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쓰나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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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쓰나모토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조후 번의 2대 번주였다. 1650년에 태어나 1653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번주 자리에 올랐으며, 숙부에게 영지를 분여하여 기요스에 번을 세웠다. 그는 검약, 문무 장려, 가쿠엔지 건립 등 번정을 펼쳤고, 문예와 와카를 즐겼다. 1702년 아코 낭사 사건 당시, 10명의 낭사 처형을 맡았으며, 170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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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무네나가는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생모 게이쇼인의 친척으로 다카모리 번 2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나 23세에 사망했다.
모리 쓰나모토 | |
---|---|
기본 정보 | |
씨명 | 모리 쓰나모토 |
![]()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게이안 3년 12월 23일 (1651년2월 13일) |
사망 | 호에이 6년 3월 1일 (1709년4월 10일) |
개명 | 요시로 (어릴 적 이름) 쓰나모토 |
시호 | 류타쿠인덴 도세이즈이린 대거사 |
묘소 | 도쿄도미나토구시로카네다이의 즈이쇼지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조후의 가쿠온지 |
관위 | 종4위상가이노카미,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쓰나 쓰나요시 |
번 | 나가토조후번주 |
씨족 | 모리 씨 |
부모 | 아버지: 모리 미쓰히로 어머니: 혼다 다다요시 딸 세이슈인 |
형제자매 | 쓰나모토 구마히메 이나바 마사요리 정실 |
배우자 | 이케다 미쓰마사 딸 후사히메 세이쇼인 |
자녀 | 요시모토 혼다 다다쓰구 다다미 모토노리 마주인 모토토모 |
2. 생애
1650년 (게이안 3년) 12월 23일 에도에서 태어나, 1653년 (조오 2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1664년 (간분 4년) 가이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683년 (덴와 3년) 검약을 주 내용으로 하는 '덴와 어법도'를 제정하고, 1697년 (겐로쿠 10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문무를 장려하며 가쿠엔지를 건립하는 등 번정 개혁에 힘썼다.[1]
문예와 와카를 좋아하여 '가슈 오바나마츠', '와카 시콘슈'에 와카가 수록되기도 했다.
1702년 (겐로쿠 15년) 아코 낭사들의 기라 요시히사 토벌 이후, 막부의 명에 따라 10명의 낭사를 맡아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낭사들을 죄인 취급하고, 센가쿠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
1707년 (호에이 4년) 장남 요시모토가 본가인 조슈 번주를 이었으며, 1709년 (호에이 6년) 3월 1일 60세로 사망했다. 이후 가쿠엔지와 호코 신사에 제사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번주 즉위
1650년 (게이안 3년) 12월 23일, 에도에서 태어났다. 1653년 (조오 2년), 부친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때 숙부인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석을 분여하여 기요스에 번을 세웠다. 1664년 (간분 4년), 가이노카미에 서임되었다.2. 2. 번정 개혁
겐로쿠 10년(1697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으며, 문무를 장려하고 가쿠엔지를 건립하는 등 번정에 힘썼다.[1] 덴와 3년(1683년)에는 검약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덴와 어법도'를 제정했다.[1]2. 3. 문예 애호
문예와 와카를 좋아하여, '가슈 오바나마츠'와 '와카 시콘슈'에 그가 지은 와카가 수록될 정도였다.2. 4. 아코 낭사 처형
1702년(겐로쿠 15년) 12월 15일, 아코 낭사가 기라 요시히사를 토벌하자 막부는 이들의 처분을 결정했다. 이 중 오카지마 쓰네키, 요시다 가네사다, 다케바야시 다카시게, 구라하시 다케유키, 무라마쓰 히데나오, 스기노 쓰기후사, 가쓰타 다케타카, 마에바라 무네후사, 하타마 미쓰카제, 오노데라 히데토미 등 10명은 모리 쓰나모토에게 맡겨졌다.검시관으로부터 "맡은 사람의 시체와 도구는 마음대로 처분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센가쿠지의 슈산 화상이 모두 인수하겠다고 하여 오기노 가쿠에몬 휘하의 족경과 데아키츄간 등 십수 명이 장례를 치렀다. 슈산은 나중에 이때 받은 의사 유품을 매각하여 돈으로 바꾸었다.[5]
이후 쓰나모토는 에도에서 사망했음에도 유해를 조후로 보내고, 히데모토가 보리사로 삼았던 센가쿠지에서 아코 의사와 합장되는 것을 꺼렸다.[6] 이는 조후 번이 센가쿠지를 피하고 결국 절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롯폰기 힐스의 모리 정원에는 다른 다이묘 가문과 달리 공양탑이나 현창비가 없고, 의사 할복지도 레이와 시대까지 불명확하다.[7]
2. 4. 1. 처형 과정
1702년 12월 15일, 아코 낭사가 기라 요시히사를 토벌하자, 모리 쓰나모토는 47명의 의사 중 오카지마 쓰네키, 요시다 가네사다, 다케바야시 다카시게, 구라하시 다케유키, 무라마쓰 히데나오, 스기노 쓰기후사, 가쓰타 다케타카, 마에바라 무네후사, 하타마 미쓰카제, 오노데라 히데토미 등 10명의 의사를 맡도록 명령받았다.모리 가문은 낭사들을 일반 죄인처럼 취급했다. 호송 가마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위에 그물을 덮었으며, 도착 후에는 5명씩 수용 오두막에 나누어 넣고 창문과 문에 판자를 박았다. 수용 오두막 주변에는 판자 울타리를 이중으로 둘렀고, 출입구와 울타리 곳곳에 주야 교대로 여러 명의 번인이 감시했다. 본가인 조슈 번에서도 감시를 위해 시도 단큐·아와야 산자에몬 등 수십 명의 소자를 파견했다.[1]
쓰나모토는 아코 의사들을 만나지 않았고, 난방을 위한 술이나 담배 등의 요구도 거절했으며, 화로 제공도 없었다.[2] 할복에는 "선풍 복부"로서 부채를 10개 준비시켰으나, 막부 감찰로부터 "참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주의를 받고 "고와키자시(단도)를 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타마 미쓰카제가 실제로 고와키자시를 배에 찔러 넣었고, 다케바야시 다카시게도 한 번에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지만, 개작인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여 소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의사 할복 후, 쓰나모토는 "무사히 마무리되어 대경하옵니다"라고 기뻐하며,[3] 중신인 다시로 요닌·도키타 곤다유에게 명하여 수용 오두막을 파각하고, 할복 터를 깨끗이 하여 번 저택 내 어디에서 할복했는지 알 수 없도록 지시했다.[4]
2. 4. 2. 센가쿠지와의 관계
1702년(겐로쿠 15년) 12월 15일, 아코 낭사가 기라 요시히사를 토벌하자 모리 쓰나모토는 47명의 의사 중 오카지마 쓰네키, 요시다 가네사다, 다케바야시 다카시게, 구라하시 다케유키, 무라마쓰 히데나오, 스기노 쓰기후사, 가쓰타 다케타카, 마에바라 무네후사, 하타마 미쓰카제, 오노데라 히데토미 등 10명의 의사를 맡도록 명령받았다.모리 가문은 낭사들을 일반 죄인으로 취급하여 호송 가마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위에 그물을 덮었다. 도착 후에는 수용 오두막에 5명씩 나누어 넣고 창문과 문에는 판자를 박았다. 게다가 수용 오두막 주변에 판자 울타리를 둘러 이중으로 둘렀다. 출입구와 울타리 곳곳에 주야 교대로 여러 명의 번인이 감시했다. 본가인 조슈 번에서도 감시를 위해 시도 단큐·아와야 산자에몬 등이 수십 명의 소자를 이끌고 파견되었다.[1]
모리 쓰나모토는 아코 의사들을 만나지 않았고, 난방을 위한 술이나 담배와 같은 요구도 거절했으며, 화로 제공도 없었다.[2] 할복에는 "선풍 복부"로서 부채를 10개 준비시켰다. 막부의 감찰로부터 "그것은 참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주의를 받고 "고와키자시(단도)를 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타마 미쓰카제가 실제로 고와키자시를 배에 찔러 넣었고, 다케바야시 다카시게도 한 번에 목을 떨어뜨리지 못했지만, 개작인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여 소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의사 할복 후, 쓰나모토는 "무사히 마무리되어 대경하옵니다"라고 기뻐하며[3], 중신인 다시로 요닌·도키타 곤다유에게 명하여 수용 오두막을 파각하고, 할복 터를 깨끗이 하여 번 저택 내 어디에서 할복했는지 알 수 없도록 지시했다.[4] 또한, 검시관으로부터 "맡은 사람의 시체·도구의 처분에 대해 마음대로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센가쿠지의 슈산 화상이 모두 인수하겠다고 하여, 오기노 가쿠에몬 휘하의 족경·데아키츄간 등 십수 명이 장례를 치렀다. 나중에 슈산은 이때 받은 의사 유품도 매각하여 돈으로 바꿨다.[5]
그 후에도 쓰나모토는 에도에서 사망했음에도 유해를 조후로 보내고, 히데모토가 보리사로 삼았던 센가쿠지에서 아코 의사와 합장되는 것을 싫어했다.[6] 이것이 조후 번이 센가쿠지를 피하고 최종적으로 절연에 이르게 된 효시가 되었다.
롯폰기 힐스의 모리 정원 내에는 다른 위탁 다이묘 가문과 달리, 일체의 공양탑이나 현창비 종류는 존재하지 않고, 의사 할복지의 위치는 레이와 시대가 되어도 전혀 불명인 채로 남아 있다.[7]
2. 5. 말년과 사망
호에이 4년(1707년), 장남인 요시모토가 본가인 조슈 번주를 이었다.호에이 6년(1709년) 3월 1일, 60세로 사망하였으며, 뒤는 요시모토의 장남인 모토토모가 이었다. 사후에는 가쿠엔지 및 호코 신사에 제사되었다.
3. 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모리 미츠히로 (1616년 ~ 1653년) |
어머니 | 세이슈인 - 혼다 타다요시의 딸 |
정실 | 후사히메(1653년 ~ 1686년) - 쇼운인, 이케다 미츠마사의 딸 |
측실 | 테이쇼인 |
자녀 | 내용 |
장남 | 모리 요시모토 (1677년 ~ 1731년) - 모리 요시히로의 양자 |
차남 | 혼다 타다츠구 (1679년 ~ 1711년) - 혼다 타다토시의 사위 양자 |
넷째 아들 | 모리 모토노리 (1704년 ~ 1718년) - 모리 모토토모의 양자 |
셋째 아들 | 모리 마사모치 (생모 불명) |
딸 | 신쥬인 - 모리 나가나리의 정실, 이후 난부 노부오토의 정실 (생모 불명) |
양자 | 모리 모토토모 (1703년 ~ 1721년) - 모리 요시모토의 장남 |
4. 유품
참조
[1]
서적
長府藩預義士一件
[2]
문서
[3]
논문
毛利甲斐守綱元
中央義士会
2007
[4]
문서
毛利家文庫、長府毛利十四代記
下関市立長府博物館
[5]
서적
日本人的心情の回帰点 忠臣蔵と日本人
PHP研究所
1994
[6]
웹사이트
豊功神社のご案内
https://chofukankou.[...]
2022-06-09
[7]
문서
[8]
문서
오카지마 쓰네시게, 요시다 가네사다, 다케바야시 다케시게, 구라하시 다케유키, 무라마쓰 히데나오, 스기노 쓰기후사, 가쓰타 다케타카, 마에하라 무네후사, 하자마 미쓰카제, 오노데라 히데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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