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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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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실리 2세는 1425년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으나, 초기에는 어머니 소피아가 섭정했다. 그는 삼촌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사촌 드미트리 셰먀카 등과의 권력 다툼, 카잔 칸국의 침략 등 잦은 시련을 겪었다. 1446년에는 시력을 잃었지만,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중앙 집권화를 강화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독립을 선언하고, 노브고로드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여 후일 이반 3세의 러시아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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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2세
기본 정보
"황실 타이틀러 (1672)의 초상화"
칭호전 러시아의 군주
계승모스크바 대공
통치 기간1425년 2월 27일 - 1462년 3월 27일 (1425년부터 1453년까지는 통치권 분쟁)
이전바실리 1세
이후이반 3세
배우자마리아 야로슬라브나
자녀이반 3세
안나 바실리예브나
안드레이 볼쇼이
왕가류리크
왕조류리크 왕조
아버지바실리 1세
어머니소피아 리토프스카야
출생일1415년 3월 10일
출생지모스크바
사망일1462년 3월 27일
사망지모스크바
종교러시아 정교회
인물 정보
별칭툄니 (어둠)

2. 생애

바실리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5년 바실리 1세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리투아니아의 소피아(Sophia)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430년 바실리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이 사망하자 바실리의 삼촌인 즈베니고로드의 유리(Yury)가 킵차크 칸국을 방문하면서 모스크바 대공 지위를 승인받았다.

1433년에는 유리가 군대를 모아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바실리는 스몰렌스크의 공자, 모스크바의 보야르였던 이반 프세볼로시스키(Ivan Vsevolozhsky)의 배신으로 인해 유리의 포로로 잡히고 만다.

바실리 2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삼촌인 유리에 대항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유리는 모스크바를 떠나 북쪽에 위치한 고향으로 피신하게 된다. 모스크바를 탈환한 바실리 2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 이반 프세볼로시스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1439년에는 카잔 칸국의 울루그 무함마드(Ulugh Muhammad)가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하면서 모스크바를 떠났다. 1445년에는 울루그 무함마드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지휘했지만 카잔 칸국 군대의 포로로 잡히고 만다. 모스크바인들은 바실리 대공의 막대한 보석금을 모았고 바실리는 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446년에는 자신의 사촌인 드미트리 셰먀카(Dmitry Shemyaka)와의 전투 도중에 시력을 잃었다. 바실리 대공과 드미트리 셰먀카 간의 전투는 14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즉위

바실리 2세는 바실리 1세와 리투아니아의 소피아(비타우타스 대공의 외동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으며, 아버지의 자식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었다. 1425년 바실리 1세의 뒤를 이어 10세의 나이로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어머니인 소피아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430년 바실리 2세의 후견인이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비타우타스 대공이 사망하자, 바실리 2세의 삼촌인 즈베니고로드유리킵차크 칸국을 방문하여 모스크바 대공 지위를 승인받았다. 1433년 유리는 군대를 모아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바실리 2세는 스몰렌스크의 공작이자 모스크바 보야르였던 이반 프세볼로시스키의 배신으로 인해 유리의 포로가 되었다.

바실리 2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삼촌인 유리에 대항했다. 유리는 모스크바를 떠났고, 모스크바를 탈환한 바실리 2세는 이반 프세볼로시스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1434년 유리가 사망한후, 그의 아들 바실리 코소이가 모스크바의 새로운 대공으로 선포되었으나, 1435년 바실리 2세와 동맹을 맺은 드미트리 셰먀카에의해 축출되었다.

2. 2. 모스크바 대공국 내전 (1425년-1453년)

바실리 1세 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5년 바실리 1세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리투아니아의 소피아(Sophia)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430년 바실리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이 사망하자 바실리의 삼촌인 즈베니고로드의 유리(Yury)가 킵차크 칸국을 방문하면서 모스크바 대공 지위를 승인받았다.

1433년에는 유리가 군대를 모아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바실리는 스몰렌스크의 공자, 모스크바의 보야르였던 이반 프세볼로시스키(Ivan Vsevolozhsky)의 배신으로 인해 유리의 포로로 잡히고 만다.

바실리 2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삼촌인 유리에 대항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유리는 모스크바를 떠나 북쪽에 위치한 고향으로 피신하게 된다. 모스크바를 탈환한 바실리 2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 이반 프세볼로시스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2. 2. 1. 유리 드미트리예비치와의 분쟁

1433년 유리는 군대를 모아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바실리 2세는 스몰렌스크 공작이자 모스크바 귀족이었던 이반 프세볼로시스키의 배신으로 유리의 포로가 되었다.[1]

유리는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바실리 2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삼촌인 유리에 대항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유리는 모스크바를 떠나 북쪽에 위치한 고향으로 피신했다. 모스크바를 탈환한 바실리 2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 이반 프세볼로시스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1]

이후 유리의 아들들(바실리 코소이, 드미트리 셰먀카)이 계승권을 주장하며 분쟁을 계속하였다.[1]

2. 2. 2. 바실리 코소이와의 전투

1433년 유리 드미트리예비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실리 코소이는 스스로를 모스크바 대공이라고 칭했다.[1] 바실리 코소이는 이반 1세 가문에서 장남이 되었지만, 장자 상속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두 동생은 바실리 2세를 지지했다.[1] 바실리 2세는 바실리 코소이를 격파하고 실명시켜, 권력 경쟁에서 제거했다.

2. 2. 3. 드미트리 셰먀카와의 항쟁

바실리 코소이의 동생 드미트리 셰먀카(Дмитрий Шемяка)는 바실리 2세와의 항쟁을 계속했다.[1] 1445년에는 노브고로드를 점령하고 있던 카잔 칸국의 울루그 무함마드(Улуг Мухаммед)에 의해 바실리 2세는 사로잡혔다(수즈달 전투).[1] 석방 조건으로 막대한 몸값(20만 은 루블)을 요구받았고, 요구대로 지불했다.[1] 그 결과 석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로부터 원군을 얻어 셰먀카와의 항쟁에서 일단 승리했다.[1]

그러나 타타르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과 가혹한 몸값 요구는 보야르(대귀족)들에게 많은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바실리 2세는 고립되었다.[1] 셰먀카는 이를 이용하여 세력을 회복하여 모스크바를 탈취하고 바실리 2세를 사로잡아 눈을 멀게 한 뒤 우글리치에 유폐시켰다.[1]

그러나 귀족들은 셰먀카의 정책에 반발하여 유폐되어 있던 바실리 2세를 구출했다.[1] 바실리 2세는 트베리로 도망쳐 재기를 하고 모스크바를 탈환했다.[1] 1450년에는 셰먀카의 본거지였던 갈리치를 함락시켰고,[1] 1453년에는 셰먀카를 독살하여 항쟁에서 승리했다.[1]

2. 3. 노브고로드와의 관계

바실리 2세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1441년부터 1460년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노브고로드 공화정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했던 노브고로드를 공격하고, 1456년 야젤비츠 조약을 맺어 노브고로드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

2. 4. 말년

바실리 2세는 말년에 국내 정책에 전념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앙 집권화를 강화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했던 노브고로드를 공격하여 셰미야카를 지원했고, 1456년 야젤비츠 조약을 맺어 노브고로드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1441년부터 1460년까지 군사 원정을 통해 수즈달, 비야트카 지역,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공화정부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했다.[2]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총대주교피렌체 공의회에서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하자,[2] 바실리 2세는 1448년 러시아 주교 회의에서 요나를 대주교로 선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2] 이는 정교회 국가들 사이에서 모스크바의 명성을 강화했다. 바실리 2세는 "전 러시아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고,[3] 모스크바인들은 대공을 모든 러시아 영토의 군주이자 통치자로 여기는 정체성을 발전시켰으며, 바실리 2세는 자신을 정교회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4]

시력을 잃은 후, 바실리 2세는 요나 대주교, 보야르, 그리고 공동 통치자였던 아들 이반 3세의 도움을 받았다. 1462년, 치료 중 화상으로 인한 상처가 악화되어 4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이반 3세가 모스크바 대공위를 계승했다. 바실리 2세의 딸 안나는 리아잔 공국의 왕자와 결혼했다.

3. 대외 관계

바실리 2세의 치세 동안 킵차크 칸국은 붕괴되어 여러 칸국들로 분열되었다.[1] 1439년 카잔 칸국의 울루그 무함마드(Ulugh Muhammad)가 모스크바를 포위하자, 바실리 2세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1] 그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1]

4. 종교 정책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 제국에 함락되고 총대주교가 피렌체 공의회에서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데 동의하자,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2] 1431년 포티우스가 사망한 후 비잔티움의 추천으로 이시도르가 대주교가 되었으나, 그는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한 후 모스크바로 돌아와 서방 가톨릭과의 합의에 반대한 바실리 2세에 의해 해임되고 투옥되었다.[2] 1448년 러시아 주교 회의에서 요나가 대주교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2] 이로써 정교회 국가들 사이에서 모스크바의 위상이 강화되었다.[2] 바실리 2세는 '전 러시아의 군주'라는 칭호를 채택하고, 모스크바인들은 대공을 모든 러시아 영토의 군주이자 통치자로 여기는 정체성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바실리는 자신을 정교회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했다.[4]

5. 평가

바실리 2세는 바실리 1세의 아들로, 1425년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초기에는 어머니인 리투아니아의 소피아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치세 동안 잦은 내전과 실명 등의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1433년에는 즈베니고로드의 유리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지만,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모스크바를 탈환했다. 1446년에는 사촌인 드미트리 셰먀카와의 전투 도중에 시력을 잃었으나, 전투는 14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바실리 2세는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여 훗날 이반 3세의 러시아 통일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치세는 중세 러시아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참조

[1] 서적 Companion to Russian Studies: Volume 1: An Introduction to Ru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2] 서적 Companion to Russian Studies: Volume 1: An Introduction to Ru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3] 서적 The origins of Muscovite autocracy: the age of Ivan III Harrassowitz 1986
[4] 서적 Between East and West: The Formation of the Moscow State https://doi.org/10.2[...] 2021-11-23
[5] 웹사이트 Vasily II grand prince of Moscow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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