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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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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보는 오호십육국 시대 후연의 황족으로, 369년에 태어나 398년에 사망했다. 모용수의 넷째 아들이며, 391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평가받았다. 395년 북위와의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고, 396년 부친 모용수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호구 조사와 개혁을 추진하며 민심을 잃었고, 후계자 분쟁과 북위의 침공으로 혼란을 겪었다. 결국 란한에게 살해당하며 후연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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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보
기본 정보
Mùróng (慕容)
Bǎo (寶)
시호혜민황제(惠愍皇帝, "자애롭고 고통받는")
묘호열종(烈宗) 또는 열조(烈祖)
재위
즉위일396년 6월 21일
퇴위일398년 5월 27일
이전 통치자모용수
이후 통치자난한 (簒奪者) (찬탈자)
연호영강(永康)
연호 기간396년 6월 21일 – 398년 5월 27일
생애
출생355년
사망398년 5월 27일 (43세)
가문
왕조후연
가문모용

2. 생애

모용보(慕容寶)는 모용수의 넷째 아들로, 355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첨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6] 358년 어머니를 잃고, 모용위 시대에 전진으로 망명했다. 처음에는 형 모용령이 모용수의 후계자였지만, 모용령이 왕맹의 모략에 빠져 자멸하면서 모용보가 장자가 되었다.

383년 비수대전 이후, 모용보는 384년 아버지 모용수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연루되었고, 같은 해 봄 모용수가 연왕을 칭하자 황태자로 임명되었다. 태자 시절, 모용보는 학문에 정진하고 재능 있는 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아버지 모용수가 원정을 나갈 때 수도 중산(中山, 현재의 허베이성, 바오딩시)을 지키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388년에는 대부분의 국사를 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북위의 탁발규에게 대패한 후, 396년 모용수가 죽자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2. 1. 참합피 전투와 패배

391년, 모용보는 후연과 북위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끈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해 북위 군주 탁발규는 그의 형제 탁발고(拓拔觚)를 후연에 조공하러 보냈다. 모용보를 필두로 한 후연측은 탁발고를 억류하고 탁발규에게 말을 뇌물로 요구하였다.[9] 탁발규는 이를 거절했고, 탁발고는 억류되었으며, 후연과 북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탁발규는 서연과 동맹을 맺었고, 393년 서연이 후연에 멸망된 후에도 후연 변경을 계속 괴롭혔다. 395년, 모용보는 형제 모용농, 모용린과 함께 북위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8만 명의 원정군을 이끌었으나, 이는 후연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탁발규는 모용보의 군대 소식을 듣고 수도 신락(盛樂,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시)을 버리고 황하 서쪽으로 후퇴했다. 모용보의 군대는 395년 가을 황하에 빠르게 도달하여 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때 북위 정찰병들이 모용보 군대와 후연 수도 중산 간의 통신선을 끊었고, 북위는 포로로 잡은 후연 사신들에게 모용수가 이미 죽었다고 선언하게 하여 후연 군대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 후연과 북위군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20여 일 동안 대치했다. 그러던 중 모용린의 추종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모용린을 새 지도자로 옹립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후연군은 혼란에 빠졌다. 겨울이 오자 후연군은 퇴각했고, 황하가 얼어붙어 북위군이 쉽게 건널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모용보는 퇴각 시 후군을 남기지 않았다. 탁발규는 직접 추격하여 참합피 전투에서 준비되지 않은 후연군을 기습, 거의 모든 후연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모용보와 몇몇 장교들만이 탈출했다.[9] 탁발규는 후연 포로들을 두려워하여 학살했다.

모용보가 북위의 탁발규에게 패배한 참합피 전투

2. 2. 즉위와 혼란

모용보는 모용수의 넷째 아들로, 369년 모용수가 전진으로 망명할 때 함께 전진에서 생활하였다. 383년 비수대전 이후 모용수가 거병하는 것을 도왔으며, 391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395년 북위를 공격했으나 참합피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였다. 396년 4월, 모용수가 죽자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 모용보는 배다른 동생들인 모용륭, 모용농 등의 보좌를 받았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호구 조사와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잃었고,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을 태자로 삼아 후계 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10] 또한 계모 단원비에게 자결을 강요했는데, 이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자신을 태자에서 폐위하도록 조언한 것에 대한 앙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원비는 황실의 예우를 갖춰 아버지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6]

396년 가을, 탁발규가 이끄는 북위군이 병주(幷州, 현대 중국 중부 및 북부의 산시성)를 기습하여 모용농을 격파하고 중산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397년, 탁발규가 신도를 함락하자 모용보는 반격을 개시했으나 호타수에서 대패하고 다시 중산에서 농성하였다. 3월에는 대장군 모용린이 모용보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모용보는 모용린이 유주의 군대를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리고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10]

용성으로 이동하던 중, 차남 모용회의 군대를 만나 호위를 받았으나, 모용회가 모반을 일으켰다. 모용륭이 풍발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고, 모용보와 모용농은 용성으로 도망쳤다. 이후 모용회는 고운에게 진압되었고, 모용보는 용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추스렸다.

2. 3. 북위의 침공과 몰락

모용수의 넷째 아들 모용보는 396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배다른 동생들인 모용륭(慕容隆), 모용농(慕容農) 등의 도움을 받아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호구 조사와 개혁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고,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 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396년 가을, 탁발규(拓拔珪)가 이끄는 북위군이 병주(幷州)를 기습 공격하여 모용농을 격파했다. 모용보는 모용린(慕容麟)의 제안에 따라 중산(中山)을 방어하면서 북위 군대가 지쳐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허베이성의 대부분 도시들이 함락되었고, 397년 봄에는 신도(信都)마저 함락되었다.

탁발규가 화친을 제안했으나 모용보는 이를 거부하고 북위군을 공격했다가 대패했다. 이후 모용린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용보는 모용린이 모용회(慕容會)의 군대를 빼앗을 것을 우려하여 397년 3월에 중산을 버리고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용성으로 이동하던 중, 모용회는 권력을 잡으려는 야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회는 모용륭을 살해했으나, 고운의 기습 공격에 패배하여 중산으로 도망쳤다가 모용상(慕容詳)에게 죽임을 당했다. 모용보는 고운을 양자로 삼고 서양공에 봉했다.

모용보가 용성에 정착한 후, 중산과 예성(鄴城)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모용상은 스스로 황제를 칭했으나 모용린에게 패배하여 죽었고, 모용린 또한 황제를 칭했다가 북위군에게 패했다. 모용덕(慕容德)은 황하 남쪽의 활태(滑台)로 가서 398년 봄에 연왕(燕王)을 칭하고 남연을 건국하여 사실상 독립했다.

398년 봄, 모용보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으나, 군대가 지쳐있다는 모용농모용성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했다. 그러나 모용보가 용성을 떠나자마자 장군 단속골(段速骨)이 반란을 일으켰고, 군대는 모용보를 버렸다. 모용보는 용성으로 도망쳤으나, 란한(蘭汗)의 도움으로 단속골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용농이 란한에게 항복하면서 용성이 함락되었고, 모용보와 모용성은 지청(薊城)으로 도망쳤다.

란한이 모용보를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으나, 모용성은 남쪽의 모용덕에게 의탁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화태 근처에서 모용덕이 황제를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북쪽으로 도망쳤다. 모용성은 란한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모용보는 듣지 않고 용성으로 돌아갔다.

398년 초여름, 모용보가 용성에 도착하자 란한은 동생 란가난(蘭加難)을 보내 모용보를 맞이하게 했으나, 실제로는 그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란가난은 용성 밖에서 모용보를 살해했고, 란한은 모용씨 황족 대부분을 학살하고 창려왕을 자칭하며 후연을 계승하려 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모용수무성 황제
어머니단씨 공주추존 황후
부인단씨 황후396년 책봉, 400년 사망
후궁정소의태자 모용성의 어머니
맹소의북위 도무제의 모용 황후의 어머니
모씨(某氏)모용회의 어머니
자녀모용성장남, 낙랑왕 (396년 책봉), 후일 황제
모용회서차자, 청하왕 (396년 책봉, 모용상에게 397년 살해됨)
모용책적자, 태자 (396년 책봉, 란한에게 398년 살해됨)
모용원성양왕, 평원공 (401년 강제로 자결)
모용연장무왕 (400년 책봉, 모용희에게 402년 살해됨)
모용민하동왕 (394년 책봉)
모용건박릉공 (400년 책봉, 406년 강제로 자결)
모용소상당공 (406년 강제로 자결)
기타모용씨4녀, 북위 도무제의 아내
모용운양자, 혜의제


4. 기타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2011년~2012년)에서 배우 임호가 모용보 역을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Book of Jin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s of the Sixteen Kingdoms https://zh.wikisourc[...]
[6] 서적 晋書
[7] 서적 魏書
[8] 서적 十六国春秋
[9] 서적 資治通鑑
[10]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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