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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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는 1191년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와 결혼한 나바라 왕국의 왕녀이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에 참여하면서 조안과 함께 여정을 떠났고, 키프로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리처드 1세가 사망한 후 과부 연금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르망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잉글랜드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땅을 밟지 못했고, 대중문화에서 여러 번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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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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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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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잉글랜드 왕비 |
배우자 | 리처드 1세 (1191년 결혼, 1199년 사망) |
가문 | 히메네스 가문 |
아버지 | 산초 6세 |
어머니 | 산차 데 카스티야 |
출생일 | 대략 1165년~1170년 |
사망일 | 1230년 12월 23일 (59~65세) |
통치 | |
즉위 | 1191년 5월 12일 |
대관식 | 1191년 5월 12일 |
메인 여백작 | |
재임 기간 | 1204년 - 1230년 |
2. 초기 생애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185년 베렝겔라는 아버지로부터 나바라의 몬레알 봉토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아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약혼을 추진했는데, 이는 나바라 왕국과의 동맹을 통해 아키텐 공작령 남부 국경을 보호하고, 이웃 카스티야 왕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나바라는 아키텐의 트루바두르 문화를 흡수했고, 베렝겔라의 평판은 흠 잡을 데 없었다.[2]
1190년, 엘레오노르는 팜플로나에서 산초 6세를 만났고, 산초 6세는 올리테 왕궁에서 엘레오노르를 위한 만찬을 열었다.[3] 리처드는 수년 동안 알리스와 약혼한 상태였기에 공개적으로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축하할 수 없었다. 알리스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리처드는 1190년 메시나에서 알리스와의 약혼을 파기했는데, 그 이유는 알리스가 리처드의 아버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의 정부가 되었고, 사생아의 어머니가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따라서 리처드와 알리스의 결혼은 친족 관계의 종교적 이유로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렝겔라와 리처드는 결혼 몇 년 전에 한 번 만났던 것으로 보이며, 작가들은 그 당시 두 사람 사이에 호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2. 1. 출생과 배경
베렝겔라는 1165년에서 1170년 사이에 나바라 왕국의 산초 6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산차 사이에서 태어났다. 1185년 아버지로부터 몬레알 봉토를 받았다.[1]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자신의 아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약혼을 추진했는데, 이는 나바라와의 동맹을 통해 아키텐 공작령 남부 국경을 보호하고, 이웃 카스티야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나바라는 아키텐의 트루바두르 문화를 흡수했고, 베렝겔라의 평판은 흠 잡을 데 없었다고 한다.[2] 베렝겔라와 리처드는 결혼 몇 년 전에 한 번 만났던 적이 있었고, 당시 두 사람 사이에 호감이 있었다고 작가들은 주장한다.
1190년, 엘레오노르는 팜플로나에서 산초 6세를 만났고, 산초 6세는 올리테 왕궁에서 엘레오노르를 위한 만찬을 열었다.[3]
2. 2. 리처드 1세와의 만남
1191년 3월, 제3차 십자군에 참가 중이던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오랜 약혼녀였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 드 프랑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당시 나바라에 인접한 아키텐 공작도 겸하고 있었다([앙주 제국]).[12][13]베렝겔라의 아버지 산초 6세는 1172년 프랑스의 리모주를 방문했을 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푸아티에 궁정에서 환대를 받은 적이 있어 교류가 있었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만남에 대해서는 리처드 1세가 즉위하기 전 푸아티에 백작이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열린 베렝겔라의 오빠 산초 7세가 주최한 마상 창 시합에서 그녀를 보고 반해 후에 시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4]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직접 나바라로 가서 베렝겔라를 데리고 리처드 1세를 쫓아갔다. 시칠리아 왕국의 왕 탄크레디의 방해를 받았지만, 1191년 4월 시칠리아에 도착하여, 리처드 1세와 전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였던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잉글랜드의 조안 (시칠리아 왕비)과 합류했다. 엘레오노르는 앙주 제국으로 돌아갔고 베렝겔라는 조안에게 맡겨졌다.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던 리처드 1세는 성지 예루살렘에서의 결혼식을 희망했고, 일행은 십자군과 함께 성지로 향하기 위해 메시나를 출항했다.[15]
그러나 출항 2일 만에 함대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조안과 베렝겔라가 탄 배는 손상되어 근처 키프로스 섬에 표류했다. 키프로스에서는 태수 이삭 코무네노스에게 조안과 함께 리처드 1세의 군자금도 모두 억류되었지만, 키프로스에 상륙한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이삭을 붙잡아 억류에서 풀려났다. 키프로스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5월 12일 키프로스의 리마솔에서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조안과 베렝겔라 등을 데리고 아크레로 출항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결혼에 즈음하여 나바라에 바스나바르 (현재의 프랑스령 바스크)를 할양했다.[16]
2. 3. 약혼과 파혼
1185년 베렝겔라는 아버지로부터 나바라의 몬레알 봉토를 받았다.[1]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베렝겔라와 자신의 아들 리처드 사자심왕의 약혼을 추진했는데, 이는 아키텐 공작령 남부 국경을 보호하고, 이웃 카스티야와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처드의 여동생 엘레오노르는 카스티야의 왕비였다.) 또한 나바라는 아키텐의 트루바두르 문화를 흡수했고, 베렝겔라의 평판은 흠 잡을 데 없었다.[2] 베렝겔라와 리처드는 결혼 몇 년 전에 한 번 만났던 것으로 보이며, 작가들은 그 당시 두 사람 사이에 호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1190년, 엘레오노르는 팜플로나에서 산초 6세를 만났고, 산초 6세는 올리테 왕궁에서 엘레오노르를 위한 만찬을 열었다.[3] 리처드는 수년 동안 알리스와 약혼한 상태였기에 공개적으로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축하할 수 없었다. 알리스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리처드는 1190년 메시나에서 알리스와의 약혼을 파기했는데, 알리스가 리처드의 아버지 헨리 2세의 정부였고 사생아의 어머니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처드와 알리스의 결혼은 친족 관계의 종교적 이유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1191년 3월, 제3차 십자군에 참가 중이던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 드 프랑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당시 나바라에 인접한 아키텐 공작도 겸하고 있었다([앙주 제국]).[12][13]
베렝겔라의 아버지 산초 6세는 1172년 프랑스 리모주를 방문했을 때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푸아티에 궁정에서 환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만남에 대해서는, 리처드 1세가 즉위하기 전 푸아티에 백작이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열린 베렝겔라의 오빠 산초 7세가 주최한 마상 창 시합에서 그녀를 보고 반해 후에 시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4]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직접 나바라로 가서 베렝겔라를 데리고 십자군에 합류하려는 리처드 1세를 쫓아갔다. 일행은 시칠리아 왕국의 왕 탄크레디의 방해를 받았지만, 1191년 4월 시칠리아에 도착, 여기서 리처드 1세와 전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였던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잉글랜드의 조안 (시칠리아 왕비)과 합류했다. 엘레오노르는 앙주 제국으로 돌아갔고 베렝겔라는 조안에게 맡겨졌다. 낭만주의자였던 리처드 1세는 성지 예루살렘에서의 결혼식을 희망했고, 일행은 십자군과 함께 성지로 향하기 위해 메시나를 출항했다.[15]
그러나 출항 2일 만에 함대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조안과 베렝겔라가 탄 배는 손상되어 근처 키프로스 섬에 표류했다. 키프로스에서는 태수 이삭 코무네노스에게 조안과 함께 리처드 1세의 군자금도 모두 억류되었지만, 키프로스에 상륙한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이삭을 붙잡아 억류에서 풀려났다. 키프로스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5월 12일 키프로스의 리마솔에서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조안과 베렝겔라 등을 데리고 아크레로 출항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결혼에 즈음하여 나바라에 바스나바르 (현재의 프랑스령 바스크)를 할양했다.[16]
3. 결혼과 십자군 원정
베렝겔라는 1191년 리처드 1세와 결혼했으나, 리처드 1세가 즉위 직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서면서 결혼식은 미뤄졌다. 베렝겔라는 리처드 1세의 누이 조안과 함께 십자군에 합류했다. 성지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가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 태수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에게 납치되었으나,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1191년 5월 12일 베렝겔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베렝겔라는 남편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했으며, 리처드 1세가 오스트리아 공국에 유폐되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함께 지내지 않았다. 교황 첼레스티노 2세의 명으로 리처드 1세는 매주 한 번씩 베렝겔라와 함께 교회에 갔으나,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서거하자 베렝겔라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왕위에 오른 존은 베렝겔라에게 미망인 연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헨리 3세 대에 이르러서야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3. 1. 결혼식
1191년 3월, 제3차 십자군에 참가 중이던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오랜 약혼녀였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 드 프랑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당시 나바라에 인접한 아키텐 공작도 겸하고 있었다.([앙주 제국])[12][13]산초 6세는 1172년 프랑스의 리모주를 방문했을 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푸아티에 궁정에서 환대를 받은 적이 있어 교류가 있었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만남에 대해서는 리처드 1세가 즉위하기 전 푸아티에 백작이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열린 베렝겔라의 오빠 산초 7세가 주최한 마상 창 시합에서 그녀를 보고 반해 후에 시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4]
십자군에 합류하려던 리처드 1세였지만, 엘레오노르가 직접 나바라로 가서 베렝겔라를 데리고 리처드 1세를 쫓아갔다. 일행은 시칠리아 왕국의 왕 탄크레디의 방해를 받았지만, 1191년 4월 시칠리아에 도착, 여기서 리처드 1세와 전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였던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잉글랜드의 조안 (시칠리아 왕비)과 합류했다. 엘레오노르는 앙주 제국으로 돌아갔고 베렝겔라는 조안에게 맡겨졌다.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던 리처드 1세는 성지 예루살렘에서의 결혼식을 희망했고, 일행은 십자군과 함께 성지로 향하기 위해 메시나를 출항했다.[15]
그러나 출항 2일 만에 함대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조안과 베렝겔라가 탄 배는 손상되어 근처 키프로스 섬에 표류했다. 키프로스에서는 태수 이삭 코무네노스에게 조안과 함께 리처드 1세의 군자금도 모두 억류되었지만, 키프로스에 상륙한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이삭을 붙잡아 억류에서 풀려났다. 키프로스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5월 12일 키프로스의 리마솔에서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조안과 베렝겔라 등을 데리고 아크레로 출항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결혼에 즈음하여 나바라에 바스나바르 (현재의 프랑스령 바스크)를 할양했다.[16]
3. 2. 십자군 원정 참여
1191년 3월, 제3차 십자군에 참가 중이던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 드 프랑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당시 나바라에 인접한 아키텐 공작도 겸하고 있었다([앙주 제국]).[12][13]산초 6세는 1172년 프랑스의 리모주를 방문했을 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푸아티에 궁정에서 환대를 받은 적이 있어 교류가 있었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만남에 대해서는 리처드 1세가 즉위하기 전 푸아티에 백작이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열린 베렝겔라의 오빠 산초 7세가 주최한 마상 창 시합에서 그녀를 보고 반해 후에 시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4]
십자군에 합류하려던 리처드 1세였지만, 엘레오노르가 직접 나바라로 가서 베렝겔라를 데리고 리처드 1세를 쫓아갔다. 일행은 시칠리아 왕국의 왕 탄크레디의 방해를 받았지만, 1191년 4월 시칠리아에 도착, 여기서 리처드 1세와 전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였던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잉글랜드의 조안 (시칠리아 왕비)과 합류했다. 엘레오노르는 앙주 제국으로 돌아갔고 베렝겔라는 조안에게 맡겨졌다.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던 리처드 1세는 성지 예루살렘에서의 결혼식을 희망했고, 일행은 십자군과 함께 성지로 향하기 위해 메시나를 출항했다.[15]
그러나 출항 2일 만에 함대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조안과 베렝겔라가 탄 배는 손상되어 근처 키프로스 섬에 표류했다. 키프로스에서는 태수 이사크 코무네노스에게 조안과 함께 리처드 1세의 군자금도 모두 억류되었지만, 키프로스에 상륙한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이삭을 붙잡아 억류에서 풀려났다. 키프로스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5월 12일 키프로스의 리마솔에서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조안과 베렝겔라 등을 데리고 아크레로 출항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결혼에 즈음하여 나바라에 바스나바르 (현재의 프랑스령 바스크)를 할양했다.[16]
3. 3. 리처드 1세의 유폐와 귀환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에 유폐되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베렝겔라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아내와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유지할 것을 명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매주 한 번씩 베렝겔라와 함께 교회에 갔으나 유지된 기간은 알 수 없다.[17]1199년 남편 리처드 1세가 전사한 후, 베렝겔라는 나바라로 돌아가지 않고 재혼도 하지 않았다. 르망으로 이주했지만, 리처드 1세를 계승한 의붓 동생 존은 처음에는 베렝겔라에게 과부 연금을 지급하지 않아 교황과 주교들이 중재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송금이 끊기게 되었고, 존의 아들 헨리 3세 시대가 되어서야 베렝겔라는 여동생 블랑카(후에 나바라 왕이 되는 샴페인 백작 티보 4세의 어머니)에게 의지하여 생활했다.[18]
4. 왕비 시절
1191년 5월 12일 베렝겔라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결혼했으나, 후사는 태어나지 않았다. 후사가 없었던 이유로는 리처드 1세가 동성애자였다는 설과 베렝겔라가 불임이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리처드 1세 슬하에 코냑의 필립이라는 사생아가 있었기 때문에, 리처드가 동성애자였다는 설의 근거로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베렝겔라는 결혼을 위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했으나, 리처드 1세가 즉위하자마자 즉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 바람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베렝겔라는 리처드 1세의 누이이자 서거한 시칠리아 선왕의 왕비였던 조안과 십자군 원정에 합류했다. 성지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가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 태수 이사키우스 콤네누스에게 납치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1191년 5월 12일 베렝겔라와 결혼식을 올렸다.[16]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에 유폐당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베렝겔라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리처드 1세에게 아내와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을 명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매주 한 번씩 베렝겔라와 함께 교회에 갔으나, 이 관계가 얼마나 유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199년 리처드 1세가 서거하자 베렝겔라는 진정으로 비탄에 빠졌다. 왕위에 오른 존은 베렝겔라에게 선왕의 미망인으로서 받아야 할 연금을 주려 하지 않았고, 이후 헨리 3세 대에 되어서야 연금을 지불하였다.[18]
결혼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추측의 대상이다. 어쨌든 리처드는 제3차 십자군의 첫 번째 여정에 새로운 아내를 데려갔다. 베렝게리아는 리처드가 성지를 떠나기 훨씬 전에 돌아왔다.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붙잡혀 투옥되었고, 베렝게리아는 보포르-앙-발레에 머물면서 그의 몸값을 모으려고 시도하며 유럽에 남아 있었다.
1191년 3월, 제3차 십자군에 참가 중이던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오랜 약혼녀였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누이 아델 드 프랑스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당시 나바라에 인접한 아키텐 공작도 겸하고 있었다(앙주 제국).[12][13]
베렝겔라의 아버지 산초 6세는 1172년 프랑스의 리모주를 방문했을 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푸아티에 궁정에서 환대를 받은 적이 있어 교류가 있었다. 리처드 1세와 베렝겔라의 만남에 대해서는 리처드 1세가 즉위하기 전 푸아티에 백작이었을 때 팜플로나에서 열린 베렝겔라의 오빠 산초 7세가 주최한 마상 창 시합에서 그녀를 보고 반해 후에 시를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4]
십자군에 합류하려던 리처드 1세였지만, 엘레오노르가 직접 나바라로 가서 베렝겔라를 데리고 리처드 1세를 쫓아갔다. 일행은 시칠리아 왕국의 왕 탄크레디의 방해를 받았지만, 1191년 4월 시칠리아에 도착, 여기서 리처드 1세와 전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였던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잉글랜드의 조안 (시칠리아 왕비)과 합류했다. 엘레오노르는 앙주 제국으로 돌아갔고 베렝겔라는 조안에게 맡겨졌다. 성지 예루살렘에서의 결혼식을 희망했던 리처드 1세는, 일행은 십자군과 함께 성지로 향하기 위해 메시나를 출항했다.[15]
그러나 출항 2일 만에 함대는 심한 폭풍우를 만나 조안과 베렝겔라가 탄 배는 손상되어 근처 키프로스 섬에 표류했다. 키프로스에서는 태수 이삭 코무네노스에게 조안과 함께 리처드 1세의 군자금도 모두 억류되었지만, 키프로스에 상륙한 리처드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이삭을 붙잡아 억류에서 풀려났다. 키프로스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5월 12일 키프로스의 리마솔에서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조안과 베렝겔라 등을 데리고 아크레로 출항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결혼에 즈음하여 나바라에 바스나바르 (현재의 프랑스령 바스크)를 할양했다.[16]
이후 베렝겔라는 남편을 따라 아크레, 시칠리아, 로마, 피사, 제노바, 마르세유, 푸아투샤랑트로 옮겨 다녔으며, 남편이 유폐된 중에는 푸아투에 있었다.[17]
연대기 작가에게 "취미가 좋은 귀부인, 현명하고 상냥하며, 덕이 있고 아름답다"라고 칭찬을 받았지만, 품행이 좋지 않은 리처드 1세를 안정시킬 수 없었고, 결혼 후에도 술과 남색에 빠져 살았던 리처드 1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
5. 과부 시절과 죽음
1191년 5월 12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결혼했으나, 리처드 1세가 즉위하자마자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서면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리처드 1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에 유폐되었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에도 베렝겔라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아내와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유지할 것을 명했고, 이후 리처드 1세는 매주 한 번씩 베렝겔라와 함께 교회에 갔으나, 이 관계가 얼마나 유지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렝겔라는 리처드 1세의 배우자였던 기간 동안 잉글랜드를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잉글랜드 땅을 밟지 않은 유일한 여왕"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다만, 1220년 캔터베리에서 토마스 베켓의 유해를 이장할 때 참석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리처드 1세 사후에는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6]
5. 1. 리처드 1세의 죽음과 연금 문제
1199년 리처드 1세가 서거하자 베렝겔라는 진정으로 비탄에 빠졌다. 왕위에 오른 존은 베렝겔라에게 선왕의 미망인으로서 받아야 할 연금을 주려 하지 않았고, 이후 헨리 3세 대에 되어서야 연금을 지불하였다.[6]베렝겔라는 과부 왕비이자 리처드의 미망인으로서 받아야 할 연금에 대해 문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냈는데, 존 왕은 이를 지급하지 않았다. 엘레오노어 여왕이 중재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베렝겔라에게 지급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존 왕은 사망할 때까지 그녀에게 4000GBP 이상을 빚졌다. 그러나 아들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치세 동안 연금이 지급되었다.[6]
1199년 남편이 전사한 후 나바라로 돌아가지 않고 재혼도 하지 않았으며, 푸아티에에서 르망으로 이주했지만, 리처드 1세를 계승한 의붓 동생 존 (잉글랜드 왕)은 처음에는 베렝겔라에게 과부 연금을 보내지 않아 교황과 주교들이 중재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송금이 끊기게 되었고, 존의 아들 헨리 3세 시대가 되자 베렝겔라는 여동생 블랑카(후에 나바라 왕이 되는 샴페인 백작 티보 4세의 어머니)에게 의지하여 생활했다. 그 후, 간신히 보내온 연금을 바탕으로 시토회의 수도원을 세우고 1230년에 사망할 때까지 신앙 생활에 몰두했다.[18]
5. 2. 르망에서의 여생
베렝겔라는 자신의 영지인 프랑스 르망에서 평탄한 여생을 보냈다. 레포 수도원(L'Épau Abbey)의 후원자가 되었고, 말년에는 그 수녀원에 들어갔다.[7] 1229년 르망에 레포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 묻혔다. 1240년 톨레도 대주교는 베렝겔라에 대해 "가장 칭찬할 만한 미망인으로 살면서 결혼 지참금의 일부로 소유한 르망 시에 대부분 머물며, 자선, 기도, 선행에 헌신하며, 모든 여성에게 정숙함과 종교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같은 도시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기록했다.[8] 1960년 수도원 복원 과정에서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재발견되었다. 이 유해는 현재 수도원의 챕터하우스에서 볼 수 있는 여왕의 석조 조각상 아래에 보존되어 있다.1199년 남편 리처드 1세가 전사한 후, 베렝겔라는 나바라로 돌아가지 않고 재혼도 하지 않았다. 르망으로 이주했지만, 리처드 1세를 계승한 의붓 동생 존 (잉글랜드 왕)은 처음에는 베렝겔라에게 과부 연금을 보내지 않아 교황과 주교들이 중재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송금이 끊겼고, 존의 아들 헨리 3세 시대가 되어서야 베렝겔라는 여동생 블랑카에게 의지하여 생활했다. 그 후, 간신히 보내온 연금을 바탕으로 시토회의 수도원을 세우고 1230년에 사망할 때까지 신앙 생활에 몰두했다.[18]
6. 유산과 평가
역사학자 앤 트리니다드는 베렝겔라에 대해 "여러 종교 단체와 기관의 후원자로 기억되며 경건함의 모범으로 여겨졌다"라고 평가했다.[9] 또한 "베렝겔라의 삶은 중세 여성, 심지어 귀족 여성조차도 살아야 했던 제약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라고 덧붙였다.[10] 베렝겔라의 고난은 13세기 많은 여성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트리니다드는 "그 긴 과부 시절은 기록을 바탕으로 강력하고 용감한 여성, 독립적이고 고독하며, 어려운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맞서 싸우며, 궁정 생활의 허례허식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며, 기독교 신앙과 성 베드로 좌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지되며, 세속적이고 성직자적인 강력한 적들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임을 보여준다"라고 설명한다.[11]
베렝겔라는 원정대에 따라온 연대기 작가에게 "취미가 좋은 귀부인, 현명하고 상냥하며, 덕이 있고 아름답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품행이 좋지 않았던 리처드 1세를 안정시키지 못했고, 결혼 후에도 술과 남색에 빠져 살았던 리처드 1세와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19] 잉글랜드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사실상 왕비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베렝겔라의 입지는 없었고, 잉글랜드 땅을 밟은 적도 없었다.[19]
7. 대중문화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는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다뤄졌다. 데이비드 엘드리지의 희곡 《성스러운 전사(Holy Warriors)》는 2014년 7월과 8월에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초연되었다.[1]
7. 1. 소설
작가 | 작품명 | 원제 |
---|---|---|
존 맥그리거 | 근친 | Propinquity |
진 플레이디 | 사자 심장 | The Heart Of The Lion |
모린 피터스 | 버들 처녀 | Willow Maid |
몰리 코스테인 헤이크래프트 | 내 주님, 사자 심장의 형제 | My Lord Brother the Lionheart |
노라 로프츠 | 류트 연주자 | The Lute Player |
잭 화이트 | 명예의 깃발 | Standard of Honor |
월터 스콧 경 | 부적 | The Talisman |
G. A. 헨티 | 스퍼스를 획득하다 | Winning His Spurs |
펀 마이클스 | 발렌티나 | Valentina |
세실리아 홀랜드 | 여왕의 마녀 | The Queen's Witch |
샤론 케이 펜먼 | 사자 심장 | Lionheart |
마가렛 캠벨 반스 | 열정적인 일족 | The Passionate Brood |
G. A. 헨티 | 소년 기사 | The Boy Knight |
레이첼 바드 | 나라 없는 여왕 | Queen Without a Country |
파멜라 카우프만 | 세 마리 사자의 방패 | Shield of Three Lions |
파멜라 카우프만 | 황금 깃발 | Banners of Gold |
엘리자베스 채드윅 | 가을 왕좌 | The Autumn Throne |
7. 2. 영화
1923년 영화 ''사자왕 리처드''에서 베렝겔라 여왕 역은 캐슬린 클리포드가 맡았다. 1935년 영화 ''십자군''은 로레타 영과 헨리 윌콕슨이 출연했으며, 리처드와 베렝겔라의 결혼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54년 역사 드라마 영화 ''킹 리처드와 십자군''은 조지 샌더스와 폴라 레이먼드가 출연했으며,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결혼하여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렸다. 1960년대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사자왕 리처드''는 그들의 결혼을 두드러지게 다루었으며, 베렝겔라 역은 셰일라 휘팅엄이 연기했다. 이 모든 버전은 매우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여왕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은 아니다.1963년 영화 ''살라딘''에서 베렝겔라는 라일라 타헤르가 연기했다. 그녀는 BBC 13부작 드라마 ''악마의 왕관''(1978년)에서 조이 워너메이커가 연기했다.
7. 3. 드라마
캐슬린 클리포드는 1923년 영화 《사자왕 리처드》에서 베렝겔라 여왕 역을 맡았다. 로레타 영과 헨리 윌콕슨이 출연한 1935년 영화 《십자군》은 리처드와 베렝겔라의 결혼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지 샌더스와 폴라 레이먼드가 출연한 1954년 역사 드라마 영화 《킹 리처드와 십자군》은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결혼하여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렸다. 1960년대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사자왕 리처드》는 그들의 결혼을 두드러지게 다루었으며, 베렝겔라 역은 셰일라 휘팅엄이 연기했다. 이 모든 버전은 매우 낭만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여왕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원은 아니다.라일라 타헤르는 1963년 영화 《살라딘》에서 베렝겔라를 연기했다. 조이 워너메이커는 BBC 13부작 드라마 《악마의 왕관》(1978)에서 베렝겔라를 연기했다.
7. 4. 연극
데이비드 엘드리지의 희곡 《성스러운 전사(Holy Warriors)》는 2014년 7월과 8월에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초연되었다.참조
[1]
서적
Queens Consort, England's Medieval Queens
Weidenfeld & Nichelson
[2]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 Life
https://archive.org/[...]
Jonathan Cape
[3]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 Life
https://archive.org/[...]
Jonathan Cape
[4]
서적
Eleanor of Aquitaine, a Life
https://archive.org/[...]
Jonathan Cape
[5]
서적
Chronicle of the Third Crusade: A Translation of the Itinerarium Peregrinorum et Gesta Regis Ricardi
Ashgate
[6]
간행물
'Is Still Not the Blood of the Blessed Martyr Thomas Fully Avenged?' Thomas Becket's Cult at Canterbury under Henry III and Edward I
The Historical Association
2020-10-12
[7]
웹사이트
Berengaria of Navarre: Queen of England, Lord of Le Mans
https://www.routledg[...]
2024-11-23
[8]
서적
Berengaria: In Search of Richard the Lionheart's Queen
Four Courts Press
1999
[9]
서적
Berengaria: In Search of Richard the Lionheart's Queen
Four Courts Press
1999
[10]
서적
Berengaria: In Search of Richard the Lionheart's Queen
Four Courts Press
1999
[11]
서적
Berengaria: In Search of Richard the Lionheart's Queen
Four Courts Press
1999
[12]
문서
森、P7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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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井、P120 - P12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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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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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生、P228 - P230、ペルヌー(2005)、P132 - P134。
[16]
문서
桐生、P230 - P231、バード、P67 - P68、石井、P123 - P124、ペルヌー(2005)、P136 - P142。
[17]
문서
森、P71、桐生、P241、P249、石井、P124 - P125、ペルヌー(2005)、P254。
[18]
문서
石井、P127 - P129、ペルヌー(2005)、P266。
[19]
문서
石井、P124 - P126、P129、ペルヌー(2005)、P133、P241、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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