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커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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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밴쿠버 커넉스는 1945년 창단된 프로 아이스하키팀으로, 현재는 내셔널 하키 리그(NHL)의 퍼시픽 디비전에 소속되어 있다. 1970년 NHL에 가입했으며, 1982년과 1994년 두 번의 스탠리 컵 결승 진출을 기록했다. 헨릭 세딘, 다니엘 세딘 형제 등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했으며, 링 오브 아너와 영구 결번 제도를 통해 팀에 공헌한 선수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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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커넉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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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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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지 |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 |
창단 | 1945년 (PCHL) 1970년 (NHL 확장팀) |
역사 | 밴쿠버 커넉스 1945–1952 (PCHL) 밴쿠버 커넉스 1952–1970 (WHL) 밴쿠버 커넉스 1970–현재 (NHL) |
경기장 | 로저스 아레나 |
팀 색상 | 파랑, 초록, 하양 |
미디어 제휴 | 스포츠넷 퍼시픽 스포츠넷 원 스포츠넷 650 |
웹사이트 | 밴쿠버 커넉스 공식 웹사이트 |
조직 | |
구단주 | 커넉스 스포츠 & 엔터테인먼트 (프란체스코 아퀼리니, 회장) |
단장 | 파트릭 알빈 |
감독 | 릭 토켓트 |
주장 | 퀸 휴즈 |
마이너 리그 제휴 | 애버츠퍼드 커넉스 (AHL) 칼라마주 윙스 (ECHL) |
성적 | |
스탠리 컵 | 0회 |
컨퍼런스 우승 | 3회 (1981–82, 1993–94, 2010–11) |
프레지던츠 트로피 | 2회 (2010–11, 2011–12) |
디비전 우승 | 11회 (1974–75, 1991–92, 1992–93, 2003–04, 2006–07, 2008–09, 2009–10, 2010–11, 2011–12, 2012–13, 2023–24) |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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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70년 5월 22일 내셔널 하키 리그(NHL)에 가입하며 밴쿠버 커넉스가 창단되었다. 커넉스는 NHL에서 우승한 적은 없지만, 3번의 준우승(1981-1982, 1993-1994, 2010-2011)을 기록했다.
커넉스는 1970년 NHL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단을 구성했다. 1970년 6월 9일 드래프트 추첨에서 커넉스와 버펄로 세이버스 중 누가 확장 드래프트와 1970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첫 지명권을 얻을지 결정했는데, 세이버스가 모두 이겼다. 커넉스는 확장 드래프트 첫 지명으로 수비수 게리 도악을 선택했고,[14] 초대 주장으로 센터 올랜드 커튼바흐를 임명했다.
1970년 10월 9일 로스앤젤레스 킹스와의 창단 첫 경기에서 3-1로 패배했고, 이 경기에서 수비수 배리 윌킨스가 구단 역사상 첫 골을 기록했다.[17] 이틀 후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를 상대로 5-3으로 승리하며 구단 첫 승을 거두었다.[18]
커넉스는 팀 역사상 3번 스탠리 컵 결승에 진출했다. 1982년 뉴욕 아일랜더스와의 첫 결승전에서는 4전 전패로 완패했다.
1994년 두 번째 결승전에서는 캡틴 트레버 린든, 득점원 파벨 부레, 골리 커크 맥린의 활약으로 서부 컨퍼런스 7번 시드에서 올라왔으나, 뉴욕 레인저스에게 3승 4패로 아쉽게 패했다. 이 경기 후 밴쿠버에서 패배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마크 메시에 등이 팀에 합류했지만, 1994년과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했다. 2006년 플로리다 팬서스로부터 로베르토 루옹고를 영입하여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2라운드에서 애너하임 덕스에 패했다.
2. 1. 창단 배경 (1945-1970)
1945년 퍼시픽 코스트 하키 리그(PCHL)는 밴쿠버시에 아이스하키 프랜차이즈권을 부여하기로 했고, 그렇게 밴쿠버 커넉스가 설립되었다. 커넉스는 창단 2년 만에 PCHL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1952년에는 PCHL이 서부 캐나다 시니어 하키 리그와 합병하여 프로 마이너 리그인 서부 하키 리그(WHL)가 탄생한다. 커넉스에서는 조니 바우어, 앤디 바스게이트, 토니 에스포지토 같은 스타 선수들이 배출되었고, 팀은 1958년, 1960년, 1969년 및 1970년에 레스터 패트릭 컵을 획득한다.
1965년, 내셔널 하키 리그(NHL)은 리그에 6개의 팀을 추가하는 시장 확대 구상을 발표했다. 당시 WHL에 가맹했던 커넉스의 구단주이자 전 밴쿠버 시장이기도 했던 프레드 휴메은 밴쿠버시도 이 구상에 참여 신청을 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NHL 이사회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엉망이었고, 밴쿠버 구단주 그룹과 시카고 블랙호크스 구단주 제임스 노리스나 토론토 메이플리프스 구단주 스타포드 스마이스 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참가 신청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쿠버에 NHL 프랜차이즈 팀이 설립될 것을 예상하여 퍼시픽 콜리세움이 건설되었다.
1970년, 다른 밴쿠버 구단주 그룹이 마이너 리그 소속의 커넉스를 인수하고, 거듭된 협의 끝에 커넉스는 가맹금 600만달러을 지불하고 NHL에 참가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2. 2. NHL 가입과 초기 (1970-1982)
1967년 NHL 확장 당시 밴쿠버는 리그에 합류할 6개 팀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입찰했지만 NHL에 의해 거부되었다. 입찰 대표 사이러스 맥린은 이를 "조작된 거래"라고 비판했다.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 회장 스태포드 스마이트가 이 입찰을 방해했다는 추측이 오랫동안 제기되었다.[10]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오클랜드 실스가 재정난을 겪자, 팀을 밴쿠버로 옮기기로 합의했지만 NHL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NHL은 소송을 피하고자 다음 확장 때 밴쿠버에 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12] 이후 미네소타 기업가 톰 스칼렌 그룹이 1967–68 NHL 시즌의 3배인 600만달러에 확장 프랜차이즈를 획득했다.[13] 이들은 WHL 커넉스를 인수하여 1970–71 NHL 시즌에 버펄로 세이버스와 함께 리그에 합류했다.
밴쿠버 커넉스는 1970년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단을 구성했다. 1970년 6월 9일 드래프트 추첨에서 커넉스와 세이버스 중 누가 확장 드래프트와 1970년 NHL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첫 지명권을 얻을지 결정했는데, 세이버스가 모두 이겼다. 커넉스는 확장 드래프트 첫 지명으로 수비수 게리 도악을 선택했고,[14] 초대 주장으로 센터 올랜드 커튼바흐를 임명했다.

1970년 10월 9일, 커넉스는 로스앤젤레스 킹스와의 창단 첫 경기에서 3-1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 수비수 배리 윌킨스가 구단 역사상 첫 골을 기록했다.[17] 이틀 후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를 상대로 5-3으로 승리하며 구단 첫 승을 거두었다.[18]
커넉스는 초반 4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고전했다.[26]
1974-75 시즌 전, 스칼렌 등 미네소타 출신 소유주들은 팀을 프랭크 그리피스에게 900만달러에 매각했다.[19] 그해 여름 커넉스는 스마이디 디비전으로 재편되었고, 골키퍼 게리 "슈트케이스" 스미스의 활약으로 첫 승률(38승 32패 10무)을 기록하며 디비전 1위에 올랐다.[20] 그러나 첫 플레이오프에서 몬트리올 캐나디언스에게 5경기 만에 패했다.
2. 3. 1982년 스탠리 컵 준우승
밴쿠버 커넉스는 1981-82 정규 시즌을 승률 0.500 미만으로 마쳤지만, 시즌 마지막 9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23] 시즌 후반, 팀의 리더였던 맥카시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스마일이 주장을 맡아 8년간 팀 기록을 세웠다.[24][25]커넉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캘거리 플레임스, 로스앤젤레스 킹스, 시카고 블랙호크스를 꺾고 (11승 2패) 스탠리 컵 결승에 진출했다.[26] 정규 시즌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밴쿠버는 스마이스 디비전에서 2위를 차지하여 첫 번째 시리즈에서 홈 경기 이점을 가졌다.
컨퍼런스 결승 2차전에서, 임시 감독 로저 닐슨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하키 스틱에 흰 수건을 걸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선수들도 이를 따랐고, 밴쿠버 팬들은 다음 경기부터 흰 수건을 흔들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타월 파워"라는 전통으로 굳어졌다.[27]
커넉스는 컨퍼런스 결승에서 승리하여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스탠리 컵 결승전에 진출했다.[27] 이는 1926년의 빅토리아 쿠거스 이후 56년 만에 서부 캐나다 팀이 스탠리 컵 결승에 진출한 것이자, 최초의 대륙 횡단 스탠리 컵 결승전이었다.[28]
뉴욕 아일랜더스와의 결승전 첫 경기에서, 밴쿠버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수비수 해럴드 스냅스트의 실수로 마이크 보시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패했다.[29] 두 번째 경기에서도 3-2로 앞섰지만, 결국 6-4로 역전패했다.[29] 결국 커넉스는 이후 두 경기를 모두 내주며 (3-0, 3-1) 4전 전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26]
2. 4. 침체기 (1982-1987)
밴쿠버 커넉스는 1982년 스탠리 컵 결승 진출 이후, 10년 동안 단 4번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침체기를 겪었다.[26]이 시기 커넉스에는 뛰어난 공격수 파트리크 순드스트롬과 토니 탄티가 합류했다. 1983-84 시즌부터 5시즌 중 4시즌 동안 순드스트롬 또는 탄티가 팀 득점왕을 차지했다.[26] 1985년에는 페트리 스크리코가 팀 득점왕이었다. 커넉스는 주로 로스앤젤레스 킹스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놓고 경쟁했으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 에드먼턴 오일러스나 캘거리 플레임스에 패해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26]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밀포드가 단장을 맡은 후, 해리 네일이 3년, 잭 고든이 2년간 단장을 맡았다. 잭 고든 단장은 1986년 캠 닐리를 보스턴 브루인스로 트레이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30] 커넉스는 닐리 외에도 1987년 1라운드 드래프트 픽을 브루인스에 넘겨주고, 센터 배리 페더슨을 영입했다. 페더슨은 처음 두 시즌 동안은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이후 경기력이 하락하여 1989년 피츠버그 펭귄스로 트레이드되었다.[31] 반면, 닐리는 브루인스에서 50골 시즌을 3번 기록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32] 브루인스가 1987년 드래프트 픽으로 지명한 글렌 웨슬리는 20년 동안 활약했다.[33] 이러한 잭 고든의 결정은 팀의 미래를 어둡게 한 근시안적인 판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5. 팻 퀸 시대 (1987-1998)
팻 퀸은 1987년 여름에 단장으로 임명된 후, 팀의 핵심 베테랑 선수들을 젊은 유망주와 선수들로 교체하며 팀 재건에 나섰다.[34] 주요 선수 거래 중 하나는 뉴저지 데블스와의 거래였는데, 여기서 파트리크 순드스트롬은 윙어 그렉 아담스와 골텐더 커크 맥클린과 교환되었다. 퀸의 트레이드 외에도, 팀은 특히 두 번의 드래프트 선발을 통해 발전했다. 1988년 NHL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커넉스는 웨스턴 하키 리그 (WHL) 출신의 윙어 트레버 린든을 선택했다. 다음 해 팀은 논란이 있는 선택으로 러시아 윙어 파벨 부레를 전체 113순위로 지명했다. 부레는 대부분의 팀에서 그해 선발 자격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커넉스의 드래프트는 팀 경영진이 그의 자격 증명을 입증하는 문서를 확보하는 데 1년이 걸려 리그에서 확인되었다.[35]
1990-91 시즌 전, 스탠 스마일은 팀에서 출전 시간이 줄어들면서 주장을 사임했다. 커넉스는 린든, 댄 퀸, 더그 리드스터를 번갈아 가며 주장으로 임명했고, 셋 중 린든이 그 이후 주장을 맡아 21세의 팀 역사상 최연소 영구 주장이 되었다. 시즌이 끝날 무렵, 스마일은 팀 통산 출전 경기, 골, 어시스트, 포인트 기록을 모두 보유한 선수로 은퇴했다.[36] 린든의 활약과 퀸의 거래에 힘입어 커넉스는 1990년대 초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 결과 밴쿠버는 1991-92 시즌에 42승 26패 12무를 기록하며 17년 만에 첫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1975-76 시즌 이후 팀의 첫 승리 시즌이기도 했다). 시즌 동안 커넉스는 스마일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니폼(12번)을 팀 역사상 처음으로 영구 결번했다.[36] 1992년 플레이오프에서 커넉스는 1982년 이후 첫 시리즈에서 승리한 후 2라운드에서 에드먼턴 오일러스에게 패했다.[26] 오프 시즌에 퀸과 부레는 NHL 주요 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커넉스 선수가 되었는데, 퀸은 최고의 코치(그해부터 코치와 단장 역할을 겸임)로, 부레는 리그 최고의 신인으로 각각 잭 애덤스 상을 수상했다.[37] 다음 해, 커넉스는 정규 시즌 디비전 챔피언 자리를 되풀이했고, 부레는 60골을 두 시즌 연속으로 기록하며 팀의 첫 번째 슈퍼스타로 떠올랐고, 이는 커넉스 역사상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38]
2. 6. 1994년 스탠리 컵 준우승
1993-94 시즌, 커넉스는 서부 컨퍼런스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정규 시즌에는 부진했지만 (전년도보다 승점이 16점 감소), 새롭게 이름이 바뀐 퍼시픽 디비전에서 2위를 차지하며,[20] 플레이오프에서 좋은 경기를 펼쳤다.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캘거리 플레임스를 상대로 3승 1패로 뒤진 상황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했다. 5차전부터 7차전까지는 각각 제프 코트날, 트레버 린든, 파벨 부레의 골로 연장전에서 승리했다.[40] 특히 7차전은 커넉스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을 만들었다. 1차 연장전에서 3-3으로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골키퍼 커크 맥클린은 '더 세이브(The Save)'로 불리는 선방을 했다. 골라인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패드를 겹쳐 로버트 라이헬의 원타이머 슛을 막았다. 이어진 공격에서 파벨 부레는 수비수 제프 브라운의 패스를 받아 캘거리 골키퍼 마이크 버논을 제치고 골을 넣어 시리즈를 승리로 이끌었다. 15년 후, 부레의 골과 맥클린의 세이브는 ''밴쿠버 선'' 기사에서 "팀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40가지 순간" 중 각각 1위와 2위로 선정되었다.[41]

플레임스를 꺾은 후, 커넉스는 댈러스 스타스와 토론토 메이플리프스를 모두 5경기 만에 꺾고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스탠리 컵 결승전에 진출했다.[26] 포워드 그렉 아담스는 메이플리프스 골키퍼 펠릭스 포트빈을 상대로 5차전에서 더블 연장전 골을 터뜨려 커넉스를 결승으로 이끌었다.[41]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동서부 해안팀 간의 결승전에서 커넉스는 프레지던트 트로피를 수상한 뉴욕 레인저스와 맞붙었다. 밴쿠버는 1차전에서 골키퍼 맥클린의 52개 선방에 힘입어 3-2로 연장전 승리를 거두었다.[42] 이후 3경기를 내리 패했지만, 커넉스는 다시 두 경기를 잡아내며 1994년 6월 14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7차전을 치렀다.[26] 트레버 린든은 (갈비뼈 골절을 안고 경기를 뛰면서)[43] 두 골을 넣었지만(쇼트핸디드 브레이크어웨이 1골 포함), 밴쿠버는 3-2로 패했다. 커넉스는 경기 종료 1분여를 남기고 포워드 네이선 라파예트의 슛이 골대를 맞고 튕겨나가는 불운을 겪었다.[44] 경기 후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재산 피해, 부상 및 체포가 이어졌다.[45] 폭동 이틀 후, 팀은 BC 플레이스에서 45,000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열어 팀의 노고를 치하했다.[46]
2. 7. 퀸 이후의 혼란기 (1994-1998)
Trevor Linden영어은 리더로서 강력한 명성을 쌓았지만, 1997-98 시즌을 앞두고 마크 메시에를 위해 주장직을 사임했다. 1994년 커넉스를 상대로 뉴욕 레인저스를 이끌었던(1990년에는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이끌고 스탠리 컵 우승) 경력 때문에 메시에는 영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59] 린든은 훗날 이 결정을 후회하며, 메시에는 탈의실에 적대감과 긴장을 조성했다고 회상했다.[59] 메시에는 밴쿠버 시절 자신이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주장을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60]커넉스는 애너하임 마이티 덕스와의 두 경기 시리즈를 일본 도쿄에서 시작하며 시즌을 해외에서 시작했다. 이는 북미 외 지역에서 정규 시즌 경기가 열린 NHL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으며, 나가노에서 열린 1998년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리그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한 노력이었다.[61]
1997–98 NHL 시즌에 팀 성적이 계속 악화되면서, 처음 16경기에서 3승을 거두자 10년 동안 팀에 몸담았던 퀸은 단장직에서 해고되었다.[58]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니가 해고되고 마이크 키넌이 코치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1994년 레인저스 팀의 핵심 인물이었던 메시에와 키넌의 재회였다. 키넌의 고용은 커넉스 선수 그룹 간의 긴장을 더욱 악화시킨 것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린든과의 부정적인 관계는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62][63]
키넌은 팀에서 2개월 만에 역할이 확대되어 사실상 단장이 되었다. 선수 인사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된 키넌은 로스터를 개편하여 두 달 만에 10번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는데, 특히 린든을 뉴욕 아일랜더스로 트레이드한 것이 눈에 띈다.[64] 이 트레이드는 팬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커넉스는 윙어 토드 베르투치를 받았고, 그는 이후 10년 동안 팀의 성공적인 복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비수 브라이언 맥케이브 또한 이 거래의 일부였으며, 결국 1999년 NHL 드래프트에서 핵심적인 거래에 참여하게 된다.
2. 8. 브라이언 버크 시대 (1998-2004)
1994년 스탠리 컵 결승 진출 이후, 마크 메시에 등이 팀에 합류했지만, 1994년과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했다.2. 9. 데이브 노니스 시대 (2004-2008)
NHL 직장 폐쇄로 인해 2004-05 시즌은 열리지 않았다. 2004년, 데이브 노니스는 브라이언 버크의 뒤를 이어 밴쿠버 커넉스의 단장으로 부임했다.[81] 노니스 단장 부임 후, 팀은 여러 변화를 겪었다.2006년, 노니스는 플로리다 팬서스와의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로베르토 루옹고를 영입했다. 이 트레이드는 커넉스 골리 전력의 핵심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반면, 팀의 주축 선수였던 토드 버투치는 이 트레이드를 통해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06-07 시즌, 커넉스는 노스웨스트 디비전에서 우승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댈러스 스타스를 상대로 4승 3패로 승리하며 2라운드에 진출했지만, 애너하임 덕스에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트레버 린든은 밴쿠버 커넉스의 상징적인 선수였으며, 그의 은퇴는 팀과 팬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다. 1994년 스탠리 컵 결승 진출 당시 팀의 주장이었던 린든은 오랜 기간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2. 10. 마이크 길리스 시대 (2008-2014)
2007-08 시즌에 밴쿠버 커넉스는 선수들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96] 시즌 마지막 경기인 캘거리 플레임스와의 경기에서 7-1로 대패한 것은 커넉스 역사상 최다 득점자인 트레버 린든의 마지막 NHL 경기였으며, 그는 은퇴했다.[97] 3년 만에 두 번째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커넉스는[26] 오프 시즌에 많은 선수 변화를 겪었다.2. 11. 짐 베닝 시대 (2014-2021)
2014년 짐 베닝이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밴쿠버 커넉스는 리빌딩 과정을 밟게 되었다.[1] 2015년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이후 성적은 좋지 않았다.[1]이 시기 동안 엘리아스 페테르손, 브록 보저, 퀸 휴즈와 같은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1] 특히 엘리아스 페테르손은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미래를 밝게 했다.[1]
밴쿠버 커넉스의 상징적인 선수였던 헨리크 세딘과 다니엘 세딘 형제는 2018년에 은퇴를 선언했다.[1] 이들의 은퇴는 한 시대의 마감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1]
2. 12. 패트릭 올빈/짐 러더포드 시대 (2021-현재)
2021년 12월, 짐 러더포드가 밴쿠버 커넉스의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팀에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112] 곧이어 패트릭 올빈이 단장으로 임명되면서, 커넉스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112]하지만 이러한 변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브루스 보드로 감독 경질 과정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보드로 감독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팀을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 수뇌부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그를 해임하고 릭 토켓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112] 이 과정에서 구단은 보드로 감독에게 충분한 설명이나 존중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112] 이는 팬들과 언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팀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커넉스는 2023-24 NHL 시즌에 퍼시픽 디비전 우승을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12] 이는 팀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였지만, 보드로 감독 경질 과정에서의 논란은 여전히 밴쿠버 커넉스 구단에게 큰 과제로 남아있다.
3. 팀 정보
1945년 태평양 연안 하키 리그(PCHL)가 밴쿠버시에 아이스하키 프랜차이즈권을 부여하면서 밴쿠버 커넉스가 창단되었다. 커넉스는 창단 2년 만에 PCHL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1952년에는 PCHL이 서부 캐나다 시니어 하키 리그와 합병하여 프로 마이너 리그인 서부 하키 리그(WHL)가 탄생한다. 커넉스에서는 조니 바우어, 앤디 바스게이트, 토니 에스포지토, 바비 오어, 필 맬로니와 같은 스타 선수들이 배출되었고, 팀은 1958년, 1960년, 1969년 및 1970년에 레스터 패트릭 컵을 획득한다.
1965년, NHL은 리그에 6개의 팀을 추가하는 시장 확대 구상을 발표했고, 당시 WHL에 가맹했던 커넉스의 구단주이자 전 밴쿠버 시장 프레드 휴메는 밴쿠버시도 이 구상에 참여 신청을 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NHL 이사회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부족했고, 밴쿠버의 구단주 그룹과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구단주 제임스 노리스나 토론토 메이플리프스의 구단주 스타포드 스마이스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아 참가 신청은 실패했다.
1970년, 다른 밴쿠버 구단주 그룹이 마이너 리그 소속의 커넉스를 인수하고, 거듭된 협의 끝에 커넉스는 가맹금 600만달러를 지불하고 NHL에 참가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때 동서 2개 지구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커넉스는 밴쿠버가 북미 대륙 서해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지구에 배치되었다.
'''1970년 신설 당시 데이터'''
항목 | 내용 |
---|---|
캡틴 | 올랜드 쿠르텐바흐 |
첫 경기 | 1970년 10월 9일 대 로스앤젤레스 킹스 전 |
첫 승리 | 1970년 10월 11일 대 토론토 메이플리프스 전 5대 3 |
첫 골 | 배리 윌킨스, 대 로스앤젤레스 킹스 전 |
커넉스는 팀 역사상 3번 스탠리 컵 결승에 진출했다. 1982년 첫 진출에서는 뉴욕 아일랜더스에 4전 전패로 완패했다. 1994년 두 번째 결승 진출에서는 트레버 린든, 파벨 부레, 커크 맥린의 활약으로 서부 컨퍼런스 7번 시드에서 올라와 뉴욕 레인저스와 3승 4패로 접전을 벌였으나 아쉽게 패했다.
이후 마크 메시에 등이 팀에 합류했지만, 1994년과 같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플레이오프 진출도 어려웠지만, 2006년 플로리다 팬서스로부터 로베르토 루옹고를 영입하여 오랜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뤄냈다. 루옹고는 첫 플레이오프에서 댈러스 스타스와 4승 3패로 2라운드에 진출했지만, 2라운드에서 애너하임 덕스에 패했다.
3. 1. 홈 경기장
로저스 아레나는 1995년부터 현재까지 밴쿠버 커넉스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18,810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는 제너럴 모터스 플레이스, 2010년 동계 올림픽 기간에는 캐나다 하키 플레이스라고 불렸다.퍼시픽 콜리시엄은 1968년부터 1995년까지 커넉스의 홈 경기장이었으며, 16,281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3. 2. 로고 및 유니폼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밴쿠버 커넉스의 로고 및 유니폼 변천사에 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3. 3. 마스코트
Fin the Orca영어는 밴쿠버 커넉스의 마스코트이다. 핀(Fin)은 범고래이며, 항상 커넉스 유니폼을 입고 북을 두드린다. 핀의 트레이드마크는 골리 헬멧 꼭대기에서 증기를 뿜어내는 '스팀 블로우홀'과 경기 중 쇄빙선에서 내려와 로저스 아레나의 얼음 위에서 뒹구는 '상어 씹기'이다. 핀은 밴쿠버 커넉스와 NHL의 다른 여러 마스코트들처럼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밴쿠버 커넉스는 2007-08 시즌부터 밴쿠버에서 열리는 홈 경기에 참석한 더 그린 맨이라는 두 명의 팬도 있다. 이들은 녹색 전신 스판덱스 수트를 입고 상대 팀 선수들에게 도발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몸짓으로 페널티 박스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3. 4. 미디어
Sportsnet Pacific영어은 밴쿠버 커넉스의 지역 텔레비전 중계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부 경기는 전국적으로 Sportsnet영어 또는 하키 나이트 인 캐나다에서 방송된다.[146] 중계진으로는 플레이 바이 플레이 해설에 존 쇼트하우스, 컬러 해설에 존 개럿, 경기 사이 리포터로 댄 머피가 활동한다.[147]Sportsnet영어은 커넉스의 라디오 중계권도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기는 Sportsnet 650영어에서 방송된다. 일부 경기는 밴쿠버의 CJVB 또는 CKWX와 같은 제휴 방송국에서 방송된다.[148] 라디오 중계진으로는 플레이 바이 플레이 해설에 브렌든 배첼러, 컬러 해설에 란디프 잔다가 참여한다.[149]
3. 5. 소유권
1945년 태평양 연안 하키 리그(PCHL)가 밴쿠버 시에 아이스하키 프랜차이즈를 부여하면서 밴쿠버 커넉스가 창단되었다. 커넉스는 창단 2년 만에 PCHL에서 우승하며 순조롭게 출발했다.1952년 PCHL은 서부 캐나다 시니어 하키 리그와 합병하여 프로 마이너 리그인 서부 하키 리그(WHL)가 되었다. 커넉스에서는 조니 바우어, 앤디 바스게이트, 토니 에스포지토, 바비 오어, 필 맬로니 같은 스타 선수들이 배출되었고, 팀은 1958년, 1960년, 1969년, 1970년에 레스터 패트릭 컵을 획득했다.
1965년 NHL은 리그에 6개 팀을 추가하는 확장 계획을 발표했고, 당시 WHL 소속 커넉스의 구단주이자 전 밴쿠버 시장이었던 프레드 휴메는 밴쿠버 시도 이 계획에 참여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NHL 이사회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미흡했고, 밴쿠버 구단주 그룹과 시카고 블랙호크스 구단주 제임스 노리스, 토론토 메이플리프스 구단주 스타포드 스마이스 간의 불화로 인해 참가 신청은 실패했다.
1970년, 다른 밴쿠버 구단주 그룹이 마이너 리그 소속 커넉스를 인수하고, 거듭된 협의 끝에 커넉스는 600만달러의 가맹금을 내고 NHL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동서 2개 지구의 균형을 위해 커넉스는 북미 대륙 서해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 지구에 배치되었다.
최근에는 구단주 프란체스코 아퀼리니와 하키 운영 책임자 짐 러더포드, 단장 패트릭 올빈이 코칭 전환을 공개적으로 잘못 처리했다는 비판이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쏟아졌다.[148][149]
3. 6. 마이너 리그 제휴
1926년부터 1970년까지 밴쿠버에는 마이너 리그 팀만 있었다. 특히 현재 캐넉스의 마이너 리그 전신인 밴쿠버 캐넉스(WHL)는 퍼시픽 코스트 하키 리그와 웨스턴 하키 리그에서 1945년부터 1970년까지 활동했다.4. 선수 및 관계자
2010-11 NHL 시즌에 팀 창단 40주년 기념 경기 전 행사가 열렸고, 헨릭 세딘이 로베르토 루옹고를 대신하여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되었다.[113] 커넉스는 창단 시즌 첫 상대였던 로스앤젤레스 킹스와 경기를 치렀으며, 두 팀 모두 창단 경기 유니폼을 착용했다. 같은 시즌 커넉스는 "명예의 링"을 만들어 오를랜드 쿠르텐바흐, 커크 맥린, 토마스 그라딘, 해롤드 스넵스츠 등 4명의 선수를 헌액했고, 마르쿠스 나슬룬드의 19번 저지를 영구 결번했다.[114] 또한, 커넉스는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프레지던츠 트로피를 수상했다.[114] 개인적으로는 다니엘 세딘이 아트 로스 트로피를 수상했고, 라이언 케슬러는 41골을 기록했으며, 로베르토 루옹고와 코리 슈나이더는 윌리엄 M. 제닝스 트로피를 공동 수상했다.
2011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에서 커넉스는 전년도 스탠리 컵 챔피언인 시카고 블랙호크스를 1라운드에서 꺾고, 2라운드에서 내슈빌 프레데터스를 6경기 만에 이겼다. 컨퍼런스 결승에서는 샌호세 샤크스를 꺾고 스탠리 컵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보스턴 브루인스에 패했다. 경기 후, 밴쿠버 시내에서 폭동과 약탈이 발생했다.[115]
2011-12 NHL 시즌에 커넉스는 릭 리피엔을 추모하며, 2년 연속 프레지던츠 트로피를 획득했다. 그러나 2012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킹스에 패했다.
2012-13 시즌은 직장 폐쇄로 인해 단축되었다.[116][117] 커넉스는 밴쿠버 밀리어네어스 복제 유니폼을 착용했으며, 2013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샌호세 샤크스에 패했다.[118] 시즌 후 알랭 비뇨 감독이 해임되고 존 토르토렐라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19]
2013-14 NHL 시즌에 커넉스는 BC 플레이스에서 오타와 세너터스를 상대로 2014 헤리티지 클래식 경기를 치렀다.[120] 시즌 말, 로베르토 루옹고는 플로리다 팬서스로 트레이드되었고, 팀은 6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21][122] 이후 마이크 길리스 사장이 해고되고 트레버 린든이 하키 운영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존 토르토렐라 감독도 한 시즌 만에 해임되었다.[123]
커넉스는 로저스 아레나에서 홈 경기를 치른다. 1995년 제너럴 모터스 플레이스로 개장했으며, 최대 18,890명을 수용할 수 있다. 2010년 동계 올림픽 기간에는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렸으며, 임시로 캐나다 하키 플레이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53] 커넉스는 이전 25년 동안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
1945년 태평양 연안 하키 리그(PCHL)의 밴쿠버 커넉스가 설립되었으며, 창단 2년 만에 PCHL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52년 PCHL은 서부 하키 리그(WHL)로 변경되었다. 커넉스는 조니 바우어, 앤디 바스게이트, 토니 에스포지토, 바비 오어, 필 맬로니 등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고, 1958년, 1960년, 1969년 및 1970년에 레스터 패트릭 컵을 획득했다.
1965년 NHL은 리그 확장을 발표했고, 프레드 휴메는 밴쿠버의 참여를 발표했지만 실패했다. 1970년 다른 구단주 그룹이 커넉스를 인수하여 NHL에 참가했다.
'''1970년 신설 당시 데이터'''
- '''캡틴''': 올랜드 쿠르텐바흐
- '''첫 경기''': 1970년 10월 9일 대 로스앤젤레스 킹스 전
- '''첫 승리''': 1970년 10월 11일 대 토론토 메이플리프스 전 5대 3
- '''첫 골''': 배리 윌킨스, 대 로스앤젤레스 킹스 전
커넉스는 스탠리 컵 결승에 세 번 진출했다. 1982년에는 뉴욕 아일랜더스에 패했고, 1994년에는 뉴욕 레인저스에 패했다. 2006년에는 플로리다 팬서스로부터 로베르토 루옹고를 영입하여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애너하임 덕스에 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