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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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은 오대 십국 시대에 복건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국가이다. 당나라 말기 왕조와 왕심지 형제가 복건 지역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907년 후량에 복속되어 민왕에 봉해진 왕심지는 내정을 다스려 복건 지역을 발전시켰다. 왕심지 사후 내분으로 혼란을 겪다가, 933년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나, 이후 왕조 간의 다툼과 폭정으로 인해 945년 남당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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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십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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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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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 민 (십국) |
정식 명칭 | 閩 |
로마자 표기 | Bân-kok (poj) Mìng-guók (buc) |
위치 | 중국 |
역사 | |
시대 | 오대십국 시대 |
건국 | 909년 |
멸망 | 945년 |
주요 사건 | 왕심지가 왕이 됨 왕연준이 황제를 칭함 (933년) 은의 독립 (943년) |
이전 | 당나라 |
이후 | 남당 은 오월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장락 |
역대 군주 | 왕심지 (909–925) 왕연정 (943–945) 왕연희 (941–947) |
칭호 | 왕/황제 |
언어 및 화폐 | |
공용어 | 중국어 민어 |
통화 | 개원통보 용기통보 영화통보 용롱통보 천덕중보 |
2. 역사
당나라 말기 혼란 속에서 왕조(王潮)와 왕심지(王審知) 형제는 복건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896년 왕조는 당나라로부터 무위군절도사(武威軍節度使)로 임명되었고, 다음 해 왕조가 죽자 왕심지가 지위를 이어받았다. 907년 주전충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왕심지는 후량에 입조하여 민왕(閩王)에 봉해졌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을 기울여 당시 낙후되었던 복건 지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남해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문인, 승려 등을 초빙하여 문화를 진흥시켰다. 이러한 선정으로 왕심지는 '개민왕(開閩王)'으로 불렸으며, 복주에는 그의 덕을 기리는 민왕덕정비(閩王德政碑)가 세워져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925년 왕심지가 죽은 후 민나라는 권력 승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 이듬해 왕심지의 장남 왕연한이 즉위했으나, 동생 왕연균에게 살해당했다. 왕연균은 후당에 신하를 자처했으나, 933년 후당의 혼란을 틈타 황제를 칭하며 독립했다.
935년, 왕연균은 아들 왕계붕에게 살해당했다. 왕계붕은 후진에 복종하여 민왕으로 격하되었으며, 도교에 심취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939년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왕심지의 셋째 아들 왕연희가 옹립되었으나, 그 역시 폭정으로 일족을 살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943년, 왕연희의 동생 왕연정이 건주에서 자립하여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은이라 했다. 944년, 왕연희는 주문진과 연중우에게 살해당하고, 주문진이 민왕을 자칭했으나 왕연정에게 패배했다. 왕연정은 민왕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과도한 세금 징수와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왕연정의 조카들이 자립하는 등 내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남당의 이경이 침공하여 945년 민은 멸망했다.
2. 1. 건국 배경
당나라 말기, 광주 고시(固始)(현재의 하남성 신양시 고시현) 출신의 왕조(王潮)와 왕심지(王審知) 형제는 중앙 정부의 혼란을 피해 복건 지역으로 이주했다. 896년, 왕조는 당나라로부터 무위군절도사(武威軍節度使)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왕조가 사망하자 왕심지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907년, 주전충(朱全忠)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하자, 왕심지는 후량에 입조하여 민왕(閩王)으로 봉해졌다.
2. 2. 왕심지의 통치와 번영
왕심지는 내정에 힘을 기울여 당시 낙후되었던 복건 지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남해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문인, 승려 등을 초빙하여 문화를 진흥시켰다. 이러한 선정으로 왕심지는 '개민왕(開閩王)'으로 불렸으며, 복주에는 그의 덕을 기리는 민왕덕정비(閩王德政碑)가 세워져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2. 3. 내분과 멸망
925년 왕심지가 죽은 후 민나라는 권력 승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다. 이듬해 왕심지의 장남 왕연한이 즉위했으나, 동생 왕연균에게 살해당했다. 왕연균은 후당에 신하를 자처했으나, 933년 후당의 혼란을 틈타 황제를 칭하며 독립했다.935년, 왕연균은 아들 왕계붕에게 살해당했다. 왕계붕은 후진에 복종하여 민왕으로 격하되었으며, 도교에 심취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939년 쿠데타로 살해당했다. 왕심지의 셋째 아들 왕연희가 옹립되었으나, 그 역시 폭정으로 일족을 살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943년, 왕연희의 동생 왕연정이 건주에서 자립하여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은이라 했다. 944년, 왕연희는 주문진과 연중우에게 살해당하고, 주문진이 민왕을 자칭했으나 왕연정에게 패배했다. 왕연정은 민왕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과도한 세금 징수와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왕연정의 조카들이 자립하는 등 내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남당의 이경이 침공하여 945년 민은 멸망했다.
3. 문화
왕심지의 문화 진흥 정책으로 복건 지역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축물들이 많다.
- '''개원사 철불(開元寺 鐵佛)''' : 복주 개원사에 있는 높이 5.3m의 철불로, 왕심지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민왕사(閩王祠)''' : 민왕덕정비(閩王德政碑)가 세워져 있는 사당이다.
- '''통천사(涌泉寺)''' : 복주 동남쪽 고산(鼓山) 중턱에 있는 사찰로, 908년 왕심지가 창건했다.
- '''천주 개원사(開元寺)''' : 복주 개원사와는 다른 사찰이며, 왕심지가 세운 탑이 있다.
4. 역대 군주
묘호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및 연대 |
---|---|---|---|---|
태조(太祖) | 충의왕(忠懿王) | 왕심지(王審知) | 909년–925년 | 후당(後唐)의 연호를 채택 |
없음 | 사왕(嗣王) | 왕연한(王延翰) | 925년–926년 | 후당(後唐)의 연호를 채택 |
혜종(惠宗) | 제숙명효황제(齊肅明孝皇帝) | 왕연균(王延鈞) | 926년–935년 | 후당(後唐)의 연호를 채택 (926년–933년) 룡기(龍啟) (933년–935년) 영화(永和) (935년) |
강종(康宗) | 성신영예문명광무응도대홍효황제(聖神英睿文明廣武應道大弘孝皇帝) | 왕계붕(王繼鵬) | 935년–939년 | 통문(通文) (936년–939년) |
경종(景宗) | 예문광무명성원덕대효황제(睿文廣武明聖元德大孝皇帝) | 왕연희(王延羲) | 939년–944년 | 영룡(永隆) (939년–944년) |
없음 | 없음 | 주문진(朱文進) | 944년–945년 | 후진(後晉)의 연호를 채택 |
없음 | 복공의왕(福恭懿王) (인의 황제이자 민의 황제로서 모두 사용됨) | 왕연정(王延政) | 943년–945년 | 천덕(天德) (943년–945년) |
각 통치자의 이름, 생몰년, 재위년에 대해서는 #민(십국)의 통치자 목록을 참조한다.
5. 통치 가계도
846년 출생–898년 사망
862년 출생–925년 사망
태조(太祖)
재위 909년–925년
858년 출생–904년 사망
재위 925년–926년;
사망 927년
혜종(惠宗)
재위 927년–935년
경종(景宗)
재위 939년–944년
천덕제(天德帝)
재위 943년–945년
강종(康宗)
재위 935년–93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