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첼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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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처드 첼리모는 1990년대 초반 활동한 케냐의 육상 선수이다. 첼리모는 1990년 세계 크로스컨트리 선수권 대회 주니어 부문 은메달, 세계 주니어 육상 선수권 대회 10,000m 금메달을 획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91년 도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0,000m에서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수행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3년 10,000m 세계 신기록을 세웠지만, 5일 만에 경신되었으며, 슈투트가르트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0,000m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1996년 은퇴 후 2001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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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첼리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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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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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국적 | 케냐 |
종목 | 장거리 달리기 |
올림픽 메달 | |
은메달 | 1992년 바르셀로나 육상 남자 10,000m |
세계 선수권 메달 | |
은메달 | 1991년 도쿄 남자 10,000m |
동메달 | 1993년 슈투트가르트 남자 10,000m |
세계 주니어 선수권 메달 | |
금메달 | 1990년 플로브디프 남자 10,000m |
2. 육상 경력
1991년 세계 선수권 대회 도쿄 10,000m 경기에 케냐 대표팀으로 출전한 첼리모는[1] 모세스 타누이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아 타누이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첼리모는 타누이의 주요 경쟁자인 모로코의 할리드 스카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00m 결승전에서 첼리모는 다시 스카와 맞붙었다. 남은 세 바퀴 동안 두 선수는 선두를 달리며 금메달을 두고 경쟁했는데, 이때 한 바퀴 뒤처진 모로코 선수 하무 부타이브를 추월했다. 부타이브는 추월당한 후에도 선두 선수들과 함께 달리며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지만, 스카에게 이득이 있었는지, 첼리모가 불이익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스페인 관중들을 격분시켰고, 스웨덴의 심판 칼-구스타프 톨레마르는 부타이브를 저지하려 했다.
마지막 150m에서 스카는 첼리모를 제치고 우승했지만, 일시적으로 실격 처리되어 첼리모가 잠시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모로코 측의 항의로 스카는 복권되었다.
1993년 스톡홀름에서 첼리모는 10,000m 세계 기록(27분 07.91초)을 세웠으나, 5일 만에 요베스 온디에키에 의해 깨졌다. 첼리모의 주니어 기록은 2004년 9월 3일 골든리그 대회에서 우간다의 보니페이스 키프로프 토로이티치가 27분 04.00초를 기록할 때까지 11년 이상 유지되었다.
1993년 세계 선수권 대회 독일 슈투트가르트 10,000m에서 첼리모는 모세스 타누이와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에게 밀려 동메달에 그쳤다. 이 경기 또한 게브르셀라시에가 타누이의 발꿈치를 밟아 타누이가 신발을 잃어버리는 논란이 있었고, 게브르셀라시에는 결국 우승했다.
첼리모는 케냐의 칼렌진족 출신이다. 그의 친척 중에는 유명한 운동선수가 많은데, 모세스 키프타누이는 그의 사촌이며, 이스마일 키르이는 그의 동생이다.
2. 1. 초기 경력
1990년 프랑스 엑스레뱅에서 열린 세계 크로스컨트리 선수권 대회 주니어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1] 케냐 팀은 주니어 부문에서 10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에 첼리모 개인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1]같은 해 불가리아 플로브디브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 육상 선수권 대회 10,0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육상계가 첼리모의 재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 이때 15세였던 친동생 이스마일 키루이는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첼리모가 동생보다 12초 앞서 결승선을 통과했다.[1]
1991년에는 10,000m에서 27분 11초 18의 세계 주니어 신기록을 세웠다.[1]
2. 2. 전성기
1991년 도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0,000m 경기에서 첼리모는 모세스 타누이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맡아 타누이가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고 자신은 은메달을 획득했다.[1]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00m 결승전에서는 모로코의 할리드 스카와 금메달을 다투었다. 경기 도중 한 바퀴 뒤처진 모로코 선수 하무 부타이브가 스카를 돕는 듯한 행동을 하여 논란이 일었다. 스카가 첼리모를 제치고 1위로 들어왔으나, 부타이브의 행동으로 인해 실격 처리되었다가 번복되어 금메달을 가져갔고, 첼리모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3년 스톡홀름 DN 갈란에서 첼리모는 10,000m 세계 신기록(27분 07초 91)을 세웠으나, 5일 후 요베스 온디에키에 의해 경신되었다.
1993년 슈투트가르트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0,000m에서는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와 모세스 타누이에게 밀려 동메달에 머물렀다.
2. 3.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00m 논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00m 결승전에서 첼리모는 모로코의 할리드 스카와 금메달을 놓고 경쟁했다. 경기 막판 세 바퀴를 남겨둔 상황에서 두 선수는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이때 한 바퀴 뒤처진 또 다른 모로코 선수 하무 부타이브를 추월하게 되었다.[1] 부타이브는 추월당한 후에도 선두 그룹에 남아 스카를 돕는 듯한 행동을 했다. 이는 한 바퀴 뒤처진 주자가 다른 주자를 돕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1]부타이브는 첼리모의 앞을 두 번이나 추월하며 진로를 방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스페인 관중들은 비신사적인 행위라며 분노했다. 심판들 역시 부타이브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마지막 150m에서 스카는 첼리모를 제치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부타이브의 방해 행위 때문에 스카는 실격 처리되었고, 첼리모가 잠시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모로코 측의 항의로 스카의 실격은 번복되었고, 결국 스카가 금메달, 첼리모가 은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1]
이 사건은 비신사적인 행위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육상 팬들에게 큰 논란을 일으켰다. 시상식에서 스카에게는 야유가, 첼리모에게는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1]
3. 은퇴 이후
첼리모는 1996년에 육상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의 사촌인 킵타누이에 따르면,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에 낙담하여 은퇴했다고 한다.[2] 은퇴 후, 군에 복귀했으나 체중이 많이 늘고 과음하기 시작했다. 이는 헨리 로노의 몰락과 매우 유사하다.[2] 그러나 친구 타누이와 윌리엄 무트월의 격려로 훈련에 복귀, 경기 체중에서 5kg 이내로 체중을 줄였다.[2]
2001년, 첼리모는 29세의 나이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2]
4. 가족 및 부족
첼리모는 케냐 마라크웨트 지역 출신의 칼렌진족으로, "달리기 부족"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유명한 운동선수 집안 출신인데, 사촌인 모세스 키프타누이는 3000m 장애물 경주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세 차례 우승했고, 형인 이스마일 키루이는 5000m 경주에서 두 차례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첼리모는 모니카 첼리모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참조
[1]
뉴스
Richard Chelimo:Athlete who narrowly missed out on Olympic gold
https://www.theguard[...]
2001-08-29
[2]
서적
The Complete Book of the Olympics 2012 Edition
Aurum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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