렐파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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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렐파첸은 9세기 초 티베트 제국의 통치자로, 재위 기간 동안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 위구르 등 주변 국가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티베트 문화 발전에 기여했지만, 과도한 숭불 정책으로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 렐파첸은 838년 신하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티베트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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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파첸 | |
---|---|
기본 정보 | |
이름 | 라팔첸 |
본명 | 트리 랄파찬 () |
즉위명 | 트리 랄파찬 |
통치 | |
칭호 | 첸포 |
국가 | 티베트 제국 |
재위 기간 | 815년 – 838년 |
시대 이름 | 키탁 (; 이태 (彝泰)) |
시대 기간 | 815년–838년 |
인물 정보 | |
출생 | 802년 |
사망 | 838년 |
매장지 | 계곡의 왕에 있는 트리텡 망리 영묘 |
아버지 | 사드날레그스 |
어머니 | 드로자 라갸엘 망모제 |
배우자 | 초자 펠기 응앙출 |
왕조 | 푸굘 |
정치 | |
선임 룐첸 목록 | 드로 트리스무제 탁낭 바 걀토레 |
반첸포 | 드랑가 팔키 용텐 |
종교 | |
종교 | 티베트 불교 |
계승 정보 | |
전임 | 사드날레그스 |
후임 | 랑다르마 |
2. 정치 활동
렐파첸의 통치 아래 티베트 제국은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당시 티베트의 영토는 중국, 인도, 네팔, 호탄 왕국, 발티, 브루자(길기트와 훈자), 장중, 호르율, 소그율, 유구르, 카밀로그(쓰촨성 일대) 등 광범위한 지역을 포함했으며, 이는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간쑤성 대부분에 해당한다.[2][8] 이러한 영토 확장은 유능한 군사 지도자 장 '브로 스탁의 역할이 컸다.[9][10][11]
렐파첸 시대 티베트는 주변국들과 외교 및 군사적 관계를 맺었다. 동쪽의 당나라와는 군사적 충돌 끝에 821/822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11][12] 이 내용은 라싸의 조캉 사원 앞 석주 등에 기록되었다.[13] 북쪽의 위구르 카간국과도 군사적 충돌[12] 후 평화를 맺었고,[12] 남쪽의 남조 왕국과도 822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2]
2. 1. 당나라와의 관계
렐파첸의 통치 아래 티베트 제국은 당나라와 활발히 교류했지만, 갈등 또한 존재했다. 렐파첸의 권력은 유능한 장군이었던 장 '브로 스탁의 군사적 리더십에 힘입어 강화되었다.[2][8]810년, 당나라 헌종은 티베트에게 세 개의 행정구를 반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티베트와 당나라 사이에는 군사적 긴장이 이어졌다. 819년, 당시 "제1재상"으로 불리던 장 '브로 스탁은 중국 만리장성 인근 오르도스 사막 남쪽에 위치한 당나라의 도시 옌저우를 공격했다.[9][10] 821년 평화 조약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는 당나라에 대한 격렬한 군사 공격을 감행했는데,[11] 이는 당나라가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
결국 양국의 불교도들이 중재에 나서면서 평화가 모색되었다. 821년 또는 822년에 체결된 중국-티베트 조약 비문은 이후 20년 이상 양국 간의 평화를 보장했다.[12] 이 조약의 내용은 823년 라싸의 조캉 사원 밖에 세워진 석주에 티베트어와 중국어 이중 언어로 새겨졌으며, 여기에는 양국 간의 국경에 대한 세부 사항도 포함되어 있다.[13] 이 석주 외에도 당나라 수도와 국경 지역(구구 메루)에도 조약 비문이 새겨진 석주가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14]
2. 2. 위구르와의 관계
렐파첸의 치세 동안 티베트 제국은 북쪽의 위구르 카간국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816년, 티베트의 장 '브로 스탁은 군대를 이끌고 위구르 카간국의 수도였던 오르두 발릭에서 이틀 거리까지 진격하는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821년에는 반대로 위구르가 티베트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2] 이러한 상호 간의 군사적 충돌 이후, 티베트는 중국과의 국경 문제 등으로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양측 불교도들의 중재 노력 끝에 821/822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2] 티베트는 비슷한 시기인 822년에 위구르와도 평화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12]2. 3. 기타 국가와의 관계
렐파첸의 통치 아래 티베트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는데, 이는 인도, 네팔, 호탄 왕국, 발티, 브루자(길기트와 훈자), 장중, 호르율, 소그율, 유구르, 그리고 카밀로그(대략 현재의 쓰촨성 지역) 등을 포함했다.[2] 당시 티베트의 영향력은 현대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간쑤성의 거의 전역에 미쳤다.[8]렐파첸의 치세는 북쪽의 위구르 카간국과의 관계로도 특징지어진다. 티베트는 816년 위구르 영토를 공격했으며, 821년에는 위구르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 이후 티베트는 위구르와도 평화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12]
또한 티베트는 822년에 남쪽의 남조 왕국과도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했다.[12] 이는 렐파첸 시대 티베트가 주변 여러 국가들과 복잡하면서도 능동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3. 불교 정책
렐파첸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티베트 제국의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국, 네팔, 카슈미르, 호탄 왕국 등지에서 많은 장인, 학자, 번역가를 티베트로 초청했다.[14][15] 특히, 상세한 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 어휘집인 ''마하비유트파티''(Mahāvyutpatti) 편찬을 지원하여 티베트 문학과 번역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 어휘집에는 수천 개의 산스크리트어 용어에 대한 표준 티베트어 대응어가 포함되었으며,[14][15] 렐파첸은 모든 번역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서 직접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령하기도 했다.[16]
바즈라파니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렐파첸은 인도와 티베트 학자들을 독려하여 삼장과 주석서, 고대 탄트라 문헌들을 티베트어로 번역하도록 했다.[17]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심지어 사후인 840년대까지도 수천 부의 ''무량수경''(Aparimitāyurnāma sūtra)과 수백 부의 ''반야바라밀경''(Prajñāpāramitā Sūtra) 등이 제작되어 렐파첸에게 공물로 바쳐졌다.[18][19][20]
렐파첸은 승려들을 매우 존경했다. 그는 자신의 길게 땋은 머리카락 끝을 좌석 아래에 놓고 그 위에 승려들이 앉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라는 뜻의 '랄파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기준을 따라 표준 무게와 척도를 도입하고, 인도의 승려 규율을 본떠 정전(淨典) 규정을 시행했으며, 여러 계층의 사제직을 조직했다.[15][21] 그의 불교 정책은 문화 발전에 기여했지만, 일부 정책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현대 라싸 근처에 있던 그의 왕실 여름 캠프는 "호랑이, 표범, 용의 황금 조각으로 훌륭하게 장식된" "궁궐 형태의 군사 파빌리온"이었다고 전해진다.[22]
3. 1. 숭불 정책의 폐단
렐파첸은 재위 기간 동안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사원을 짓는 데 힘썼으며, 일부 사원은 너무 거대하고 세밀하게 계획되어 결국 완성되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얄룽 창포 강과 키 강의 합류 지점 근처에 9층짜리 석조 사원 '우 샹'을 지었는데, 아래층은 돌, 중간 세 층은 벽돌, 꼭대기 세 층은 나무로 지어졌으며 화려한 황금 지붕을 가졌다.[15][21] 백성의 의견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추진하여 토번의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7호양승제(七戶養僧制)'를 실시하여 일곱 가구가 승려 한 명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했으며, 각 승려에게 일곱 가구의 수입을 할당했다.[15][21] 이는 단순히 식량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승복에 수선한 흔적이 보이면 가혹한 처벌을 내렸기 때문에 백성들은 늘 최고급 옷을 구해 승려에게 바쳐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가짜 승려에게도 절하도록 명령했으며, "승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는 손가락을 자르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자는 눈알을 뽑으라"는 극단적인 지시까지 내리며 승려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복종을 강요했다.[15][21]
왕궁 회의 때는 자신의 길게 땋은 머리카락에 비단을 묶어 늘어뜨린 뒤, 그 위에 승려를 앉게 하여 불교에 대한 존숭을 과시하기도 했다.
야사에는 렐파첸이 백성들에게 고기 섭취를 금지하고, 땅을 갈면 벌레가 죽는다는 이유로 농사까지 금지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농작물이 부족하여 목축과 육식에 의존하는 티베트의 현실을 무시한 정책으로, 불교 신자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였다.
결국 이러한 극단적인 숭불 정책과 독단적인 통치는 백성과 신하들의 큰 반발을 샀고, 838년 신하들의 공모로 살해당했다.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은 궁 안의 승려들까지 살해한 뒤 렐파첸의 형인 랑다르마를 새로운 짼뽀로 추대했다.
4. 죽음
838년, 렐빠짼은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티베트 전통에 따르면, 그는 본교를 지지하는 두 명의 신하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23] 다른 기록에서는 신하들이 공모하여 궁궐 안에서 그를 칼로 살해했다고 전한다. 당시 렐빠짼의 지나친 불교 숭상 정책과 7호양승제 등으로 국력이 낭비되고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신하들이 그를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렐빠짼을 살해한 후 궁 안의 승려들도 죽이고, 그의 반불교 성향 형인 랑다르마를 새로운 짼뽀로 추대했다.
다른 설로는 말드로 사원 계단에서 미끄러져 사고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24]
한편,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중국의 역사서 ''구 당서''에는 그가 병에 걸려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었고 나중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둔황에서 발견된, 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도 병사설을 뒷받침한다.[25] 후대의 중국 기록인 주희의 ''통감강목'' 역시 렐빠짼이 재위 기간 내내 병을 앓았으며 838년 말에 사망했다고 전한다.[26] 당시 티베트 제국 주변에서는 839년부터 몇 년간 유행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어[27][28], 렐빠짼의 죽음이 이 유행병이나 다른 만성 질환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렐빠짼은 838년 말에 사망하여 야를룽 계곡 근처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일부 현대 학자들이 페르시아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놀라운 조각의 돌 사자"로 장식되어 있다.[29]
5. 계승
렐파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티베트 전통에 따르면, 렐파첸은 친본교 성향을 가진 두 명의 대신에게 살해당했으며, 이들은 렐파첸의 반불교 성향 형제인 랑다르마를 왕위에 올렸다고 한다.[23] 다른 기록에서는 렐파첸이 말드로 사원 계단에서 미끄러져 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하며, 중국의 역사서인 ''구 당서''에는 그가 병으로 인해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둔황에서 발견된 손상된 문서 중에는 렐파첸 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어, 그가 병을 앓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25] 후대의 중국 학자 주희(1130–1200)가 쓴 ''통감강목''에서는 렐파첸이 재위 기간 대부분 병을 앓아 제국을 순행할 수 없었으며, 838년 말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26] 같은 책에는 839년에 유구족 사이에서 큰 역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역병이 몇 년간 지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27] 이 역병에 대한 언급은 ''신 당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28] 따라서 렐파첸의 죽음이 이 역병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만성적인 질병의 결과일 수도 있다.
렐파첸은 838년 말에 사망하여 야를룽 계곡 근처에 묻혔다. 그의 무덤에는 돌 사자상이 세워져 있는데,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를 페르시아 양식으로 보기도 한다.[29] 그의 사후, 티베트 전통에 따라 형제인 랑다르마가 왕위를 계승했다.[23]
6. 평가
렐파첸은 재위 기간 동안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절을 짓는 등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으나, 너무 거대한 계획 탓에 완공하지 못했다. 그는 백성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며 독단적으로 정치를 운영하여 토번의 국력을 낭비시키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특히 '7호양승제(七戶養僧制)'를 실시하여 일곱 가구가 승려 한 명을 부양하도록 강제했다. 이는 단순히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승려의 옷에 바느질 자국만 있어도 해당 가구를 엄하게 처벌하는 등 매우 가혹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재물을 모아 항상 최고급 옷을 승려에게 바쳐야만 했다. 또한 "가짜 중에게도 머리를 숙여 인사하라"거나, "승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는 그 손가락을 자르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자는 그 눈알을 뽑으라"는 극단적인 명령까지 내렸다. 심지어 왕궁 회의 때는 자신의 길게 땋은 머리카락에 비단을 묶어 늘어뜨린 뒤, 그 위에 승려를 앉히는 방식으로 불교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려 했다.
야사에 따르면, 렐파첸은 백성들에게 고기 섭취를 금지했는데, 농작물이 부족한 티베트의 환경에서는 생존을 위협하는 무리한 명령이었다. 또한 땅을 갈면 벌레가 죽는다는 이유로 농사까지 금지하려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숭불 정책은 불교 신자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정책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했고, 838년 신하들은 공모하여 렐파첸을 암살했다. 그는 궁 안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신하에게 살해당했으며, 신하들은 궁 안의 승려들까지 제거한 후 렐파첸의 넷째 형인 랑다르마를 새로운 짼뽀로 추대했다. 렐파첸의 통치는 티베트 불교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그의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종교 정책은 결국 국력을 쇠퇴시키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자신의 죽음과 토번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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