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노부야스 (1864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다이라 노부야스(1864년)는 우에야마 번의 7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타카의 아들로, 보신 전쟁 이후 형의 양자로서 가독을 상속받았다. 판적봉환으로 번 지사가 되었으나 폐번치현으로 면직된 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양자와의 갈등 끝에 작위를 반납했다. 그는 시바다이진구의 사사를 지냈으며, 사망 이후 그의 가족들은 어려운 삶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신직 (신사) - 마쓰다이라 나가요시
마쓰다이라 나가요시는 일본의 군인, 야스쿠니 신사 궁사, 후쿠이 시립 향토 역사 박물관 관장으로, 해군 소좌로 진급하여 종전 처리를 담당했으며, 야스쿠니 신사 궁사로 A급 전범 합사를 실행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 신직 (신사) - 다카쓰카사 노부스케
일본의 화족이자 조류학자인 다카쓰카사 노부스케는 공작 다카쓰카사 히로미치의 장남으로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일본조류학회 2대 회장을 역임하고 멸종된 벚꽃 품종을 일본으로 들여와 명명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 가미노야마번주 - 마쓰다이라 노부유키 (1790년)
마쓰다이라 노부유키(1790년)는 가미야마번의 7대 번주이며, 번교 덴포칸을 설립하고 번 통치에 힘썼으며, 1831년 장남에게 번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 가미노야마번주 - 마쓰다이라 노부쓰라
마쓰다이라 노부쓰라는 에도시대 가미야마 번의 4대 번주로, 가독 상속 후 오사카 가반 등의 직책을 맡았으나 문화 예술에 몰두하여 번정을 소홀히 하고, 가혹한 검지로 농민 반발을 사 막부의 명령으로 강제 은거하게 되었다. - 후지이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유키 (1790년)
마쓰다이라 노부유키(1790년)는 가미야마번의 7대 번주이며, 번교 덴포칸을 설립하고 번 통치에 힘썼으며, 1831년 장남에게 번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 후지이 마쓰다이라씨 - 다카사키번
에도 시대 고즈케국 다카사키 지역을 다스린 다카사키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이 나오마사에게 성을 건설하게 하면서 시작되어 여러 가문이 통치했으며, 막부 말기 덴구토 당의 난 진압, 보신 전쟁 때 신정부군에 합류 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1864년) | |
---|---|
기본 정보 | |
![]() | |
시대 | 에도 시대 말기 - 다이쇼 시대 |
출생 | 1864년 5월 29일 |
사망 | 1918년 10월 23일 |
어릴 적 이름 | 도요쿠마 |
이름 | 노부야스 |
계명 | 정운원전독예신안대거사 |
묘소 | 도쿄도 미나토구 다카나와의 쇼코지 |
관위 | 종5위 |
주군 | 메이지 천황 |
번 | 데와가미노야마번 번주 |
씨족 | 후지이 마쓰다이라가 |
부모 | 아버지: 마쓰다이라 노부토모, 어머니: 요시다 씨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쓰네 |
형제자매 | 야마우치 노리코, 노부쓰네, 노부야스, 유, 에미코 등 |
배우자 | 전처: 스즈 후처: 마쓰다이라 씨 첩: 다마 |
자녀 | 노부히데, 노부모토, 야에코, 도요코, 요시코 등 양자: 노부야스 |
가계 계승 정보 | |
후지이 마쓰다이라가 당주 | 전임자: 마쓰다이라 노부쓰네 후임자: 마쓰다이라 노부모토 대수: 16대 임기: 1868년 ~ 1918년 |
가미노야마 번 번주 (후지이 마쓰다이라가) | 전임자: 마쓰다이라 노부쓰네 후임자: 폐번치현 대수: 10대 임기: 1868년 ~ 1871년 |
2. 경력
겐지 원년(1864년) 4월 24일, 우에야마 번 7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타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게이오 4년(1868년) 12월, 보신 전쟁에서 형 노부쓰네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가하여 신정부와 대립했기 때문에, 전쟁 후 강제 은거 처분을 받았다. 노부야스는 형의 양자로서 가독을 상속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판적봉환에 의해 우에야마 번 지사가 되었고, 8월 24일에 종5위에 서임되었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사후, 그의 첩이었던 타마와 딸 야에코, 토요코, 요시코는 도쿄시혼고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타마는 장남 노부히데의 작위 부활을 기대했지만, 노부히데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방탕한 성격으로 오사카로 떠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이후 타마는 천식으로 사망했다. 야에코는 결혼했지만, 다른 자매들은 전 화족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야에코는 신바시·아카사카 주변의 게이샤로, 토요코는 여급 겸 댄서로, 요시코는 게이샤 오키야(기생집)에 팔려갔다. 이후 요시코는 1930년경 교토의 직물상과 결혼했으나, 성격 불일치 등으로 이혼했다.[3] 1936년 4월경부터 토요코가 살던 시바구하마마쓰초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게 되었지만, 다음 달 병에 걸려 병원을 다녔다.[3]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에 의해 지번사 직을 면직당하고 도쿄로 이주했다. 메이지 5년(1872년) 7월 8일, 8세 때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했다.[1] 메이지 17년(1884년) 7월 8일, 자작에 서작되었다. 메이지 32년(1899년) 8월, 38세 때 시바다이진구의 사사에 취임했다.
메이지 41년(1908년) 10월 19일, 정4위 및 작위 반납을 명받아, 후지이 마쓰다이라 가문 적류의 우에야마 번주 가문은 화족의 자리에서 전락했다.[2] 다이쇼 7년(1918년) 10월 23일, 형의 뒤를 따라 사망하여 55세가 되었다.
3. 노부야스 사후의 마쓰다이라 가문
1936년 9월 9일 오전 10시 30분경, 하마마쓰초발 요쓰야행 도쿄 시전차 33계통이 오나리몬 정류장 근처 아타고 경찰서(시바구 신바시 6가) 커브 길을 돌던 중, 통원 치료를 위해 승차했던 요시코가 떨어져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졌다.[3] 요시코는 자혜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언니 토요코가 간병했다. 신문에서 사고 기사를 읽은 야에코와 10년 정도 소식이 끊겼던 노부히데, 노부모토가 병실을 찾아와 가족 전원이 재회했다. 또한 마쓰다이라 가문을 3대째 섬긴 가신이었던 츠츠미 카즈요시(당시 85세)가 지팡이를 짚고 조후에서 달려왔다. 요시코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화족 대계』에서는 마쓰다이라 노부히데, 마쓰다이라 야에코, 마쓰다이라 토요코, 마쓰다이라 요시코의 이름은 삭제되어 있으며, 차남인 마쓰다이라 노부모토가 가독을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연보
5. 계보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타카 | 1817년 - 1872년 |
어머니 | 요시다 씨 | |
양아버지 | 마쓰다이라 노부쓰네 | 1844년 - 1918년 |
첫 번째 부인 | 스즈 | 츠다 씨 |
두 번째 부인 | 마쓰다이라 씨 | |
첩 | 타마 | |
생모 불명의 자녀 | ||
장남 | 마쓰다이라 노부히데 | |
차남 | 마쓰다이라 노부모토 | |
장녀 | 야에코 | |
차녀 | 토요코 | 1906년 - ? |
삼녀 | 요시코 | 1910년 - 1936년 |
양자 | ||
장남 |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 마쓰다이라 노부쓰네의 장남 |
참조
[1]
서적
慶應義塾入社帳 第1巻
https://dl.ndl.go.jp[...]
국립국회도서관디지털컬렉션
[2]
간행물
官報 1908年10月20日 四五二頁
https://dl.ndl.go.jp[...]
1908-10-20
[3]
뉴스
落魄した名門の果て
読売新聞
1936-09-10
[4]
웹사이트
Shin Sekai Asahi Shinbun 1937.01.24 — Hoji Shinbun Digital Collection
https://hojishinbun.[...]
2022-11-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