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코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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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코테 전쟁은 15세기 초 명나라의 정화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스리랑카의 코테 왕국을 공격한 사건이다. 당시 스리랑카는 코테 왕국과 자프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코테 왕국의 알라케스와라 왕은 명나라 함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화는 알라케스와라의 위협에 대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코테 왕국을 공격, 알라케스와라를 체포하고 파라크라마바후 6세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이 사건으로 명나라와 스리랑카의 관계가 개선되었고, 명나라는 해상 진출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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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코테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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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명-코테 전쟁 |
부분 전쟁 | 정화의 원정 |
전투 정보 | |
날짜 | 1410년 또는 1411년 |
장소 | 코테, 스리랑카 |
결과 | 명나라의 승리 |
결과 상세 | 알라케슈바라 축출 파라크라마바후 6세의 즉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명나라 |
교전국 2 | 코테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명나라 지휘관 | 정화 제독 |
코테 왕국 지휘관 | 감폴라의 비라 알라케슈바라 왕 |
병력 규모 | |
명나라 병력 | 27,000명 이상의 함대 승무원 (비전투 인원 포함) |
명나라 주둔 병력 | 코테에 2,000명 주둔 |
코테 왕국 병력 | 50,000명 |
2. 배경
코테 왕국과 자프나는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2] 이 전쟁에서 알라가코나라 가문 출신의 알라케스와라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얻었다.[2] 그는 이전 왕조의 꼭두각시 군주 아래 코테를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결국 왕국의 왕위를 찬탈했다.[2]
명나라 보물선 원정 동안, 정화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 중국 함대가 스리랑카와 남인도 주변 해역에서 중국의 통제력과 해상 항로의 안정을 확립하기 위해 현지 해역에 도착했다.[2]
당시 왕자였던 파라크라마바후 6세 또는 그를 대신한 다른 인물들이 이 시기에 정화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중국 제독은 알라케스와라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이 왕자의 대의를 옹호했다.[11] 드레이어(Dreyer)는 2007년 저서에서 스리랑카에서 알라케스와라에 대한 대결은 1411년 귀항 여정보다는 1410년 중국 함대의 출항 여정 중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4]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 대결이 1411년 귀항 여정 중에 일어났다고 언급했다.[2]
2. 1. 명나라의 스리랑카 원정
당시 스리랑카 지역은 코테 왕국과 자프나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 전쟁 과정 도중, 코테 왕국의 알라케쉬바라 장군이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허수아비 왕을 세워둔 채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이후 왕을 쫓아낸 뒤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정화의 원정대가 스리랑카 주변 해역을 탐험하던 중이었는데, 정화는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의 항로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코테 왕국의 해안에 상륙했다. 알라케쉬바라 왕은 명나라 함대를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그들에게 몰래 해적질을 감행하거나 적대적인 행동들을 취하는 등 위협을 가했다.[2]알라케쉬바라 왕이 지속적으로 명나라 원정대를 위협하자, 정화는 일단 스리랑카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들을 먼저 탐험한 후 돌아오기로 결심한다.[3] 이후 3차 원정 때 정화가 다시 스리랑카 해안에 돌아왔고, 이 때는 알라케쉬바라 왕을 쫓아내버리기 위하여 군대를 함께 거느리고 왔으며, 이로 인해 명-코테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2]
2. 2. 알라케쉬바라의 도발
당시 스리랑카 지역은 코테 왕국과 자프나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 전쟁 과정에서 코테 왕국의 알라케쉬바라 장군이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허수아비 왕을 세워둔 채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이후 왕을 쫓아낸 뒤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2] 이때 정화의 원정대가 스리랑카 주변 해역을 탐험하던 중이었는데, 정화는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의 항로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코테 왕국의 해안에 상륙했다. 알라케쉬바라 왕은 명나라 함대를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그들에게 몰래 해적질을 감행하거나 적대적인 행동들을 취하는 등 위협을 가했다.[2]알라케쉬바라 왕이 지속적으로 명나라 원정대를 위협하자, 정화는 일단 스리랑카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들을 먼저 탐험한 후 돌아오기로 결심한다.[3] 이후 3차 원정 때 정화가 다시 스리랑카 해안에 돌아왔고, 이때는 알라케쉬바라 왕을 쫓아내기 위하여 군대를 함께 거느리고 왔고, 이렇게 명-코테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2]
3. 전쟁
중국인들은 스리랑카로 돌아온 후, 싱할라족을 무례하고 불손하며 적대적인 존재로 여겨 그들을 멸시했다.[5] 또한 싱할라족이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인접 국가에 적대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었다.[5] 정화와 2,000명의 중국군은 알라케슈바라가 그들을 자신의 영토로 유인했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코테로 이동했다.[5] 알라케슈바라는 콜롬보에 정박해 있던 중국 보물선으로부터 정화와 그의 군대를 고립시켰다.[6] 그는 함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계획했다.[2]
이에 대응하여 정화와 그의 군대는 코테를 침략하여 수도를 정복하고,[2] 알라케슈바라와 그의 가족, 주요 관리들을 포획했다.[6][9] 그 후 6일 동안, 그들은 함대로 돌아가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7]
3. 1. 명나라의 코테 왕국 침공
명나라 함대는 항해 내내 스리랑카인들의 무례하고 적대적인 행동을 잊지 않았고, 나중에 반드시 갚아줄 것을 다짐했다. 그들은 알라케쉬바라 왕이 명나라와 친한 국가들에게도 적대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판단하여 왕위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5] 정화는 약 2,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코테 왕국 내륙으로 진입했다. 알라케쉬바라 왕은 기습 작전을 펼쳐 정화와 그의 군대를 콜롬보에 정박해 있던 본 함대와 분리시켰다.[6] 그는 정화를 본진과 격리시켜 전멸시키려 했으나,[2] 정화의 군대가 곧바로 수도로 진격하여 알라케쉬바라 왕과 그의 가족, 신하들을 모두 사로잡으면서 실패했다.[6][9] 코테 왕국군은 수도 함락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나라 군대를 격퇴하려 했으나,[5] 명나라 군대에 패배하며 전쟁은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다.3. 2. 코테 왕국군의 반격과 패배
항해 내내, 함대에 타고 있던 중국인들은 스리랑카인들의 무례하고 적대적인 행동을 잊지 않았고 나중에 반드시 되돌아가 갚아줄 것을 다짐하였다. 그들은 알라케쉬바라 왕이 명나라와 친한 국가들에게도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 결국 그를 아예 왕위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하였다. 정복 전쟁에 나선 정화는 약 2,000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코테 왕국 내륙 지방으로 들어왔다. 그 직후 알라케쉬바라 왕은 기습 작전을 펼쳐 정화와 2,000여 명의 군대를 콜롬보에 정박해 있는 본 함대와 떼어놓았다.[6] 그는 정화를 본진과 격리시킨 후 그들을 모두 쳐죽일 생각이었으나, 정화와 그의 군대가 곧바로 수도로 쳐들어와 알라케쉬바라 왕과 그의 가족들, 신하들을 모두 사로잡으며 실패로 끝나게 된다.[6][9] 코테 왕국군은 수도가 함락된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명나라 군대를 격퇴하려 하였으나, 명나라 군대에게 패배하며 결국 전쟁은 명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5]1515년, 楊榮|양롱중국어이 기록한 스리랑카 원정기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스리랑카로 돌아온 후, 싱할라족을 무례하고 불손하며 적대적인 존재로 여겨 그들을 멸시하고 깔봤으며,[5] 싱할라족이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인접 국가에 적대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5]
4. 전쟁 이후
명-코테 전쟁 이후, 정화는 1411년 7월 11일에 포로로 잡힌 알라케쉬바라 왕을 난징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영락제는 스리랑카인 포로들을 보고 알라케쉬바라 왕을 스리랑카로 돌려보냈다.[9][2]
이 분쟁으로 알라가코나라 가문의 알라케슈바라 왕이 전복되었다.
4. 1. 파라크라마바후 6세의 즉위와 친명 정책
영락제는 대신들에게 코테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삼을 자를 추천하라 명했고, 당시 명나라 조정에 있던 스리랑카 대사는 파라크라마바후 6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천했다. 영락제는 그 안을 따랐고 파라크라마바후 6세는 명나라 군대의 무력에 힘입어 스리랑카 지역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11][10] 이후 스리랑카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호전되었고, 명나라의 원정대와 무역선들이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등 외교적, 경제적 교류들이 잇따랐다.[10] 명나라 보물선은 이후 항해에서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동안 적대 행위를 겪지 않았다.[2] 1411년 9월 13일, 영락제는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인원들에게 상을 내리고 직위를 높여주었다.[12]4. 2. 명나라의 포상
1411년 9월 13일, 영락제는 병부와 예부의 공동 추천에 따라 스리랑카 대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직위를 높여주었다.[12]5. 명나라-스리랑카 관계에 미친 영향
명-코테 전쟁으로 알라가코나라 가문의 알라케슈바라 왕이 축출되었다.[9] 명나라는 코테의 파라크라마바후 6세를 지지하여 알라케슈바라를 몰아내고 동맹을 맺었다.[11][10] 이후 중국과 스리랑카 간의 경제적, 외교적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명나라 보물선은 항해에서 스리랑카를 방문할 때 적대 행위를 겪지 않았다.[2]
5. 1. 스리랑카 내 정치 세력 구도 변화
3차 원정 이후, 정화는 포로로 잡힌 알라케슈바라 왕을 데리고 1411년 7월 11일에 난징으로 귀환하였다. 이후 그는 영락제에게 포로로 잡은 스리랑카인들을 보여주었고, 영락제는 알라케슈바라 왕을 풀어 스리랑카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9][2]명나라 조정은 이후 스리랑카 지역에 새로운 왕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영락제는 대신들에게 코테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삼을 자를 추천하라 명했고, 당시 명나라 조정에 있던 스리랑카 대사는 파라크라마바후 6세를 추천했다. 영락제는 그 안을 따랐고 파라크라마바후 6세는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스리랑카의 새 왕이 되었다.[11][10][2] 이후 스리랑카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좋아졌고, 명나라 원정대와 무역선들이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등 외교적, 경제적 교류가 잇따랐다.[10][2] 1411년 9월 13일, 영락제는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인원들에게 상을 내리고 직위를 높여주었다.[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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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Yang Wenmin Gong Ji
Jianan, Yang shi chong kan 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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