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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망소이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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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망이·망소이의 난은 1176년 고려 명종 때 명학소에서 망이와 망소이가 일으킨 민중 봉기이다. 특수 행정 구역의 차별과 사회 경제적 불만에 불만을 품은 망이와 망소이는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정의 회유에 잠시 항복했으나, 과도한 세금 징수와 주동자 체포 시도로 인해 재봉기했다. 이후 관군의 진압으로 1177년 진압되었으며, 이 난을 계기로 고려는 특수 행정 구역을 폐지하기 시작했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신분 차별과 경제적 수탈에 맞선 민중 봉기로 평가받으며,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에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2. 배경

고려 시대에는 무신정권의 수탈과 신분제의 모순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다. 특히, 무신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토지를 빼앗고 강제로 세금을 걷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또한, 천민들은 가혹한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를 일으킨 공주 명학소는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특수 행정 구역인 '소' 중 하나였다. 소의 주민들은 일반 양인보다 더 많은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으며,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3. 전개 과정

1176년(고려 명종 6년) 1월, 공주 명학소에 살던 망이와 망소이는 굶주린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칭하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 고려 조정은 반군의 기세가 커지자 1176년 6월 13일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보내는 등 회유하였다.[5]

하지만 조정은 군사를 보내 주동자들을 잡아 가두려 하고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비열한 처사를 보이자 1177년 2월 10일 다시 난을 일으켰다.[7] 亡伊|망이중국어와 亡所伊|망소이중국어예산현 덕산에 소재한 가야사와 직산에 있는 홍경원을 불태우고 홍경원에 기거하던 승려 10여 명을 죽였으며, 홍경원의 주지를 협박하여 주장을 담은 글을 가지고 개경으로 가게 하였다. 1177년 3월 11일 조정에 도착한 그 글에는 "이미 우리 고을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두어 위로하다가 다시 군사를 보내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항복하여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에 쳐들어가고야 말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8]

이후 농번기로 인해 반군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이탈하고, 식량과 무기가 부족해지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결국 망이와 망소이를 비롯한 반군들은 1177년 6월에 투항 의사를 밝혔고, 반란은 진압되었다.[11] 망이와 망소이는 1177년 7월 20일 청주옥에 수감되었다.[12]

3. 1. 봉기 시작과 공주 공격

1176년 (고려 명종 6년) 1월, 공주 명학소에 살던 망이와 망소이는 굶주린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1] 이들은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칭하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

3. 2. 조정의 회유와 배신

고려 조정은 반군의 기세가 커지자 1176년 6월 13일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하고 수령을 보내는 등 회유하였다.[5] 결국 반군은 1177년 1월 8일 관군의 진압에 항복하였다. 창고의 곡식을 하사하여 민심을 달래고 감찰어사 김덕강에게 명하여 그들의 고향으로 압송하였다.[6]

하지만 조정은 군사를 보내 주동자들을 잡아 가두려 하고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비열한 처사를 보이자 1177년 2월 10일 다시 난을 일으켰다.[7]

3. 3. 재봉기와 저항

亡伊|망이중국어와 亡所伊|망소이중국어는 1177년 2월 10일 다시 난을 일으켰다.[7] 지배 세력만을 대변하던 절인 예산현 덕산에 소재한 가야사와 직산에 있는 홍경원을 불태우고 홍경원에 기거하던 승려 10여 명을 죽였으며, 홍경원의 주지를 협박하여 주장을 담은 글을 가지고 개경으로 가게 하였다. 1177년 3월 11일 조정에 도착한 그 글에는 "이미 우리 고을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수령을 두어 위로하다가 다시 군사를 보내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항복하여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고려 수도)에 쳐들어가고야 말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8]

3. 4. 관군의 진압과 항복

1177년 1월 8일, 망이·망소이의 난을 일으킨 반군은 관군의 진압에 항복했다. 조정은 창고의 곡식을 하사하여 민심을 달래고 감찰어사 김덕강에게 명하여 그들을 고향으로 압송하였다.[6] 그러나 이후 농번기로 인해 반군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이탈하고, 식량과 무기가 부족해지면서 상황이 불리해졌다. 결국 망이와 망소이를 비롯한 반군들은 1177년 6월에 투항 의사를 밝혔고, 반란은 진압되었다.[11] 망이와 망소이는 1177년 7월 20일 청주옥에 수감되었다.[12]

4. 결과 및 의의

망이·망소이의 난은 특수 행정 구역 주민들의 불만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 난은 고려가 특수 행정 구역을 폐지하는 계기가 되었다.[13]

망이와 망소이가 봉기를 시작한 명학소는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당시 공주군 유성현)으로 추정되며,[13] 이곳 남선근린공원에는 이 난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다.

4. 1. 행정 구역 개편

고려는 망이·망소이의 난을 계기로 특수 행정 구역을 폐지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태종은 고려 때의 속현과 향·소·부곡을 군·현에 편입시켜 향·소·부곡은 사라지게 된다.[13]

5. 기념 사업

(내용 없음)

5. 1. 망이 망소이 기념탑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시작되었던 명학소는 현재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당시 공주군 유성현)으로 추정되며,[13] 탄방동 1084번지 남선봉에 있는 남선근린공원에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6. 기타

망이·망소이의 난과 관련하여 내시 함유일이 고초를 겪었다는 기록이 있다.[14] 난을 진압한 후 설치한 충순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전 탄방동이라는 설과 갈마동사무소 안쪽이라는 설이 있다.[14]

6. 1. 함유일

내시는 함유일은 망이·망소이의 난으로 고초를 겪었다.[14]

6. 2. 충순현 위치 논란

충순현을 신설하여 사람들을 회유했다고 하는데, 대전 탄방동에 설치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갈마동사무소 안쪽이라고 하기도 한다.[14]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고려사
[3] 서적 고려사
[4] 서적 고려사
[5] 서적 고려사
[6] 서적 고려사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고려사
[11] 서적 고려사
[12] 서적 고려사
[13]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14] 간행물 대전 덕명지구 문화재 지표 조사 보고서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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