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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바이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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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우라 바이엔은 1723년 일본 규슈 지역에서 태어난 에도 시대의 의사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고 나가사키에서 유학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 활동을 펼치며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사상은 조리학(條理學)으로 대표되며, 기(気)와 같은 용어를 독특하게 사용하여 우주와 인간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했다. 사후 잊혀졌으나, 1900년대 초 재평가를 통해 그의 사상적 가치가 인정받았으며, 현재 그의 옛 저택과 자료관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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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바이엔
기본 정보
미우라 바이엔
미우라 바이엔
이름미우라 바이엔 (三浦梅園)
본명미우라 스스무 (三浦晋), 미우라 야스사다 (三浦安貞), 미우라 스스무 야스사다 (三浦晋安貞)
학문 분야 및 사상
분야일본 철학, 동아시아 지성사
주요 관심사자연 철학, 인식론, 과학적 방법, 윤리학, 대칭
주요 사상조리학
생애
출생일1723년 9월 1일
출생지오이타현 아키, 분고국, 일본
사망일1789년 4월 9일
사망지아키, 일본
시대에도 시대
학문적 배경
영향(정보 없음)
영향을 준 인물(정보 없음)
주요 저서
주요 저서『현어(玄語)』, 『췌어(贅語)』, 『감어(敢語)』 (매원삼어(梅園三語))

2. 생애

미우라 바이엔은 오이타현 구니사키시 아키 지역인 규슈섬 분고국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부터 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23세에 나가사키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다.[1] 28세에 이세 신궁을 순례한 후, 한동안 나가사키에 머물다가 고향인 구니사키로 돌아왔다.[1]

그의 철학적 연구는 사후 잊혀졌다가 1912년에 『메이엔 전집(梅園全集)』 2권이 출판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에 사에구사 히로토의 『미우라 바이엔 집(三浦梅園集)』이 출판될 때까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75년에는 도쿄대학의 오가와 하루히사를 회장으로 하는 바이엔 학회(梅園学会)가 설립되었고, 바이엔 학회의 연례 학술지를 편집하고 있다. 그 이후로 매년 학술대회가 개최되고 있다.[1]

2. 1. 출생과 성장

미우라 바이엔은 분고국(지금의 오이타현 구니사키시 아키 지역)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1] 16세 무렵 아야베 케이사이와 후지타 케이쇼에게 배웠으며,[1] 23세에 나가사키다자이후 일대를 유학했다.[1] 28세에는 이세 신궁을 참배하고 나가사키에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1] 이후 여러 봉건 영주들의 초빙을 거절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1]

그의 먼 조상은 사가미국 미우라 출신으로 가마쿠라 막부에 봉직했으나, 어떤 사정으로 분고국 구니사키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1] 조부 대부터 의술을 가업으로 삼았다.[1]

2. 2. 유학과 귀향

미우라 바이엔은 현재의 오이타현 구니사키시 아키 지역인 분고국 마을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부터 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23세에 나가사키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다.[1] 28세에 이세 신궁을 순례한 후, 한동안 나가사키에 머물다가 고향인 구니사키로 돌아왔다.[1] 그는 여러 지역 다이묘의 초청을 여러 차례 거절하고, 의학, 시가, 사회경제사, 비판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하며 자신의 철학과 학문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선호했다.[1]

그의 먼 조상은 사가미국 미우라 출신으로 가마쿠라 막부에 봉직했으나, 사정이 있어 분고국 구니사키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1] 조부 대부터 의술을 가업으로 삼았으며, 16세 무렵에는 아야베 케이사이와 후지타 케이쇼에게 사사했다.[1] 23세에 나가사키와 다자이후 일대를 유학하고,[1] 28세에 이세 신궁을 참배했으며, 말년에 다시 나가사키를 여행했다.[1] 그 외에는 고향인 구니사키에서 지냈으며, 여러 봉건 영주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초빙도 계속 거절했다.[1]

2. 3. 학문적 성취와 저술 활동

미우라 바이엔은 특정 학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학문 체계인 조리학(条理学)을 구축하여 『현어(玄語)』, 『췌어(贅語)』, 『감어(敢語)』를 저술했다.[1] 이들은 메이엔 스스로 “메이엔 삼어(梅園三語)”로 명명했으며, 그의 사상의 골격을 이룬다.[1]

“메이엔 삼어” 외에도 시학 개론 『시철(詩轍)』, 경세론 『가원(価原)』, 의학서 『신생여담(身生餘譚)』, 『조물여담(造物餘譚)』 등을 저술했다.[1] 특히 『가원(価原)』은 사회경제사에서도 주목받는 문헌이다.[1]

그의 독서 일기 『우자수기(浦子手記)』에는 도가(道家) 계보의 철학 개론 『회남자(淮南子)』, 서양 천문학설 『천경혹문(天経或問)』을 비롯하여 『장자(荘子)』, 『열자(列子)』, 송학(宋学), 주자학(朱子学), 불교 서적 등 많은 서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미우라 바이엔의 사상이 이러한 한적(漢籍)의 교양 위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중국의 도홍경(陶弘景)과 한강백(韓康伯)의 인품을 사모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지역 다이묘(大名)의 초청을 여러 차례 거절하고, 의학, 시가, 사회경제사, 비판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하며 자신의 철학과 학문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그의 저술은 중국 고전(中国古典)부터 서양 천문학 이론, 일본 성리학(日本朱子学), 도교(道教), 불교 경전(仏教経典), 그리고 도홍경(陶弘景)의 저술과 같은 다른 저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를 참고했다.

2. 4. 만년과 죽음

미우라 바이엔은 현재의 오이타현 구니사키시 아키 지역인 규슈섬 분고국(豊後国)의 마을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부터 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23세에 나가사키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다. 28세에 이세 신궁을 순례한 후, 한동안 나가사키에 머물다가 고향인 구니사키로 돌아왔다. 그는 여러 지역 다이묘의 초청을 여러 차례 거절하고, 의학, 시가, 사회경제사, 비판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술하며 자신의 철학과 학문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그의 저술은 중국 고전부터 서양 천문학 이론, 일본 성리학(일본 주자학), 도교(道教), 불교 경전(仏教経典), 그리고 도홍경의 저술과 같은 다른 저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를 참고했다.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철학적 연구는 사후 잊혀졌다가 1912년에 『梅園全集』(바이엔 젠슈) 2권이 출판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에 사에구사 히로토의 『三浦梅園集』(미우라 바이엔슈)이 출판될 때까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75년에는 도쿄대학의 오가와 하루히사를 회장으로 하는 바이엔 학회(梅園学会)가 설립되었고, 바이엔 학회의 연례 학술지를 편집하고 있다. 그 이후로 매년 학술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3. 사상

미우라 바이엔은 기(気)를 비롯한 여러 개념들이 서로 짝을 이루며, 그 짝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조리(條理)'라는 독특한 철학 체계를 제시했다.[1] 그는 우주를 옷감에 비유하며, 보이는 현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세계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전체와 측면", "전체와 부분"이라는 조리 쌍에서 전체는 짝을 이루는 개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2]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는 바이엔의 조리 체계가 보어의 상보성 이론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2]

바이엔은 중국의 음양론이나 유럽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원론을 제시했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동서양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다.[3] 아사다 고류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 과학 지식을 접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론을 추구했다.[4]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활용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조리 체계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5] 자신의 저술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비추어 검증할 것을 권고했다.[7]

3. 1. 조리학(條理學)

미우라 바이엔은 조리(條理)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짝지어지는 용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다. 특히 '기(気)'라는 용어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했다.[1] 예를 들어 비단 한 조각을 보면, 날것의 면은 날실과 씨실, 진홍색 실과 녹색 실로 구성되지만, 완성된 면에는 꽃과 풀, 신화 속의 새들이 있다. 바이엔은 우주도 이와 같아서, 한쪽 면은 나무, 별, 일상적인 것들로 구성된 현실 세계이지만, 다른 면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원자 입자로 구성될 수도 있는 또 다른 현실 세계라고 보았다. 이처럼 두 면이 다르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전체와 측면", "전체와 부분"이라는 조리 쌍에서 "전체"의 의미가 "측면" 또는 "부분"과 짝을 이루는지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2]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는 바이엔의 조리 체계가 보어(Bohr)의 파동과 입자 이론의 상보성 이론에 적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2]

바이엔은 음양(陰陽)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역경(易經)에 나타나지만, 그 의미가 때로는 (道), 때로는 형상, 때로는 선(線)으로 다양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역경이 점복에 대한 설명이지만, 하늘과 땅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3] 바이엔의 이원론은 중국의 음양론이나 유럽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다른 독자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통을 깨고 어떤 사상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었다.[3]

바이엔은 아사다 고류(浅田 ゴ流)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사다가 직접 만든 기구로 태양 표면의 흑점, 달 표면의 세부 사항, 금성의 위상, 토성과 목성의 위성 움직임, 태양 주위 행성 궤도 등을 발견한 것에 대해 칭찬했다. 아사다 고류는 일본이 서구에 폐쇄되었을 때 독자적으로 케플러의 제3행성 운동 법칙을 발견한 인물이다. 바이엔은 이러한 과학적 발견이 자신의 조리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고 언급했다.[4]

바이엔은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다이어그램을 많이 그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조리 체계를 나타내기에 부족하다고 인정했다.[5] 그는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고, 어떤 지점에서든 바퀴를 돌리듯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6] 또한 자신의 사고방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말고 하늘과 땅으로 확인하고, 하늘과 땅이 정확하다고 보여주는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7]

3. 2. 자연관

미우라 바이엔은 기(気)를 비롯한 조리(條理) 용어를 독특하게 정의하여 자연을 설명했다. 그는 만물이 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는 짝지어지는 용어에 따라 의미가 변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비단 한 조각은 날것의 면과 완성된 면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니는데, 이는 우주가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그 이면의 본질(예: 끊임없이 움직이는 원자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의 우주관을 반영한다.[2] 이러한 "전체와 측면", "전체와 부분"이라는 개념은 보어(Bohr)의 파동-입자 상보성 이론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2]

그는 음양(陰陽)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사용했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음양론이나 서양의 변증법적 유물론과는 다른 것이었다.[3] 그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했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의 저작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3]

미우라 바이엔은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기술로는 완전히 모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5]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활용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조리 체계를 온전히 표현하기 어렵다고 인정했다.[5] 그는 자신의 이론이 오류를 포함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비추어 판단할 것을 권고했다.[7]

당시 일본 학자 아사다 고류(浅田 ゴ流)는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아 케플러의 제3행성 운동 법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하기도 했다.[4] 미우라 바이엔은 아사다 고류의 연구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관측 결과가 자신의 조리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다.[4]

3. 3. 인간관

미우라 바이엔은 기(気)를 우주의 근본적인 요소로 보았으며, 이는 서양 철학의 물질이나 에너지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는 기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만물은 기의 특정한 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례지(例旨)』에서 그는 "내가 ‘기(気)’라는 말을 쓸 때, 기와 사물, 기와 몸, 기와 형태, 기와 물질, 기와 이미지, 하늘과 기, 마음과 기, 기와 색깔 등의 종류가 있다"고 언급하며 기의 다양한 형태를 설명한다.[1]

바이엔은 정신을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는 정신이 인간의 사고와 인식 능력을 담당하며, 우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례지(例旨)』에서 그는 "내가 ‘정신’이라는 말을 쓸 때, 하늘과 정신, 본질과 정신, 정신과 사물, 정신과 영혼, 허상과 정신, 정신과 인간, 총명함과 정신 등의 종류가 있다"고 말하며 정신의 다양한 측면을 제시한다.[1]

그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믿었으며, 교육과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며,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바이엔은 『혼소(本宗)』에서 옷감의 비유를 통해 우주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현상)과 그 이면의 본질(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예를 들어, 비단 한 조각을 가져보자. 날것의 면은 날실과 씨실, 진홍색 실과 녹색 실로 구성되어 있지만, 완성된 면에는 꽃과 풀, 그리고 신화 속의 새들이 있다"고 말하며, 현상 세계의 다양성과 그 이면에 있는 본질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2]

그는 음양(陰陽)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철학에 통합했다. 음양을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보았다. 유니사키 요시타다(湯崎吉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陰)과 양(陽)이라는 항목은 처음으로 역경(易經)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 의미는 때로는 도(道), 때로는 형상, 때로는 선(線)이었다"고 언급하며, 전통적인 음양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이를 재해석했음을 보여준다.[3]

바이엔은 자신의 이론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독자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글을 읽을 것을 권했다. 다가 보케이(田賀伯渓)에게 보낸 답장에서 "사람은 나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되고, 하늘과 땅으로 확인하고, 하늘과 땅이 정확하다고 보여주는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론에 대한 열린 태도를 보여주었다.[7]

3. 4. 사회관

미우라 바이엔은 기(気)를 포함한 다양한 개념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 의미가 변하는 '조리(條理)'라는 독특한 철학 체계를 제시했다.[1] 그는 우주를 옷감에 비유하며, 보이는 현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세계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전체와 측면", "전체와 부분"이라는 조리 쌍을 통해 설명되며, 전체는 짝을 이루는 개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2] 유가와 히데키는 바이엔의 조리 체계가 보어의 상보성 이론에 적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2]

바이엔은 중국의 음양론이나 유럽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다른 독자적인 이원론을 제시했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동서양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다.[3]

그는 또한 아사다 고류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 과학 지식을 접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론을 추구했다.[4] 그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활용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조리 체계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5] 그는 자신의 저술이 오류를 포함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비추어 검증할 것을 권고했다.[7]

4. 평가 및 영향

미우라 바이엔은 에도 시대철학자이자 박물학자였다. 그의 사상과 저술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후대에 재평가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나이토 나가오카 등이 토미나가 나카모토, 야마가타 반토와 함께 바이엔을 재평가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4] 1912년에는 종사위가 추증되었다.[5]

21세기 그의 고향인 아키정에는 구택과 묘소(국가사적)가 있으며,[6] 근처에는 "미우라 바이엔 자료관"이 있어 자필 원고와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 지도, 남천도·북천도 등을 보관하고 있다.

4. 1. 후대의 재평가

메이지 30년대(1900년 전후) 무렵, 나이토 나가오카가 토미나가 나카모토, 야마가타 반토와 함께 미우라 바이엔을 재평가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4]

1912년(메이지 45년), 종사위가 추증되었다.[5]

21세기 현재, 고향인 아키정에 구택과 묘소(국가사적)가 있으며,[6] 근처에는 숙박 시설, 캠핑장, 천문대, 매실원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시설인 "매실원의 마을"과 방대한 자필 원고류가 모두 보관되어 있는 "미우라 바이엔 자료관"(2006년 설치)이 있다. 보관물에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 지도(바이엔 자신의 필사)와 남천도·북천도(남반구·북반구의 항성도. 동전) 등도 있다.

5. 유적 및 기념 시설

메이지 30년대(1900년 전후) 무렵, 나이토 나가오카가 토미나가 나카모토와 야마가타 반토와 함께 미우라 바이엔을 재평가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4] 1912년에는 종사위가 추증되었다.[5]

5. 1. 미우라 바이엔 구택

미우라 바이엔의 옛 저택은 1959년부터 국가 중요문화재로 보존되어 왔다.[1] 이 집은 미우라 바이엔이 직접 설계하고 1775년에 건축한 것으로,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저택은 남쪽으로 흐르는 강의 오른쪽 제방에 위치하며, 완만한 경사면 동쪽을 향하고 있다. 건물은 좁은 정원과 함께 흙바닥 방이 오른쪽에, 응접실이 왼쪽에, 그리고 현관이 있는 초가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이 건물의 남쪽에는 한 단 높은 직사각형의 평평한 공간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곳은 그의 서당 터로, 낮은 돌담과 돌바닥, 우물이 있다. 서당 터의 남쪽에는 작은 언덕 위에 그의 묘가 있는 가족 묘지가 있다. 약 189m2의 면적을 가진 이 저택은 현재 "미우라 바이엔 박물관"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천문대, 매화 정원 등과 함께 다수의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에는 미우라 바이엔 자신의 필체로 그려진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제작된 세계지도와 남반구 및 북반구의 별자리 지도 등이 있다.

21세기 현재, 고향인 아키정에 구택과 묘소(국가사적)가 있으며, 근처에는 숙박 시설, 캠핑장, 천문대, 매실원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시설인 "매실원의 마을"과 방대한 자필 원고류가 모두 보관되어 있는 "미우라 바이엔 자료관"(2006년 설치[6])이 있다. 보관물에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 지도(바이엔 자신의 필사)와 남천도·북천도(남반구·북반구의 항성도. 동전) 등도 있다.

5. 2. 미우라 바이엔 자료관

아키정에 있는 미우라 바이엔의 옛 저택과 묘소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 근처에는 숙박 시설, 캠핑장, 천문대, 매실원 등으로 구성된 복합시설 "매실원의 마을"이 있으며, "미우라 바이엔 자료관"이 2006년에 설치되었다.[6] 자료관에는 미우라 바이엔의 자필 원고류가 보관되어 있는데,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 지도와 남천도·북천도(남반구·북반구의 항성도) 등이 있다.

5. 3. 기타

미우라 바이엔의 옛 저택은 1959년부터 국가 중요문화재로 보존되어 왔다.[1] 이 집은 미우라 바이엔이 직접 설계하고 1775년에 건축한 것으로, 그는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저택은 남쪽으로 흐르는 강의 오른쪽 제방에 위치하며, 완만한 경사면 동쪽을 향하고 있다. 건물은 좁은 정원과 함께 흙바닥 방이 오른쪽에, 응접실이 왼쪽에, 그리고 현관이 있는 초가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이 건물의 남쪽에는 한 단 높은 직사각형의 평평한 공간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곳은 그의 서당 터로, 낮은 돌담과 돌바닥, 우물이 있다. 서당 터의 남쪽에는 작은 언덕 위에 그의 묘가 있는 가족 묘지가 있다. 189m2 면적의 이 저택은 현재 "미우라 바이엔 박물관"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천문대, 매화 정원 등과 함께 다수의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에는 미우라 바이엔 자신의 필체로 그려진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제작된 세계지도와 남반구 및 북반구의 별자리 지도 등이 있다.

메이지 30년대(1900년 전후) 무렵, 나이토 나가오카가 토미나가 나카모토와 야마가타 반토와 함께 재평가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4] 1912년에는 종사위가 추증되었다.[5]

21세기 현재, 고향인 아키정에 구택과 묘소(국가사적)가 있으며, 근처에는 숙박 시설, 캠핑장, 천문대, 매실원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시설인 "매실원의 마을"과 방대한 자필 원고류가 모두 보관되어 있는 "미우라 바이엔 자료관"(2006년 설치[6])이 있다. 보관물에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세계 지도(바이엔 자신의 필사)와 남천도·북천도(남반구·북반구의 항성도. 동전) 등도 있다.

6. 주요 저서

미우라 바이엔은 여러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은 "삼어(三語)"라고 불리는 『현어(玄語)』, 『췌어(贅語)』, 『감어(敢語)』이다.[7] 이 외에도 시학 개론서인 『시철(詩轍)』, 경세론인 『가원(価原)』, 의학서인 『신생여담(身生餘譚)』과 『조물여담(造物餘譚)』 등을 저술했다.[7]


  • 『겐키론』(Genkiron, 1753): 『깊은 말』(Deep Words)에 수록됨.
  • 『아사다 고류(Asada Gōryū)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sada Gōryū, 1763)
  • 『가겐(価原)』(Kagen, 가격의 기원, 1773)
  • 『겐고 혼소』(Gengo Honsō, 핵심 본문, 1775)
  • 『겐고 레이지』(Gengo Reiji, 논평, 1775)
  • 『유미사키 요시타다(Yumisaki Yoshitada)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Yumisaki Yoshitada, 1776)
  • 『고 타카오키(Kō Takaoki)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Kō Takaoki, 1776)
  • 『타가 보케이(Taga Bokkei)에게 보내는 답장』(Reply to Taga Bokkei, 1777)
  • 『사미다레쇼』(Samidaresho, 여름비 속의 사색, 1784)
  • 『아사다 고류(Asada Gōryū)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sada Gōryū, 1785)

7. 참고 문헌


  • 데 바리 편, 『일본 전통의 원천』 제1권, 1958년, 489-496쪽.
  • 데 바리 외 편, 『일본 전통의 원천』 제2권, 2005년, 424-431쪽.
  • 하이지그, 카술리스, 멀랄도 편, 『일본 철학: 자료집』, 호놀룰루, 2011년, 441-446쪽.
  • 머서, 로즈메리, 『깊은 말들』(Deep Words), 라이덴, 1991년.
  • 머서, 로즈메리, 「우주를 그리다」(Picturing the Universe), 『동서 철학』(Philosophy East and West) 제48권 3호, 1998년.
  • 머서, 로즈메리, 『미우라 바이엔 독본』(Miura Baien Reader), 전자책, 2016년.
  • 玄語論|겐키론일본어(1753): 『깊은 말들』 수록.
  • 浅田剛立宛書簡|아사다 고류에게 보내는 편지일본어(1763): 머서의 박사 논문 "바로 우리 눈앞에"(1994) 및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価原|가겐일본어(가격의 기원, 1773):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玄語本宗|겐고 혼소일본어(핵심 본문, 1775): 『깊은 말들』 및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玄語零二|겐고 레이지일본어(논평, 1775): "바로 우리 눈앞에" 및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弓崎美尹宛書簡|유미사키 요시타다에게 보내는 편지일본어(1776): "바로 우리 눈앞에" 및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高隆沖宛書簡|고 타카오키에게 보내는 편지일본어(1776): "바로 우리 눈앞에" 및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答多賀墨卿|타가 보케이에게 보내는 답장일본어(1777): 『깊은 말들』 수록.
  • 鎖薇多零書|사미다레쇼일본어(여름비 속의 사색, 1784): 허비츠(Leon Hurvitz)의 "모누멘타 니포니카"(Monumenta Nipponica), 8권과 9권 수록.
  • 浅田剛立宛書簡|아사다 고류에게 보내는 편지일본어(1785): "바로 우리 눈앞에" 및 『미우라 바이엔 독본』 수록.
  • 岩見輝彦|이와미 데루히코일본어 저, 三浦梅園の性理学|미우라 바이엔의 성리학일본어, 九州書院|규슈쇼인일본어, 1990.
  • 小川晴久|오가와 하루히사일본어 저, 三浦梅園の世界|미우라 바이엔의 세계일본어, 講談社|고단샤일본어, 1989.
  • 島田虔次|시마다 겐지일본어, 田口正治|다구치 마사하루일본어 공저, "미우라 바이엔", 日本思想体系|니혼시소타이케이일본어 41, 岩波書店|이와나미 쇼텐일본어, 1982. (言志|겐시일본어 전문, 원문 한문과 일본어 번역본 모두 수록).
  • 高橋正和|다카하시 마사야스일본어 저, 三浦梅園の思想|미우라 바이엔의 사상일본어, ペリカン社|페리칸샤일본어, 1981.
  • 柳沢南|야나기사와 미나미일본어 저, 三浦梅園と日本文化|미우라 바이엔과 일본 문화일본어, 柳沢|야나기사와일본어, 前橋|마에바시일본어, 2012.
  • 小野精一|오노 세이이치일본어 편, 三浦梅園書簡集|미우라 바이엔 서간집일본어, 제일서방, 1943.
  • 三枝博音|삼지 박음일본어 편, 三浦梅園集|미우라 바이엔집일본어, 이와나미 문고, 1953, 복간 1991 외.
  • 三枝博音|삼지 박음일본어・清水幾太郎|시미즈 이쿠타로일본어 편, 多賀墨郷君に答うる文|다가 묵향군에게 답하는 글일본어, 日本哲学思想全書 第2巻 (思想思索編)|일본 철학사상 전서 제2권 (사상 사색편)일본어, 평범사, 1955.
  • 日本哲学思想全書|일본 철학사상 전서일본어 제19권 (歴史・社会歴史論編・社会編|역사・사회 역사론편・사회편일본어), 평범사, 1956. (道徳|도덕일본어)
  • 日本哲学思想全書|일본 철학사상 전서일본어 제7권 (科学学問編|과학 학문편일본어), 평범사, 1956. (戯示学徒|희시학도일본어)
  • 日本哲学思想全書|일본 철학사상 전서일본어 제1권 (思想哲学編|사상 철학편일본어), 평범사, 1957. (玄語|현어일본어)
  • 日本哲学思想全書|일본 철학사상 전서일본어 제14권 (道徳儒教編・道徳論一般編|도덕 유교편・도덕론일반편일본어), 평범사, 1957. (敢語|감어일본어)
  • 日本哲学思想全書|일본 철학사상 전서일본어 제18권, 평범사, 1957. (価原|가원일본어)
  • 일본의사학회 편, 医学古典集 第3 造物余譚|의학고전집 제3 조물여담일본어, 의치약출판, 1958.
  • 매원회 편, 梅園全集|매원전집일본어, 명저간행회, 1970.
  • 中村幸彦|나카무라 유키히코일본어 편, 玄語本宗|현어본종일본어, 日本の思想 18 三浦梅園 外|일본의 사상 18 미우라 바이엔 외일본어, 츠쿠마 서방, 1971.
  • 吉川弘文館|기카와 코분칸일본어, 梅園拾葉|매원십엽일본어, 日本随筆大成 5|일본수필대성 5일본어 제2기, 1974.
  • 辛島詢士|신지마 쥰시일본어 편, 玄語図全影 三浦梅園 手蹟依拠|현어도전영 미우라 바이엔 수적의거일본어, 매원연구소, 1975.
  • 三浦梅園 日本教育思想大系|미우라 바이엔 일본교육사상대계일본어, 일본도서센터, 1979.
  • 島田虔次|시마다 겐지일본어・田口正治|다구치 마사하루일본어 교주, 日本思想大系 41 三浦梅園|일본사상대계 41 미우라 바이엔일본어, 이와나미 서점, 1982. (玄語|현어일본어 외)
  • 山田慶児|야마다 케이지일본어 책임편집, 日本の名著 20 三浦梅園|일본의 명저 20 미우라 바이엔일본어[7], 중앙공론신사, 1982, 신판・중공백스, 1984. (玄語|현어일본어 (초록) 외 현대어역. 역자는 吉田忠|요시다 타다시일본어(도호쿠대학 교원))
  • 高橋正和|다카하시 마사카즈일본어・古丸允|고로마루 노부일본어 편, 近世儒家資料集成 第1・2巻 三浦梅園 資料集|근세유가자료집성 제1・2권 미우라 바이엔 자료집일본어, 펠리칸사, 1989.
  • 미우라 바이엔 연구회, 三浦梅園 遺墨選集|미우라 바이엔 유묵선집일본어, 1993.
  • 尾形純男|오가타 스미오일본어・島田虔次|시마다 겐지일본어 편주역, 三浦梅園 自然哲学論集|미우라 바이엔 자연철학론집일본어, 이와나미 문고, 1998.
  • 狹間久|하자마 히사시일본어 역, 玄語 現代語訳|현어 현대어역일본어, 오이타 고도신문사, 2009.

참조

[1] 웹사이트 三浦梅園旧宅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3-12-20
[2]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5巻 岩波書店 1984-10
[3] 웹사이트 三浦梅園資料館 {{!}} 日本一の「おんせん県」大分県の観光情報公式サイト https://www.visit-oi[...] 公益社団法人 ツーリズムおおいた 2022-10-23
[4] 논문 三浦梅園の哲學 : 極東儒學思想史の見地から 東洋史研究會 1979
[5]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6] 웹사이트 国東市三浦梅園資料館条例 https://www1.g-reiki[...] 2023-04-15
[7] 서적 黒い言葉の空間 中央公論社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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