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다다타카 (16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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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다다타카(1682년)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로, 아마가사키 번주였다. 마쓰다이라 다다쓰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형의 요절과 조부의 사망으로 15세에 번주가 되었다. 도토미 가케가와 번과 셋쓰 아마가사키 번을 거치며, 에도에서 장군을 수행하고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1751년 은거 후 1756년 아마가사키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차남 마쓰다이라 다다나가 가문을 이었다.
마쓰다이라 다다타카는 겐로쿠 13년(1700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영지인 반산에 들어갔다. 그 전까지는 대부분 에도에서 지내며 쇼군의 외출에 동행하거나, 여러 토목 공사, 니시노마루 오테 어문반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막부의 명에 따라 조선 통신사 접대역, 닛코 도쇼구 경호역 등도 맡았다.
2. 생애
호에이 3년(1706년) 가케가와 번으로, 호에이 8년(1711년)에는 아마가사키 번으로 영지가 변경되었다. 쇼토쿠 원년(1711년) 아마가사키에 신쇼인을 건립했는데, 이는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보리사가 되었고, 절 이름은 조부 다다토모의 법명에서 따왔다.
교호 2년(1717년) 에도 대화재(고이시카와 바바 화재) 때는 방화 임무를 맡아 가신을 지휘했고, 이후 노고를 치하받았다. 간엔 3년(1750년)에는 종4위하로 승진했는데, 이는 가문 내 유일한 사례이다. 간엔 4년/호레키 원년(1751년) 은거 후 이와미노카미로 옮겨졌다.
가독은 차남 다다나가 이었다. 호레키 6년(1756년) 아마가사키에서 74세("공식 나이" 75세)로 사망, 신쇼인에 묻혔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마쓰다이라 다다토모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쓰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간세이 정수 제씨보』에는 덴와 2년(1682년)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으나, 가신 집안에 전해지는 자료에는 덴와 3년(1683년) 1월 9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막부에는 실제 나이보다 많게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 (관년 참조)
겐로쿠 7년(1694년) 12월, 아버지 다다쓰구는 병 때문에 폐적되었다. 다다타카의 형 다다토시가 반산 번의 세자가 되었고, 겐로쿠 8년(1695년) 2월에는 조부를 이을 '적손'으로 막부에 인정받았으나, 같은 해 12월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이 때문에 다다타카가 세자가 되었지만, 겐로쿠 9년(1696년) 5월 26일에 오사카 가반을 맡고 있던 조부가 임지 오사카에서 사망했고, 같은 해 7월 25일에 다다타카가 15세(공식 나이)로 번주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쇼군에게 어전을 받거나 세자 임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7월 28일에 쓰나요시에게 어전하고 가독 상속을 사죄했다. 이때 쓰나요시에게 아버지의 유품인 엣추 노리시게의 칼, 어전에 이치조 후유요시의 『고킨와카슈』, 게이쇼인에게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와칸 료에이슈』를 각각 바쳤다. 12월 22일, 종5위하 도오토미노카미에 임명되었다.
2. 2. 번주 시절
마쓰다이라 다다쓰구(마쓰다이라 다다토모의 아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겐로쿠 7년(1694년) 12월, 아버지 다다쓰구는 병을 이유로 폐적되었다. 다다타카의 형 다다토시가 반산 번의 세자가 되었고, 겐로쿠 8년(1695년) 2월에는 조부를 이을 '적손'으로 막부에 인정받았지만, 같은 해 12월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이 때문에 다다타카에게 세자의 자리가 돌아왔지만, 겐로쿠 9년(1696년) 5월 26일에 오사카 가반을 맡고 있던 조부가 임지 오사카에서 사망했고, 7월 25일에 다다타카가 15세(공식 나이)로 번주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장군에게 어전을 받거나 세자로서의 임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7월 28일에 쓰나요시에게 어전하고 가독 상속을 사죄했다. 이때 쓰나요시에게 아버지의 유품인 엣추 노리시게의 칼, 어전에 이치조 후유요시 필의 『고킨와카슈』, 게이쇼인에게 아시카가 요시마사 필의 『와칸 로에이슈』를 각각 헌상했다. 12월 22일, 종5위하 도토미노카미에 임명되었다.
다이묘가 된 마쓰다이라 다다타카는 대부분을 에도에서 보냈으며, 첫 영지(반산) 입성은 겐로쿠 13년(1700년)의 일이었다. 에도 체류 중에는 장군의 외출에 수행하거나 각종 토목 공사, 니시노마루 오테 어문반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막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 통신사의 접대역, 닛코 도쇼구의 경호역 등을 맡았다.
호에이 3년(1706년) 1월 28일, 도오토미 가케가와 번으로 이봉되었다. 호에이 8년(1711년) 2월 11일에 셋쓰 아마가사키 번으로 이봉되었다. 아마가사키 번주가 된 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의 보리사가 될 신쇼인 (아마가사키시 오모노초)은 쇼토쿠 원년(1711년)에 다다타카가 아마가사키에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절의 이름은 오사카에서 사망한 조부 다다토모의 법명인 원호를 따서 지었다.
교호 2년(1717년) 1월 22일의 대화재 (고이시카와 바바 화재) 때에는 방화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직접 가신을 지휘했고, 후에 가신이 노중에 불려가 노고를 치하받았다. 간엔 3년(1750년) 12월 18일, 종4위하로 승진했다.(사쿠라이 마쓰다이라 가문에서 유일한 사례) 간엔 4년/호레키 원년(1751년) 3월 20일에 은거했다. 같은 날 21일에 이와미노카미로 옮겨졌다.
2. 3. 은거와 사망
호레키 원년(1751년) 3월 20일에 은거하여, 같은 달 21일에 이와미노카미로 옮겨졌다. 가독은 차남 다다나가 이었다. 호레키 6년(1756년) 2월 5일, 아마가사키에서 74세로 사망했으며("공식 나이"로 75세), 신쇼인(아마가사키시 오모노초)에 묻혔다.
3. 계보
후계자가 된 마쓰다이라 다다나는 『간세이 중수 제보』에서는 정실 도다 씨 소생(「어머니는 차녀와 같다」)으로 되어 있지만, 『도설 아마가사키의 역사』에서는 측실 소생으로 되어 있다 . 이와키 다쿠지는, 다카요시의 「정실의 자식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여자 3명입니다」라고 하고, 「측실의 자식이 당주가 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막부에 제출하는 공식 기록 등에서는 측실이 아닌 정실의 자식으로 기록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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