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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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라노 대교구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교구이다. 초대 주교는 사도 바르나바의 제자 아나탈론으로 전해지며,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교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어 세력을 확장했으며, 13세기에는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를 지배하면서 공국으로 발전했다. 16세기에는 카를로 보로메오 대주교가 반종교개혁을 주도했고, 20세기에는 두 명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현재 대주교는 마리오 델피니이며, 1,104개의 본당과 신학교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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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대교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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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관할 구역 | 이탈리아 |
종류 | 대교구 |
라틴어 명칭 | Archidioecesis Mediolanensis |
이탈리아어 명칭 | Arcidiocesi di Milano |
위치 | 밀라노 |
면적 | 4243 km² |
인구 (2021년) | 5,608,331명 |
가톨릭 신자 (2021년) | 4,908,331명 |
가톨릭 신자 비율 (2021년) | 87.5% |
본당 수 | 1,107개 |
설립 | 1세기 (교구) 374년 (대교구) |
전례 | 암브로시오 전례 로마 전례 |
웹사이트 | 밀라노 대교구 공식 웹사이트 |
구성원 | |
현임 교구장 | 마리오 델피니 대주교 |
보좌 주교 | 프랑코 아그네시 이탈리아어: Luca Raimondi 이탈리아어: Giuseppe Natale Vegezzi |
명예 교구장 | 안젤로 스콜라 에르미니오 데 스칼치 안젤로 마스케로니 |
사제 수 | 교구 사제: 1,712명 수도회 사제: 738명 |
부제 수 | 156명 |
주요 성당 | |
주교좌 성당 | 산타 마리아 나셴테 대성당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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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밀라노 대교구의 역사는 초대 주교에 대한 전설로 시작한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 바르나바가 밀라노에 복음을 전했으며, 그의 제자인 성 아나탈론이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 교구 설립은 로마 황제 디클레티아누스의 행정 개혁 이후인 200년 이후로 추정된다. 초기 기독교 박해 시기에는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를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이들은 밀라노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발표한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 내 종교 관용이 선포되면서 박해는 종식되었다.
밀라노 교회는 역사적으로 교황과 완전한 친교를 유지해왔다. 초기 주교 중 성 암브로시오(374년~397년)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밀라노 교회를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후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 호노라투스 주교(568년)가 성직자들과 함께 제노바로 피신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약 70년 후 선한 요한 주교 시기에 주교좌는 밀라노로 복귀했다.
10세기에는 밀라노 대주교가 황제의 봉신이 되어 이탈리아 북서부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했다. 아리에르토 다 인티미아노(1018년~1045년) 대주교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점차 도시 세력이 성장하면서 대주교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12세기 이후 밀라노는 황제에 맞서는 구엘프(교황파) 도시가 되었다.[5] 13세기에는 오토네 비스콘티 대주교가 스스로 영주가 되어 비스콘티 가문의 통치 시대를 열었으며, 이 가문은 1447년까지 밀라노 공국을 다스렸다.
근대 시기에는 성 카를로 보로메오(1564년~1584년) 대주교가 반종교개혁을 이끌며 가톨릭교회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노력은 후임자인 페데리코 보로메오와 주세페 포초보넬리 등에게 이어졌다. 20세기에는 밀라노 대교구에서 두 명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1922년 아킬레 라티 추기경이 교황 비오 11세로, 1963년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었다. 1979년부터 2002년까지는 개혁 성향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이 교구를 이끌었다.
2. 1. 초기 (1세기 ~ 6세기)
전설에 따르면, 복음서는 사도 바르나바에 의해 밀라노로 전해졌으며, 밀라노의 초대 주교인 아나탈론은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황제 디클레티아누스의 행정 개혁 이후 교구가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실제 교구 설립은 200년 이후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밀라노 주교 명단에는 313년 로마에서 열린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한 미로클레스 이전의 주교 5명만이 언급되어 있다.3세기와 4세기 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시기 동안, 밀라노에서는 여러 기독교인들이 순교했으며, 이들은 이후 밀라노에서 공경받았다.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디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첫 박해), 빅터, 나보르와 펠릭스, 나자리우스와 켈수스 등이 있다. 이러한 박해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제국 내 종교 관용을 선포하면서 종식되었다.
역사적으로 밀라노 교회는 교황과 완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초기 주교 중에는 유스토르기우스 1세와 디오니시우스가 있다. 특히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정통 신앙을 수호하다 355년 카파도키아로 추방되었다. 황제는 아리우스파 성직자인 아욱센티우스를 밀라노 주교좌에 앉혔다.
아욱센티우스가 사망한 후, 밀라노 시민들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선출했다(374년 ~ 397년). 암브로시오는 뛰어난 학식과 지도력으로 밀라노 교회를 크게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후계자로는 심플리치아누스, 상원 의원, 다키우스(530년 ~ 552년) 등이 있다. 다키우스 주교는 동고트 왕국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 벌어진 고트 전쟁의 혼란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망명 생활로 보냈다.
6세기 후반,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략하면서 밀라노 교회는 또 다른 시련을 맞았다. 롬바르드족은 아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이거나 이교도였으며, 비잔틴 제국과 적대 관계였다. 이 시기 밀라노 교회는 세 장의 분열 논쟁에 연루되었는데, 롬바르드족이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견제했기 때문에, 밀라노 교회는 약 38년간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568년,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이 밀라노를 포위하자, 당시 주교였던 호노라투스는 많은 성직자들과 함께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제노바로 피신했다. 밀라노의 주교좌는 약 70년 뒤 선한 요한 주교 때 밀라노로 복귀했다.
2. 2. 중세 (7세기 ~ 15세기)
롬바르드족의 침략 동안 밀라노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세 장의 분열은 롬바르드족이 비잔틴 제국의 적이었기 때문에 38년 동안 밀라노 교회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이 밀라노를 포위 공격하자, 호노라투스 주교(568년)는 많은 성직자와 함께 제노바로 피신해야 했다. 밀라노 주교좌는 약 70년 후인 7세기 중반, 선한 요한 주교 시기에 밀라노로 돌아왔다.10세기에 들어 밀라노 대주교들은 황제의 봉신이 되어 그 영향력을 이탈리아 북서부 전역으로 확장했다.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아리에르토 다 인티미아노(1018–1045) 대주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민들의 힘이 강해지자 대주교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성직자를 통해 행사되던 황제의 권위 역시 점차 쇠퇴했다. 12세기부터 밀라노는 황제에 맞서 싸우는 구엘프(교황파) 도시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5]
13세기에는 오토네 비스콘티 대주교가 스스로를 영구적인 영주로 선포하며 밀라노 공화국을 종식시키고 비스콘티 가문의 시대를 열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1277년부터 1447년까지 밀라노 공국을 통치하며 밀라노의 역사를 이끌었다.
=== 7세기 ~ 15세기 주교 목록 ===
주교 | 재임 기간 |
---|---|
요한 1세 | 641–669 |
안토니누스 | 669–671 |
마우리리우스 | 671 |
암펠리우스 | 671–676 |
만수에투스 | 676–685 |
베네딕토 | 685–732 |
테오도로 2세 | 732–746 |
나탈리스 | 746–747 |
아리프레드 | 747–748 |
스타빌레 | 748–750 |
레토 | 751–755 |
토마소 | 755–783 |
피에트로 | 784–803 |
오델페르토 | 803–813 |
안젤모 1세 | 813–818 |
부오노 | 818–822 |
안길베르토 1세 | 822–823 |
안길베르토 2세 푸스테를라 | 824–859 |
타도네 | 860–868 |
안스페르토 콘팔로니에리 | 868–881 |
안젤모 2세 카프라 | 882–896 |
란둘포 1세 | 896–899 |
안드레아 디 칸치아노 | 899–906 |
아이코네 | 906–918 |
가리베르토 오브 베사나 | 918–921 |
람베르토 | 921–931 |
엘두인 | 931–936 |
아르데리코 | 936–948 |
아델만 | 948–953 |
발페르토 | 953–970 |
아르눌포 1세 | 970–974 |
고토프레도 1세 | 974–979 |
란둘포 2세 오브 카르카노 | 980–998 |
아르놀포 2세 다 아르사고 | 998–1018 |
아리에르토 다 인티미아노 | 1018–1045 |
구이도 다 벨라테 | 1045–1069 |
아토네 | 1070–1075 |
고토프레도 2세 다 카스틸리오네 | 1070–1075 (대립 주교) |
테달드 | 1075–1080 |
안젤모 3세 다 로 | 1086–1093 |
아르놀포 3세 | 1093–1097 |
안젤모 4세 다 보비시오 | 1097–1101 |
그로솔라노 | 1102–1112 |
조르다노 다 클리비오 | 1112–1120 |
올리코 다 코르테 | 1120–1126 |
안젤모 5세 델라 푸스테를라 | 1126–1135 |
로발도 | 1135–1145 |
움베르토 1세 다 피로바노 | 1146–1166 |
갈디노 델라 살라 | 1166–1176 |
알기시오 다 피로바노 | 1176–1185 |
움베르토 2세 크리벨리 | 1185–1187[8] |
밀로네 다 카르다노 | 1187–1195 |
움베르토 3세 다 테르자고 | 1195–1196 |
필리포 1세 다 람푸냐노 | 1196–1206 |
움베르토 4세 다 피로바노 | 1206–1211 |
제라도 다 세소 | 1211–1212 |
엔리코 1세 다 세탈라 | 1213–1230 |
굴리엘모 1세 다 리졸리오 | 1230–1241 |
레온 다 페레고 | 1241–1257 |
오토네 비스콘티 | 1262–1295 |
루피노 다 프리세토 | 1295–1296 |
프란체스코 1세 다 파르마 | 1296–1308 |
카소네 델라 토레 | 1308–1317 |
아이카르도 다 인티미아노 | 1317–1339 |
조반니 2세 비스콘티 | 1342–1354 |
로베르토 비스콘티 | 1354–1361 |
굴리엘모 2세 델라 푸스테를라 | 1361–1370 |
시몬 다 보르사노 | 1370–1380 |
안토니오 데 살루치 | 1380–1401 |
피에트로 2세 디 칸디아 | 1402–1410 |
프란체스코 2세 크리파 | 1409–1414 |
바르톨로메오 카프라 | 1414–1433 |
프란체스코 3세 피콜파소 | 1433–1443 |
엔리코 2세 람피니 | 1443–1450 |
조반니 3세 비스콘티 | 1450–1453 |
니콜로 아미다노 | 1453–1454 |
티모테오 마페이 | 1454 |
가브리엘레 스포르차 | 1454–1457 |
카를로 1세 다 포를리 | 1457–1461 |
추기경 스테파노 나르디니 | 1461–1484 |
추기경 조반 4세 아르침볼디 | 1484–1488 (부재) |
구이도 안토니오 아르침볼디 | 1488–1497 (부재) |
오타비아노 아르침볼디 | 1497 (부재) |
2. 3. 근현대 (16세기 ~ 현재)
밀라노 교회의 근현대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은 1564년부터 1584년까지 밀라노 대주교를 지낸 성 카를로 보로메오이다. 그는 반종교개혁 시기의 주요 인물로서 가톨릭 교회 내 중요한 개혁들을 이끌었다. 그의 사목적 노력은 후임자인 페데리코 보로메오(1631년 사망)와 주세페 포초보넬리(1783년 사망) 등에게도 계승되었다.20세기에는 밀라노 대교구에서 두 명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1922년에는 아킬레 라티 추기경이 교황 비오 11세로, 1963년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었다. 1979년부터 2002년까지는 가톨릭 내 개혁적 성향의 신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이 교구를 이끌었다.
이름 | 재임 기간 |
---|---|
추기경 카를로 보로메오 | 1564–1584 |
추기경 가스파레 비스콘티 | 1584–1595 |
추기경 페데리코 보로메오 | 1595–1631 |
추기경 체사레 몬티 | 1632–1650 |
추기경 알폰소 리타 | 1652–1679 |
추기경 페데리코 비스콘티 | 1681–1693 |
추기경 페데리코 카차 | 1693–1699 |
추기경 주세페 아르킨토 | 1699–1712 |
추기경 베네데토 2세 에르바 오데스칼키 | 1712–1737 |
추기경 카를로 가에타노 스탐파 | 1737–1742 |
추기경 주세페 포초보넬리 | 1743–1783 |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 1784–1801 |
추기경 조반니 바티스타 카프라라 | 1802–1810 |
공석 | 1810-1816 |
추기경 카를로 가에타노 가이스루크 | 1816–1846 |
바르톨로메오 카를로 로밀리 | 1847–1859 |
파올로 안젤로 발레리니 | 1859–1867 |
루이지 나자리 디 칼라비아나 | 1867–1893 |
추기경 안드레아 카를로 페라리 | 1894년 5월 21일 – 1921년 2월 2일 |
추기경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 | 1921년 6월 13일–1922년 2월 6일 (교황 비오 11세로 선출) |
추기경 에우제니오 토시 | 1922–1929 |
추기경 일데폰소 슈스터 | 1929년 6월 26일 – 1954년 8월 30일 |
추기경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 1954년 11월 1일–1963년 6월 19일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 |
추기경 조반니 콜롬보 | 1963년 8월 10일 – 1979년 12월 29일 |
추기경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 1979년 12월 29일 – 2002년 6월 11일 |
추기경 디오니지 테타만치 | 2002년 7월 11일 – 2011년 6월 28일 |
추기경 안젤로 스콜라 | 2011년 6월 28일 – 2017년 7월 7일 |
마리오 델피니 | 2017년 9월 9일 – 현재[9] |
(내용 없음)
3. 교구 현황
3. 1. 현재의 리더십
2017년 7월 7일 현재 밀라노 대교구의 대주교는 마리오 델피니 (마리오 엔리코 델피니) 대주교이다. 그는 이전에 밀라노 대교구의 부교구장과 보좌 주교를 역임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델피니 대주교는 2011년부터 재임하며 교황 선출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던 은퇴한 안젤로 스콜라 추기경의 뒤를 이었다.
델피니 대주교는 처음에 에르미니오 데 스칼치, 루이지 스투키, 프랑코 아그네시, 파올로 마르티넬리 등 4명의 보좌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2020년 4월 3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루이지 스투키 주교와 에르미니오 데 스칼치 주교의 사임을 수락했다. 같은 날, 교황은 조반니 라이몬디와 주세페 베게치를 새로운 보좌 주교로 임명했다.[14]
3. 2. 신학교
밀라노 대교구 신학교는 베네고노 인페리오레에 주요 시설을 두고 있다. 소신학교는 세베소에 위치해 있다.
3. 3. 본당
1,104개의 본당은 모두 롬바르디아 지역에 속해 있으며, 베르가모 현, 코모 현, 레코 현, 밀라노 현, 파비아 현, 바레세 현에 분포되어 있다.[10]
4. 역대 주교 및 대주교
밀라노 대교구의 역대 주교 및 대주교 목록은 밀라노 대성당 남쪽 본당 벽에 새겨져 있으나, 이 목록에는 일부 역사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아래 제시된 목록은 에우제니오 카차니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6]
전설에 따르면 복음서는 사도 바르나바에 의해 밀라노에 전파되었고, 초대 주교인 아나탈론은 그의 제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로마 제국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 개혁 이후 교구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200년 이전에 밀라노에 교구가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3세기와 4세기 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시기 동안 밀라노에서는 여러 순교자가 나왔으며, 이들은 오늘날에도 밀라노에서 공경받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 빅터, 나보르와 펠릭스, 나자리우스와 켈수스 등이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종교적 관용을 선포하면서 박해는 종식되었다. 313년 로마에서 열린 라테란 공의회에는 밀라노 주교 미로클레스가 참석했으며, 기록상 그의 전임자 다섯 명의 이름이 남아있다.
역사적으로 밀라노 교회는 교황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왔다. 초기 주교 중 유스토르기우스 1세와 디오니시우스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압력에 맞서 신앙을 지켰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로 인해 카파도키아로 추방되었고(355년), 황제는 아리우스파 성향의 아욱센티우스를 밀라노 주교좌에 앉혔다. 아욱센티우스 사후, 밀라노 시민들은 암브로시우스(374–397)를 주교로 선출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후임자로는 심플리치아누스, 상원 의원, 다키우스(530–552) 등이 있었는데, 다키우스는 고트 전쟁의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입 시기(6세기 후반)는 밀라노 교회에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세 장의 분열 논쟁과 맞물려, 롬바르드족이 비잔틴 제국과 적대 관계였던 상황 속에서 밀라노 교회는 약 38년간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도 했다. 568년 롬바르드족의 알보인 왕이 밀라노를 포위하자, 당시 주교였던 호노라투스는 성직자들과 함께 제노바로 피신했다. 밀라노 주교좌는 70년 후 선한 요한 주교 시대에 다시 밀라노로 복귀했다.
10세기에 이르러 밀라노 대주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으로서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특히 아리에르토 다 인티미아노(1018–1045) 대주교가 유명하다. 그러나 점차 도시 시민 세력(부르주아)이 성장하면서 대주교의 정치적 권력은 약화되었고, 12세기 이후 밀라노는 황제에 맞서는 구엘프(교황파) 도시가 되었다.[5] 13세기에는 오토네 비스콘티 대주교가 스스로를 밀라노의 영주로 선포하며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비스콘티 가문의 통치를 열었다. 비스콘티 가문은 1277년부터 1447년까지 밀라노 공국을 다스렸다.
근대에 들어 밀라노 교회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카를로 보로메오(1564–1584) 대주교이다. 그는 반종교개혁 시기의 중심인물로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이끌었다. 그의 사목 정신은 후임자인 페데리코 보로메오(1631년 사망)와 주세페 포초보넬리(1783년 사망) 등에게 계승되었다.
20세기에는 밀라노 대교구 출신 추기경 두 명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1922년 아킬레 라티 추기경이 교황 비오 11세로, 1963년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6세로 선출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1979년부터 2002년까지는 가톨릭 내 진보 진영의 지지를 받았던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이 교구를 이끌었다.
- 바나바 (1세기)[7]
- 아나탈론
- 가이우스
- 카스트리티아누스
- 칼리메루스 (약 270–280)
- 모나스 (283–313?)
- 미로클레스 (313–316?)
- 마테르누스 (316–328?)
- 프로타시우스 (328–343?)
- 에우스토르기우스 1세 (343–349?)
- 디오니시우스 (349–355)
- * 아욱센티우스 (355–374), 아리우스파, 가톨릭교회에서 침입자로 간주
- 암브로시우스 (374–397)
- 심플리키아누스 (397–400)
- 베네리우스 (400–408)
- 마롤루스 (408–423)
- 마르티니아누스 (423–435)
- 글리케리우스 (436–438)
- 라자로 (438–449)
- 에우세비우스 (449–462)
- 게론티우스 (462–465)
- 베니그누스 (465–472)
- 세나토르 (472–475)
- 테오도로 1세 (475–490)
- 로렌스 1세 (490–512)
- 에우스토르기우스 2세 (512–518)
- 마그누스 (518–530?)
- 다키우스 (530–552)
- 비탈레 (552–555)
- 아우사누스 (556–559?)
- 호노라투스 (560–571?)
- 프론토네 (571–573?)
- 라우렌시오 2세 (573–592)
- 콘스탄티우스 (593–600)
- 데오다투스 (601–628)
- 아스테리우스 (629–639)
- 포르테 (639–641)
- 요한 1세 (641–669)
- 안토니누스 (669–671)
- 마우리리우스 (671)
- 암펠리우스 (671–676)
- 만수에투스 (676–685)
- 베네딕토 (685–732)
- 테오도로 2세 (732–746)
- 나탈리스 (746–747)
- 아리프레드 (747–748)
- 스타빌레 (748–750)
- 레토 (751–755)
- 토마소 (755–783)
- 피에트로 (784–803)
- 오델페르토 (803–813)
- 안젤모 1세 (813–818)
- 부오노 (818–822)
- 안길베르토 1세 (822–823)
- 안길베르토 2세 푸스테를라 (824–859)
- 타도네 (860–868)
- 안스페르토 콘팔로니에리 (868–881)
- 안젤모 2세 카프라 (882–896)
- 란둘포 1세 (896–899)
- 안드레아 디 칸치아노 (899–906)
- 아이코네 (906–918)
- 가리베르토 오브 베사나 (918–921)
- 람베르토 (921–931)
- 엘두인 (931–936)
- 아르데리코 (936–948)
- 아델만 (948–953)
- 발페르토 (953–970)
- 아르눌포 1세 (970–974)
- 고토프레도 1세 (974–979)
- 란둘포 2세 오브 카르카노 (980–998)
- 아르놀포 2세 다 아르사고 (998–1018)
- 아리에르토 다 인티미아노 (1018–1045)
- 구이도 다 벨라테 (1045–1069)
- 아토네 (1070–1075)
- 고토프레도 2세 다 카스틸리오네 (1070–1075), 대립 주교
- 테달드 (1075–1080)
- 안젤모 3세 다 로 (1086–1093)
- 아르놀포 3세 (1093–1097)
- 안젤모 4세 다 보비시오 (1097–1101)
- 그로솔라노 (1102–1112)
- 조르다노 다 클리비오 (1112–1120)
- 올리코 다 코르테 (1120–1126)
- 안젤모 5세 델라 푸스테를라 (1126–1135)
- 로발도 (1135–1145)
- 움베르토 1세 다 피로바노 (1146–1166)
- 갈디노 델라 살라 (1166–1176)
- 알기시오 다 피로바노 (1176–1185)
- 움베르토 2세 크리벨리 (1185–1187)[8] (훗날 교황 우르바노 3세)
- 밀로네 다 카르다노 (1187–1195)
- 움베르토 3세 다 테르자고 (1195–1196)
- 필리포 1세 다 람푸냐노 (1196–1206)
- 움베르토 4세 다 피로바노 (1206–1211)
- 제라도 다 세소 (1211–1212)
- 엔리코 1세 다 세탈라 (1213–1230)
- 굴리엘모 1세 다 리졸리오 (1230–1241)
- 레온 다 페레고 (1241–1257)
- 오토네 비스콘티 (1262–1295)
- 루피노 다 프리세토 (1295–1296)
- 프란체스코 1세 다 파르마 (1296–1308)
- 카소네 델라 토레 (1308–1317)
- 아이카르도 다 인티미아노 (1317–1339)
- 조반니 2세 비스콘티 (1342–1354)
- 로베르토 비스콘티 (1354–1361)
- 굴리엘모 2세 델라 푸스테를라 (1361–1370)
- 시몬 다 보르사노 (1370–1380)
- 안토니오 데 살루치 (1380–1401)
- 피에트로 2세 디 칸디아 (1402–1410) (훗날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
- 프란체스코 2세 크리파 (1409–1414)
- 바르톨로메오 카프라 (1414–1433)
- 프란체스코 3세 피콜파소 (1433–1443)
- 엔리코 2세 람피니 (1443–1450)
- 조반니 3세 비스콘티 (1450–1453)
- 니콜로 아미다노 (1453–1454)
- 티모테오 마페이 (1454)
- 가브리엘레 스포르차 (1454–1457)
- 카를로 1세 다 포를리 (1457–1461)
- 추기경 스테파노 나르디니 (1461–1484)
- 추기경 조반 4세 아르침볼디 (1484–1488) (부재)
- 구이도 안토니오 아르침볼디 (1488–1497) (부재)
- 오타비아노 아르침볼디 (1497) (부재)
- 추기경 이폴리토 1세 데스테 (1497–1520) (부재)
- 추기경 이폴리토 2세 데스테 (1520–1550) (부재)
- 조반니 안젤로 아르침볼디 (1550–1555) (부재)
- 추기경 이폴리토 2세 데스테 (1555–1556) (부재)
- 필리포 2세 아르킨토 (1556–1558) (부재)
- ''공석'' (1558-1560) - 이후 카를로 보로메오가 임명됨.
참조
[1]
웹사이트
Resignations and Appointments, 30.04.2020
https://press.vatica[...]
Holy See
2020-04-30
[2]
웹사이트
Archdiocese of Milano {Milan}
http://www.catholic-[...]
2016-02-29
[3]
웹사이트
Metropolitan Archdiocese of Milano
http://www.gcatholic[...]
2016-02-29
[4]
웹사이트
Milano laica e religiosa
http://www.osservato[...]
L'Osservatore Romano
2012-06-03
[5]
백과사전
Archdiocese of Milan
[6]
서적
Vescovi e arcivescovi di Milano
Massimo NED
[7]
문서
The name of Barnabas first appears in connection with the Church of Milan in the 11th century.
[8]
문서
Elected Pope Urban III in 1185, but retained the archdiocese of Milan as administrator until his death
[9]
뉴스
Delpini, messa in Sant'Ambrogio: 'Mi scuso se ho rubato la scena'
http://milano.corrie[...]
2017-09-09
[10]
웹사이트
Parrocchie
https://web.archive.[...]
Chiesa Cattolica Italiana
[11]
웹사이트
Archdiocese of Milano {Milan}
http://www.catholic-[...]
2016-02-29
[12]
웹사이트
Metropolitan Archdiocese of Milano
http://www.gcatholic[...]
2016-02-29
[13]
웹인용
Milano laica e religiosa
http://www.osservato[...]
L'Osservatore Romano
2012-06-03
[14]
웹인용
Resignations and Appointments, 30.04.2020
https://press.vatica[...]
Holy See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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