룀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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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룀 스캔들은 나치당의 고위 간부 에른스트 룀의 성적 지향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말한다. 룀은 동성애자였으며, 이는 나치당 내에서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스캔들은 언론 보도, 소책자 배포, 폭력 사건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룀의 숙청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권력과 도덕성, 소수자 혐오의 정치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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룀 스캔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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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명칭 | 룀 스캔들 |
발생 시기 | 1931년 ~ 1932년 |
관련 인물 | 에른스트 룀 |
배경 | |
주요 내용 | 뮌헨의 가톨릭 신문인 뮌헤너 포스트가 에른스트 룀과 다른 돌격대 지도자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그들의 생활 방식이 나치당의 도덕적 강령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
논란 및 영향 | |
논란 중심 인물 | 에른스트 룀 헬무트 클로츠 (de) |
결과 | 이 스캔들은 나치당 내에서 권력 투쟁을 심화시키고, 결국 장검의 밤 사건으로 이어진다. |
2. 배경
에른스트 룀은 초기 나치당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동성애자였다. 당시 독일 사회는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룀 스캔들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에른스트 룀과 초기 나치당

에른스트 룀(Ernst Röhm|에른스트 룀de, 1887년 ~ 1934년)은 초기 나치당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과 나치에 반하는 세력들을 공격한 준군사조직 돌격대(Sturmabteilung|슈투름압타일룽de, SA)의 증진을 이끌었다.[2]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친구였으며, 맥주 홀 반란이라고도 불리는 뮌헨 폭동에 가담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3] 1924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입법부 하원으로 선출되어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긴 룀은 엘도라도 나이트클럽을 비롯하여 동성애자 시설에 자주 방문했다.[4] 1929년에는 동성애자 협회였던 Bund für Menschenrecht|분트 퓌어 멘셴레히트de(인권을 위한 연합)[4]에 입단하면서 베를린의 동성애자 공동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룀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는 것을 싫어했으며,[4] 공식적으로 언급을 피하는 대신 성적 지향을 공개하다시피 행동했다. 1925년에는 매춘부로 고용한 남성이 돈을 갈취하였고, 룀은 경찰에 매춘부를 신고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알게 되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4]
2. 2. 룀과 하임조트의 편지
1928년, 동성애자이자 민족주의 성향의 의사 카를귄터 하임조트는 룀의 자서전 《대(大)반역자 이야기》(Die Geschichte eines Hochverrätersde)의 한 구절에 대해 질문하는 편지를 보냈다. 룀은 이 책에서 보수와 부르주아적 도덕성을 비난하며 "오늘날 사회의 가식, 기만, 위선에 대한 투쟁은 요람에서 인간들에게 놓인 추진력의 선천적 성질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중략) 이 분야에서 투쟁하는 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가면은 인간 사회와 법질서의 모든 영역에서 이화(異化)되어 찢어질 수 있다."라고 썼다. 룀은 부르주아적 도덕성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나치당원들은 룀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3]하임조트는 룀에게 이 구절이 독일 형법 175조, 즉 남성 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법에 대한 비판인지 물었다. 룀은 "당신이 나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답장하며, 처음에는 좀 더 노골적으로 쓰고 싶었으나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해당 구절을 수정했다고 밝혔다. 룀과 하임조트는 친구가 되었고 베를린 내 동성애자들이 만나는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룀은 1928년 볼리비아에 군사 고문으로 일하기 위해 이민을 갔고, 둘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둘은 동성애와 나치즘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하임조트는 룀이 나치당을 이끌며 동성애를 받아들이길 바랐다. 룀은 편지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에 관해 "동성 지향적"(gleichgeschlechtlichde)이라는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동시에 여성에 대한 혐오가 있다고 적었다.[1]
2. 3. 나치당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
에른스트 룀은 나치당 초기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돌격대(Sturmabteilung|슈투름압타일룽de, SA)의 지휘관이었다. 룀은 아돌프 히틀러의 친구였으며, 뮌헨 폭동에 가담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다.[2] 1924년 국회 의원으로 선출된 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엘도라도 클럽을 비롯한 동성애 업소를 자주 방문했다.[3] 1929년에는 동성애 단체인 Bund für Menschenrecht|인권 연맹de에 가입하여 베를린 동성애자 사회에 알려졌다.[4] 룀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고 최대한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25년에는 자신이 고용한 남창이 강도질을 하자 경찰에 신고했는데, 히틀러는 이 사건을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28년, 나치당은 형법 175조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설문에 "동성애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의 적이다"라고 답하며 동성애를 배척했다. 나치 정치인들은 동성애가 독일 국민을 약화시키려는 유대인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동성애자들을 불임 시술하겠다고 공언했다. 대다수 나치 당원들은 전통적인 도덕관을 지지하며 룀과 그의 동료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했다. 당시 동성애 사실이 발각된 공무원이나 장교는 해고되었지만, 돌격대는 자체적으로 동성애자들을 묵인했다. 이러한 묵인은 은밀하게 유지되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돌격대의 남성적인 이미지가 의심받을 수 있었다. 룀은 사생활과 정치를 분리하려 했지만, 역사학자 로리 마르호퍼는 "대부분의 나치들은 성적 취향과 같은 사적인 문제들을 매우 공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고 기록했다. 전기 작가 엘레노어 핸콕은 "에른스트 룀이 혁명적이었다면, 그는 국가 사회주의와 독일 사회가 그를, 즉 다른 남자를 원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한 점에서 혁명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공산당(KPD)은 형법 175조 폐지를 지지했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동성애 혐의를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의 위선을 주목했다. 나치즘의 부상에 직면하여, 그들은 오일렌부르크 사건에서 확립된 동성애와 군국주의를 연관시키는 고정 관념을 이용했다. 1927년, SPD 의원들은 빌헬름 프리크가 동성애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요구하자 "히틀러 만세, 만세, 만세. 오일렌부르크 만세!"라고 외치며 조롱했다. SPD는 나치의 권력 장악을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룀 스캔들을 이용했다.
3. 스캔들의 전개
룀의 동성애는 1931년 언론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1년 4월, 뮌헨의 실업 웨이터 프리츠 라이프가 룀을 협박하려 하자 언론에 보도되었다. 같은 해 초부터 신문들은 그의 동성애를 암시하기 시작했고, 나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는 그의 일기에 2월 27일 나치당이 "175-ers의 엘도라도"로 여겨진다고 썼다.
룀의 이중생활은 그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나치당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지속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전보다 더 신중해졌고 동성애 클럽을 피했다. 그의 친구 페터 그라닝거는 16세에서 20세 사이의 젊은 남성들을 구해 그라닝거와 카를 레온 뒤 물랭에카르트가 소유한 아파트로 데려가 성관계를 가졌다.
1932년 3월, 사민당은 헬무트 클로츠가 작성한 "룀 사건"(Der Fall Röhmde)이라는 소책자를 30만 부 가량 인쇄하여 독일 내 주요 인사들에게 배포했다. 이 소책자에는 룀과 하임조트의 편지가 공개되었고, 룀의 동성애를 비난하며 나치당의 위선을 폭로했다. 룀은 편지 배포 중단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편지가 가짜라고는 주장하지 않아 법정에서 기각되었다. 룀은 다른 나치당원들에게는 자신이 썼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3. 1. 언론의 보도 (1931년)
1931년 4월 14일, 독일 사회민주당(SPD) 기관지 뮌헨 포스트de(Münchener Post)는 1면에 나치당 내에 만연한 "제175조에 해당하는 끔찍한 타락"에 대한 기사를 연이어 게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기사는 룀과 에드문트 하이네스가 돌격대(SA) 내 동성애 집단의 일원이며, 오토 슈트라서로 추정되는 익명의 전 나치 당원의 증언을 인용하여 히틀러와 팔짱을 끼고 다녔다고 주장했다. 4월 23일자 두 번째 기사는 룀이 남성 매춘부와 관계를 맺었다고 보도했다. 세 번째 기사는 히틀러가 룀의 동성애에 대한 여러 보고를 무시했다며, 나치당이 공개적으로는 동성애를 비난하면서도 당내 동성애자들에게는 눈을 감는 위선을 보였다고 비난했다. 뮌헨 포스트de는 룀의 동성애 때문에 독일 청년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근거 없이 주장했으며, 돌격대의 도덕적 해이를 묘사하기 위해 룀ischde(Röhmisch)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른 사회민주당 및 (KPD) 신문들도 이 보도를 반복했다.이 기사들의 주요 출처 중 하나는 룀과 전 나치 당원 에두아르트 마이어 간의 편지였다. 룀은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Völkischer Beobachter)de에 마이어의 편지가 위조된 것이라고 반박하며 뮌헨 포스트de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조사 결과 마이어가 편지를 위조한 것으로 확인되었고, 마이어는 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 전에 감옥에서 자살했다. 이후 좌파 언론들은 스캔들에 대한 보도를 줄였지만, 소문은 계속되었다. 룀의 동성애는 나치당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도덕적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주장의 일부로 자주 언급되었다. 1931년 9월, 사회민주당의 (Hamburger Echo)는 "깨끗한 독일, 진정한 가족 생활"을 요구하는 나치 정치 포스터에 대해 "동성애자(schwulde) 룀 대위"를 언급했다.
3. 2. 룀의 재판 (1931-1932년)
마이어 사건 이후, 사민당 지도부는 룀의 동성애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형법 175조에 따른 증거를 찾고자 했다. 베를린 경찰은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 칼 제베링의 지휘 아래 수사를 시작했지만, 형법 175조 적용을 꺼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웨이터 프리츠 레이프의 증언을 확보한 경찰은 룀과 하임조트 간의 편지를 압수하고 두 사람을 심문했다.[1][2] 룀은 심문 과정에서 양성애자임을 인정하고 다른 남성과의 자위행위 사실은 시인했지만, 형법 175조 위반 혐의는 부인했다.[3][4]1931년 6월 6일 열린 재판에서 레이프는 1930년 말 호텔 방에서 룀, 자신의 친구인 호텔 직원 피터 크로닝거와 함께 자위행위를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약속된 돈을 받지 못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주장했다. 룀과 크로닝거는 혐의를 부인했고, 재판은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되었다.[2] 이후 룀은 1931년과 1932년에 걸쳐 총 다섯 차례 재판을 받았으나, 검찰은 룀의 형법 175조 위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3] 특히 사적인 범죄에 대한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3. 3. 헬무트 클로츠의 소책자 (1932년 3월)
사민당은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대항하여 출마한 히틀러 때문에 룀과 하임조트의 편지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전 나치당의 반파시스트 언론인이었던 헬무트 클로츠는 17쪽 분량의 "룀 사건"(Der Fall Röhmd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준비하였다.[1] 1932년 3월 초, 사민당은 소책자를 30만 부 가량 인쇄하여 정치인, 육군 장교, 의사, 교사, 공증인 등 독일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하는 독일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2] 소책자에서 클로츠는 "이 물고기는 머리에서 냄새가 난다. 부패는 NSDAP(나치당)의 지위의 깊이에 이른다"고 묘사했다.[3] 그는 동성애를 용인하는 정당은 "사람들을 독살하고 (중략) 도덕적 힘을 파괴할 것"이며, 고대 로마의 쇠퇴와 비슷하게 독일의 쇠퇴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 클로츠는 룀을 현재 지위에 남겨두고 있는 것은 "의도적으로 독일의 젊은이들을 동성애자 똘마니들로 만들게 하려는 유혹 범죄"에 나치가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책자 내에서 "룀의 편지를 출판함으로써, 나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썼지만, 클로츠는 룀에 대한 보도가 나치와 동성애자들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룀은 편지 배포 중단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편지가 가짜라고는 주장하지 않아 법정에서 기각되었다. 법원은 편지 출판에 위법성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룀은 다른 나치당원들에게는 자신이 썼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소책자의 배포를 중단하려는 법정 싸움은 몇 달 동안 함부르크 에호에 정기적으로 보도되었다. 사민당 신문들은 곧 클로츠의 소책자를 입수해 편지의 발췌본을 출판했다. 룀에 대한 혐의는 선거 포스터와 스티커까지 이르렀다. 이 작전은 히틀러나 나치 운동 전체만큼의 범위처럼 룀을 특정으로 하지 않았으며, 동성애에 찌들어있는 것처럼 비방하고 독일의 젊은이들이 도덕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고 시사하였다.
3. 4. 국회의사당에서의 폭행 사건 (1932년 5월)
1932년 5월 12일, 헬무트 클로츠는 오토 벨스 (사민당) 의장을 만나기 위해 국가의회 의사당 카페를 방문했다. 벨스가 투표 때문에 자리를 비운 후, 클로츠는 나치 의원들과 함께 카페에 들어온 하이네스에게 발각되었다. 하이네스는 "그 팸플릿을 발행한 건 너잖아, 이 양아치야!"라고 외치며 그의 뺨을 때렸다. 나치들은 이어서 주먹과 의자로 그를 공격했지만, 웨이터와 다른 의원들이 개입하자 도망쳤다. 두 명의 경찰이 현장에 나타나 클로츠에게 공격자를 식별할 수 있도록 밖으로 호위하겠다고 제안했다. 클로츠는 동의했지만, 카페 밖에서 수십 명의 나치 지지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여러 목격자들은 누군가 "그를 때려 죽이겠다"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누군가 클로츠의 아내에게 전화하여 국회의사당에 와서 "그의 뼈를 수습하라"고 말했다.
당시 의회가 회기 중이었기 때문에, 국회의장 파울 로베 (사민당)는 클로츠를 폭행한 하이네스, 한스 크라우제 (정치인)|Hans Krause (politician)|한스 크라우제de , 프리츠 바이첼, 빌헬름 슈테그만 (정치인)|Wilhelm Stegmann|빌헬름 슈테그만de에게 최대 징계(30일)를 명령했다. 그는 질서를 회복하고 떠나기를 거부한 나치 4명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을 불렀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에 나치 국회의원 전원 107명이 "히틀러 만세!"를 외쳤다.[4] 베른하르트 바이스의 지휘 하에 수십 명의 경찰이 본회의장에 들어섰지만, 유대인이었던 바이스를 향한 반유대주의적 비난에 시달렸다. 경찰은 체포하려는 나치들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성공했다. 그 결과 혼란이 심해 로베는 의회 회기를 중단해야 했다. 본회의장에서 나치와 사민당 의원 간의 난투극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국회의사당은 1932년 7월 독일 연방 선거 전에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 공격과 그에 따른 재판은 널리 읽히는 전국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5월 14일, 크라우제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하이네스, 슈테그만, 바이첼은 유죄 판결을 받고 3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판사는 민주주의의 성지인 국회의사당에서 클로츠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의원들의 무법 행위를 규탄했다.
4. 언론의 반응과 사회적 논쟁
에른스트 룀의 동성애는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룀과 카를-귄터 하임조트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사회적 논쟁거리로 떠올랐다.[1] 전 나치당원이자 반(反)파시스트 언론인이었던 헬무트 클로츠는 "룀 사건"(Der Fall Röhmde)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2] 이 소책자는 나치당이 동성애를 용인하면 독일이 쇠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룀을 비난했다.[3]
룀은 편지 배포 중단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편지가 가짜라고는 주장하지 않아 기각되었다.[4] 법원은 편지 출판에 위법성이 없다고 판결했다. 룀은 다른 나치당원들에게 자신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소식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선거 포스터와 스티커에도 등장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룀을 옹호하며 그를 돌격대 참모장 직에 계속 있도록 했다. 많은 나치당원들은 히틀러의 결정에 놀랐지만, 히틀러는 룀에 대한 개인적 애정과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2년 5월, 국가의회 의사당에서 클로츠가 나치 의원들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룀 스캔들은 다시 한번 독일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이 스캔들은 나치당에게 불쾌감을 안겨주었지만, 선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룀과의 악수를 꺼려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는 것을 망설였다고 한다.
4. 1. 나치 언론의 대응
나치 언론은 룀 스캔들에 대해 대부분 무시하거나, 사회주의자나 유대인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룀을 옹호했다.[1] 또한 룀의 볼리비아에서의 활동을 과장하여 룀이 볼리비아 육군 참모총장직을 제안받았다고 허위 보도했다.[2]마르회퍼는 "독일이 아닌 타국에서 1930년대 제도권 언론이 자제력을 가진 유력 정치인에 대한 동성애 스캔들에 반응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라고 평가하며, 반(反)나치 세력조차 룀의 성적 문제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이는 동성애 운동으로 인해 독일인들에게 개인적인 성적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3] 그럼에도 동성애 해방에 반대하는 일부 보수주의자 및 나치 동조자들은 룀의 성적 문제를 대중의 관심사가 아닌 문제로 묘사했는데, 마르회퍼는 이를 동성애가 반드시 공적인 생활에서의 추방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시라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회퍼는 "룀의 성에 대한 공개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주장들은 나치가 도덕적 쇄신 정당으로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클로츠 공격 이후 언론은 주로 나치의 폭력성, 법치주의(Rechtsstaat|법치국가de)에 반하는 주먹구구식 통치(Faustrecht|주먹구구식 통치de) ,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 등을 보도했다. 룀의 동성애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는 극좌파인 사민당과 극우파인 독일 국가인민당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많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클로츠가 룀의 성적 문제를 제기한 것을 비난했다. 상당수의 우익 신문들은 민주주의를 적대시하고 클로츠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했지만, 다른 신문들은 나치의 폭력성에 불안감을 느꼈다. 친(親)나치 성향의 신문이었던 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는 클로츠의 소책자를 비판하면서도 "특히 국가의회 의사당의 건물은 일련의 언어적 폭력 같은 걸로 복수를 하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극우 성향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루덴도르프 장군이 말한다: 이 갈색 늪에서 나가자!"라는 글에서 룀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히틀러를 비난했다. 제목에 쓰인 갈색 늪은 동성애자들을 늪에 빠뜨리던 고대 독일의 관습을 의미했다. 루덴도르프의 글은 좌파 언론에 호의적으로 보도되었다.
사민당의 보도는 주로 동성애 혐오에 호소하며 나치즘의 명예를 훼손하고 동성애가 나치당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신문 포르베르츠는 나치 용어를 사용하며 건강한 대중의 감정을 호소하였으며, 히틀러 청년단이나 돌격대에 들어간 소년이나 청년이 동성애 약탈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언급하였다. 반파시스트 신문들은 나치의 동성애 주장을 폭력과 살인과 동일시하거나 엮었다. 1932년 10월, 함부르크 에호는 돌격대가 무고한 젊은이들을 동성애, 급진적 정치, 군국주의로 유혹했다고 전하며 자신이 동성애자 진보 세력의 대상임을 깨닫지 못하는 젊은 돌격대원으로서의 관점에서 풍자 편지를 신문에 실었다. 공산당은 하임조트의 편지 출판을 거부하였지만, 스캔들이 터진 후에는 일관성이 없는 반응을 보였다. 공산당 신문인 벨트 암 아벤트는 룀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경제적으로 취약한 노동자들을 착취하였다고 주장했다. 디 로테 파네는 나치당이 동성애의 번식지이며, 룀은 청소년들의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오직 소수의 좌파 언론만이 아웃팅을 비판하였다. 디 벨트뷔네에 글을 쓴 쿠르트 투홀스키가 대표적으로 쿠르트는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불명예스러운 형법 175조를 반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한 남자를 추방하고 싶어하는 단체에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언급했다.
4. 2. 진보 언론과 동성애 운동가들의 비판
카를-귄터 하임소트는 1928년 에른스트 룀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자서전(Die Geschichte eines Hochverrätersde)의 한 구절에 대해 질문했다.[1] 룀은 보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도덕성을 비난하며 "오늘날 사회의 위선, 기만, 가식에 맞선 투쟁은 인간에게 요람에서부터 주어지는 본능적 본성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자살의 원인을 부르주아적 도덕성으로 돌렸고, 그의 주장은 다른 나치들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하임소트는 룀에게 이 구절이 독일 형법 제175조, 즉 남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에 대한 비판의 의미인지 질문했다. 룀은 "당신은 나를 완전히 이해했소!"라고 답하며, 처음에는 더 명확하게 표현하려 했지만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수위를 낮췄다고 말했다. 룀과 하임소트는 친구가 되었고 베를린의 동성애자 만남의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룀이 1928년 볼리비아로 이주하여 군사 고문으로 일하는 동안 그들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동성애가 나치즘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고, 하임소트는 룀이 나치당을 이끌어 동성애를 수용하게 되기를 희망했다. 룀은 편지에서 자신을 "동성 지향적"(gleichgeschlechtlichde)이라고 묘사하고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했다.
1928년, 나치당은 제175조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설문조사에 "동성애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의 적이다"라고 선언하며 부정적으로 답했다. 나치 정치인들은 동성애가 독일 국민을 훼손하려는 유대인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정기적으로 동성애를 비난했고, 정권을 잡으면 동성애자들을 불임 시술하겠다고 약속했다. 대다수의 나치들은 전통적인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룀과 그의 동료들 중 일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게 여겼다. 당시 동성애 사실이 발각된 공무원이나 장교는 제175조 위반이 증명되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해고되었지만, 친위대(SA)는 자체적으로 동성애자들을 묵인했다. 이러한 묵인은 은밀함을 유지하고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다. 룀은 사생활과 정치 생활을 분리하려 했지만, 역사가 로리 마르호퍼는 "대부분의 나치들은 성적 취향과 같은 사적인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매우 공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고 기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공산당(KPD)은 제175조 폐지를 지지했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상대로 동성애 혐의를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의 위선을 주목했다. 나치즘의 부상에 직면하여, 그들은 오일렌부르크 사건 동안 확립된 동성애를 군국주의와 연관시키는 고정 관념을 이용했다. SPD는 바이마르 공화국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고 느낄 즈음에, 나치의 권력 장악을 막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룀 스캔들을 시작했다.
좌파 언론과 대조적으로 동성애 운동가들은 나치당의 위선을 강조하였다. 인권 연맹이나 과학-인도주의 위원회와 같은 동성애 단체들은 나치즘에 반대하였지만, 동시에 룀의 사생활이 사생활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나치를 비난하였다. 프리드리히 라츠추바이트는 사민당이 나치당을 공격하기 위해 동성애 혐오를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과학-인도주의 위원회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나 좌파였기에 나치즘의 생존 위협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웃팅을 전술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를 하였다. 아돌프 브랜트는 "누군가가 타인의 친밀한 애정 접촉을 가장 해로운 방식으로 통제하고 싶을 때—그 순간 자신의 애정생활 또한 사적인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브랜트는 동성애자 돌격대 남성들이 "자기들을 죽일 교수형 집행자의 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며 경고를 하였다.
5. 스캔들의 결과와 영향
에른스트 룀 스캔들은 나치당 내 권력 투쟁과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룀은 돌격대(SA)의 지도자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동지였다. 그러나 룀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숨기지 않았고, 이는 나치당 내에서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1934년, 히틀러는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룀과 그의 측근들을 숙청했다.[3] 나치 선전은 이 숙청이 룀의 동성애와 돌격대의 쿠데타 모의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3]
이 사건은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동성애 혐오를 더욱 부추겼다. 나치는 룀 스캔들을 이용하여 동성애자들을 '타락한 존재',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었고, 이는 이후 나치 독일의 동성애자 박해로 이어졌다.
또한, 룀 스캔들은 좌파 진영에서 나치당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좌익 준군사조직은 "뜨거운 룀"( Geil Röhm|가일 룀de ), "게이 하일"( Schwul Heil|슈불 하일de )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돌격대를 조롱했고, 반나치 농담에서는 룀의 동성애를 언급하며 나치 지도부를 비꼬았다.[2] 빌리 뮌첸베르크는 ''국회의사당 방화 및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 책''에서 룀과 돌격대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소련은 룀 스캔들을 동성애가 국가에 대한 위험이자 파시스트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하여 소련의 동성애 범죄화의 동기 중 하나로 삼았다. 소련 작가 막심 고리키는 "동성애자들을 모두 근절하기만 하면 파시즘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숙청 이후, 나치 독일의 동성애 남성들은 체계적으로 박해받았다. 베르너 베스트에 따르면, 하인리히 힘러는 동성애자들이 국가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간신히 저지되었다고 믿었다. 힘러는 나치 안보 기구 내의 동성애 집단을 찾아내 근절하려 결심했다.
1950년대 서독의 냉전 시대에, 독일 연방 법무부는 룀 사건을 "동성애 전복의 위험"의 예시로 언급하며, 나치의 더욱 가혹한 제175조 개정을 유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5. 1. 룀의 숙청 (장검의 밤)
1934년 중반, 히틀러는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룀과 그의 측근들을 숙청했다.[3] 나치 선전은 히틀러가 룀의 동성애를 뒤늦게 알게 되었고, 이 살인이 돌격대의 쿠데타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3] 그러나 이는 동성애자 남성을 배신적인 음모자로 보는 고정관념을 이용한 주장이었다.[3] 히틀러는 이전부터 룀의 동성애를 알고 용인했지만, 독일 국민들은 나치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커푸스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이용함으로써 히틀러와 나치 언론은 불법 살인에 대한 지지를 얻었고, 억제되지 않은 국가 폭력의 추가적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주장한다.반(反)파시스트들은 나치가 숙청의 이유로 동성애를 강조한 것에 동조했고, 뮌헨베르크는 나치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일으킨 증인을 제거하기 위해 돌격대 지도부를 살해했다고 주장하였다.
5. 2. 동성애-나치 편견의 심화
에른스트 룀 스캔들은 나치당이 동성애자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켰고, 이는 좌파의 선전에서 반복되는 주제가 되었다.[3] 스캔들 직후 좌익 준군사조직은 "뜨거운 룀"(Geil Röhm|가일 룀de), "게이 하일"(Schwul Heil|슈불 하일de) 또는 "돌격대, 바지 내려!"(SA, Hose runter!|자, 호제 룬터!de)라고 외치며 돌격대(SA)를 조롱했고, 이는 거의 항상 싸움으로 이어졌다.[2] 반나치 농담은 룀의 동성애를 언급했는데, 예를 들어 이상적인 독일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농담이 있었다. "히틀러처럼 금발, 괴벨스처럼 키가 크고, 괴링처럼 날씬하고, 룀처럼 정숙하다." 1934년에 작성된 소파데 보고서는 많은 독일인들이 1933년 이전에 룀 스캔들에 대해 들었고 이를 사민당과 연관시켰음을 나타냈다.빌리 뮌첸베르크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국회의사당 방화 및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 책''(1933)은 1933년 초 오스트리아에서 살해된 룀의 조수 벨이 룀의 포주였으며 국회의사당 방화범 마리누스 판 데르 뤼베를 룀에게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하이네스가 이끄는 동성애 돌격대 무리가 국회의사당 방화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판 데르 뤼베는 애정에 대한 절박함 때문에 혼자 모든 책임을 지기로 동의했고, 벨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살해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없었고, 사실 하이네스는 당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커푸스는 국회의사당 음모가 반파시스트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던 이유는 "나치의 호전적인 민족주의 정치의 핵심이 타락한 동성애 범죄자들의 사악한 계획에 있다"는 그들의 기존 신념 때문이라고 말한다. 1933년, 룀과 다른 동성애 나치 주변의 지속적인 스캔들은 소련의 동성애 범죄화의 동기 중 하나였는데, 동성애는 국가에 대한 위험이자 파시스트의 변태라고 주장되었다. 소련 작가 막심 고리키는 "동성애자들을 모두 근절하기만 하면 파시즘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34년 중반, 히틀러는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룀과 그의 측근 정치 친구 대부분을 살해했다. 나치 선전은 히틀러가 최근 룀의 동성애를 발견했으며, 살해는 SA의 쿠데타로부터 정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신적인 음모가로서 동성애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러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의 설명은 독일 대중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바커푸스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이용함으로써 히틀러와 나치 언론은 불법 살인에 대한 지지를 얻었고, 통제되지 않는 국가 폭력의 추가적인 토대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반파시스트들은 숙청의 이유로 동성애를 강조하면서 나치를 따랐다; 뮌첸베르크는 나치가 SA 지도부를 살해한 것은 나치가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저지른 증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숙청 이후, 나치 독일의 동성애 남성들은 체계적으로 박해받았다. 베르너 베스트에 따르면, 힘러는 동성애자들이 국가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간신히 저지되었다고 믿었다. 힘러는 나치 안보 기구 내의 동성애 집단을 찾아내 근절하려 결심했다. 1945년까지, 나치 지도자들은 룀의 군대 개혁 아이디어를 칭찬하며, 결국 그의 동성애가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원인이라고 비난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괴벨스는 만약 룀이 "동성애자이자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6월 30일에 수백 명의 SA 지도자 대신 수백 명의 장군이 처형되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50년대 서독의 냉전 시대에, 독일 연방 법무부는 룀 사건을 "동성애 전복의 위험"의 예시로 언급하며, 나치의 더욱 가혹한 제175조 개정을 유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참조
[1]
뉴스
Queer Fascism and the End of Gay History
https://notchesblog.[...]
2021-12-28
[2]
웹사이트
Reichstagsprotokolle, 1930/32,3
https://www.reichsta[...]
2022-01-12
[3]
뉴스
Queer Fascism and the End of Gay History
https://notchesblog.[...]
2021-12-28
[4]
웹인용
Reichstagsprotokolle, 1930/32,3
https://www.reichsta[...]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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