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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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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그마드는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법률 관련 직책 또는 명칭이다. 스웨덴에서는 각 지역 정부의 중요한 관직으로, 팅(의회)을 주재하고 판사 역할을 수행했으며, 1849년 폐지되었다가 1947년 고위 판사에게 명칭이 다시 도입되었다. 핀란드에서는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제도가 있었으며, 지방 법원 수석 판사 등의 직함으로 사용되었다. 노르웨이에서는 법률 고문 역할을 하다가 판사로 활동했으며, 1797년 폐지되었다가 1887년 부활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알thing의 의장으로서 법률을 낭독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으며, 노르웨이와의 연합 이후에는 왕실 로스피커가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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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마드
정의
설명스칸디나비아의 법률가
명칭
음성 정보
다른 언어 명칭

2. 스웨덴

스웨덴에서 율법 옹호관(라그만)은 각 지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관직이었다. 각 전통적인 지방과 같은 ''lagsaga''(관할권)는 Tiundaland의 율법 옹호관에게 종속된 율법 옹호관이 담당했다. 율법 옹호관은 thing을 주재하고 판사 역할을 했으며, 국민이 결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법을 암기하고 ''thing''에서 낭송했으며, ''thing''에서의 행정과 결정 실행,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고 왕 또는 그의 대리인에게 국민을 대신하여 말하는 의무가 있었다. 선출된 왕이 Eriksgata를 통과할 때 그를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율법 옹호관이었다. 1350년경 지방 법률이 제정된 후에는 관할 지역에서 온 12명의 동반자와 함께 모라의 돌에 참여했다.

Västgöta 법에 따르면, 율법 옹호관은 지방의 자작농(''bönder'')이 종신직으로 임명했다. 아버지도 토지 소유자였어야 했다. 이 관직은 세습되지 않았지만, 보통 유력한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스웨덴 율법 옹호관은 1320년대에 Vidhem의 사제였던 Laurentius Dyakn이 필사한 Västergötland 법관 기록에 기록된 Lum이며, 1000년경에 살았을 것이다. 상당한 전기적 정보를 가진 최초의 율법 옹호관은 Laurentius 목록에서 17번째인 에스킬 (c. 1175–1227)이다.

이후 율법 옹호관은 귀족 출신이 되었고, 스웨덴 추밀원 구성원으로 선택되어 봉급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일을 돌보는 연금으로 바뀌었다.

스웨덴 각 지방의 최초의 알려진 법관
지방 (lagsaga)최초의 알려진 법관연도
UpplandBirger Persson1296-1316
TiundalandLars1231
TiundalandIsrael Andersson And1286–1289
TiundalandBirger Persson1293–1296
AttundalandGermund1231
AttundalandHåkon1286–1296
Fjädrundaland?(1290년대에 Uppland에 합류)
Hälsingland??
SödermanlandBjörn Næf1285–1286
SödermanlandJohan Ingevaldsson1295–1304
Västmanland and DalaMagnus Gregersson1305
Västmanland and DalaGreger Magnusson1325–1336
NärkeFilip Törnesson1271–1279
VärmlandA. legislator in Vermlandia1190
VärmlandHöldo1268
VärmlandMarl Haraldssonc. 1285
Västergötland에스킬 마그누손 (뱔보 가문)1217–1227
VästergötlandGustaf1230
VästergötlandFolke1240
VästergötlandPeter Näf1251–1253
ÖstergötlandLars Petersson1244
Östergötland마그누스 벵트손 (뱔보 가문)1247–1263
Tiohärad (Småland)Nils1180
Tiohärad (Småland)Ulf1200
Tiohärad (Småland)Karl Ingeborgsson1266–1268


2. 1. 초기 율법 옹호관

율법 옹호관은 민회(Ting)를 주재하고 판사 역할을 했으며, 법률을 제정하는 권한을 가졌다. 법률을 암기하고 낭송하는 것이 중요 의무였으며, 백성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고 왕이나 그의 대리인에게 백성을 대변하는 역할도 맡았다. 초기에는 백성들이 자작농 중에서 종신직으로 임명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토지 소유자였어야 했다. 이 관직은 세습되지 않았지만, 보통 유력한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13세기 중반부터 율법 옹호관은 왕에게 더 밀착되었고, 왕의 평의회 구성원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그누스 에릭손 왕은 율법 옹호관 임명에 왕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결정했다. 6명의 귀족과 6명의 자작농이 2명의 성직자와 협의하여 관할 지역에서 3명을 임명하고, 왕은 그들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선택했다. 이 절차는 선택의 모든 과정이 왕에게 이전된 16세기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2. 2. 왕권 강화와 율법 옹호관의 변화

13세기 중반부터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법 옹호관은 왕에게 더욱 밀착되었고, 왕의 평의회 구성원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그누스 에릭손 왕은 율법 옹호관 임명에 왕이 영향을 미치도록 제도를 변경했다. 6명의 귀족과 6명의 자작농이 2명의 성직자와 협의하여 관할 지역에서 3명을 임명하고, 왕은 그들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선택했다. 이 절차는 16세기까지 효력을 발휘했는데, 이때 선택의 모든 과정이 왕에게 이전되었다.

2. 3. 율법 옹호관의 쇠퇴와 현대적 계승

1680년 감축으로 귀족 출신 율법 옹호관이 누리던 특권이 폐지되면서, 율법 옹호관은 직접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추밀원 구성원 임명에 대한 점검도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1723년까지 율법 옹호관 임명은 귀족에게만 제한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 옹호관의 기능은 판사 역할로 제한되었고, 그 중요성 또한 점차 감소하였다. 결국 1849년에 율법 옹호관 관직은 폐지되었으나, 주지사들의 명예 칭호로 간혹 사용되기도 했다.

1947년, 'lagman'(복수형 'lagmän')이라는 명칭은 고위 판사, 즉 항소 법원 부서장에게 다시 도입되면서 부활했다. 1969년 개혁 이후, 지방 법원(''tingsrätter'')의 장은 'lagmän'이며, 항소 법원 부서장은 'hovrättslagmän'("항소 법원 율법 옹호관")이다. 마찬가지로, 행정 법원(''förvaltningsrätter'')의 장도 'lagma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행정 항소 법원 부서장은 'kammarrättslagmän'("행정 항소 법원 율법 옹호관")이다.

3. 핀란드

핀란드는 1809년까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율법 옹호관 제도는 스웨덴과 유사했다. 1868년에 '라그만' 직책이 폐지되었으나, 1993년 개혁으로 지방법원 수석 판사 또는 항소 법원 선임 판사의 직함으로 다시 도입되었다.[1]

4. 노르웨이

노르웨이에서 율법학자는 노르웨이 국왕 스베레 1세 (1184–1202)가 그들을 자신의 관료로 임명하기 전까지 법률에 정통한 고문 역할을 했다.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6세 (1263–1280)의 법률에 따르면, 그들은 판사로서 활동하고 라그팅 (노르웨이 상급 법원)을 주재할 권한을 부여받았다.[2]

4. 1. 중세 노르웨이 율법 옹호관의 지위

노르웨이에서 율법학자들은 노르웨이 국왕 스베레 1세 (1184–1202)가 그들을 자신의 관료로 임명하기 전까지 법률에 정통한 고문 역할을 했다.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6세 (1263–1280)의 법률에 따르면, 그들은 판사로서 활동하고 라그팅 (노르웨이 상급 법원)을 주재할 권한을 부여받았다.[2] 현대 역사가들은 고대 시대(특히 1600년경 이전)의 율법학자들을 전체 왕국에 10~12명 정도 있었던 귀족의 일원으로 간주한다.[2]

14세기와 15세기에는 주로 기존의 고위 귀족 출신이 임명되었으며, 일부는 왕국에서 가장 높은 귀족 계급인 기사 칭호를 받았다.[2] 16세기에도 여전히 기존의 귀족 출신이 임명되었지만, 하위 귀족 출신이 더 많았다.[2] 율법학자들은 봉토를 받았는데,[2] 예를 들어 마르케르 봉토는 전통적으로 오슬로의 율법학자가 소유했다.[2] 그들은 또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귀족과 동등하게 대우받았다.[2]

4. 2. 율법 옹호관 직책의 변화와 부활

역사적인 라그팅과 율법 옹호관 직책은 1797년에 폐지되었지만, 1887년 배심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그 직함이 부활했다.[2]

5.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에서는 930년 알thing(의회) 설립과 함께 로그마드(lǫgsǫgumaðr) 직책이 도입되었다. 알thing의 창립 전통적인 날짜는 930년이며, 울플리오트르가 창립 인물로 등장하고 법률의 원저자로 여겨진다. 이 직책은 1262년 이후 과도기 동안 몇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후 ''lǫgmaðr''로 대체되었다.

5. 1. 로그마드의 역할과 권한

아이슬란드에서 930년 알thing (의회)이 설립되면서 로그마드(lǫgsǫgumaðr) 직책이 도입되었다. 로그마드는 3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띵(thing)의 의장으로서의 기능 외에 법률 자문과 낭독을 임무로 했다. 로그마드는 중세 아이슬란드 자유국의 유일한 정부 직책이었다. 로스피커(lawspeaker, 법률 낭독자)는 3년 임기로 선출되었으며, 매년 여름 알thing에서 법률의 3분의 1을 낭독해야 했다. 실제로 그림르 스베르팅손(Grímr Svertingsson)의 임기는 무능함이나 질병이 아닌, 그의 목소리가 업무에 너무 약했기 때문에 단축되었다. 로그마드는 법률 해석자이자 법정 의장으로서의 기능 외에 공식적인 권한은 없었지만, 빈번하게 발생하는 분쟁에서 중재자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5. 2. 노르웨이와의 연합 이후

1264년 노르웨이와의 연합 이후, 두 명의 왕실 로스피커가 임명되어 띵(thing)에서의 법적 절차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직책은 1800년 알thing과 함께 폐지되었다.

참조

[1] 서적 Lagerquist 1997:36
[2] 서적 Perspektiver på adelen i Norge ved utgangen av middelalderen og på 1500-tallet Kane.benkestokk.teiste fo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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