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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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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묘청의 난은 1135년 묘청 등이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이다. 묘청은 개경의 지덕이 쇠퇴했다고 주장하며 서경으로의 천도를 통해 고려의 국운을 융성하게 하고 금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묘청은 칭제건원을 주장하며 개경 세력과 대립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서경 세력의 몰락과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무신정변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으로 나뉘며,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의 좌절이라는 평가와 함께 금나라 정벌의 현실성을 지적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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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지도
기본 정보
이름묘청의 난
한글묘청의 난
한자妙淸 亂
히라가나みょうせいのらん
가타카나ミョチョンエ ナン
로마자 표기Myo-cheong-ui nan

2. 배경

묘청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들을 규합하였다. 정지상을 비롯하여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았다.[3] 묘청은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 태도를 비판하며,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주변 36개국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4]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1115년)을 건국하고 고려에게 형제관계를 요구하며 스스로 형이라고 자처했다.[2] 묘청은 이를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금나라의 국서를 내칠 것을 주장했다. 여진족은 본래 압록강 연안 및 연해주 일대에 살면서 고려에 복속해오던 민족인데, 고려 관료들은 이러한 상황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 묘청은 서경 천도와 함께 을 정벌할 것을 주장했고, 정지상, 백수한 등이 이에 동조했다.[2]

인종 때, 승려 묘청은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에 기반한 가르침을 펼쳐 개경의 문벌귀족이 지배하는 현지 귀족층 등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묘청의 지지자들은 유교를 신봉하는 개경의 관료들이 송에 대해 사대주의를 하는 것을 비판하며, 고려는 독자적인 황제와 연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풍수가 쇠퇴하고 반란이 계속되는 개경에서 풍수가 좋은 서경으로 천도하면 고려의 기세가 회복되고 주변 국가들이 모두 저절로 고려에 따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묘청은 여진족이 금을 세워 고려에 대해 형처럼 굴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서경 천도와 함께 세력을 회복하여 금을 토벌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자겸의 난(1126년)으로 왕궁이 소실되는 등 개경이 황폐해지자, 1127년 묘청은 인종에게 접근하여 서경 근처의 “대화세(大花勢)”에 신궁전을 지으면 고려가 주변 여러 나라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128년 11월, 인종은 신궁전 건설을 명령했고, 1129년 봄에 “대화궁(大花宮)”이 완성되었다. 인종은 잠시 이 궁전에 머물렀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서경 천도, 황제 즉위, 독자적인 연호 제정 등에는 응하지 않았다.

1132년, 인종은 묘청 등을 개경으로 불러 왕궁 재건 현장을 보여주었지만, 묘청은 이 장소는 풍수가 나쁘다고 주장했고, 인종은 서경 천도에 기울게 된다.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했지만, 도중에 돌풍과 폭우를 만나 묘청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이 위태로워졌다. 이후 궁정에서는 천도를 추진하는 묘청 등의 “서경파”와 천도에 반대하는 유신들의 “개경파”의 격렬한 다툼이 계속되었다. 김부식 등 “개경파”는 천도 반대 상소를 올리고, 인종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어 천도는 없던 일이 되었다.

2. 1. 서경 세력의 대두와 풍수지리설

고려 광종 이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3]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의 지덕이 쇠약해져 고려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하며, 서경 천도를 통해 국운을 융성하게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묘청은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을 내세웠다.[4]

2. 2. 개경파와 서경파의 갈등

개경에 기반을 둔 기존 세력과 서경의 신흥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개경파는 유교주의, 사대주의 세력으로, 서경파는 국수주의, 배타주의 세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인종은 묘청의 주장에 설득되어 서경 천도를 추진했으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광종 이후 서경 세력은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탄핵하여 인종의 최측근으로 부상했고,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하여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하여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묘청이 주장하였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에 맞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1126년(인종 4) 정지상은 백수한과 더불어 묘청의 주장을 거들었다. 왕의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이 내세운 풍수지리설에 설득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林原驛)[5]에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인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밖에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 천도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 임원개, 이공승, 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그 후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 왕궁이 수축되자 서경행을 결심한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까지 갔다. 왕궁을 수축하자 다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6] 이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6]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의 관복을 하사하였다.[6]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6]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7]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묘청은 상징 조작에 능했다. 이를 이용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 오히려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132년(인종 10년) 음력 2월, 인종이 묘청을 따르게 하고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고 인종을 비롯한 대소신료가 고초를 겪었다. 이에 묘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폭풍우와 고생이 묘청의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묘청은 무리수를 썼다. 기름이 들어간 떡을 강에 던졌던 것이다. 기름떡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수면에서 오색으로 빛났고, 묘청은 이를 용이 침을 토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현상은 천 년에 한 번 있기도 힘든 상서로운 기운이라는 것이다. 묘청과 검교태사를 지낸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은 이때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대신에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용의 침’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용의 침’은 기름떡을 가지고 농간한 것임이 탄로났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인종은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간은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이 무리하면서까지 대화궁 행차를 거듭 왕에게 청원한 것은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벼락을 맞아 불탄다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굶어죽기도 했으며, 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큰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 배척상소를 올렸으며, 이어서 임완(林完)이 시폐(時弊)를 통론하고,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인 김부식이 서경 행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니, 그에 인종이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3. 묘청의 난

1134년 말, 묘청 등은 인종에게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갈 것을 요청했으나 인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135년 1월, 묘청 등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개경의 귀족들을 몰아내려 하였다.[8]

인종은 개경에 있던 서경파 귀족들을 처형하고, 김부식을 지휘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보냈다. 북서 지방의 많은 성들이 잇달아 토벌군에 항복하면서 서경은 고립되었다. 장기간의 포위와 보급 차단으로 서경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이듬해 1136년 2월, 토벌군이 서경에 진입하면서 묘청은 살해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3. 1. 서경 천도 운동의 좌절과 반란의 시작

1132년(인종 10년) 묘청은 인종을 따라 서경으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자, 기름떡을 강에 던져 용의 침이라 속이는 등 상징 조작을 통해 인종의 총애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문공인과 이준양에 의해 발각되었고,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인종은 묘청을 완전히 내치지 않고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이는 묘청이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궁이 벼락을 맞아 불타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등 불길한 사건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중, 문공유 등이 묘청 배척 상소를 올렸고, 김부식이 서경 행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종은 결국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정월, 조광 및 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리를 서북인으로 채웠으며, 서북면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고, 개경으로 진격할 뜻을 밝혔다.

3. 2. 정부군의 진압

1135년(인종 13년) 묘청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종은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처형하였다.[8]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 평산역·관산역[9]·사암역[10]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토적(討賊)의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 서경 주위의 여러 성(城)을 산하에 끌어들여 이들을 달랬다.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連州)[11]를 거쳐 안북대도호부[12]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진압군)에 호응·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진압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진압군은 서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제압하여 서경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윽고 서경 주변 지역에 대한 제압이 끝나자 진압군은 서경을 포위하였다. 서경에는 7∼8차례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은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그 뒤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 교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인종과 김부식이 회유하기 위해 보낸 사절들도 죽였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 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진압군은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을 완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1136년(인종 14)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미 식량도 사기도 떨어진 반란군은 진압군이 성으로 진입하자 도망가기에 이르고, 반란군의 수장인 조광 등이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자 성 안의 사람들이 장수 최영(崔永)을 붙잡아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4. 묘청의 난의 영향과 평가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며, 성공했다면 조선사가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묘청 개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묘청의 난이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일 뿐이며, 금국 정벌론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이 서경천도운동은 묘청 세력의 공명심, 서경 사람들의 기질, 정치적 혁신 의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국내외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개경 귀족 사회의 부패를 막고, 음양도참설을 이용해 서경 중심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묘청의 난으로 서경 귀족 세력은 쇠퇴했고, 개경 귀족 세력은 더욱 권력을 강화했다. 난을 진압한 문신들이 무신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면서 무신들의 불만이 쌓였고, 이는 결국 무신정변으로 이어졌다.

4. 1.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고려 사회는 표면상으로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 반란은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큰 변화는 권력 구조에서 서경의 지위가 크게 낮아진 것이다. 이로 인해 고려 권력 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했다. 이는 문신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아, 훗날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문신 귀족 세력은 더욱 득세하여 왕권마저 무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이자겸의 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할 기회가 있었지만, 인종은 인재 기용에 실패하여 이 기회를 놓쳤다. 결국 의종 대에 이르러 무신의 난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 체제가 붕괴되고,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 문신 귀족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훗날 무신정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묘청의 난으로 서경 귀족 세력은 쇠퇴했고, 서경의 견제를 받지 않게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제재 없이 권력을 휘둘렀다. 난을 진압한 문신이 무신에 대해 더욱 우월해지면서 무신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1170년, 무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학살했고(경인의 난), 이후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가 되었다.

4. 2. 역사적 평가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신채호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높이 평가하며, 낭가, 불가 사상과 유가 사상의 대립, 독립당과 사대당의 대립, 진취적 사상과 보수적 사상의 대립으로 규정했다.[13][14][15]

반면, 묘청의 금국정벌론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적 평가도 있다. 이러한 비판은 묘청 세력의 주장이 실현되기 어려웠고, 당시 고려군의 전력으로는 금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16]

묘청의 난은 고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난이 진압된 후 서경 귀족 세력은 쇠퇴했고, 개경 귀족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또한, 난을 진압한 문신들이 무신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면서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결국 무신정변으로 이어졌다.

4. 2. 1. 신채호의 평가와 그에 대한 반론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했다. 만일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묘청 개인에 대해서는 광망하다는 표현을 쓰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3]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시 개경 세력과 이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의 권력 투쟁일 뿐이며, 금국 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채호는 한국 고유의 낭가사상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좌절로 단절되었다고 보았다.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한국어

조선사연구초

신채호는 묘청의 운동을 낭불양가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했다.[14] 그는 '우리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고 하면서,[15] 이 사건이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고 했다.[15] 그는 낭·불 양가 대 유가, 국풍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며 전자의 대표는 묘청, 후자의 대표는 김부식이라고 하였다.[15]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14]

묘청이 주장한 금국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도 있다.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라는 주장 때문이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이 거의 힘들었으며, 기병 강국이던 금나라를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공격하여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산성 중심으로 적 기병대의 충격력과 기동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으나, 만주로 공격을 하게 된다면 우수한 기병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절대 불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5. 묘청의 난과 관련된 인물

1135년부터 1136년까지 고려 인종 때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이 일으킨 묘청의 난에는 여러 인물들이 관여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역할 및 활동
묘청서경천도 운동을 주도한 승려.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고, 정벌과 칭제건원을 주장했다. 난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우고 천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8]
김부식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대표. 묘청과 서경 세력에 반대하며 사대적 입장을 견지했다. 묘청의 난 진압군을 이끌며 난을 진압했다.[6]
정지상서경 출신의 시인.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고 서경 천도 운동을 지지했다.[5]
조광묘청의 난에 가담한 서경의 분사시랑. 묘청 사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다 자결했다.[12]



이 외에도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로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을 모으는데 기여했다.[3]

5. 1. 묘청

묘청은 서경천도론을 처음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백수한을 제자로 삼아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 세력을 모았다.[3] 정지상,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영향을 받았다.[3]

묘청은 유교를 믿는 관료들의 사대적 태도를 비판하며, 고려중국처럼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개경은 이미 기운이 다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주변 36개국이 복속할 것이라고 왕을 설득했다.[4]

당시 여진족이 세운 (1115년)이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스스로 형이라 칭하자, 묘청은 이를 옳지 않다며 금나라의 국서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여진족은 원래 압록강 연안과 연해주 일대에 살면서 고려에 복속해왔다. 고려 관료들이 이러한 치욕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묘청은 서경 천도와 함께 정벌을 주장했다. 정지상, 백수한 등도 칭제건원과 북벌에 적극 동참했다.[2]

광종 이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던 서경 세력이 부상했다. 특히 서경 출신 시인 정지상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척준경을 탄핵하여 인종의 측근으로 떠올랐다. 정지상은 묘청의 사상을 믿고 인종에게 묘청을 소개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묘청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해져 고려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도를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옮기면 국운이 융성해지고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했다. 묘청 일파는 도참설을 바탕으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국수주의, 배타주의 세력 또는 “서경파”로 불리기도 한다.

신라 말기부터 풍수지리설이 유행했기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다. 1126년(인종 4) 정지상도 백수한과 함께 묘청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들은 왕의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묘청은 인종의 총애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1127년(인종 5) 이후 인종은 서경에 자주 갔다. 서경 천도는 곧 실현될 듯 보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풍수지리설에 설득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 행차를 성공시키고 15개 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했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등이 고려에 항복할 것이라고 하여 서경 천도 운동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자 신궁 건설에 착수했다.

1131년(인종 9) 묘청은 인종을 설득해 새 궁궐에 팔성당을 짓고 8개의 상(像)을 안치했다. 1132년 왕은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버린 개경의 궁궐을 수리할 때 묘청과 그 일파에게 궁터를 보게 했다. 묘청은 서경 천도를 위해 개경의 궁터가 서경보다 못하다고 주장하여 공사는 중지되었다.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가서 천도를 결정하려 했으나, 김부식, 임원개, 이공승, 이지저 등 개경 귀족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가 1132년 왕궁이 수리되자 서경행을 결심했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까지 갔다. 그러나 갑자기 폭우와 돌풍이 불어 인종을 태운 말들이 진창에 빠지고, 호종하던 시종들이 왕의 행방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 때문에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6] 서경 가는 길의 사고는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1133년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묘청과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했지만 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로 삼고 자색 관복을 하사했다.[6]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 '칭제건원'을 상소했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 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6]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7] 김부식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나타났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하고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준공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묘청은 상징 조작에 능했다. 이를 이용해 인종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차지했지만, 그 도가 지나쳐 신뢰를 잃게 되었다. 1132년(인종 10년) 음력 2월, 인종이 묘청을 따라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인종을 비롯한 신하들이 고초를 겪었다. 묘청은 기름떡을 강에 던져 수면에서 오색 빛이 나게 하고, 이를 용의 침이라 속였다. 묘청과 검교태사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은 금나라 공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 ‘용의 침’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용의 침’은 기름떡을 이용한 속임수로 밝혀졌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떨어졌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이 대화궁 행차를 거듭 왕에게 청원한 것은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벼락을 맞아 불타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기도 했으며,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위험을 겪기도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이 묘청 배척 상소를 올렸고, 임완(林完)이 시폐(時弊)를 비판했으며, 김부식이 서경 행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35년(인종 13년) 정월, 묘청은 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란을 일으켜 개경에서 파견된 관리들과 서경에 와 있던 사람을 모두 가두었다.[8]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리를 서북인으로 채웠으며, 서북면 안의 모든 군대를 서경에 집결시키고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 군대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할 뜻을 밝혔다.

5. 2. 김부식

김부식이자겸의 난 이후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묘청정지상서경 세력의 주장에 반대하며, 사대적인 입장을 견지했다.[6] 인종이 묘청의 주장에 따라 서경 천도를 추진하려 할 때, 김부식은 임원개, 이공승, 이지저 등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6]

1132년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고, 묘청이 기름떡을 이용해 조작한 사건이 발생하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 귀족들은 묘청 일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6] 1133년에는 묘청을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1134년 묘청이 '칭제건원'을 주장하자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은 더욱 강하게 반발했다.[6]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자, 인종은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삼아 진압군을 이끌게 했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을 처형했다.[9]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 평산·성천 등을 거쳐 안북에 이르렀다.[11][12] 그는 서경 주변의 여러 성을 설득하여 진압군에 협력하게 만들었고, 서경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9][10]

진압군은 서경을 포위하고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묘청이 죽은 후에도 조광 등은 항전을 계속했다. 1136년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여 서경을 함락시켰고, 조광 등은 자결함으로써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적 조치와 함께 외교적 노력을 병행하여, 고려 왕조의 안정을 도모했다.

5. 3. 정지상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척준경을 탄핵하여 인종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그는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고,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5]

1126년(인종 4) 정지상백수한과 함께 묘청의 주장을 지지하며, 왕의 측근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고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128년(인종 6) 묘청의 건의에 따라 임원역대화궁을 건설하여 서경 천도 운동을 추진하는데 힘을 보탰다.

5. 4. 조광

1135년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은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9] 이를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하고 개경 정부의 어떠한 회유도 거절하며 인종과 김부식이 보낸 사절들을 죽였다.[10]

묘청이 죽은 후에도 반란군은 결사 항전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떨어졌다. 1136년 2월, 진압군의 총공격에 반란군은 도망쳤고, 조광 등은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었다. 성 안의 사람들이 장수 최영(崔永)을 붙잡아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난은 끝났다.[11] 조광趙匡중국어은 고려 인종 때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12]

참조

[1] 문서 평양
[2]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3]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4]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5] 문서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7]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8] 문서 개경 사람
[9] 문서 신계
[10] 문서 수안
[11] 문서 개천
[12] 문서 안주
[13] 문서 김부식
[14] 서적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5]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16]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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