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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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리 수도원은 1027년 합스부르크의 라드보트 백작에 의해 설립된 스위스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다. 검은 숲의 성 블레이즈 수도사들이 합류하고, 헨리 5세 황제와 교황들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했다. 18세기에는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수도원장을 제국 공작으로 승격시키고 재건을 지원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1841년 폐쇄되었지만, 공동체는 해체되지 않고 티롤의 그리스로 이전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무리 수도원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요 매장지이며, 20세기 마지막 황실 부부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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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닉스펠덴 수도원은 알브레히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남편을 기리기 위해 설립,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원으로 발전했으나 종교개혁으로 폐쇄 후 정신 병원으로 전환되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 인물들이 매장되어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무리 수도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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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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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스위스 |
국가 | 스위스 |
지방 | 유럽 |
현지 이름 | Kloster Muri |
현지 언어 | 독일어 |
역사 | |
건설 | 1064년 |
건축 | |
건축 양식 |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
건축가 | 알 수 없음 |
관리 | |
관리 주체 | 알 수 없음 |
지정 정보 | |
문화재 지정 | 알 수 없음 |
참고 자료 | |
참고 웹사이트 | The Catholic Encyclopedia의 Muri 항목 |
2. 역사
무리 수도원의 역사는 1027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합스부르크의 라드보트 백작이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아인지델른 수도원 출신 수도사들이 정착했고, 이후 생 블레즈 수도원 수도사들이 합류하면서 성장했다. 란첼린, 쿠노, 헨리 소이크, 헨리 드 쇤베르트 등 수도원장들의 지도 아래 종교적, 문화적으로 발전했다.
1300년과 1363년 두 차례의 화재와 전쟁, 봉기 등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콘라드 2세와 조지 러싱거 수도원장 시대에 수도원 개혁을 통해 다시 일어섰다. 1530년대 개신교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불링거와 친분이 있던 로렌티우스 폰 하이데크 수도원장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후 야콥 마이어 수도원장의 경제적 실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요한 요독 지기젠 수도원장이 개혁을 통해 수도원을 재건하고 스위스 수도회 설립에 기여했다. 18세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 지위를 얻고 수도원과 교회를 재건하며 번영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아르가우 주의 종교 탄압으로 수도원은 해산되었지만, 공동체는 운터발덴 주로 이전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황제의 제안으로 그리스로 이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리 수도원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매장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 부부의 심장이 로레토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
2. 1. 설립과 초기 발전 (11세기 - 15세기)
바젤 교구(원래는 콘스탄츠 교구) 아르가우주 무리에 있는 성 마르틴 수도원은 1027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조 중 한 명인 합스부르크의 라드보트 백작이 설립했다. 룩셈부르크의 프리드리히 2세의 딸인 라(Rha)와 스트라스부르크 주교 베르너는 각각 그들이 세운 수도원에 토지의 일부를 기부했다. 수도사 정착지는 원장 레긴볼트(Reginbold)의 지도 하에 인근 아인지델른 수도원에서 왔다. 1055년 그가 사망하자 부르하르트(Burchard)가 수도원의 첫 번째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대수도원 교회가 1064년에 축성되었다.[1]이즈음에 검은 숲에 있는 생 블레즈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합류하면서 공동체가 강화되었으며, 그중 한 사람인 복자 루이트프리드가 1096년 12월 31일 죽을 때까지 두 공동체의 통치를 계속했다. 수도원은 유능한 수도원장들의 지도 하에 종교와 문명의 조용한 활동을 추구했으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1]
- 란첼린 (Ranzelin)
- 학교 설립자이자 수도원 도서관에 대한 관대한 후원자 쿠노(Cuno)
- 토지 재산을 크게 늘렸던 헨리 소이크(Henry Scheuk)
- 헨리 드 쇤베르트(Henry de Schoenwerd)
쇤베르트의 통치 아래서 온 가문이 종교 생활을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아들들과 함께 수도사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의 아내와 딸들은 인접한 수녀원에 합류했는데, 이 수녀원은 나중에 무리에서 약 8km 떨어진 헤르메치빌로 옮겨졌다. 무리의 수도원이 누리는 좋은 평판은 많은 친구들을 얻었다. 1114년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는 이곳을 자신의 특별한 보호하에 두었다. 그리고 교황들은 그 복지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1]
수도원은 좋은 운과 나쁜 운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1300년과 1363년에 두 차례의 재앙적인 화재로 무너졌다. 전쟁과 봉기도 한동안 이어졌다. 콘라드 2세 대수도원장 치하에서 예전의 삶의 일부를 회복했지만, 구 스위스 연방과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전쟁에서 그의 후계자인 조지 러싱거의 재위 기간 동안 다시 고통을 겪었다.[1]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 참여했던 러싱거는 수도원 개혁에 착수하여, 베네딕토회의 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1446년에 설립된 남녀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연합인 새로 형성된 부르스펠데 수도회에 합류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는 무리의 수도원장들에게 교황 예복의 사용을 승인했다.[1]
2. 2. 종교개혁과 시련 (16세기 - 17세기)
1530년대에 수도원은 구스위스 연방의 주도 세력이자 신생 개신교 세력인 베른의 군대에 의해 공격받았다. 취리히의 대표적인 개혁가인 하인리히 불링거와 친구였던 로렌티우스 폰 하이데크 수도원장(1508-1540) 덕분에 수도원은 살아남았다.[6]
루체른 귀족 가문 출신인 야콥 마이어 수도원장의 통치는 경제적 재앙으로 판명되었다. 마이어는 결국 1596년에 수도원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요한 요독 지기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수도원의 두 번째 창립자임을 증명했으며, 스위스의 다른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까지 그의 보살핌을 확장했으며, 1602년에 설립된 스위스 수도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였다. 그의 노력으로 규율이 회복되었다. 신심과 학식을 갖춘 수도사들이 무리에서 나와 절반쯤 비어있던 수도원을 다시 채웠다. 그의 지혜로 수많은 혁명에서 살아남은 수녀 공동체를 위한 적절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도미니크 추디는 학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1595년에 바덴에서 태어나 1654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합스부르크 백작의 기원과 족보》이다.[6]
2. 3. 바로크 시대와 재건 (18세기)
18세기에 무리 수도원은 새로운 영예를 얻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플라시드 추르라우벤 수도원장과 그의 후임자를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으로 승격시켰다. 레오폴트 1세는 황실 가족의 고대 묘소였던 수도원과 교회를 재건하고 장식하는 데 막대한 돈을 썼다.[6] 수도원은 모든 면에서 계속 번영했으며, 훌륭한 규율을 유지했고 많은 저명한 성직자와 학자들이 그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6]프랑스 혁명이 확산되면서 아르가우 주는 종교 기관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무리 수도원은 오랜 저항 끝에 복종해야 했다. 수도원장은 노인이 되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엥겔베르크 수도원으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1838년 11월 5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후임인 아달베르트 레글리가 1841년에 주에서 수도원을 폐쇄한 후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6] 무리에서 추방된 후, 공동체는 운터발덴 주로 이전했다.
2. 4. 프랑스 혁명, 해산, 그리고 복원 (19세기 - 현재)
프랑스 혁명이 확산되면서, 아르가우 주는 종교 기관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무리 수도원은 오랜 저항 끝에 결국 굴복해야 했다. 당시 수도원장은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더 유리한 위치에 있던 엥겔베르크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1838년 11월 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임자인 아달베르트 레글리(D. Adalbert Regli)가 1841년 주 정부의 수도원 폐쇄 결정 이후의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무리에서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다. 수도원장과 몇몇 수도사들은 운터발덴 주에서 환영받았고, 그곳에서 자르넨 주립 대학 운영을 맡게 되었다.[6]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수도사들에게 1807년 이후 비어 있던 티롤의 보첸 근처 그리스(Gries)에 있는 오래된 라테란 수도원을 거주지로 제안할 때까지, 수도사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교황청은 이 제안을 승인했고, 무리 공동체를 그리스로 이전하는 것을 확정했다(1844년 9월 16일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요약서). 복잡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그리스 가문은 수도원으로서 이전 지위를 계속 유지했고,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되는 무리의 스위스 수도원과 통합되었다. 무리의 수도원장은 동시에 그리스의 수도원장이었다.[6]
무리 수도원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선호하는 매장지였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통치했던 황실 부부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현 복자 카를 1세, 1887-1922)와 그의 배우자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공주(현 하느님의 종, 1892-1989)의 심장은 로레토 예배당의 가족 묘지에 안치되어 있으며,[3] 그들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 (1919–2010)과 오스트리아의 펠릭스 대공의 시신도 그곳에 있다.
3.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 중 한 명인 합스부르크의 라드보트 백작은 1027년에 무리 수도원을 설립했다.[6] 로렌 공작 프레데릭의 딸인 라와 스트라스부르크 주교 베르너는 각각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했다.[1]
18세기에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플라시드 추르라우벤 수도원장과 그의 후임자를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으로 승격시켰고, 황실 가족의 고대 묘소였던 수도원과 교회를 재건하고 장식하는 데 막대한 돈을 썼다.[1]
무리 수도원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선호하는 매장지였다.[3]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장 오래된 매장지는 수도원 교회에 있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통치했던 황실 부부인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복자 카를 1세, 1887–1922)와 그의 배우자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공주(하느님의 종, 1892–1989)의 심장은 로레토 예배당의 가족 묘지에 있으며,[3] 그들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 (1919–2010)과 오스트리아의 펠릭스 대공의 시신도 거기에 안치되어 있다.
참조
[1]
백과사전
Mur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2]
서적
Engelbergs Gründung und die erste Blüte 1120–1223
https://www.e-helvet[...]
Verlag Lehmann
[3]
웹사이트
Muri Abbey and the Habsburg burial place
https://www.myswitze[...]
[4]
웹사이트
Klosterkirche Muri
https://www.myswitze[...]
[5]
웹사이트
ISOS site
http://www.isos.ch/e[...]
2010-05-26
[6]
백과사전
Mur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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