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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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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인으로, 평민 칼푸르니아 씨족 출신이었다. 기원전 65년 큐룰 조영관, 기원전 62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59년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카이사르의 정책에 반대하며 대립했고, 이후 시리아 속주 총독을 지냈다. 로마 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며 아드리아 해에서 카이사르 군을 공격했으나, 과로로 인해 기원전 48년 사망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며, 카토의 딸 포르키아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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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로마자 표기Marcus Calpurnius Bibulus
출생기원전 102년경
사망기원전 48년
사망 장소이오니아해
배우자1. 이름 미상
자녀 (첫 번째 부인)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칼푸르니아
자녀 (포르키아)(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칼푸르니아
경력
직책로마 공화정의 집정관
임기 시작기원전 59년 1월
임기 종료기원전 59년 12월
함께 역임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전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이후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에소니누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기타 직책시리아 총독, 아드리아 해군 사령관
군사 경력
소속로마 공화정
참전카이사르-폼페이우스 내전
지휘아드리아 해군

2. 초기 생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평민 칼푸르니아 씨족 출신으로, 그의 코그노멘(cognomen)은 씨족 내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었다.[4] 그는 "진지하고 다소 우직한" 인물로 묘사되며,[5] 피소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4]

비불루스 시대의 로마 공화국


기원전 65년에 아이딜리스(안찰관)으로 선출되어 다양한 조영물을 건조하고 구경거리를 열었지만, 동료 아이딜리스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만 감사를 받았다고 수에토니우스는 전하고 있다. 기원전 62년에 프라에토르(법무관)으로 선출되었고, 다시 카이사르가 동료 프라에토르였지만,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사건 연루 문제나 보나 데아 축제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카이사르 저택에 침입하여 고발을 받는 등, 카이사르에게 주목이 쏠리는 형국이 되었다.

비불루스는 '보니'(boni, 선량한 자들) 세력에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 원로원의 역할이 인민의 입법 집회에 의해 찬탈당하고 있다고 믿는 정치인들이었다. '보니'는 인민의 입법 집회를 통해 국가를 개혁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반대했으며,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요 정책이었다.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 정치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59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보니'는 카이사르가 선조들의 방식을 파괴할 것을 우려하여 비불루스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동료가 되도록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고,[10][11][12]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선호하는 후보인 루키우스 루케에이우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13] 비불루스는 카토의 딸인 포르키아와 결혼했다.[9]

2. 1. 가문 배경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의 아들이었다.[50] 비불루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는 훗날 정치가가 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있었다. 그의 두 아들 마르쿠스와 가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왕위에 복위시킨 후 그곳에 남겨둔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50] 그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시알라 코르비누스 로마 원로원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칼푸르니아라는 딸이 있었을 수 있다.[51]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카토의 딸 포르키아였으며, 기원전 58년에서 53년 사이에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더 가졌는데, 그 중 적어도 한 명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던 아들이었다.[52] 다른 한 명은 딸일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2] 비불루스가 죽은 후 포르키아는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가 될 브루투스와 결혼했다.[54]

2. 2. 초기 경력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평민 칼푸르니아 씨족 출신으로, 그의 코그노멘(cognomen)은 씨족 내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었다.[4] 그는 "진지하고 다소 우직한" 인물로 묘사되며,[5] 피소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4]

기원전 65년, 비불루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큐룰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공공 건물 유지, 공공 축제 규제, 공공 질서 유지를 담당했다. 카이사르는 공직 수행 기간 내내 비불루스를 압도했다.[6] 기원전 62년,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와 함께 프라에토르로 선출되어 사법 관직을 수행하며 카이사르를 반대했다. 제2차 카틸리나 음모 직후, 비불루스는 펠리니에서 음모 지지자들을 진압했다.[7]

비불루스는 '보니'(boni, 선량한 자들) 세력에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 원로원의 역할이 인민의 입법 집회에 의해 찬탈당하고 있다고 믿는 정치인들이었다. '보니'는 인민의 입법 집회를 통해 국가를 개혁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반대했으며,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요 정책이었다. 카이사르는 제1차 삼두 정치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59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보니'는 카이사르가 선조들의 방식을 파괴할 것을 우려하여 비불루스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동료가 되도록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고,[10][11][12]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선호하는 후보인 루키우스 루케에이우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13] 비불루스는 카토의 딸인 포르키아와 결혼했다.[9]

3. 집정관 시절 (기원전 59년)

'''카이사르와의 대립'''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시작하면서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제대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구매하는 법안을 제시했다.[14] 카토가 이끄는 ''보니''는 이 법안을 막기 위해 원로원에서 집단 퇴장했고, 카이사르는 이 법안을 백인회에 가져갔다. 폼페이우스의 많은 퇴역 군인들이 로마로 왔고, 비불루스는 그들을 귀족적인 경멸로 대하며 인기를 잃었다.[15] 비불루스는 세 명의 평민 호민관의 지지를 얻어 법안 통과를 막으려 했다.[16]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공개적으로 카이사르의 법안을 지지했고, 비불루스에 대한 반대는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투표 직전, 비불루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투표 중단을 명령했지만,[17][18]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진행했다. 비불루스와 두 명의 호민관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계단에 올라 법안을 비난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그와 그의 일행에게 달려들어 그의 ''파스케스''를 부수고 그를 땅에 밀어 넣고 배설물을 부었다.[19][20] 일어선 비불루스는 목을 드러내고 군중들에게 그를 죽여 수치를 끝내라고 외쳤고, 그의 동료 원로들은 그가 떠나 근처 신전에 재결집하도록 설득했으며,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21]

다음 날, 비불루스는 원로원에 들어가 자신이 겪은 대우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원로원에 법을 무효화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그는 새로운 법을 지지하는 선서를 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결국 선서를 하도록 설득당했다. 기원전 59년 3월, 비불루스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23] 카이사르가 집정관직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때때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 해 나머지 기간 동안 제1차 삼두정치의 지지자들은 두 집정관을 "율리우스와 카이사르"라고 선언하며 비불루스를 조롱했다.[24] 비불루스는 공동 집정관을 "비티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면서 모욕으로 되갚았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비티니아의 왕과의 스캔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첫 번째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불루스는 임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집에 칩거하면서 징조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 해에 통과된 모든 법률을 무효화하려는 행위였다.[25]

집정관 임기 중반쯤, 카이사르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반면, 비불루스의 인기는 키케로에 따르면 주로 카이사르에 대한 독설적인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26] 7월에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기원전 58년의 집정관 선거를 10월 18일로 연기하도록 지시했다.[27][28] 그러나 8월에 루키우스 베티우스는 비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비불루스는 5월 13일에 폼페이우스에게 암살 시도의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대응했다.[29] 베티우스는 비불루스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에 대해 심문을 받기 하루 전에 살해당했다.[30] 렌툴루스는 연기된 선거가 마침내 치러졌을 때 낙선했다.[31]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불루스는 자신이 징조를 관찰하는 동안 공적인 업무가 수행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카이사르가 알파인 갈리아와 트란스알파인 갈리아의 총독으로 5년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카이사르의 임명을 지지하는 폼페이우스와 한 명의 집정관 지명자에 의해 다시 거절당했다.[32] 그 해 말에 비불루스는 자발적인 은퇴에서 나와 원로원 앞에 나타났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하는 전통적인 선서를 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평민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거부권을 사용하여 비불루스가 더 이상 발언하는 것을 막았다.[33]

'''농지법 반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구매하는 법안을 제시했다.[14] 카토가 이끄는 ''보니''는 이 법안이 논의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법안을 백인회에 가져갔다.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들이 로마로 왔고, 비불루스는 그들을 경멸하며 인기를 잃었다.[15] 비불루스는 세 명의 평민 호민관의 지지를 얻어 법안 통과를 막으려 했다.[16]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공개적으로 카이사르의 법안을 지지했고, 비불루스에 대한 반대는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투표 직전, 비불루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투표 중단을 명령했다.[17][18] 대사제였던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강행했다. 비불루스와 두 명의 호민관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계단에 올라 법안을 비난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그와 그의 일행에게 달려들어 그의 ''파스케스''를 부수고 그에게 배설물을 부었다.[19][20] 비불루스는 군중들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외쳤지만, 동료 원로들은 그를 설득하여 의회를 통과시켰다.[21]

다음 날, 비불루스는 원로원에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법률 무효화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그는 새로운 법을 지지하는 선서를 거부했지만 결국 설득당했다. 기원전 59년 3월, 비불루스는 원로원 회의에 불참했고,[23] 카이사르가 집정관직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비난했고, 이로 인해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삼두정치의 지지자들은 두 집정관을 "율리우스와 카이사르"라고 조롱했다.[24]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비티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며 맞섰고, 카틸리나의 첫 번째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불루스는 임기 동안 집에 칩거하며 징조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 해 통과된 법률을 무효화하려는 행위였다.[25]

집정관 임기 중반쯤, 카이사르의 인기가 시들해진 반면, 비불루스의 인기는 카이사르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26] 7월에 그는 기원전 58년의 집정관 선거를 10월 18일로 연기했다.[27][28] 그러나 8월에 루키우스 베티우스는 비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비불루스는 5월 13일에 폼페이우스에게 암살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선언했다.[29] 베티우스는 심문 전날 살해당했다.[30] 렌툴루스는 낙선했고,[31]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알파인 갈리아와 트란스알파인 갈리아의 총독으로 5년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폼페이우스와 한 명의 집정관 지명자에 의해 거절당했다.[32] 그 해 말, 비불루스는 원로원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했지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거부권을 사용하여 비불루스가 발언하는 것을 막았다.[33]

'''은둔과 저항'''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시작하면서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제대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한 토지 구매 법안을 제시했다.[14] 카토가 이끄는 ''보니''는 법안 논의를 막기 위해 원로원에서 집단 퇴장했고, 카이사르는 이 법안을 백인회에 가져갔다.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들이 로마로 오면서 비불루스는 그들을 경멸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 인기를 잃었다.[15] 비불루스는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세 명의 평민 호민관의 지지를 얻었으나,[16]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공개적인 법안 지지로 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투표 직전 비불루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투표 중단을 명령했지만,[17][18] 대사제였던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진행했다. 비불루스와 두 명의 호민관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계단에서 법안을 비난하려다 군중들에게 저지당하고 ''파스케스''(집정관의 상징)가 부서지고, 땅에 밀어 넣어지고 배설물을 뒤집어 쓰는 수모를 당했다.[19][20] 동료 원로들의 설득으로 비불루스는 떠났고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21]

다음 날, 비불루스는 원로원에 자신이 겪은 대우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법률 무효화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새 법률 지지 선서를 거부하다 결국 설득당했다. 기원전 59년 3월, 비불루스는 원로원 회의에 불참했고,[23]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다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삼두정치 지지자들은 두 집정관을 "율리우스와 카이사르"라고 부르며 비불루스를 조롱했다.[24]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비티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며, 비티니아 왕과의 스캔들을 암시하고 카틸리나의 첫 번째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그는 징조를 찾고 있다는 이유로 집에 칩거하며, 통과된 법률을 무효화하려 했다.[25]

집정관 임기 중반쯤, 카이사르의 인기가 시들해진 반면, 비불루스의 인기는 카이사르에 대한 독설적인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26] 7월에 그는 기원전 58년의 집정관 선거를 10월 18일로 연기했다.[27][28] 그러나 8월, 루키우스 베티우스는 비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비불루스는 5월 13일에 폼페이우스에게 암살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선언했다.[29] 베티우스는 심문 전날 살해당했고,[30] 렌툴루스는 연기된 선거에서 낙선했다.[31]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알파인 갈리아와 트란스알파인 갈리아 총독으로 5년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폼페이우스와 집정관 지명자에 의해 거절당했다.[32] 그 해 말, 비불루스는 은퇴에서 나와 원로원 앞에서 집정관으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거부권으로 발언이 막혔다.[33]

3. 1. 카이사르와의 대립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시작하면서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제대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구매하는 법안을 제시했다.[14] 카토가 이끄는 ''보니''는 이 법안을 막기 위해 원로원에서 집단 퇴장했고, 카이사르는 이 법안을 백인회에 가져갔다. 폼페이우스의 많은 퇴역 군인들이 로마로 왔고, 비불루스는 그들을 귀족적인 경멸로 대하며 인기를 잃었다.[15] 비불루스는 세 명의 평민 호민관의 지지를 얻어 법안 통과를 막으려 했다.[16]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공개적으로 카이사르의 법안을 지지했고, 비불루스에 대한 반대는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투표 직전, 비불루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투표 중단을 명령했지만,[17][18]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진행했다. 비불루스와 두 명의 호민관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계단에 올라 법안을 비난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그와 그의 일행에게 달려들어 그의 ''파스케스''를 부수고 그를 땅에 밀어 넣고 배설물을 부었다.[19][20] 일어선 비불루스는 목을 드러내고 군중들에게 그를 죽여 수치를 끝내라고 외쳤고, 그의 동료 원로들은 그가 떠나 근처 신전에 재결집하도록 설득했으며,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21]

다음 날, 비불루스는 원로원에 들어가 자신이 겪은 대우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원로원에 법을 무효화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그는 새로운 법을 지지하는 선서를 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결국 선서를 하도록 설득당했다. 기원전 59년 3월, 비불루스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23] 카이사르가 집정관직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때때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 해 나머지 기간 동안 제1차 삼두정치의 지지자들은 두 집정관을 "율리우스와 카이사르"라고 선언하며 비불루스를 조롱했다.[24] 비불루스는 공동 집정관을 "비티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면서 모욕으로 되갚았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비티니아의 왕과의 스캔들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카이사르가 카틸리나의 첫 번째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불루스는 임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집에 칩거하면서 징조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 해에 통과된 모든 법률을 무효화하려는 행위였다.[25]

집정관 임기 중반쯤, 카이사르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반면, 비불루스의 인기는 키케로에 따르면 주로 카이사르에 대한 독설적인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26] 7월에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기원전 58년의 집정관 선거를 10월 18일로 연기하도록 지시했다.[27][28] 그러나 8월에 루키우스 베티우스는 비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비불루스는 5월 13일에 폼페이우스에게 암살 시도의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대응했다.[29] 베티우스는 비불루스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에 대해 심문을 받기 하루 전에 살해당했다.[30] 렌툴루스는 연기된 선거가 마침내 치러졌을 때 낙선했다.[31]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불루스는 자신이 징조를 관찰하는 동안 공적인 업무가 수행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카이사르가 알파인 갈리아와 트란스알파인 갈리아의 총독으로 5년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카이사르의 임명을 지지하는 폼페이우스와 한 명의 집정관 지명자에 의해 다시 거절당했다.[32] 그 해 말에 비불루스는 자발적인 은퇴에서 나와 원로원 앞에 나타났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하는 전통적인 선서를 했다. 그는 집정관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평민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거부권을 사용하여 비불루스가 더 이상 발언하는 것을 막았다.[33]

기원전 52년호민관 클로디우스가 살해된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단독으로 집정관에 취임할 것을 요구했다.

3. 2. 농지법 반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구매하는 법안을 제시했다.[14] 카토가 이끄는 ''보니''는 이 법안이 논의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법안을 백인회에 가져갔다.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들이 로마로 왔고, 비불루스는 그들을 경멸하며 인기를 잃었다.[15] 비불루스는 세 명의 평민 호민관의 지지를 얻어 법안 통과를 막으려 했다.[16] 그러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공개적으로 카이사르의 법안을 지지했고, 비불루스에 대한 반대는 호민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투표 직전, 비불루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투표 중단을 명령했다.[17][18] 대사제였던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강행했다. 비불루스와 두 명의 호민관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계단에 올라 법안을 비난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그와 그의 일행에게 달려들어 그의 ''파스케스''를 부수고 그에게 배설물을 부었다.[19][20] 비불루스는 군중들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외쳤지만, 동료 원로들은 그를 설득하여 의회를 통과시켰다.[21]

다음 날, 비불루스는 원로원에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법률 무효화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그는 새로운 법을 지지하는 선서를 거부했지만 결국 설득당했다. 기원전 59년 3월, 비불루스는 원로원 회의에 불참했고,[23] 카이사르가 집정관직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비난했고, 이로 인해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삼두정치의 지지자들은 두 집정관을 "율리우스와 카이사르"라고 조롱했다.[24]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비티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며 맞섰고, 카틸리나의 첫 번째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불루스는 임기 동안 집에 칩거하며 징조를 찾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 해 통과된 법률을 무효화하려는 행위였다.[25]

집정관 임기 중반쯤, 카이사르의 인기가 시들해진 반면, 비불루스의 인기는 카이사르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26] 7월에 그는 기원전 58년의 집정관 선거를 10월 18일로 연기했다.[27][28] 그러나 8월에 루키우스 베티우스는 비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비불루스는 5월 13일에 폼페이우스에게 암살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선언했다.[29] 베티우스는 심문 전날 살해당했다.[30] 렌툴루스는 낙선했고,[31]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알파인 갈리아와 트란스알파인 갈리아의 총독으로 5년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폼페이우스와 한 명의 집정관 지명자에 의해 거절당했다.[32] 그 해 말, 비불루스는 원로원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했지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거부권을 사용하여 비불루스가 발언하는 것을 막았다.[33]

3. 3. 은둔과 저항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시작하면서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을 제대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한 토지 구매 법안을 제시했다.[14] 카토가 이끄는 ''보니''는 법안 논의를 막기 위해 원로원에서 집단 퇴장했고, 카이사르는 이 법안을 백인회에 가져갔다.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들이 로마로 오면서 비불루스는 그들을 경멸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 인기를 잃었다.[15] 비불루스는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세 명의 평민 호민관의 지지를 얻었으나,[16]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공개적인 법안 지지로 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투표 직전 비불루스는 종교적인 이유로 투표 중단을 명령했지만,[17][18] 대사제였던 카이사르는 이를 무시하고 투표를 진행했다. 비불루스와 두 명의 호민관은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 계단에서 법안을 비난하려다 군중들에게 저지당하고 ''파스케스''(집정관의 상징)가 부서지고, 땅에 밀어 넣어지고 배설물을 뒤집어 쓰는 수모를 당했다.[19][20] 동료 원로들의 설득으로 비불루스는 떠났고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다.[21]

다음 날, 비불루스는 원로원에 자신이 겪은 대우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법률 무효화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새 법률 지지 선서를 거부하다 결국 설득당했다. 기원전 59년 3월, 비불루스는 원로원 회의에 불참했고,[23]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다 지지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제1차 삼두정치 지지자들은 두 집정관을 "율리우스와 카이사르"라고 부르며 비불루스를 조롱했다.[24]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비티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르며, 비티니아 왕과의 스캔들을 암시하고 카틸리나의 첫 번째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그는 징조를 찾고 있다는 이유로 집에 칩거하며, 통과된 법률을 무효화하려 했다.[25]

집정관 임기 중반쯤, 카이사르의 인기가 시들해진 반면, 비불루스의 인기는 카이사르에 대한 독설적인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26] 7월에 그는 기원전 58년의 집정관 선거를 10월 18일로 연기했다.[27][28] 그러나 8월, 루키우스 베티우스는 비불루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비불루스는 5월 13일에 폼페이우스에게 암살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선언했다.[29] 베티우스는 심문 전날 살해당했고,[30] 렌툴루스는 연기된 선거에서 낙선했다.[31]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알파인 갈리아와 트란스알파인 갈리아 총독으로 5년 임명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폼페이우스와 집정관 지명자에 의해 거절당했다.[32] 그 해 말, 비불루스는 은퇴에서 나와 원로원 앞에서 집정관으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거부권으로 발언이 막혔다.[33]

4. 집정관 이후의 활동

비불루스는 기원전 50년대 내내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를 계속 공격했다.[34] 기원전 56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사이의 싸움에 대한 책임을 폼페이우스에게 돌렸고,[34] 폼페이우스는 비불루스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자들과 한통속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35] 또한 폼페이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를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직접 이집트로 가는 것을 허가하는 것에 반대 투표를 했다.[36]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통과된 법률에 따라, 임기를 마친 후 5년 이내에 프라에토르 또는 집정관으로 봉사한 사람은 총독직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39] 그 결과, 비불루스는 기원전 51년에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를 자신이 차지하려하여 시리아 군인들을 불쾌하게 했다.[40] 2년 전 카르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패배한 후, 롱기누스는 생존자들을 성공적으로 후퇴시키고 파르티아 제국을 안티오크에서 격파하여 시리아 속주를 구했다.[40] 비불루스는 이미 안정되어가는 상황에 도착하여 파르티아인 추격 및 소탕 작전과 시리아 방어 재편성에 대한 보고서를 원로원에 보냈고, 원로원은 그에게 20일간의 감사제를 부여했다.[41] 기원전 50년, 파르티아의 위협이 여전하자 비불루스는 두 아들을 이집트로 보내 로마 군인들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보낸 살인범들을 비불루스는 원로원이 처벌해야 한다며 돌려보냈다.[42]

4. 1. 원로원 의원 및 총독

비불루스는 기원전 50년대 내내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를 계속 공격했다.[34] 기원전 56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 사이의 싸움에 대한 책임을 폼페이우스에게 돌렸고,[34] 폼페이우스는 비불루스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자들과 한통속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35] 또한 폼페이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를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직접 이집트로 가는 것을 허가하는 것에 반대 투표를 했다.[36]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통과된 법률에 따라, 임기를 마친 후 5년 이내에 프라에토르 또는 집정관으로 봉사한 사람은 총독직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39] 그 결과, 비불루스는 기원전 51년에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를 자신이 차지하려하여 시리아 군인들을 불쾌하게 했다.[40] 2년 전 카르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패배한 후, 롱기누스는 생존자들을 성공적으로 후퇴시키고 파르티아 제국을 안티오크에서 격파하여 시리아 속주를 구했다.[40] 비불루스는 이미 안정되어가는 상황에 도착하여 파르티아인 추격 및 소탕 작전과 시리아 방어 재편성에 대한 보고서를 원로원에 보냈고, 원로원은 그에게 20일간의 감사제를 부여했다.[41] 기원전 50년, 파르티아의 위협이 여전하자 비불루스는 두 아들을 이집트로 보내 로마 군인들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보낸 살인범들을 비불루스는 원로원이 처벌해야 한다며 돌려보냈다.[42]

4. 2. 로마 내전과 죽음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기원전 49년에 서방으로 돌아온 비불루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내전이 발발한 것을 알게 되었다.[43] 폼페이우스 편에 서서 그는 아드리아 해에서 폼페이우스 함대를 지휘하여,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가 이탈리아의 브룬디시움에서 에피루스로 건너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했다.[43] 필요한 선박의 절반만 갖춘 카이사르는 일곱 군단을 아드리아 해를 건너게 하고, 배가 돌아와 브룬디시에 도착하면 나머지 군단을 수송하기로 결정했다.[44] 카이사르는 자신이 최고 제사장으로서의 책무 때문에 달력이 천문학적 계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쉽게 건널 수 있다는 이점을 가졌다.[44]

비불루스는 11월 6일 저녁에 카이사르와 그의 함대가 아드리아 해를 성공적으로 건너 팔라스에 상륙했을 때 기습을 받았다.[45] 그는 카이사르의 횡단을 듣고 부하들에게 배로 돌아가 카이사르의 증원군을 수송하는 배를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너무 늦어서 카이사르의 수송선 30척을 포획하여 불태우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46] 그 후 그는 더 이상의 배가 카이사르를 증원하거나 보급하기 위해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동했다. 격분한 그는 사설 개인들이 임대하여 자신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한 수송선 한 척의 승무원 전원을 죽이라고 명령했다.[47]

비불루스는 그 후 해안을 따라 모든 항구를 봉쇄하여 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건너오는 것을 막고 카이사르를 에피루스에 고립시키려 했다.[48] 카이사르의 사절을 오리쿰에서 속여 카이사르가 일시적인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하여 재보급을 시도했으나, 비불루스가 폼페이우스와의 평화로운 해결을 논의하기 위해 카이사르가 보내고 싶어하는 사절의 안전을 보장하기를 거부하자, 카이사르는 그것이 계략임을 깨닫고 협상에서 물러났다.[48] 봉쇄를 계속하기로 결심한 비불루스는 너무 무리하게 행동했다; 그는 기원전 48년 초에 병에 걸려 겨울이 끝나기 전에 코르키라 근처에서 사망했다.[49]

기원전 49년부터의 로마 내전에서는 원로원파에 속해, 아드리아 해에 전개되어 있던 원로원파 해군의 지휘를 담당했다. 비불루스의 함대는 카이사르 군의 선박 다수를 나포·격침시켜 카이사르를 괴롭혔다. 그러나, 오랜 해상 생활로 인해 한기와 과로로 병을 얻었고, 임무를 사임하지 않고 직무를 수행한 결과, 기원전 48년에 병사했다. 비불루스의 죽음은 파르살루스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일이었다.

두 번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부하로 활약했다. 나머지 2명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왕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침공했을 때 동행했지만, 이후 가비니우스가 이집트에서 철수한 후 이집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5. 가족 관계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는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의 아들이었다. 비불루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는 훗날 정치가가 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있었다. 그의 두 아들 마르쿠스와 가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왕위에 복위시킨 후 그곳에 남겨둔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50] 그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시알라 코르비누스 로마 원로원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칼푸르니아라는 딸이 있었을 수 있다.[51]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카토의 딸 포르키아였으며, 기원전 58년에서 53년 사이에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더 가졌는데, 그 중 적어도 한 명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던 아들이었다.[52] 다른 한 명은 딸일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2] 비불루스가 죽은 후 포르키아는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가 될 브루투스와 결혼했다.[54]

두 번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 루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부하로 활약했다. 나머지 2명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왕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침공했을 때 동행했지만, 이후 가비니우스가 이집트에서 철수한 후 이집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참조

[1] 서적 Harvard Studies in Classical Philology Harvard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M. Bibulus and Four Sons 1987
[3] 서적 The Last Generation of the Roman Republic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서적 Letters to Atticus: 68-59 B.C. 1-45 (Books 1-2) University Press
[5] 문서 Holland, pg. 224
[6] 문서 Broughton, pg. 158
[7] 문서 Broughton, pg. 173
[8] 문서 Holland, pg. 226
[9] 문서 Syme, pg. 24
[10] 문서 Holland, pg. 225
[11] 문서 Syme, pg. 34
[12] 문서 Holmes I, pg. 308
[13] 문서 Holmes I, pg. 309
[14] 문서 Holland, pg. 226
[15] 문서 Holland, pg. 226
[16] 문서 Broughton, pg. 187
[17] 문서 Bringmann, pg. 232
[18] 문서 Holmes I, pg. 313
[19] 문서 Holland, pg. 227–8
[20] 문서 Plutarch, ''Life of Pompey'', 48.1; ''Life of Cato'', 32.2.
[21] 문서 Holland, pg. 227–8
[22] 문서 Holmes I, pg. 314
[23] 문서 Bringmann, pg. 234
[24] 문서 Suetonius, ''Life of Julius Caesar'', 20:2
[25] 문서 Holmes I, pg. 315
[26] 문서 Holmes I, pgs. 320–321
[27] 문서 Bringmann, pg. 235
[28] 문서 Holmes I, pg. 322
[29] 문서 Holmes I, pg. 323
[30] 문서 Appian, ''Civil Wars'', Book 2, 12:44–45
[31] 문서 Holmes I, pgs. 323–324
[32] 문서 Holmes I, pg. 325
[33] 문서 Holmes I, pg. 329
[34] 문서 Holland, pg. 256
[35] 문서 Holmes II, pg. 69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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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Harvard Studies in Classical Philology Harvard University Press
[53] 서적 Adfinitas: Die Verwandtschaften der senatorischen Führungsschicht der römischen Republik von 218-31 v.Chr https://az.1lib.sk/b[...] Verlag Karl Stutz
[54] 기타 Bru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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