟 명의 깨달은 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6]

부처의 가르침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깨달은 제자로서, 라훌라는 동아시아 예술에서 크고 "우산 모양"의 머리, 두드러진 눈, 갈고리 모양의 코를 가진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7]

중국 승려 현장과 법현(320~420년경)은 인도를 순례하면서 특히 마두라 지역에서 라훌라를 숭배하는 숭배가 존재했다는 것을 주목했다. 승려들은 특정한 전문 분야를 따르는 초기 남성 제자들을 숭배하고, 비구니들은 아난다를 존경하는 반면, 수습생들은 라훌라를 숭배했다.[8] 두 중국 순례자는 아소카 황제가 라훌라를 기리기 위해 특히 수습생들이 경의를 표하도록 의도된 을 세웠다고 언급했다.[9] 종교학자 로리 미크스는 일본에서 라훌라가 16 장로와 같은 깨달은 제자 그룹의 일부로 존경받았지만, 어떤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예외는 13~14세기로, 라훌라의 모습은 나라현 사찰들 사이에서 초기 불교 제자에 대한 헌신의 부활, 강경 의식, 라훌라에게 헌정된 이미지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정기적인 종교적 준수일에 남성과 여성 수습생들은 라훌라를 기리는 의식을 거행하고 강경을 했다. 이것들은 세속 사람들과, 특히 초기 불교 율법인 인도 불교를 부활시키려는 사제들에게 인기가 있었다.[10][11] ''강식''에서 라훌라는 광범위하게 칭찬받았으며, 싯다르타 왕자에게 다른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맏아들"로 묘사되었다.[12] 따라서 라훌라의 인물은 수도 생활을 잘 지키고 싶어하는 승려들에게 헌신과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법화경과 같은 동아시아 텍스트와 ''라운 강식''은 고타마 붓다가 라훌라가 미래 생에서 "칠보화 밟기"(Saptaratnapadmavikrama |link=nosa)라는 이름의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한다. 이 텍스트에서 라훌라는 많은 중생을 구원하고 정토에서 사는 대승 불교의 붓다 유형으로 여겨진다.

부처가 라훌라에게 주는 권고는 그의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암발라티카-라훌로바다 수타''는 아쇼카 황제의 비문에서 연구가 권장되는 7개의 불교 텍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담론은 불교의 결과주의 윤리에 대한 증거로 현대 윤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이에 대한 논쟁이 있다.

라훌라는 사르바스티바다 학파의 일부였던 불교 철학 체계인 ''바이바시카''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그는 또한 일부 태국 불교 '보란' 명상 학파에서 자신의 전통의 수호자로 여겨지는데, 이는 라훌라가 다른 제자들의 즉각적인 깨달음과는 대조적으로 명상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보인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참조

[1] 웹사이트 Siddhartha Gautama https://www.worldhis[...] 2013-12-09
[2] 백과사전 Shariputra: Disciple of the Buddha https://www.britanni[...] 2018-10-30
[3] 서적 『今日から役立つ仏教』
[4] 서적 『図解仏教』 成美堂出版
[5] 문서
[6] 웹사이트 仏教夜話・19 仏弟子群像(6)釈尊の実子ラーフラ(上) http://web.kyoto-ine[...]
[7] 논문 ラーフラ(羅睺羅)の命名と釈尊の出家 https://archives.buk[...]
[8] 문서
[9] 웹사이트 「羅雲忍辱経」 https://elkoravolo.h[...] 2011-07-17
[10] 웹사이트 불교 야화 19불제자 군상 (6) 석가모니의 친자식 나후라 (위) http://web.kyoto-ine[...]
[11] 문서
[12] 웹사이트 무명 초원 일기 「라운인욕경」 http://d.hatena.n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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