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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스카 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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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레스카 거트는 독일의 무용가, 배우, 카바레 예술가이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독일 표현주의 무용과 다다이즘 예술에 참여하며 혁신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1920년대에는 '카나유'와 같은 파격적인 작품으로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며 이름을 알렸다.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런던과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유럽으로 돌아와 영화와 카바레 활동을 이어갔다. 1970년 독일 영화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에는 베를린 현대 미술관에서 그녀의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2. 초기 생애와 경력

발레스카 거트는 베를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무용과 퍼포먼스 아트에 재능을 보이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그녀는 표현주의다다이즘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파격적인 무대 공연과 초기 무성 영화 출연을 통해 전위적인 예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1][5][2]

2. 1. 베를린에서의 유년 시절과 무용 입문

게르트는 베를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게르트루트 발레스카 자모슈'''(Gertrud Valesca Samosch)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제조업자 테오도르 자모슈와 아우구스타 로젠탈의 장녀였다.[1] 학업이나 사무직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1] 9세에 무용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2] 이는 화려한 패션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결합되어 무용과 퍼포먼스 아트 분야로 이끌었다.[1] 1915년, 그녀는 마리아 모이시에게 연기를, 리타 사케토에게 무용을 배웠다.[3]

제1차 세계 대전은 그녀 아버지의 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게르트는 다른 중산층 가정의 딸들보다 훨씬 더 자립해야 했다.[1] 전쟁이 격화되면서 게르트는 베를린의 한 무용단에 합류하여 혁신적인 풍자 무용을 창작했다.[2] 그녀는 1916년 초 첫 솔로 댄스인 '오렌지 댄스'를 만들었고, 무용 스승 리타 사케토의 프로그램 일부로 베를린 블뤼트너잘(Blüthnersaal)에서 공연했으며, 다음 주에는 베를린 놀렌도르프플라츠(Nollendorfplatz)의 UFA 영화 궁전(UFA-Palast)에서 두 영화 상영 사이의 휴식 시간에 공연했다.[4]

도이체스 극장과 트리뷴 극장에서 공연한 후, 게르트는 표현주의 연극과 다다이즘 혼합 매체 예술의 밤에 초청받아 공연하게 되었다.[1] 그녀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욥'(Hiob, 1918), 에른스트 톨러의 '변신'(Die Wandlung, 1919), 프랑크 베데킨트의 '프란치스카'(Franziska)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5]

발레스카 게르트, 수제 바이크의 사진


1920년대에 게르트는 '카나유'(Kanaille, 불량배 또는 창녀를 의미)와 같이 더욱 도발적인 작품 중 하나를 초연했다. 또한 이 시기 그녀의 다른 진보적인 공연에는 교통사고, 권투, 죽음을 묘사하는 춤 등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끊임없이 관객에게 충격과 매혹을 동시에 선사했다. 1922년 베를린에서 오르가즘을 표현하며 '카나유'를 공연했을 때 관객들이 경찰을 부르기도 했다.[6]

이 시기에 그녀는 샬 운트 라우흐(Schall und Rauch) 카바레에서 공연했다.[1][7] 게르트는 또한 '오렌지 댄스', '권투', '서커스', '일본 그로테스크', '죽음', '카나유'와 같은 제목으로 자신의 댄스 투어를 시작했다.[1] 그녀는 또한 잡지 디 벨트뷔네(Die Weltbühne)와 '베를리너 타게스차이퉁'(Berliner Tageszeitung) 등에 글을 기고했다.[2]

1923년부터 게르트는 영화 연기에도 부분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여 앤드루스 엥겔만, 아르놀트 코르프 등과 함께 작업했다.[8] 그녀는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감독의 영화 '즐거움 없는 거리'(Die freudlose Gasse, 1925), '잃어버린 소녀의 일기'(Tagebuch einer Verlorenen, 1929), '서푼짜리 오페라'(Die 3 Groschen-Oper, 1931)에 출연했다.[1][2] 또한 1923년에 그녀는 연인인 아리베르트 베셔를 만났고,[9] 그들의 관계는 1938년까지 지속되었다. 늦어도 1926년부터는 '톤텐체'(Tontänze, 소리 춤)라고 불리는 새로운 솔로 작품을 무대에 선보였는데, 이는 움직임, 몸짓, 표정에 목소리(소리와 단어)를 더한 것이었다.[1]

게르트의 공연은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조롱하고, 비참하거나 격렬하게 변모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정부주의적인 강렬함과 예술적인 대담함으로 공연하여 다다이스트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10] 발레스카 게르트는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분석하고, 그 분석에서 얻은 통찰력을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였다.[6]

2. 2.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활동과 표현주의 무용

제1차 세계 대전은 발레스카 게르트 아버지의 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그녀는 다른 부르주아 가정의 딸들보다 훨씬 더 자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 전쟁이 격화되면서 게르트는 베를린의 한 무용 그룹에 합류하여 혁신적인 풍자 무용을 창조하기 시작했다.[2] 그녀는 9세 때부터 무용 수업을 받았고,[2] 1915년에는 마리아 모이시에게 연기를, 리타 사케토에게 무용을 배웠다.[3]

1916년 초, 게르트는 자신의 첫 솔로 댄스인 '오렌지 댄스'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녀의 무용 스승 리타 사케토의 프로그램 일부로 베를린의 블뤼트너잘에서 처음 공연되었고, 다음 주에는 베를린 놀렌도르프플라츠에 있는 UFA 영화 궁전에서 두 영화 상영 사이의 휴식 시간에 공연되었다.[4]

이후 도이체스 극장과 트리뷴 극장에서 공연하며 경력을 쌓은 게르트는 표현주의 연극과 다다이스트들의 혼합 매체 예술 공연에 초청받아 참여하게 되었다.[1] 그녀는 오스카 코코슈카의 희곡 '욥'(1918), 에른스트 톨러의 '변신'(1919), 프랑크 베데킨트의 '프란치스카' 등에 출연하며 표현주의 연극계에서 주목받았다.[5]

게르트의 공연 스타일은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조롱하는 듯하면서도 비참하거나 격렬한 감정을 넘나들었다. 그녀는 아나키적인 강렬함과 예술적인 대담함으로 공연하여 다다이스트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10] 발레스카 게르트는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 통찰을 자신의 몸짓과 표정을 통해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독창적인 예술가였다.[6]

2. 3. 1920년대의 전성기와 파격적인 무대

1920년대에 게르트는 더욱 도발적인 작품 중 하나인 '카나유'(Canaille|카나유fra, 프랑스어로 창녀를 의미)를 초연했다.[6] 이 시기 그녀의 다른 진보적인 공연에는 교통 사고, 권투, 죽음을 묘사하는 춤 등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예술가였으며, 끊임없이 관객에게 충격과 매력을 동시에 선사했다. 1922년 베를린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연기를 하며 '카나유'를 공연했을 때는 관객들이 경찰을 부르기도 했다.[6]

이 시기에 그녀는 샬 운트 라우흐 카바레에서도 공연했다.[1][7] 또한 '오렌지 댄스', '권투', '서커스', '일본 그로테스크', '죽음', '카나유'와 같은 작품들을 포함한 자신만의 댄스 투어를 시작했다.[1] 그녀는 '디 벨트뷔네'(Die Weltbühne|디 벨트뷔네deu, 세계 무대)나 '베를리너 타게블라트'(Berliner Tageblatt|베를리너 타게블라트deu, 베를린 일보) 같은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2]

1923년부터는 영화 연기에도 집중하기 시작하여 앤드루스 엥겔만, 아르놀트 코르프 등과 함께 출연했다.[8] 특히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연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즐거움 없는 거리'(1925), '잃어버린 소녀의 일기'(1929), '서푼짜리 오페라'(1931)가 있다.[1][2] 또한 1923년에는 훗날 연인이 되는 배우 아리베르트 베셔를 만났으며, 그들의 관계는 1938년까지 이어졌다.[9] 늦어도 1926년부터는 '톤텐체'(Tontänze|톤텐체deu, 소리 춤)라고 불리는 새로운 형식의 솔로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는 기존의 움직임, 몸짓, 표정에 목소리(소리와 단어)를 더한 것이었다.[1]

게르트의 공연은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조롱하는 듯하면서도, 비참하거나 격렬한 감정을 넘나들었다. 그녀는 아나키적인 강렬함과 예술적인 두려움 없는 태도로 공연하여 다다이스트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10] 발레스카 게르트는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 통찰을 자신의 몸을 통해 표현하는 독창적인 예술가였다.[6]

3. 망명

1933년, 나치 독일 정권은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발레스카 거트의 독일 내 활동을 금지했다.[1] 이로 인해 거트는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처음에는 런던으로 이주했으며,[1] 이후 193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이어갔다.[1][2]

3. 1. 런던 시절 (1933-1939)

1933년, 거트는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독일 무대에서 활동이 금지되었다. 독일에서 추방된 후 잠시 런던으로 이주하여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1] 런던에서는 실험 단편 영화 ''페트와 포트''(Pett and Pott)에 참여했는데, 이 작품은 오랫동안 그녀의 마지막 영화로 여겨졌다. 런던 체류 기간 동안 영국 작가 로빈 헤이 앤더슨(Robin Hay Anderson)과 결혼했으며,[11] 이는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2]

3. 2. 미국 시절 (1939-1947)

1939년 초,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유대인 난민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았다. 같은 해, 그녀는 게오르크 크라이슬러(Georg Kreisler)를 리허설 피아니스트로 고용하여 카바레 작업에 계속 집중했다. 1940년 여름, 그녀는 프로빈스타운 (매사추세츠)에서 예술가를 위해 누드 모델로 일자리를 구했다.[2] 1941년 말까지 그녀는 뉴욕시에 'Beggar's Bar'를 열었다. 그곳은 어울리지 않는 가구와 램프로 채워진 카바레 겸 레스토랑이었다. 줄리안 벡(Julian Beck), 주디스 말리나(Judith Malina),[1] 그리고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그녀를 위해 일했다.[12]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도 잠시 웨이터로 일했지만, 팁을 합산하는 것을 거부하여 해고되었다.[12] 거트는 그의 작업이 "너무 엉성하다"고 평했다.[13] 1945년 2월, 거트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공식 허가 부족으로 인해 'Beggar's Bar'를 닫아야 했다.

거트는 1946년까지 매년 여름 프로빈스타운에서 보냈고, 그해 그녀는 그곳에 새로운 카바레 'Valeska's'를 열었다.[1] 프로빈스타운에서 그녀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재회했다. 그녀는 그에게 'Beggar's Bar'를 위해 70세의 난쟁이 '마드모아젤 펌퍼니켈'을 고용했는데, 거트가 무대에 설 때마다 질투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46년 여름, 그녀가 'Valeska's'를 운영하는 동안, 그녀는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댄스 파트너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은 혐의로 프로빈스타운 법원에 소환되었다. 그녀는 윌리엄스를 증인으로 불렀고, 그는 그녀에게 해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응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친구들에게 "단지 그녀가 좋았다"고 말했다.[12]

4. 유럽으로의 귀환

1947년, 나치즘을 피해 망명 생활을 했던 발레스카 거트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파리취리히를 거쳐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이던 베를린에 정착하여 카바레를 운영하는 등 예술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실트 섬에서도 카바레를 운영했으며, 1960년대부터는 영화계에도 복귀하여 페데리코 펠리니,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폴커 슐렌도르프 등 여러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며 말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4. 1. 유럽에서의 활동 재개 (1947-1978)

1947년 유럽으로 돌아와 파리취리히에 머물며 1948년 반년 동안 '발레스카와 그녀의 주방 직원들'(Valeska und ihr Küchenpersonalde)이라는 이름의 카바레 카페를 운영했다. 이후 베를린 봉쇄가 한창이던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옛 '오페라 지하실'(Opernkellerde)이 있던 '서부 극장'(Theater des Westensde)에서 카바레 '바이 발레스카'(Bei Valeskade)를 열었고, 1950년에는 카바레 '마녀의 부엌'(Hexenküchede)을 열었다. '마녀의 부엌'은 1956년 4월까지 매년 겨울에 운영되었다.[2] 같은 시기인 1951년 여름에는 실트 섬의 캄펜 마을에서 카바레 '염소 우리'(Ziegenstallde)를 열었다.[1]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매년 여름 이 작지만 잘 알려진 카바레를 운영했다.

1960년대에는 영화계에 복귀했다. 1965년에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영혼의 줄리에타''에 출연했으며,[1] 이 영화의 성공 이후 1970년대에는 젊은 독일 감독들과 함께 작업했다. 이 시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TV 시리즈 ''8시간은 하루를 만들지 않는다''와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1976년 영화 ''쿠 드 그라스''에 출연했다.[2]

베를린 시 명예 묘소


1978년에는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으로부터 F. W. 무르나우의 고전 영화 ''노스페라투''의 리메이크 작품에서 부동산 중개인 녹 역할을 제안받았다. 계약은 3월 1일에 체결되었으나, 촬영 시작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망했다. 1978년 3월 18일, 독일 캄펜의 이웃과 친구들이 나흘 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다고 신고했고, 경찰 입회 하에 문을 열었을 때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망일은 3월 16일로 추정되며, 당시 86세였다.

2010년, 그녀의 예술 세계는 베를린 현대 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에서 열린 전시회 '휴식. 움직이는 조각들'(Pause. Bewegte Fragmentede)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예술 펑크 밴드 ''Die Tödliche Doris''의 큐레이터 볼프강 뮐러와 미술사학자 안 파엔휴센(An Paenhuysen)은 1969년 에른스트 미츠카(Ernst Mitzka)가 촬영한 거트의 공연 영상 "Baby"를 이 전시에 포함시켰다.[14] 거트가 "Baby"와 "Death"를 공연하는 미츠카의 영상은 비디오 아트 컬렉션 ''Record Again! 40 Jahre Videokunst.de part 2.''에도 수록되었다.[15]

4. 2. 영화계 복귀와 말년

1947년 그녀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파리와 취리히에서 머물면서 1948년 반년 동안 Valeska und ihr Küchenpersonal|발레스카 운트 이어 퀴헨페르조날de이라는 카바레 카페를 운영한 후, 베를린 봉쇄가 진행 중이던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옛 Opernkeller|오페른켈러de의 Theater des Westens|테아터 데스 베스텐스de에서 카바레 Bei Valeska|바이 발레스카de를 열었고, 이후 1950년에는 카바레 Hexenküche|헥센퀴헤de를 열었다. 이 카바레는 1956년 4월까지 매년 겨울마다 운영되었다.[2] 같은 기간 동안, 그녀는 1951년 여름 실트 섬의 캄펜 마을에서 카바레 Ziegenstall|치겐슈탈de을 열었다.[1]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매년 여름 이 작지만 잘 알려진 카바레를 운영했다.

1960년대에 그녀는 영화계에 복귀했다. 1965년,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영혼의 줄리에타''에 출연했으며,[1] 이 영화의 성공으로 1970년대에는 젊은 독일 감독들에게 자신을 알렸다. 이 시기 그녀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TV 시리즈 ''8시간은 하루를 만들지 않는다''와 폴커 슐렌도르프의 1976년 영화 ''쿠 드 그라스''에 출연했다.[2]

1978년, 베르너 헤어조크는 그녀에게 F. W. 무르나우의 고전 영화 ''노스페라투''의 리메이크작에서 부동산 중개인 녹 역할을 제안했다. 계약은 3월 1일에 체결되었으나, 촬영 시작 불과 2주 전인 1978년 3월 16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18일, 독일 캄펜의 이웃과 친구들이 그녀를 나흘 동안 보지 못했다고 신고했고, 경찰 입회하에 문을 열었을 때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86세였다.

2010년, 발레스카 거트의 예술은 베를린 현대 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에서 열린 전시회 ''Pause. Bewegte Fragmente|파우제. 베베크테 프라그멘테de''에서 소개되었다. 예술 펑크 밴드 ''Die Tödliche Doris''의 큐레이터 볼프강 뮐러와 미술사학자 안 파엔휴센은 거트가 1969년 에른스트 미츠카가 촬영한 영상 "Baby"를 공연하는 모습을 포함시켰다.[14] 거트가 "Baby"와 "Death"를 공연하는 미츠카의 비디오는 비디오 아트 컬렉션 ''Record Again! 40 Jahre Videokunst.de part 2.''에도 포함되었다.[15]

5. 영화

발레스카 거트 출연 영화 목록
연도제목역할감독제작 국가비고
1918콜롬바아르첸 폰 체레피독일
1925우드 러브한스 노이만독일
1925환락의 거리프라우 그라이퍼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독일크레딧 미기재
1926나나조에 - 라 팜므 드 상브르장 르누아르독일 / 프랑스에밀 졸라 원작
1928알라우네아가씨헨릭 갈렌독일한스 하인츠 에버스 원작
1929죽음카를 코흐독일실험 영화 ("토텐탄츠", 베르톨트 브레히트바덴바덴 동의 교육 일부)
1929잃어버린 소녀의 일기감독의 아내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독일마르가레테 뵘 원작
1930인생이란 이런 것 (Takový je život)웨이트리스카를 융한스독일 / 체코슬로바키아
1930일요일의 사람들본인로베르트 시오드마크, 로쿠스 글리제, 에드가 G. 울머독일
1931서푼짜리 오페라피첨 부인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독일
1934페트와 포트하녀알베르토 카발칸티영국단편 영화
1939리오스페셜티존 브라함영국크레딧 없음
1965영혼의 줄리에타피지마페데리코 펠리니이탈리아 / 프랑스 / 서독
1966라 본 담피에르 필리프프랑스
1973여덟 시간은 하루를 만들지 않는다디 안데레 오마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서독TV 시리즈 (에피소드: "프란츠와 에른스트")
1975디 베퇴룽 데어 블루엔 마트로젠아인 알터 포겔울리케 오팅거서독
1976쿠 드 그라스탄테 프라스코비아폴커 슐뢴도르프서독 / 프랑스마지막 영화 역할
1977누어 춤 슈파스, 누어 춤 슈필 – 칼레이도스코프 발레스카 게르트본인폴커 슐뢴도르프서독다큐멘터리


6. 수상


  • 1970: 독일 영화상 (Deutscher Filmpreisde) - 독일 영화 평생 공로상
  • 2004: 마인츠의 카바레 명예의 거리(Walk of Fame of Cabaret영어)에 별 헌정

7. 유산과 평가

게르트의 공연 스타일은 그로테스크하고 강렬하며, 때로는 조롱하거나 격렬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강렬함과 예술적 대담함은 다다이스트들에게도 인정받았다.[10] 그녀는 사회적 관습의 한계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이를 신체적 표현으로 옮기는 데 뛰어났으며,[6]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춤으로 관객들에게 충격과 매혹을 동시에 안겼다. 1922년 베를린에서 공연한 '카나유'는 외설 논란으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6]

다음은 발레스카 거트의 주요 저작 및 관련 연구 자료 목록이다.

'''발레스카 거트 저작 (1차 자료)'''

제목출판 정보
Mein Weg|나의 길ger라이프치히, 1931. (2판, 자가 출판, s.l. & s.a., 약 1950년)
Die Bettlerbar von New York|뉴욕의 거지 바ger베를린, 1950. (2판, s.l. & s.a., 약 1958년)
Ich bin eine Hexe|나는 마녀다ger뮌헨, 1968 (다양한 판본)
Die Katze von Kampen|캄펜의 고양이ger페르차, 1974
Je suis une sorcière. Kaléidoscope d'une vie dansée|나는 마녀입니다. 춤추는 삶의 만화경fre파리, 2004 (나는 마녀다의 번역본, 필립 이베르넬의 주석 및 서문 포함)


  • 이 외에도 약 20편의 에세이가 F.-M. 피터(1985)에 의해 기록되었다.


'''발레스카 거트에 관한 저작 (2차 자료)'''

저자제목출판 정보
프레드 힐덴브란트Die Tänzerin Valeska Gert|무용가 발레스카 거트ger슈투트가르트, 1928
프랑크-마누엘 피터Valeska Gert: Tänzerin, Schauspielerin und Kabarettistin. Eine dokumentarische Biographie|발레스카 거트: 무용가, 배우, 카바레 예술가. 다큐멘터리 전기ger베를린, 1985, 2판 1987
수잔네 푈머Valeska Gert. Fragmente einer Avantgardistin in Tanz und Schauspiel der 1920er Jahre|발레스카 거트. 1920년대 춤과 연극에서 아방가르드의 파편ger빌레펠트, 2006. CD-ROM 포함 (거트, 메리 위그만, 니디 임페코벤의 댄스 필름)
페터 에크하르트 라이헬Solo für ein Mannequin von Grieneisen|그리네이젠의 마네킹을 위한 솔로ger발레스카 거트에 대한 헌정 오디오 콜라주, 모니카 한센과 게르트 바멜링 참여, 듀오폰 레코드, 2001
볼프강 뮐러Valeska Gert. Ästhetik der Präsenzen|발레스카 거트. 프레젠스의 미학ger서베를린 퍼포먼스 그룹 Die Tödliche Doris의 창립자가 프로토 펑크 발레스카 거트의 퍼포먼스/예술과 포스트 펑크 장면의 관계에 대해 쓴 글, 베를린, 2010.



'''발레스카 거트를 언급한 저작 (2차 자료)'''

저자제목출판 정보
파울 니콜라우스Tänzerinnen|무용가ger뮌헨 (1919)
에른스트 블라스Das Wesen der neuen Tanzkunst|새로운 춤 예술의 본질ger바이마르, 1921
베르너 수르Das Gesicht des Tanzes|춤의 얼굴ger함부르크 근처 에게스토르프, 1927



'''학술 연구'''

저자제목출판 정보
가브리엘레 브란트슈테터Tanz-Lektüren. Körperbilder und Raumfiguren der Avantgarde|춤 강의. 아방가르드의 신체 이미지와 공간 형상ger프랑크푸르트 a. M., 1995
다이앤 S. 하우Individuality and Expression – The Aesthetics of the New German Dance, 1908–1936|개성과 표현 – 1908–1936년 독일 신무용의 미학eng뉴욕, 1996
램지 버트Alien bodies: representations of modernity, ‚race and nation in early modern dance|이질적인 신체: 초기 근대 무용에서의 현대성, 인종' 및 국가의 표현eng뉴욕, 1998
크리스티안 쿠르만Bewegter Körper – Mechanischer Apparat. Zur medialen Verschränkung von Tanz und Fotografie in den 1920er Jahren|움직이는 신체 – 기계 장치. 1920년대 춤과 사진의 매체적 얽힘ger프랑크푸르트 a. M., 2003
이본 하르트Politische Körper. Ausdruckstanz, Choreografien des Protests und die Arbeiterkulturbewegung in der Weimarer Republik|정치적 신체. 표현 무용, 항의의 안무, 바이마르 공화국의 노동자 문화 운동ger뮌스터, 2004
아멜리 소이카"Eine kleine Rakete, die ständig zirpt: Valeska Gert". In: dies. (Hg.): Tanzen, tanzen und nichts als tanzen. Tänzerinnen der Moderne von Josephine Baker bis Mary Wigman|"계속 윙윙거리는 작은 로켓: 발레스카 거트". 에서: 디에스. (편집): 춤추고, 춤추고, 오직 춤만 춰라. 조세핀 베이커에서 메리 위그만까지의 현대 무용가들ger베를린, 2004, p. 123–137
알렉산드라 콜브"There Has Never Been Such a Thing"이런 건 전에 없었다" 바이마르 문화의 맥락에서 발레스카 거트의 퍼포먼스eng, The European Legacy 2007 (12/3), pp. 293–309
케이트 엘스윗"Returned Again? Valeska Gert Exiles". In: New German Dance Studies|"다시 돌아왔나? 발레스카 거트의 망명자들". 에서: 신 독일 무용 연구''eng일리노이, 2012, p. 113-129
크리스틴 힐렌스키"‘I want to live, even if I am dead’: Valeska Gert's Autobiographical Legacy."|"‘나는 죽더라도 살고 싶다’: 발레스카 거트의 자전적 유산."engGerman Life and Letters 66.1 (2013): 39-54.
크리스틴 힐렌스키"‘Kaleidoscope of My Life’: Valeska Gert's Self-Performance."|"‘내 삶의 만화경’: 발레스카 거트의 자기 퍼포먼스."engColloquia Germanica 42.4 (2009): 289-306.



'''전기에서 언급'''

저자제목출판 정보
한스-위르겐 핑크 & 미하엘 조이페르트Georg Kreisler gibt es gar nicht – Die Biographie|게오르크 크라이슬러는 존재하지 않는다 – 전기ger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2005, p. 96–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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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Valeska Gert http://www.cyrano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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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서 Valeska Gert
[5] 서적 Twentieth-Century Theatre: A sourcebook https://books.google[...] Routledge 1995
[6] 웹사이트 Profile http://www.goethe.de[...] 2014-06-15
[7] 서적 Berlin Cabaret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8] 기타 Amg name
[9] 문서 Valeska Gert. Von Berlin bis Kampen auf Sylt 2022
[10] 웹사이트 The grotesque burlesque of Valeska Gert http://strangeflower[...] 2010-01-11
[11] 웹사이트 Biodata https://www.imdb.com[...] 2014-06-15
[12] 강연 Mel Gordon, lecture 2007-07-09
[13] 서적 The Unknown Tennessee Williams https://books.google[...] W. W. Norton & Company 1995
[14] 문서 Der absolute Tanz, Tänzerinnen der Weimarer Republik 2021
[15] 웹사이트 Record Again! 40 Jahre Videokunst.de Teil 2 https://www.edith-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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