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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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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됭 조약은 843년 프랑크 왕국을 세 아들, 로타르 1세, 루드비히 2세, 카를 2세로 분할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들 간의 권력 다툼의 결과로, 840년 경건왕 루이 1세의 사망 이후 로타르 1세가 아버지 왕국의 전체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로타르 1세는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스트라스부르 맹약을 통해 동맹을 맺은 루드비히 2세와 카를 2세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되자 협상에 응했다. 조약의 결과, 로타르는 중 프랑크 왕국을, 루드비히 2세는 동 프랑크 왕국을, 카를 2세는 서 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이 조약은 프랑크 왕국의 해체를 가져왔으며, 이후 유럽의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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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조약
조약 정보
이름베르됭 조약
원어 이름 (프랑스어)Traité de Verdun
원어 이름 (독일어)Vertrag von Verdun
루이 1세 경건왕이 843년에 카롤링거 제국을 서프랑크, 로타링기아, 동프랑크로 나누는 것을 축복하는 모습.
루이 1세 (루이 1세) (오른쪽)이 843년에 프랑크 제국을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로 나누는 것을 축복하는 모습; 15세기의 Grandes Chroniques de France에서
서명일843년 8월 10일
위치베르됭, 프랑크
참여국카를 2세
로타르 1세
루트비히 2세
배경
주요 내용샤를마뉴의 손자들 간의 프랑크 제국 분할
영토 분할
서프랑크 왕국'#B5B4B9'로 표시
중프랑크 왕국'#FEDA86'로 표시
동프랑크 왕국'#BCEAFE'로 표시

2. 역사적 배경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자 맏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왕국과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주장하며 나섰다. 이로써 경건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독일왕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손잡고 큰형인 로타르 1세를 공격했다. 니타르트 등도 대머리 카를을 도와 로타르를 공격했다.

로타르는 피핀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841년 6월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협정을 맺고 황제에 대항하였으므로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3] 당시 로타르는 이탈리아를,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을, 카를은 아키텐을 소유하고 있었다.

리옹의 대주교 아고바르는 제국 분할이 가톨릭 교회를 분열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국 분할에 반대했다.[1] 이 회담은 8월 10일 직전에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4][5]

2. 1. 제국 정비령과 분할 상속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경건왕 루트비히는 817년 "제국 정비(계획)령"(Ordinatio Imperii)을 반포했다. 이는 장남 로타르 1세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로타르에게는 왕국 본토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트비히에게는 각각 아키텐과 바이에른을 할당하는 분할 통치안으로, 분권적 통일 왕국 창출을 목표로 했다.[2]

프랑크족에게는 "영토 상속권을 장자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분할 상속시킨다"라는 관습이 있었다. 제국 계획령은 이러한 분할 상속 이념과 통일 국가 유지 이념 간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반포된 것이었다.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자 맏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왕국과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주장했다. 이로써 경건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독일왕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손잡고 큰형인 로타르 1세를 공격했다. 니타르트 등도 대머리 카를을 도와 로타르를 공격했다. 로타르는 피핀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841년 6월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협정을 맺고 황제에 대항하였으므로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3]

2. 2. 상속 분쟁의 격화

840년 경건왕 루이가 죽자 맏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왕국과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주장했다. 리옹의 대주교인 아고바르는 제국 분할이 가톨릭 교회를 분열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국 분할에 반대했다.[1]

이에 경건왕 루이의 세 아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독일왕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손잡고 큰형인 로타르 1세를 공격했다. 로타르는 피핀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841년 6월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협정을 맺고 황제에 대항하였으므로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2][3]

823년 경건왕이 제2비 유디트와의 사이에서 막내 동생 카를을 얻자, 831년 카를에게도 영토를 주기로 결정했다. 로타르 등 3형제는, 손에 들어올 영토가 줄어든 것에 불만을 품었다. 832년 3형제가 경건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 리옹 대주교 아고바르 등 유력 성직자들도 이를 지지했다. 833년 경건왕은 폐위되었으나, 834년 복위한 경건왕은 여전히 카를에게 유리한 분할안에 집착했다.[12] 이 상속 분쟁은, 838년 피핀이 사망함에 따라 더욱 격화되었다.

2. 3. 퐁트누아 전투와 스트라스부르 맹약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자 맏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왕국과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주장하며 나섰다. 경건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으며 독일왕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손잡고 큰형인 로타르 1세를 공격했다. 니타르트 등도 대머리 카를을 도와 로타르를 공격했다. 로타르는 피핀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841년 6월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했고,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협정을 맺고 황제에 대항하였으므로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2] 842년 스트라스부르의 맹세를 통해 동맹을 맺은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1세가 황제 자리에 부적합하다고 선언했으며, 이후 로타르 1세는 화해를 위한 협상에 응하게 되었다.[3]

3. 조약의 내용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황제 로타르 1세와 독일왕 루트비히, 대머리왕 카를 삼형제는 만나서 프랑크 왕국을 분할하는 협정을 맺었다.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자 맏아들인 로타르 1세는 형제들의 왕국과 조카 피핀 2세의 아키텐 상속을 주장하며 형제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르 1세가 패배하고, 스트라스부르 협정으로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이 동맹을 맺자, 로타르 1세는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15]

각 형제들은 이미 각각의 왕국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로타르는 이탈리아, 루트비히는 바이에른, 카를은 아키텐을 소유하고 있었다. 베르됭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로타르'''는 제국의 중앙 부분을 차지한다. 로타링기아, 알사스, 부르군트(부르고뉴), 프로방스,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반도의 북쪽 절반)을 통합하여 중 프랑크 왕국으로 칭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직함을 가지되 형제들의 왕국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권만 가진다.
  • '''루트비히 독일왕'''은 제국의 동쪽 부분을 차지한다.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게르만 지역을 동 프랑크 왕국으로 칭한다. (이 지역은 현대의 독일에 해당)
  • '''대머리왕 카를'''은 제국의 서쪽 지역(론 강, 손 강, 세르트트 강 서쪽)을 차지한다. 이 지역은 서 프랑크 왕국으로 칭하며 (나중에 프랑스의 모태가 됨) 피핀 2세는 아키텐 왕국을 차지하지만 카를의 지배 아래 둔다.


베르됭 조약(843) 이후 프랑크 왕국의 분할.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3년 간의 전쟁 중 10만 명의 프랑크인 남성 군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철수하였고 아들 루트비히 2세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855년 로타르가 죽자 그의 왕국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는데, 맏아들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와 황제의 직위를, 둘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막내 샤를은 부르고뉴를 물려받았다.

이 조약은 분할 상속이라는 프랑크족 특유의 개념을 짙게 반영한 결과이며, 이로 인해 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4. 조약의 결과 및 영향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과 조카 피핀 2세의 영토까지 차지하려 했고, 이에 독일왕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동맹을 맺어 로타르 1세에 맞섰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한 로타르 1세는 결국 협상에 응했다.[15]

843년 프랑스 북부 베르됭에서 세 형제는 만나 다음과 같이 영토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었다.


  • '''로타르 1세'''는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타링기아, 알사스, 부르군트(부르고뉴), 프로방스, 이탈리아 왕국 북부를 차지하여 중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직함은 유지했지만, 형제들의 왕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은 없었다.
  • '''루트비히 독일왕'''은 제국의 동쪽, 즉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게르만 지역을 차지하여 동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 지역은 훗날 독일의 기원이 된다.
  • '''대머리왕 카를'''은 제국의 서쪽, 즉 론 강, 손 강, 세르트트 강 서쪽 지역을 차지하여 서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 지역은 훗날 프랑스의 기원이 된다. 피핀 2세는 아키텐 왕국을 차지했지만, 카를의 지배를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3년간의 전쟁으로 10만 명의 프랑크인 군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베르됭 조약은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분할 상속 관습을 따른 것이었다. 이는 장남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는 장자 상속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4. 1. 중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로타링기아 문제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인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아버지의 황제 계승권을 물려받았다. 상부 부르군디와 하부 부르군디(아를프로방스)는 로타르의 셋째 아들인 프로방스의 샤를에게 넘어갔다. 알프스 산맥 북쪽에 남아 있던 영토는 이전에는 이름이 없었지만, 로타르의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에게 상속되었고, 그를 기려 로타링기아(오늘날의 로렌)라고 명명되었다.[9]

분할 상속은 통치자의 아들들 사이의 낡은 프랑크 관습으로, 장자 상속과는 달랐다. 로타링기아는 알프스산맥에 의해 분리되어 길고 취약한 국경과 열악한 내부 통신을 결합했기 때문에 실행 가능한 실체가 아니었고 곧 분열되었다. 이로 인해 단일 통치자가 샤를마뉴의 제국을 재구성하기가 어려워졌다. 비만왕 샤를만이 잠시 이를 달성했다.

869년 로타르 2세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죽자 그의 영토는 유일한 아들인 서자 위그를 제치고 다시 삼촌들에게 넘어갔는데, 870년 루트비히 2세와 카를 2세는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를 나누어 가졌다.[9]

로타링기아는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9] 로타링기아의 남부 3분의 1알자스-로렌은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독일 사이에서 오갔다. 1766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종식시킨 빈 조약 (1738)에 의해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이 지역을 얻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한 후 프랑스로 넘어갔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후 알자스-로렌은 독일이 되었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가 승리한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다시 프랑스가 되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 정복 이후 알자스-로렌을 다시 합병했다. 마지막으로,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알자스-로렌은 프랑스 영토로 굳어졌으며, 이는 베르됭 조약 이후 천 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9] 중 프랑크 왕국의 붕괴는 19세기까지 지속된 이탈리아 반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로타르 1세 사후, 그의 이름을 딴 로렌, 알자스, 롬바르디아, 부르군디로 이루어진 중부 프랑크를 두고 영토 문제가 재연되었다. 870년메르센 조약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에도 프랑스와 독일 간의 외교 문제로 계속 불거져 나왔다.[14]

4. 2. 프랑크 왕국의 해체와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

840년 경건왕 루트비히가 죽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맏아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1세는 형제들과 조카 피핀 2세의 영토까지 차지하려 했다. 이에 독일왕 루트비히는 막내 카를과 동맹을 맺고 로타르 1세에 맞섰다. 841년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한 로타르 1세는 결국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843년, 프랑스 북부의 베르됭에서 세 형제는 만나 영토를 나누는 조약을 맺었다.

  • '''로타르 1세'''는 제국의 중앙 부분인 로타링기아, 알사스, 부르군트(부르고뉴), 프로방스, 이탈리아 왕국 북부를 차지하여 중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직함을 유지했지만, 형제들의 왕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은 없었다.
  • '''루트비히 독일왕'''은 제국의 동쪽, 즉 라인강 동쪽에서 이탈리아 북동쪽에 이르는 게르만 지역을 차지하여 동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 지역은 훗날 독일의 기원이 된다.
  • '''대머리왕 카를'''은 제국의 서쪽, 즉 론 강, 손 강, 세르트트 강 서쪽 지역을 차지하여 서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 지역은 훗날 프랑스의 기원이 된다. 피핀 2세는 아키텐의 왕국을 차지했지만, 카를의 지배를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3년간의 전쟁으로 10만 명의 프랑크인 군인이 사망했다고 한다.[15]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왕국은 다시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맏아들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황제 직위를, 둘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막내 샤를은 부르고뉴를 물려받았다.

베르됭 조약은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분할 상속 관습을 따른 것이었다. 이는 장남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는 장자 상속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로타링기아는 알프스 산맥으로 인해 분리되어 있었고, 국경이 길고 취약하며, 내부 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이로 인해 샤를마뉴의 제국을 다시 통일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비만왕 샤를만이 잠시 통일을 이루었을 뿐이다.

855년, 북부 지역은 취약한 로타링기아가 되었고, 이는 서 프랑크 왕국(현재의 프랑스)과 동 프랑크 왕국(현재의 독일) 사이에서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9] 특히 로타링기아의 남부 3분의 1 지역은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독일 사이를 오가며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 1766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1738)을 종식시킨 빈 조약 (1738)에 의해 독일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이 지역을 얻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망한 후 프랑스로 넘어갔다.
  •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에서 승리한 프로이센과 독일 동맹국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에서 승리한 프랑스가 베르사유 조약 (1919)을 통해 다시 이 지역을 되찾았다.
  • 1940년, 프랑스 정복 이후 독일이 다시 이 지역을 합병했다.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이후 알자스-로렌은 프랑스 영토로 굳어졌다.


중 프랑크 왕국의 붕괴는 이탈리아 반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이는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베르됭 조약은 프랑크 왕국의 해체와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4. 3. 분할 상속의 관습과 장자 상속제로의 변화

분할은 통치자의 아들들 사이에 재산을 나누는 프랑크족의 오래된 관습인 분할 상속을 따른 것이었다. 이는 장남에게 모든 것을 상속하는 장자 상속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로타링기아는 알프스산맥으로 인해 분리되어 있었고, 국경이 길고 취약했으며, 내부 통신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로 유지되기 어려웠고 곧 분열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샤를마뉴의 제국을 한 명의 통치자가 다시 통일하는 것은 어려웠다. 비만왕 샤를만이 잠시 동안 통일을 이루었다.[9]

참조

[1] 서적 Deutsche Geschichte Verlag von Duncker & Humblot 1894
[2] 뉴스 What was the Treaty of Verdun? https://www.thoughtc[...] 2017-05-15
[3] 웹사이트 Treaty of Verdun https://www.britanni[...]
[4] 서적 La succession de Charlemagne et le traité de Verdun https://books.google[...] Paris 1890
[5] 서적 Struggle for Empire: Kingship and Conflict Under Louis the German, 817–876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2002
[7] 웹사이트 Pippin II https://www.britanni[...] 2007
[8] 웹사이트 Charles II https://www.britanni[...] 2021
[9] 웹사이트 Treaty of Verdun: 843 http://www.thenagain[...] 2017-05-15
[10] 문서 柴田、p. 168
[11] 문서 成瀬、p. 89
[12] 문서 瀬原、p. 43
[13] 문서 柴田、p. 166
[14] 문서 成瀬、p. 89
[15] 문서 瀬原、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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