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펠트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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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역사
- 3. 가계도
- 3.1. 주요 인물
- 3.1.1. 안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1184년 사망?)
- 3.1.2. 몬테펠트라노 1세 다 몬테펠트로 (1135년경~1202년)
- 3.1.3. 부온콘테 1세 다 몬테펠트로 ( ? ~ ?)
- 3.1.4. 귀도 1세 다 몬테펠트로 (1255–1286, 1293–1296)
- 3.1.5. 페데리코 1세 다 몬테펠트로 (1296–1322)
- 3.1.6. 놀포 다 몬테펠트로 (1323–1359)
- 3.1.7. 안토니오 2세 다 몬테펠트로 (1377–1403)
- 3.1.8. 기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1403–1443)
- 3.1.9.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1444–1482)
- 3.1.10.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1492–1508)
- 3.1.11.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1508–1538)
- 3.1. 주요 인물
- 참조
1. 개요
몬테펠트로가는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가문이다. 카르페냐 영주들의 분파로 시작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했다. 14세기에는 영토를 확장하고, 구엘프와 기벨린 세력 간의 갈등에서 기벨린을 지지하며 세력을 키웠다. 15세기에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우르비노 공작으로 임명되어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가문의 단절로 1631년 우르비노 공국은 교황령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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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비노 공국 - 우르비노 전쟁
우르비노 전쟁은 1516년부터 1517년까지 교황 레오 10세가 우르비노 공작령을 장악하려 하고 우르비노 공작이 자치권을 유지하려 하면서 벌어진 분쟁으로, 우르비노 공작의 승리로 끝났다. - 몬테펠트로가 -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우르비노 공작이자 뛰어난 용병대장이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인문주의를 후원하여 우르비노 궁정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 몬테펠트로가 -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오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는 1443년부터 1444년 암살당할 때까지 우르비노를 통치한 초대 공작이었으며, 방탕한 생활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백성들의 불만을 사 암살당했다.
몬테펠트로가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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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성씨 | 몬테펠트로 가문 |
문장 | Coat of arms of da Montefeltro.svg |
국가 | 24x24픽셀 우르비노 백국 "24x24픽셀 우르비노 공국" 교황령 |
설립 | 11세기 |
창시자 | 안토니오 1세 다 몬테펠트로 |
해체 | 1508년 |
마지막 통치자 |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
작위 | 우르비노 공작 우르비노 백작 몬테펠트로 백작 몬테코피올로 백작 피에트라루비아 백작 칸티아노 백작 메르카텔로 백작 카스텔 두란테 백작 우르비노 영주 칸티아노 영주 구비오 영주 칼리 영주 프론토네 영주 사소코르바로 영주 |
2. 역사
몬테펠트로 가문은 카르페냐 영주 가문의 분파로 시작하여, 12세기 초 몬테코피올로 성을 획득하고 몬테펠트로 지역의 이름을 따 가문의 명칭으로 삼았다.
몬테펠트라노 2세와 귀도 1세는 포를리의 지휘관으로 프랑스와 교황군과의 전쟁을 치렀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귀도 1세를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한 비난에서 면죄하고 팔레스트리나와 콜론나 가문에 대항하여 그를 고용했다.
기단토니오의 아들 오도 안토니오는 집권한 지 몇 달 만에 암살당했다. 이후 우르비노 사람들은 페데리코 3세에게 영주직을 제안했다.
2. 1. 초기 역사 (12세기 ~ 13세기)
말라테스타 가문과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던 이 가문은 카르페냐 영주들의 분파이자 리미니의 영주였다. 1140년경 안토니오는 형제들과의 분배를 통해 몬테코피올로 성을 받았고, 이후 몬테펠트로 지역의 이름을 따온 바위 ''몬스 페트리우스''(mons feretrius) 위에 위치한 산 레오 성을 획득했다.115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안토니오를 우르비노의 황제 대리로 임명하여 교황령이 그에 대한 더 오래된 주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탈리아 왕국의 봉토라고 주장했다. 안토니오의 아들 몬테펠트라노 1세(1135년경~1202년) 역시 우르비노의 대리였으며 몬테펠트로 백작이 되었다. 1226년, 그의 아들 부온콘테 1세와 타데오 다 몬테펠트로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우르비노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교황과 황제 추종자들 간의 갈등 동안 몬테펠트로 형제와 그 후손들은 마르케와 로마냐의 기벨린 지도자가 되었고, 말라테스타 가문은 구엘프를 이끌었다.
2. 2. 전성기 (14세기 ~ 15세기)
14세기 초, 페데리코 1세(1296–1322)는 파노, 오시모, 레카나티, 구비오, 스폴레토, 아시시를 성좌로부터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는 높은 세금을 징수한 후 살해당했고 우르비노는 교황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323년, 페데리코의 아들 놀포(1323–1359)가 우르비노의 영주로 선포되었다. 1355년, 추기경 알보르노스는 교황 사절로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교황의 권위를 회복했고 우르비노는 다시 성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놀포의 아들 페데리코 2세는 어떤 권위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안토니오 2세(1377–1403)는 마르케와 움브리아가 성좌에 대항한 반란(1375)을 이용하여 우르비노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했다.기단토니오(1403–1443)는 교황 마르티노 5세에 의해 스폴레토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브라초 다 몬토네와 전쟁을 벌여 승패를 거듭했다.
2. 3. 르네상스와 우르비노 공국 (15세기 ~ 16세기)
페데리코 3세 다 몬테펠트로는 기단토니오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비토리노 다 펠트레의 학교에서 교육받고 예술을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 아래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는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앙주의 르네, 피렌체와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1474년 교황 식스토 4세는 그에게 우르비노 공작 칭호를 수여했다.귀도발도 1세는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를 피해 우르비노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는 누이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후계자로 삼아 시니갈리아의 시뇨리아를 우르비노와 합병했다. 그는 율리우스 2세가 로마냐를 다시 정복하는 것을 도왔다.
2. 4. 쇠퇴와 교황령 귀속 (16세기 ~ 17세기)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교황 율리우스 2세를 도와 로마냐 재정복에 기여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국을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에게서 빼앗아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주었다가, 다시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에게 돌려주었다. 델라 로베레 가문은 1631년 단절될 때까지 공국을 통치했으며, 그 후 교황령으로 반환되었다.3. 가계도
wikitext
안토니오 몬테코피올로 영주 | ||||||
몬테페르트라노 1세 몬테펠트로 백작 | ||||||
본콘테 1세 우르비노 백작 | 타데오 | |||||
몬테페르트라노 2세 우르비노 백작 | ||||||
귀도 우르비노 백작 | ||||||
페데리코 1세 우르비노 백작 | 본콘테 | |||||
귀도 2세 우르비노 백작 | 노르포 우르비노 백작 | |||||
페데리코 2세 우르비노 백작 | ||||||
안토니오 2세 우르비노 백작 | 놀포 | 귀도 | 갈레아초 | 안나 | ||
렌갈다 (리미니 영주 갈레아초 말라테스타 딸) | —it| 귀단토니오it 우르비노 백작 | 카테리나 (로렌초 콜론나 딸) | 안나 | 바티스타 (~1447) (페사로 영주 갈레아초 말라테스타) | ||
(서자) 페데리코 우르비노 공작 | (서자) 아우라 (베르나르디노 우발디니 델라 칼다) | 오단토니오 2세 우르비노 공작 | 블랑카 (파엔차 영주 귀단토니오 만프레디) | 비올란테 (체세나 영주 도메니코 말라테스타) | 아그네시나 (카스틸리오네 영주 알레산드로 곤차) | 스베바 (페사로 백작 알레산드로 스포르차) |
귀도발도 우르비노 공작 | 엘리자베타 곤차 | 조반나 | 조반니 델라 로베레 세니갈리아 영주 | 코스탄차 | 안토넬로 디 산세베리노 살레르노 후작 | |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우르비노 공작 | 안토넬로 디 산세베리노 살레르노 후작 | 펠리체 델라 로베레 (율리우스 2세 서자) | ||||
델라 로베레 가 |
3. 1. 주요 인물
몬테펠트로 가문은 카르페냐 영주 가문의 분파로, 리미니의 영주였으며, 말라테스타 가문과는 오랫동안 적대 관계였다.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1155년 안토니오를 우르비노의 황제 대리로 임명했다. 그의 아들 몬테펠트라노 1세 역시 우르비노의 대리였으며 몬테펠트로 백작이 되었다. 1226년, 그의 아들 부온콘테 1세와 타데오는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우르비노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교황과 황제 추종자들 간의 갈등 동안 몬테펠트로 가문과 그 후손들은 마르케와 로마냐의 기벨린 지도자가 되었고, 말라테스타 가문은 구엘프를 이끌었다.
부온콘테 1세의 뒤를 이어 몬테펠트라노 2세와 귀도 1세가 몬테펠트로 가문을 이끌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귀도 1세를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한 비난에서 면죄하고 팔레스트리나와 콜론나 가문에 대항하는 데 기용했다.
귀도 1세의 후계자인 페데리코 1세는 영토를 확장했지만,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살해당했고, 우르비노는 교황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페데리코 1세의 아들 놀포는 1323년 우르비노의 영주로 선포되었으나, 1355년 성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페데리코 2세의 아들 안토니오 2세는 우르비노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했다. 기단토니오는 스폴레토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브라초 다 몬토네와의 전쟁에서 승패를 거듭했다. 그의 아들 오도 안토니오는 집권한 지 몇 달 만에 암살당했다.
우르비노 사람들은 기단토니오의 사생아였던 페데리코 3세에게 영주직을 제안했다. 그의 통치 아래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474년 교황 식스토 4세는 그에게 우르비노 공작 칭호를 수여했다.
페데리코 3세의 아들 귀도발도 1세는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를 피해 우르비노를 떠나야 했다. 그는 누이의 자녀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입양하여 시니갈리아의 시뇨리아를 우르비노와 합병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귀도발도 1세에게서 영토를 빼앗아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주었고, 나중에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에게 주었다. 델라 로베레 가문은 1631년 가문이 단절될 때까지 공국을 통치했으며, 그 후 교황령으로 반환되었다.
3. 1. 1. 안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1184년 사망?)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1155년 안토니오를 우르비노의 황제 대리로 임명하여, 교황령이 그에 대한 더 오래된 주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탈리아 왕국의 봉토라고 주장했다. 안토니오는 형제들과의 분배를 통해 몬테코피올로 성을 받았고, 이후 몬테펠트로 지역의 이름을 따온 바위 ''몬스 페트리우스''(mons feretrius) 위에 위치한 산 레오 성을 획득했다.3. 1. 2. 몬테펠트라노 1세 다 몬테펠트로 (1135년경~1202년)
안토니오의 아들 몬테펠트라노 1세(1135년경~1202년)는 우르비노의 황제 대리이자 몬테펠트로 백작이었다. 1226년, 그의 아들 부온콘테 1세와 타데오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에 의해 우르비노 백작으로 임명되었다.3. 1. 3. 부온콘테 1세 다 몬테펠트로 ( ? ~ ?)
몬테펠트라노 1세의 아들이다. 1226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우르비노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교황과 황제 추종자들 간의 갈등 동안 몬테펠트로 형제와 그 후손들은 마르케와 로마냐의 기벨린 지도자가 되었고, 말라테스타 가문은 구엘프를 이끌었다.3. 1. 4. 귀도 1세 다 몬테펠트로 (1255–1286, 1293–1296)
부온콘테 1세 다 몬테펠트로의 아들인 귀도 1세 다 몬테펠트로(1255–1286, 1293–1296)는 포를리의 지휘관으로 프랑스와 교황군에 맞서 싸웠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그를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한 비난에서 면죄하고 팔레스트리나와 콜론나 가문에 대항하는 데 기용했다.3. 1. 5. 페데리코 1세 다 몬테펠트로 (1296–1322)
귀도 1세의 후계자인 페데리코 1세(1296–1322)는 파노, 오시모, 레카나티, 구비오, 스폴레토, 아시시를 성좌로부터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높은 세금을 징수한 후 살해당했고, 우르비노는 교황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3. 1. 6. 놀포 다 몬테펠트로 (1323–1359)
페데리코 1세의 아들 놀포(1323–1359)는 1323년 우르비노의 영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1355년 추기경 알보르노스가 교황 사절로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면서 우르비노는 다시 성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3. 1. 7. 안토니오 2세 다 몬테펠트로 (1377–1403)
페데리코 2세의 아들 안토니오 2세는 마르케와 움브리아에서 성좌에 대항한 반란(1375)을 이용하여 우르비노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했다.3. 1. 8. 기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 (1403–1443)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기단토니오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는 브라초 다 몬토네와의 전쟁에서 승패를 거듭했다.3. 1. 9.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1444–1482)
페데리코 3세는 기단토니오의 사생아로, 비토리노 다 펠트레의 학교에서 교육받고 예술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그의 통치 아래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는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앙주의 르네, 피렌체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1474년에는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우르비노 공작으로 임명되었다.3. 1. 10.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로 (1492–1508)
귀도발도 1세(1492–1508)는 페데리코 3세의 아들로,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를 피해 우르비노를 도망쳐야 했다. 그는 누이의 자녀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1508–38)를 입양하여 시니갈리아의 시뇨리아를 우르비노와 합병했으며, 율리우스 2세가 로마냐를 재정복하는 것을 도왔다.3. 1. 11.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1508–1538)
귀도발도 1세는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를 피해 우르비노를 도망쳐야 했다. 그는 누이의 자녀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를 입양하여 시니갈리아의 시뇨리아를 우르비노와 합병했다. 율리우스 2세가 로마냐를 재정복하는 것을 도왔다. 교황 레오 10세는 귀도발도 1세에게서 영토를 빼앗아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주었고, 나중에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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